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군의 휘(諱)는 모(某)요 자(字)는 모(某)이니 양천 최씨(陽川崔氏)이다. 고려 때에 휘 모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금천(衿川)에 식읍(食邑)을 하사받음으로써 자손이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금천에 본관을 두게 되었는데, 뒤에 개성부(開城府)로 옮겨 갔다.
군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정교하고 날렵한 솜씨를 아무도 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금상(今上 영조) 4년 무신년(1728)에 영남에서 역적이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 올라오자 군은 스스로 관부(官府)에 나아가 장사(壯士)의 선발에 끼었는데, 화살을 활통에 꽂고 말에 가슴걸이를 갖추고 활을 메고서 칼을 쥐고 나가며,
하였다. 역적이 평정되자 양무공신(揚武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철권(鐵券)을 하사받았으며, 1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올랐다.
상(上)이 만월대(滿月臺)에 거둥하여 보인 시험에 합격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고,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운봉 현감(雲峯縣監) 겸 영장(營將)이 되었다. 이때 운봉현과 그 속읍들에 크게 기근이 들고 역병(疫病)이 돌자 군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하고는 녹봉을 모두 털어서 구제하고, 그래도 부족하자 관할하는 다섯 고을에서 두루 빌려 와서 진휼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고자 힘썼다. 그리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병들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모좌(某坐)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고(考)의 휘(諱)는 모(某)이니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祖)의 휘는 모(某)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증조(曾祖)의 휘는 모(某)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모씨(某氏)이며 아들과 딸은 아래쪽에 기록되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작은 곳간 큰 곳간 든든히 재어 놓고 / 窖廩囷倉固所藏
조금씩 골고루 나누어 주니 유사들은 착실했네 / 庾斛釜鍾有司良
운봉 현감으로 승진되었는데 재량을 잘못하여 / 升以雲峯失所量
쌀을 쌓아 놓고 썩혀 두면 우리 고향을 슬프게 하리 / 積久腐紅悲我鄕
자신은 크게 떨치지 못했어도 후손은 창성하리 / 不振厥躬留後昌
窖廩囷倉固所藏。庾斛釜鍾有司良。升以雲峰失所量。積久腐紅悲我鄕。不振厥躬留後昌。
[주D-002]우리 …… 오래되었다 : ‘우리 고향’이란 개성(開城)을 말한다. 조선 개국 이래 개성 사람들의 관직 진출이 오래도록 막혔었다.
[주D-003]우리 …… 것이다 : 원문은 ‘爲我鄕恥耶’인데, 이본에는 ‘爲我鄕洗恥耶’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우리 고향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이다.
[주D-004]조금씩 …… 착실했네 : 원문의 유(庾), 곡(斛), 부(釜), 종(鍾)은 모두 소량(少量)의 단위들이다.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는 제자 공서적(公西赤)이 제(齊) 나라에 사신으로 갈 적에 사치스러운 차림을 한 사실을 들어 그의 모친에게 부(釜 : 6두 4승) 아니면 유(庾 : 16두)의 식량만을 주도록 허락하면서, “군자는 급한 사람을 두루 돕지, 부자가 계속 여유 있도록 돕지는 않는다.〔君子周急 不繼富〕”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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