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28. 11:36

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군의 휘(諱)는 모(某)요 자(字)는 모(某)이니 양천 최씨(陽川崔氏)이다. 고려 때에 휘 모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금천(衿川)에 식읍(食邑)을 하사받음으로써 자손이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금천에 본관을 두게 되었는데, 뒤에 개성부(開城府)로 옮겨 갔다.
군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정교하고 날렵한 솜씨를 아무도 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금상(今上 영조) 4년 무신년(1728)에 영남에서 역적이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 올라오자 군은 스스로 관부(官府)에 나아가 장사(壯士)의 선발에 끼었는데, 화살을 활통에 꽂고 말에 가슴걸이를 갖추고 활을 메고서 칼을 쥐고 나가며,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

하였다. 역적이 평정되자 양무공신(揚武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철권(鐵券)을 하사받았으며, 1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올랐다.
상(上)이 만월대(滿月臺)에 거둥하여 보인 시험에 합격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고,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운봉 현감(雲峯縣監) 겸 영장(營將)이 되었다. 이때 운봉현과 그 속읍들에 크게 기근이 들고 역병(疫病)이 돌자 군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고향이 관직 진출이 막힌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이번에 성상의 후한 은덕을 입고서 병부(兵符)와 인끈을 차고 일산(日傘)을 덮고 오마(五馬)를 몰아 부임한 것은 우리 고향의 영광이 되겠으나, 이 나라 백성들을 하나라도 살리지 못한다면 우리 고향의 수치가 될 것이다.

하고는 녹봉을 모두 털어서 구제하고, 그래도 부족하자 관할하는 다섯 고을에서 두루 빌려 와서 진휼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고자 힘썼다. 그리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병들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모좌(某坐)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고(考)의 휘(諱)는 모(某)이니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祖)의 휘는 모(某)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증조(曾祖)의 휘는 모(某)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모씨(某氏)이며 아들과 딸은 아래쪽에 기록되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작은 곳간 큰 곳간 든든히 재어 놓고 / 窖廩囷倉固所藏
조금씩 골고루 나누어 주니 유사들은 착실했네 / 庾斛釜鍾有司良
운봉 현감으로 승진되었는데 재량을 잘못하여 / 升以雲峯失所量
쌀을 쌓아 놓고 썩혀 두면 우리 고향을 슬프게 하리 / 積久腐紅悲我鄕
자신은 크게 떨치지 못했어도 후손은 창성하리 / 不振厥躬留後昌

 

君諱某。字某。陽川崔氏。高麗時有諱某。三重大匡門下侍中。食釆衿川。子孫世居焉。因籍衿川。後徙開城府。君善騎射。精穎飄疾。衆莫能先。上之四年戊申。嶺賊大起西上。君自詣府。隷壯士選。箭鍤房馬。飾纓掛弓。握刀出曰。大丈夫生當死國。賊平。錄揚武勳。賜鐵券。十九。中武科。由部將。陞武兼宣傳官。上試才滿月臺。中格陞折衝。由五衛將。出爲雲峯縣監。兼營將。時郡邑大飢疾疫。君嘆曰。我鄕廢久矣。吾今蒙被厚恩。佩符組張盖。驅五馬。爲我鄕榮。一不活國家赤子。爲我鄕恥耶。悉捐俸以賙救。不足則遍假貸所管五邑以賑之。務出至誠。比歲登。民無瘵札者。以年月日。卒于京第。享年七十一。以年月日。葬于某坐之兆。考諱某。贈戶曹參判。祖諱某。贈左承旨。曾祖諱某。贈司僕寺正。配貞夫人某氏。子女錄于下方。銘曰。
窖廩囷倉固所藏。庾斛釜鍾有司良。升以雲峰失所量。積久腐紅悲我鄕。不振厥躬留後昌。




 

[주D-001]철권(鐵券) : 공신들의 후손들에게도 각종의 특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증명서를 말하며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고도 한다.
[주D-002]우리 …… 오래되었다 : ‘우리 고향’이란 개성(開城)을 말한다. 조선 개국 이래 개성 사람들의 관직 진출이 오래도록 막혔었다.
[주D-003]우리 …… 것이다 : 원문은 ‘爲我鄕恥耶’인데, 이본에는 ‘爲我鄕洗恥耶’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우리 고향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이다.
[주D-004]조금씩 …… 착실했네 : 원문의 유(庾), 곡(斛), 부(釜), 종(鍾)은 모두 소량(少量)의 단위들이다.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는 제자 공서적(公西赤)이 제(齊) 나라에 사신으로 갈 적에 사치스러운 차림을 한 사실을 들어 그의 모친에게 부(釜 : 6두 4승) 아니면 유(庾 : 16두)의 식량만을 주도록 허락하면서, “군자는 급한 사람을 두루 돕지, 부자가 계속 여유 있도록 돕지는 않는다.〔君子周急 不繼富〕”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