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51

韓國東洋藝術學會
동양예술 제32호 한국동양예술학회 2016년 8월 30일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민주식
영남대학교

 

Ⅰ. 머리말: 생태미학의 의의와 과제
Ⅱ. 연암의 자연 인식
Ⅲ. 연암의 생태 미학적 사유
1. 생태 미학적 구조: “자연 그 자체가 최고의 예술이다”
2. 생태 미학적 태도: “눈으로 보려말고 마음으로 비추어보자”
3. 생태 미학적 지혜: “천하에는 버릴 것이 없다”
Ⅳ. 맺음말: 자연의 몸짓을 배우자
* 본 논문은 2014년도 영남대학교 학술연구비(214A380144)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음.
동양예술 제32호 한국동양예술학회 2016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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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요약>
이 글은 한국의 전통적 사유체계 속에서 생태 미학적 관점을 찾아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자연사물과 생명현상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새로운
자연인식의 태도를 강조하면서 사물의 올바른 쓰임새를 논하고 있는 연암 박지원의 사
상을 고찰하는 가운데, 현대의 생태 미학적 관점을 찾아볼 것이다. 연암은 생생한 자연
의 모습을 관찰하고 거기로부터 얻은 지혜로 기존의 인습과 고정된 관념을 탈피하고
새로운 창작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는 남다른 치밀한 관찰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다
시 말해 빼어난 감수성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사물을 ‘보는 방식’에 새로운 충격을 가져
다주었다.
연암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실로 소중하다. 연암은 자신이
살고 있던 현실사회가 깊이 병들었다고 진단하였다. 그는 사회현실을 치유하는 돌파구
로서 또 문학행위의 출발점으로서 자연사물에 주목하였다. 그는 자연사물로 돌아가 자
연의 몸짓을 배울 때 사회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연사물의 원리를 들
어 인간과 사회의 모순과 폭력성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에게서 자연은 실체이며, 예술은 외양이고 표면일 따름이었다. 예술창작을 위
해서는 미적 감수성을 발휘하여 그러한 자연의 생동적인 모습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
다. 그렇게 함으로써 올바른 사고와 가치관을 습득하게 된다. 이러한 생태학적 관점에
입각한 연암의 심미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1)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 그
본래의 모습이 있다. 자연의 사물과 현실은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따라서 자연 그 자체
가 예술이며 시이다. 2) 하찮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인 미물(微物)도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 쓰임새에 따라 빛을 발할 수가 있다. 3)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는 유기체는 아
름답다. 4) 인간은 창조와 변화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자연과의 교감을 행함으로써 자
신의 삶을 새롭게 한다.
우리는 연암으로부터 “자연에서 배운다.”는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자연은
결코 인간에게 대해서 단순히 재료나 환경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
리는 자연 앞에서 겸허하게 배운다는 태도를 갖고 자연을 교사로 섬겨야한다“는 말이기
도 하다. 연암이 강조하듯이 인간과 사물은 그 근원에서 동일하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
은 자연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제어: 연암 박지원, 생태학, 생태미학, 자연인식, 아름다움, 자연, 예술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11

 

Ⅰ. 머리말: 생태미학의 의의와 과제
근래 우리 주위에는 ‘생태학적 삶’이라거나 ‘생태학적 발상’ 등
생태학(ecology)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심지어 ’생태 패션‘이라거나 ’생태
색채‘라는 말조차 생겨났다. Ecology라는 말은 본시 독일의 동물학자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이 만들어낸 용어인데, “생물의 생활을 주위의 다른 생물이나
물, 공기, 기온, 빛 등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 헤켈이
Ecology를 제안하기 전까지는 이 분야를 ‘Nature Economy’라고 불렀다. 헤켈은
식물학과 동물학을 통합한 과학으로서 그리스어의 oikos(집)이라는 말을 연결고리로
삼아 ‘Ecology’라는 말을 창안했다고 한다. “상호 의존하면서 생활을 함께 하는 가족과
같은 구성”이라고 하는 견해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학제적인 성격을 갖는
생태학은 자연계 즉 생태계를 해석하는 학문으로서 응용생물학, 응용동물학
가운데에서 발전하고 인정을 받아왔다. 오늘날에는 이 생태학이 단지 생물학의 한
분야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의미를 갖는 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어떤 때는 무한히
질주하는 과학기술에 비판적인 학과를 의미하고, 또 어떤 때는 한번 쓰고 마는
소비문화를 저지하고자하는 시민운동, 자연보호운동 가운데에서 언급되어왔다. 그리고
공생(共生)이라는 생명관을 지지하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레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은 이러한 흐름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우리가 새로운 Ecology로 변화해가는 길을 추적해가면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레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그것이다. 그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바닷바람 아래에서』,『해변』이라는 소위 바다 삼부작 가운데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대자연의 영위와 그 리듬을 느끼고, 엄한
현실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는 평안함을 찾아 나섰다. 또 1957년 여성잡지
『우먼즈 컴패니온』에 게재된 「어린이들에게 경이의 눈을, 멀리 내다보게
하자」라고 하는 에세이는 그녀의 사후 『경외감(敬畏感, Sense of Wonder)』
이라고 하는 제명으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 들어있는 “어린이에게 자연을
접촉함으로써 배양되는 풍부한 감성을!”1)이라고 하는 그녀가 던진 메시지는 출판 후
50년 이상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유아교육의 현장,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 환경교육의 장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센스 오브 원더’2), 즉 자연계의

 

1) Rachel Carson, The Sense of Wonder, New York: Harper & Row, 1956,
p.42.
112 동양예술 제32호

 

불가사의함, 아름다움, 신비로움에 주목하는 감성은 레첼 카슨의 모든 작품에
흘러넘치고 있는 저류이다. 생명에 대한 무한한 경외의 마음이 그녀를 굳게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 『침묵의 봄』은 되돌릴 수 없는 지구의 미래를 아이들에게
안전하게 물려주기 위해 인간의 과학기술에 대한 오만함에 관해 경종을 계속 울리고,
『경외감』은 온화한 설득력을 갖고 자연과의 공생이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할 것이다.
우리는 레첼 카슨의 메시지를 접하면서 동 아시아적 사유에 정초된
한국인으로서 체질적으로 강한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한국의 전통사상
가운데에서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1-1805)의 경우에서처럼 이와 같은
생태주의 사고가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한국의 전통사상은 아름답고도 심원한
생태학적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 그 사유는 협소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고 있으며
다분히 미적이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만물이 근원적으로 동일한 존재라고 하는
이치에 따라 전 생명체가 함께 연계하여 율동을 구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유는 도구적이거나 조작적인 이성에 익숙한 우리 현대인으로서는 오히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하고, 근원적이다.3)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통사상이 근대 이후 우리가 망각해온 사물을 보는 또
다른 하나의 관점, 즉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내면적으로 깊이 결부시켜
파악하는 관점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오늘날의
서구적 합리주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이러한 관점은 신비주의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주체와 대상을
또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사유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은 협소하고 편협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인(人)과 물(物)의 근원적 평등에 대한 주장4)은 과학 혹은
지식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이라 할 ‘생태학적 지혜’의 차원에 속한다. 이러한 지혜의
차원에서 본다면 같은 자연속의 존재로서 물아(物我)의 근원적 동일성에 대한 주장은
‘진실’이고 ‘합리’일 수 있다.
우리는 한국의 전통사상가들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상대적 관점을 배우게
되고, 또한 인과 물의 조화와 공생에 대해서도 깊은 사유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모두

 

2) 이 경외감(敬畏感)이야말로 인간 활동의 바탕이 되는 출발점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같
은 과학자도 “내게 신이란 우주만물에 대한 나의 경외감이다.(My sense of God is my
sense of wonder about the Universe.)”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A. Einstein
Quotes, http://www.azquotes.com/quote/411427
3) 박희병 지음, 『한국의 생태사상』, 돌베개, 1999. p. 16 참조.
4) 이에 관해서는 박지원보다 앞서 홍대용이 ‘인물(人·物)균등론’을 확립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13

 

자연과 그 근본적 원리, 즉 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이들의 생태학적
관점은 사회나 역사를 보는 눈과 결부되기도 하고, 정치적 입장과 연결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생태학적 관점이 어떤 현상이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관점과 연관되거나 혹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5)
이 글은 한국의 전통적 사유체계 속에서 생태 미학적 관점을 찾아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자연사물과 생명현상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새로운
자연인식의 태도를 강조하면서 사물의 올바른 쓰임새를 논하고 있는 연암 박지원의
사상을 고찰하는 가운데, 현대의 생태 미학적 관점을 찾아볼 것이다. 연암은 생생한
자연의 모습을 관찰하며 거기로부터 얻은 지혜로 기존의 인습과 고정된 관념을
탈피하고 새로운 창작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는 남다른 치밀한 관찰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다시 말해 빼어난 감수성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사물을 ‘보는 방식’에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연암의 문학론을 중심으로 그의 실학사상에 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으나. 이러한 생태학적 사유에 관해서는 그리 많지가 않다. 박희병의
『한국의 생태사상』(1999)이 있고, 박수밀의 논문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의식”(2010)이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이 글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생태학적 관점에 입각한 미의식을 해명해보고자 한다.

 

Ⅱ. 연암의 자연인식
연암의 생태학적 사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세계관과 자연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세계가 무엇보다도 먼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물질이 자연만물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질적 요소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별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티끌세상을 미루어 보면서 저 달세계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
다. 저 달 속에도 응당 역시 물질이 있어 쌓이고 모이고 엉킨 것이 있기 마련
이다. 그것은 오늘날 이 대지가 한 점 작은 먼지의 집적(集積)인 것과 같다.
먼지들은 서로 의지를 삼아 엉키면 흙이 되고, 먼지가 거친 것은 모래가 되

 

5) 박희병 지음, 『한국의 생태사상』, p. 35 참조.
114 동양예술 제32호

 

고, 먼지가 단단한 것은 돌이 되고, 먼지의 진액은 물이 되고, 먼지가 더우면
불이 되고, 먼지가 엉켜 맺혀서는 쇠가 되고, 먼지가 자라면 나무가 되고, 먼
지가 움직이면 바람이 되고, 먼지가 더위에 뜨고 기운이 북받치면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벌레로 화한다. 오늘날 우리 사람이란 곧 이 여러 가지 벌레의 한
종족일 것이다.6)
이처럼 미세한 먼지는 물질의 기본요소이며, 또 물질은 자연만물 형질의
근본적인 요소이다. 연암은 이러한 물질일원론에서 출발하여 당시 성행하고 있던 주자
성리학의 객관적 유심론 즉 “기(氣)는 이(理) 가운데 있다”는 입장을 부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였다.
그래서 인간도 따지고 보면 신비한 존재가 아니며, 그 근원을 찾아가보면 다른
물질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입장에서 남을 본다면 이 기(氣)를 고루 받아 하나의 거짓도 없다. 이것
이 어찌 천리(天理)의 지극히 공평한 것이 아니겠는가? 물(物)의 입장에서 나
를 본다면 나 역시 물(物)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물(物)의 편에 서서 도리어
나에게 구한다면 만물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고 나의 성질을 다하는 것은
능히 물(物)의 성질을 다하는 까닭이다.7)
연암에 의하면 인간도 물질세계의 일원이고 인간에게는 기타 물(物)들의 속성이
다분히 구비되어 있다. 이로부터 연역하면 인간도 모든 생물계의 일원이며 기타
생물들의 속성과 본능이 완전하게 구비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 속성과 본능을 다하는
것이 모든 생물의 속성과 본능을 다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연법칙성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는 물질세계는 영원한 운동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보며, 고정불변은 사물의
사멸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물질이나 사물은 운동 변화하는 가운데 낡은 것이
부단히 소멸되고 새로운 것이 부단히 생겨난다고 인정하였다.

 

6) 『熱河日記』「鵠汀筆談」.
(본 논문에서 인용하는 연암 박지원의 텍스트 『열하일기』와 『연암집』은 기본적으로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를 따르
고 있고, 필요에 따라 문맥의 흐름을 고려하여 약간의 자구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원
문은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지면을 줄이기 위해 생략하기로 한다.)
7) 『燕巖集』卷一, 「答任亨五論原道書」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15

 

하늘과 땅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그 빛은 날마다 새로우며, 또 이 세상에 서적이
많다고 하나 그 담긴 뜻은 제각기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날고 헤엄치고 달리
고 뛰는 생명체 중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신비스러운 영험함이 있다. 썩은 흙에서 지초가 돋아나며 썩은 풀에서
반딧불 생긴다.8)
이처럼 자연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는 창조의 공간이다.
산천초목에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으며 신비스런 영험이 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존재로 가득 찬 신비의 공간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모든 것들이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는 유기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그 자체가
최고의 예술이며 시이다.
자연은 바람과 구름, 비와 눈, 서리와 이슬, 새와 물고기, 짐승과 곤충이 웃고
울며 지저귀고 울부짖는 다채로운 소리와 빛깔, 정감과 환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자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자연에서의 불변의 원리를 따르고 물아일체를
추구하였다. 이에 반해 연암은 자연 속에서 변화와 창조의 움직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연암에게는 살아 움직이는 자연과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가 과제가 된다.
연암은 자연을 인간과 교감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는 파초가 나의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 달 밝은 밤의 창문, 눈 내리는 창가에서 가슴을
터놓고 마음껏 이야기했다고 하며, 어느 날에는 다리가 부러진 새끼 까치와 친구가
되어 새에게 농담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들은 비록 하찮은 미물이라도
제각기 지극한 경지를 갖는다는 평소 자신의 견해를 보여준다.

 

Ⅲ. 연암의 생태 미학적 사유
1. 생태 미학적 구조: “자연 그 자체가 최고의 예술이다”

 

동양사상의 특징은 인간이 천지자연과 대립하여 이를 정복하는 존재로 상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 또한 만물을 기르는 천지의
작용에 참가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천지의 움직임은 무한한 조화와 목적이 있는 법칙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8) 『燕巖集』卷一, 「楚亭集序」
116 동양예술 제32호

 

인간의 세계에도 공통된다. 천·지·인 삼재(三才)의 도(道)는 일원적인 도의 내적
삼분을 의미하지만, 도의 본질성은 천지인에게서 동질적이다.9)
이러한 바탕위에 연암은 미가 자연 속에, 생활 속에 그 본래의 모습이 있다고
보았다.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다. 이처럼
자연은 ‘지속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과 인식의 바탕을 이루는
본원(本源)이다.
연암은 대자연을 사랑하고 일상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한 다정다감한 성품의
인간이었다. 일생 동안 우리나라의 수많은 명산대천을 돌아보았고, 호기심과 흥취로
가득 찬 눈으로 중국 동북지방과 그 산수 풍광을 편력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이 그의
허다한 기문, 서문, 여행기 등에 기록되어있다. 연암의 자연산수에 대한 견해는 그의
미학사상 전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달 밝은 밤 돌돌 구르는 냇가에 앉아 벗들과 노닐면서 옛글을 품평하였다.
망망한 바다, 아름답고 진기한 꽃과 풀을 대하면서 시적 정감을 무르익게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는 산 좋고 물 맑은 연암계곡에 묻혀 살기도 하였다. 그에 따르면
아름다운 산수자연은 그 기이한 형태, 절묘한 변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진리를
함의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인간의 성정을 도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인묵객들이
외면할 수 없는 예술적 소재의 보고가 된다. 그래서 자연산수는 인간에게 더없이
중요한 미적대상이라고 역설하였다.
아하! 복희씨(伏羲氏)가 죽은 뒤 문장이 흩어진지 오래다. 그러나 벌레수염,
꽃잎사귀, 파란들, 비취빛의 새 깃 등에는 글자의 뜻이 변하지 않았고 식기의
다리, 병의 허리, 둥근 해, 기운 달의 모양 등에는 글자의 형체가 아직도 완연
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바람, 구름, 우뢰, 번개, 비, 눈, 서리, 이슬, 그
리고 나는 것, 물속에 헤엄치는 것, 걷는 것, 뛰는 것, 웃는 것, 우는 것, 끽
끽거리는 것, 휘파람 부는 것 등에는 그 소리, 빛깔, 정감, 환경이 모두 지금
까지 고스란히 그대로다.10)
복희씨가 중국의 상형문자를 창제한 이래 수많은 문인들이 나타나 자연산수를
노래했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태와 인물과 심미관은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그러나 미적대상인 자연 산수만은 바뀌지 않았고, 모두 지금까지 고스란히 그대로이다.

 

9) 『周易』, 「繫辭傳」
10) 『燕巖集』, 卷七, 「鍾北小選自序」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17

 

연암의 눈에 비친 대자연은 레첼 카슨이 말했듯이 ‘불가사의한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신비로운 세계였다. 인간의 의식이 변화하고 사회가 발전하더라도,
자연이라는 객관적 존재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예술의 묘사대상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문학의 묘사대상을 옛 성현의 경전이나 옛 문인의 글귀에서 찾아올 것이
아니라, 시대의 심미관을 바탕으로 삼아 모름지기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예술적 안목을 갖고 눈앞에 있는 산수자연 속에서 직접 찾아야 한다. 이러한 연암의 말
가운데에는, 당시 성행하던 옛 사람들의 글을 흉내 내는 모방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평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연산수는 문학예술의 중요한 묘사대상이었다. 그런데 자연과 예술의
선후관계와 관련하여 말해주는 연암의 다음과 같은 일화는 흥미롭다. 그가 열하 가는
길에서 고죽성 부근의 난하에서 배 띄우고 노닐고 있었다. 옆 사람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산수를 보고 “산수가 그림 같구먼!”이라 하면서 감탄할 때, 연암은 “자네들은
산수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군. 산수가 그림에서 나왔겠는가, 그림이 산수에서
나왔겠는가?”라고 말했다. “산수가 그림 같다”라는 말은 산수가 매우 이름다울 때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연암 역시 이러한 표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그 나름으로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서였다.
그에 의하면 모든 예술 활동은 현실의 삶의 직접적 반영이며, 바로 눈앞에 있는
즉물(卽物)과 즉사(卽事)야말로 바람직한 묘사를 위한 미적대상이다. 한 폭의
산수화는 주체의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연현실 속의 아름다운 산수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여기에는 현실미인 자연 산수의 아름다움과 그림 속에 묘사된
예술적 형상의 아름다움, 이 양자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자연현실과 예술형상
사이에는 엄연한 선후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산수가 그림 같다”라는 말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형용한 옳은 말 같지만, 실은 그 속에는 어느 것을 원천적으로 보는가라고
하는 미학 상의 근본문제가 존재한다. 산수가 그림 같다는 말은 산수를 그림이라는
표본에 비추어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연암에 따르면 산수가 그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림이 산수에서 나온 것인 만큼, 예술은 자연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현실의
반영일 따름이다.
그는 여름 장미철의 큰 시냇물 소리에 대해 반응했던 자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느 때 문을 닫고 방안에 누워서 그 물소리를 여러 가지 종류에 비겨서
들어보았다. 소나무 수풀에 풍악을 재 피는 바람소리는 내가 청아한 것으로
듣는 때문이며, 산이 찢어지고 벼랑이 무너지는 소리는 내가 흥분한 것으로
118 동양예술 제32호

 

듣는 때문이며, 뭇 개구리가 다퉈가며 울어대는 소리는 내가 교만한 것으로
듣는 때문이며, 수많은 비파를 번갈아 가며 치는 소리는 내가 노여운 것으로
듣는 때문이며, 벼락치고 천둥치는 소리는 내가 놀라는 것으로 듣는 때문이며
찻물 천천히 혹은 급히 끓는 소리는 내가 취미 있는 것으로 듣는 때문이며,
거문고를 궁성과 우성으로 맞추어 타는 소리는 내가 슬픈 것으로 듣는 때문이
며, 창문에 문풍지가 우는 소리는 내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듣는 때문이다.11)
이 글은 주체가 객관적 사물에 접할 때 느끼는 주체의 심적 태도에 따라
상이하게 파악됨을 설명하고 있다. 즉 미감활동에 의한 미적 판단은 항상 주관의 정서,
정감, 의지 등 당시의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듯이 장마철 시냇물
소리 하나를 두고도 내 심정이 청아할 때, 흥분할 때, 노여울 때, 놀랄 때, 흥취를
느낄 때, 슬플 때, 의심스러울 때에 따라 그 미적 호응방식이 각각 다르다. 동일한
사물을 두고도 사람에 따라 미적 감수와 판단이 다를 수 있고, 또는 한 사람에게서도
동일한 대상을 두고 심리상황의 변화에 따라 미적 감수와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연암의
관점은 바로 이러한 미적 파악방식의 구조에 대해 인식의 깊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현대의 환경미학을 주도하고 있는 미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놀드 벌리언트(Arnold
Berleant)는 연암이 행한 이러한 ‘자연의 모습에 대한 생생한 묘사(description)’가
곧 환경미학의 출발점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12)
그런데 필자는 이 글의 주된 취지가 미적 태도에 입각한 미적 판단의 구조를
설명하려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여러 시냇물 소리는
자신의 실제체험의 기록이 아니라, 문을 닫고 방안에 누워서 그 물소리를 여러 가지
종류에 비겨서 들어본 것이었다. 태도를 달리 취함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고 하는
견해도 내포되어 있지만, 더욱 핵심을 이루는 요체는 예술의 근원이 되는 자연은
‘무궁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는 예술적 창작의 무진장의 보고라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다양한 형상을 내포하고 있는 본체이며,
무궁무진하게 해석이 가능한 궁극의 실체이다. 그는 ‘비겨서 들어본[類而聽之]’ 시냇물
소리의 생생함과 다양함에 경탄하면서 자연에 대한 경이감을 새삼 느꼈던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산수는 우리들로 하여금 감각적 쾌감과 정신적 기쁨을
불러일으킨다.

 

11) 『熱河日記』「山莊雜記」
12) Arnold Berleant, Aesthetics and Environment, Theme and Variations on
Art and Culture, Aldershot: Ashgate, 2005, pp. 3-16..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19

 

가슴이 답답하고 심사가 산란하고 탕건이 흐트러지고 눈썹이 무거울 때에 파
초에서 소리를 듣고, 정신을 맑게 하는 데는 상쾌한 비가 내리는 낮이 제일이
고 ,반가운 손님들이 다락에 올라 분위기가 깨끗해 보일 때는 구름이 걷히고
달이 솟는 저녁이고, 주인이 문장을 내리우고 매화와 함께 더불어 수척해졌을
때는 눈 내린 밤이다.13)
자연 산수미의 중요한 작용은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하는 일이다. 자연은 우리
에게 덕을 갖추도록 교시하기도 한다.
아! 뒷날에 이 집에 거처하게 되는 사람은 연꽃이 아침에 피어 향기가 멀리까
지 퍼지는 것을 보면 바람의 은혜처럼 혜택이 멀리까지 미치도록 하며, 참대
가 새벽이슬을 맞아 물방울이 한 결 같이 고르게 맺힌 것을 보면 이슬이 고르
게 맺히듯이 덕화를 고르게 입히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14)
연꽃 향기가 풍기는 자연현상에서 우리는 인간 역시 사회와 사물에 혜택을
미쳐야 함을 생각하며, 참대 잎에 맑고 고르게 맺힌 이슬을 보면서 뭇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언뜻 보면 흡사 선진 유가사상에서
자연을 ‘덕에 비유하는(比德)’ 경우와 유사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공자는 “슬기로운
자는 물을 즐기고, 어진 자는 산을 즐긴다[知者樂水, 仁者樂山].”15)고 하여 물과 산을
슬기로움과 어짊에 비유하였다. 하지만 연암은 자연을 단순히 덕에 비유하는 관념적
심미관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미적으로
완상하면서, 자신의 심성의 수양을 도모하고 때로는 정신적 해탈 즉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는 장으로 생각했다. 자연산수가 인간의 미적 완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자체의 속성이나 형태적 특성이 인간의 내재적 정신 가운데의 성격과
일치하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완상은 인간의 생활실천 가운데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벌레의 더듬이와 꽃잎사귀에 관심이 없는 자는 도무지 ‘글을 지을만한 생각’
(文心이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사물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글자 한

 

13) 『燕巖集』卷一, 「荷風竹露堂記」
14) 『燕巖集』卷一, 「荷風竹露堂記」
15) 『論語』, 「雍也」第六
120 동양예술 제32호

 

자를 모른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16)
우리 모두가 힘을 쏟고 있는 글쓰기의 정신이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 잎사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참다운 문심이란 자연의 세심한 부분에 대한 미적 호기심과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 구체적인 세부형상을 음미하여 파악하는 데에서 유발된다.
글(文)과 형상(象) 간의 관계에 대하여, 연암은 끊임없이 형상의 근원성, 우선성을
강조하였다. 구체적인 자연 형상은 창작의 바탕이므로, 작가는 자연의 세심한 부분과
그 변화하는 생동적인 모습을 면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암은 자신의
문예론을 펼치면서 자연형상의 비유를 들어 형상적으로 실감나게 서술하였다. 이
점에서 그 자신의 관찰력과 통찰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는 사람들이 늘
접하면서도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현상들의 실례를 들어, 사물 인식의 방법에
대해 깨우쳐주었다. 그 박력과 호소력은 남다른 면이 있다.
연암의 끊임없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창조적인 글쓰기였다. 그는 이 글쓰기
문제를 항상 자연인식의 방법과 연관 지어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연암을 논할 때 많은
학자들이 문학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필자는 연암의 가장 큰 관심이 문학보다는
오히려 생생한 자연인식에 있다고 보고, 자연인식에서의 그의 독보적인 관찰과 해석이
오늘날의 생태학적 사고에 크게 시사해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고자 한다.
연암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소리(聲)・색(色)・정(情)・경(境)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관찰이며,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글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바람・구름・천둥・번개・비・서리, 날아가는 것, 숨는 것, 달리는 것, 웃는
것, 고함치며 외치는 것, 휘파람 부는 것 등 여러 가지 사물에 관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소리・색・정・경 등을 당시 그 어느 누구도 뒤따르지 못할 만큼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아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즉 그는 사물을 결코 흔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벌레의 더듬이와 꽃잎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물을 표현하는 마음이
부족하며, 움직이는 모든 형상을 섬세하게 캐묻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문자의 수를
모르는 것이 된다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또 그는 문학의 소재는 다름 아닌 현실 속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즉 여러 서민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심리와 생활 상태와 실질 속에서 창작의 원천을 발견하고
발굴해내야 한다고 보았다.
소천암이 국내의 가요, 민속, 방언, 기예 동을 모두 기록하였다. 심지어 연을

 

16) 『燕巖集』, 卷七, 「鍾北小選自序」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21

 

날리는 것도 적고 아이들의 수수께끼도 해석하고 길거리와 골목 안에서 주고
받는 수작, 문에 기대어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 칼을 두드리는 백정, 어깨 짓
으로 아양을 부리는 계집, 손바닥을 치며 맹세지거리를 하는 장사치에 이르기
까지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으며 또 그런 사실들을 조리 있게 벌여놓았
다. 입으로나 혀로써는 구별하기 어려운 것도 붓으로 표현하였으며 마음속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도 책을 들기만 하면 나오고 있다. 대체 닭이 울고 개
가 짖고 벌레가 썰썰거리고 좀이 욱실거리는 등의 그 형상이나 그 소리를 그
대로 떠다놓고 있다.17)
이렇듯 제왕장상(帝王將相)이나 재자가인(才子佳人)들의 생활이 아니라
시정이나 향촌의 생활을, 양반사대부들의 생활이 아니라 보통의 시민이나 농사꾼들의
생활을 담아내야한다고 보았다. 중국고전의 모방이나 답습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문학의 샘을 찾자는 것이다. 소천암의 『순패』가 바로 이러한 견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연암은 이에 커다란 찬사를 보냈다.
자네는 비속한 말을 주워 모으고 곤궁한 사람들의 일을 거두어들이었네 그려.
그런데 무식한 사내와 무식한 여자들의 천박한 웃음과 일생의 생활이란 어느
하나 현실적인 일이 아닌 게 없으니 눈이 시게 보고 귀가 아프게 들어서 신기
할 것 없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세.18)
시정이나 향촌에서 진행되는 실제 생활이야말로 문학이 반영하여야 할
즉사(卽事)이고 서민 노동자들의 희로애락이야말로 작가들이 파악하고 표현해야 할
실사(實事)이다. 연암은 문학의 진정한 실미(實美)를 찾는 일을 강조한다. 그래서
중국의 양한(兩漢)이나 당송(唐宋)의 문학의 성과를 모방 답습하며 옛 성인들의
경전에 매달려 글감을 찾고 있던 당시 고루한 선비들과 퇴폐적 문풍에 비판의 채찍을
휘둘렀다.
시경에 올라있는 300편의 시도 모두 새, 짐승, 풀, 나무의 이름을 표절하지
않은 것 없고 민간의 사내와 여자가 서로 지껄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지방과 저 지방의 기풍이 서로 다르고 이 강 언덕과 저 강 언덕의 풍속이 같
지 않은 까닭에 시경을 편찬한 사람이 지방별로 따로 모아서 그 기풍과 습속
을 참고한 것이다.19)

 

17) 『燕巖集』卷七, 「旬稗序」
18) 『燕巖集』卷七, 「旬稗序」
122 동양예술 제32호

 

문학작품은 민족적 특색이든 지방적 특색이든 각 지역의 기풍과 풍속이 서로
다른 만큼, 조선의 문학은 반드시 조선의 특색을 드러내야 한다. 인간의 삶을 표현하고
사회를 반영하는 문학은 독자적인 토대위에 이러한 인정과 풍토를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시정의 이야기나 향촌의 민요, 심지어 무식한 사내와 아낙네의 속된
웃음과 일상생활 그 어느 하나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두 예술창작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연암은 작품의 세부묘사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말은 큰 것만 해서 맛이 아니다. 한 푼, 한 리, 한 터럭(毫)만한 일도 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와장이나 조약돌이라고 해서 내버릴 것이 무엇이냐? …글
을 짓는 데는 오직 진실해야 할 것뿐이다.20)
그는 문학창작이 정치적 설교나 대도리만을 말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세부묘사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을 주장한다. 하나의 형상은 다양한 세부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세부에 대한 진실하고 생동적인 묘사가 없다면 작품의 생동성과 핍진성이
나올 수 없다. 한 푼, 한 리, 한 터럭(毫)의 세부들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기와조각이나 조약돌이라 해서 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평소에 한국의 전통사상 가운데 비교적 취약한 부문 가운데 하나가
'세부묘사'이며, 한국의 현대 작가들 가운데서도 '클로즈업(closeup)' 기법의 구사가
등한시되고 있다고 느껴왔다. 어쩌면 한국사상사에서 연암만큼 사물의 구체적인
세부에 대해 관심을 갖고 면밀한 관찰을 행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세심한 관찰력과 탁월한 표현력으로 자연의 구조와 요소에 대한
창조적 인식을 도모했다.

 

1. 생태 미학적 태도: “눈으로 보여말고 마음으로 비추어보자”
그런데 창조적인 진정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에 대한 인습적이고
고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평범한 사물이라도 다시 새롭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연암은 하늘과 땅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서 존재하고, 또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그 빛은 날마다

 

19) 『燕巖集』卷七, 「旬稗序」
20) 『燕巖集』卷三, 「孔雀館文稿自序」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23

 

새로워진다고 말했다.21) 이와 같이 글의 대상인 삼라만상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새로운 국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태의연한 글에 얽매여서 그것을 단지 모방하고
표절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새롭게 창조적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연암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요인이 마음속에 어떤
선입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장애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사고의 틀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새로운 사로의 틀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
틀과의 관련을 청산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그는 먼저 우리들의 지각에 의한 인식은 진정한 인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눈과 귀의 인지능력은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안의(安義)
현감(縣監)으로서 부임하여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데, 그 건물을 ‘공작관(孔雀館)’이라
이름 짓고 또「공작관기」를 썼다. 이 글은 건물의 신축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기록하는 기문(記文) 형식으로 쓰여 있으나, 연암의 인식론 및 문예이론과도 관련된
글로서도 흥미롭다. 여기에서 ‘공작관’의 이름의 바탕이 된 공작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학보다 작고 백로보다 크다. 꼬리의 길이는 2척 정도이다. 붉은 발은 뱀과 같
이 빛나고 검은 부리는 백로의 부리처럼 구부러져있다. 몸은 털로 덮여서 진
한 불꽃색(火色)과 옅은 황금색을 띠고 있다. 각각의 꼬리깃털의 끝에는 금색
의 눈과 같은 원이 하나 있고, 그것은 청록색의 눈동자, 이중의 수정색의 눈
동자와 같으며, 자색의 가장자리와 남색의 경계선으로 나누어져 있어 마치
나전(螺鈿)이 반점이 되어 무지개가 늘어서 있는 것 같다. 이것을 푸른 새라
고 하여도 잘못되었으며, 붉은 새라고 하여도 잘못 된 것이다. 때로는 몸을
움츠리면 그 몸은 검어지고, 날개를 펴면 밝아진다. 한동안 몸을 털면 처음에
는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이 갑자기 붉어지고, 불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
다. 대개 문장의 극의를 진술한 것에 관해서 이것보다 좋은 비유는 없다. 원
래 색은 빛에서 생겨나고, 빛은 빛남에서 생겨나며, 빛남은 섬광에서 생겨난
다. 섬광이 있고나서 비출 수가 있다. 비춘다는 것은 빛과 빛남이 색에 떠올
라 문에 차서 넘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글을 지을 때 종이와 묵에 매이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니며, 색을 논할 때 마음에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것은 바
른 견해가 아니다.22)

 

21) 『燕巖集』卷一, 「楚亭集序」.
124 동양예술 제32호

 

공작은 그 색을 보아서는 푸른 새 혹은 붉은 새라고 단정할 수 없다.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는 실제의 모습을 모른다. 즉 우리들의 눈은 변화하는 실체, 즉 감추어져
있는 세계를 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 연암은 공작이 날개를 폈을 때의 찬연하게 빛나는
모습을 하나의 색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사물의 색이 우리들에게
지각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사물의 견해로서 고정된 장소에서
고정된 물체를 본다면 그 실체는 파악되지 않고, 미리 물체의 색을 눈과 마음으로
정해두면 바르게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새삼스럽게 건물의 명칭을 공작관이라 명명한 이유는, ‘공작관’은 같은
건물에서도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보이는 경치가 다르며, 보는 지점을 바꿈에 따라서
경관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세계는 보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고정적・불변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변화하는 실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보통 우리들의 눈에는 이미
어떤 선입관이 내재하여 있어 실체를 보는 것은 어렵다. 우리들의 눈은 이 선입견에
지배되어 닫혀 있다. 따라서 눈으로 사물의 외양만을 본다면 사물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 가 없다. 
연암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익히 보고 있는 대상의 인식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까마귀의 색이 검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연암에 의하면, 사물에는 정해진 색이 없으므로 까마귀의 색은 상황에
따라서 엷은 황색이 되기도 하고 부드러운 녹색이 되기도 하며, 또 자색이 되기도 하고
비취색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까마귀는 푸른 까마귀라고도 붉은 까마귀라고도
말할 수 있다.23) 그는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 내지는 사물이 가지는 고유색을
부정하였다.
연암에 따르면 우리들의 귀와 눈은 객관적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선입관 혹은 흉중의 의식이 진정한 인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눈과 귀 그 자체의 오류가 아니라, 선입관이 눈과 귀를 지배하기 때문에
잘못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고정관념에 지배되어 있는 어른은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 어른이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진정한 세계를 아이들은 파악하는 것이다. 연암에 따르면 작자는 이와 같은 어린이의

 

22) 『燕巖集』卷一, 「孔雀館記」
23) 『燕巖集』卷七, 「菱洋詩集序」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25

 

동심(童心)을 가지고 사물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24) 레첼 카슨이 ‘어린이’에게 자연을
접촉하게 함으로써 풍부한 감성을 배양하자고 주창했는데, 연암은 어린이만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감성을 오히려 어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작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 즉 인습적인 장애물이 없는 진솔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거기에 있는 진정함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창조적인
글을 쓸 수 있다. 연암이 주장하는 이런 태도를 송재소는 ‘창조적 정신에 통하는
마음가짐’이라고 해석한다.25)
그런데 사물의 관찰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연암은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시야의 한계, 시간과 공간의 한계, 환경조건의 한계 등이 있어서 우리는
이런 한계로 인해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방을 보면 후방이 안보이고, 우측을 보면 좌측을 놓친다. 왜냐하면 방 안에 앉으면
몸과 사물이 차단되고 또 시선이 일정한 공간에 한정되기 때문이다.”26) 사물에 대한
인식이 어려운 것은 사물 그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물을 보는
사람의 입장이다.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이 어떻게 보고 인식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에 관한 판단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서화담이 어느 날 길을 잃어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나 “어째서 너는 울고 있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 아이는 대답하였다. “나는 다섯 살 때 장님이 되고 나

 


24) 동심을 중시하는 연암의 이와 같은 생각은 명나라의 이탁오(李卓吾, 1527-1602)의 사
상의 중핵인「동심설」과 유사하다. 이탁오에 의하면 동심이란 꾸밈이 없는 진심으로,
독서를 하여 의(義)·리(理)를 아는 것에 의해 오히려 동심은 상실하게 된다. 의리에 얽
매여서 하는 말은 의·리의 언(言)으로, 동심에서 자연스럽게 발하는 말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시(詩)는 고시(古詩)만이 좋은 것이 아니며, 문(文)도 선진(先秦)만이 좋은 것이
아니다. 육조의 시·문도 지금시대의 것도, 그리고 전기소설(傳記小說)도,잡극(雜劇)도
「서상기(西廂記)」「수호전(水滸傳)」같은 종류도 모두 고금의 지문(至文)이라고 한다.
동심의 발로인 소설은 경서 이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경서는 도학자의 구실
로, 위선자가 여기서 생겨난다고 혹평되고 있다. 이탁오는 총괄하여 「무욕(無欲)」을
이야기하고 있다. 명리(名利)에 대한 욕심을 부정하고, 의리의 지식을 떠나, 무선무악한
동심을 나타내는 것이 그의 기본사상이다. ‘자연’이야말로 진정한 도학이라고도 전하고
있다. (赤塚忠他編, 『中國文化叢書3 思想史』大修館書店,1967 참조.)
25) 송재소,「연암의 시에 관하여」『이조후기 한문학의 재조명』, 창작과 비평사, 1983,
p. 16.
26) 『燕巖集』卷三, 「素玩亭記」
126 동양예술 제32호

 

서 20년이 흘렀습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와 신기하게도 갑자기 눈이 떠져서
천지만물이 확실하게 보이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돌아가려고 했더니 골목이
몇 갈래로 나뉘고, 문도 비슷하여서 나의 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울
고 있습니다.” 서화담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너의 집에 돌아갈 방법
을 가르쳐 주겠다. 원래대로 너의 눈을 감으면 즉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눈을 감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무사하게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것은 시각상이 역전하고,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망설임은 망상에서 기인한다. 지팡이를 짚고 걷
는 다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 위한 요점이며 집을 찾는 비결이었던 것
이다.27)
맹인에게는 맹인만이 익숙한 길과 그 자질이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맹인의 자질이라고 한다면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은 맹인의 익숙한 행동이다. 이것은
설령 맹인이 눈을 감는다고 하여도 그에게는 걷는 방향이 확연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암에 의하면 사물을 판단하는 것은 눈과 귀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다. 눈과
귀만으로 외계의 현상을 볼 경우, 감각에 기울어져서 사물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관조한다면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일종의 ‘심안(心眼)의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28) 즉 사물을 보거나
듣거나하기에는 눈과 귀가 필요하지만, 사물을 인식하는 최종단계에서는 사물의
중심으로 마음을 수렴시키고, 그 이치를 간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심안으로 보는 것이다. 연암은 이것을 ‘완상(玩賞)’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연암은 이서구(李書九)가 많은 책으로 묻혀있는 그의 서재를
‘소완정(素玩亭)’이라 이름 붙인 것에 관하여, 그것은 마음을 겸허하게 하여 천지간에
흩어져 있는 책의 정기를 얻을 수 있는 의미를 가지게 한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방과 창에 비쳐 보이지 않으면 밝아지지 않고, 유리구슬도 투명하지 않으면
정기(精氣)가 모이지 않는다”는 비유를 사용하였다. 완상이란 이처럼 “나를 겸허하게
하여 타자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사적인 망상을 가지지 않는” 태도이다.
이것은 곧 “뜻을 명확히 하는 도리(明志之道)”인 것이다.29)

 

27) 『燕巖集』卷七, 「答蒼涯、之二」
28) 崔信浩,「燕巖의 문학론에서 사물인식과 창작의식」『韓國漢文學硏究』第8輯, 1985,
p. 96.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27

 

1. 생태 미학적 지혜: “천하에는 버릴 것이 없다”
『열하일기』에는 연암이 연경으로 향하던 도중에 새벽에 큰 비가 내려 어느
민가에 머물게 되어 거기에서 집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뜰은 넓어 수백 칸이나 되었는데 오랜 비에도 진창이 되지 않았다. 바둑돌 또
는 참새 알 크기의 물에 닳은 냇가의 돌이란 본래 무용한 물건이지만, 그 모
양이나 색깔이 서로 비슷한 놈을 골라서 문 앞에 이리저리 깔아서 날아가는
봉황 모양으로 만들어 진창이 되는 것을 막았으니, 이로 미루어 그들에게는
버리는 물건이 없음을 알겠다.30)
이야기의 핵심은 냇가에 흔히 널려있는 돌을 뜰에 깔아 진창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지나가는 듯이 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실로 이 가운데 연암의
사고를 꿰뚫고 있는 중요한 관점이 있다. 냇가의 돌은 보통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버린 물건이다. 그런데 이 물건을 잘 활용하여 뜰에 깔면, 비가 올 때
진창이 되지 않게끔 편안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운 문양과 더불어 기분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연암은 이처럼 중국 사람들에게는 버리는 물건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은 연암이 후일 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도 동일한
내용으로 표명되었다.
아버지는 늘 도간(陶侃)이 대나무 조각과 톱밥을 모아두었다가 긴요하게 쓴
일을 말씀하시면서 “천하에는 본래 버릴 물건이 없다”라고 하셨다. 그 당시 사
용된 대나무 조각은 모두 예전에 발을 짤 때 대나무 밑동을 잘라서 버린 것을
모아두신 것이었다.31)
아들 박종채가 전하는 이야기이다. 진(晉)나라 때 인물인 도간은 톱밥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질퍽질퍽한 땅을 덮는데 썼다고 한다. 질퍽한 땅을 덮는 데 썼던
냇가의 돌이 여기에서 동일하게 기능하는 톱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냇가의 돌과
톱밥은 쓸모없는 물건을 지칭한다. 하지만 쓸모없는 물건이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고

 

29) 『燕巖集』卷三, 「素玩亭記」
30) 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돌베개, 1998, p. 97.
31) 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돌베개, 1998, p. 89.
128 동양예술 제32호

 

있음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천하에는 본래 버릴 물건이 없다”는 연암의 말은 그가
줄곧 실천해온 생각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연암의 생태학적 미의식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언급이 갖는 의의는 모든 존재가 미적가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관념에 따르면, 미적가치를 지닌 사물이란 고상한 것,
우아한 것, 유용한 것이다. 하지만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 사람들이 버리는 것조차
미적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연암의 주장이다. 연암은 일찍이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 선귤자(蟬橘子)의 입을 빌려 "깨끗한 것도 깨끗하지
못한 것이 있고, 더러운 것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똥
푸는 사람을 옹호하면서 꺼낸 말이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똥 푸는 사람을
업신여기면서 밑바닥 인생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연암은 똥을 푸고 거름을 메어 사는
엄행수야말로 지극히 향기롭고 덕이 높은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는 진실한 인간인
엄행수를 통해 깨끗한 것과 깨끗하지 않은 것, 더러운 것과 더럽지 않은 것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어엎었다. 깨끗함과 더러움에 대한 역설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훗날 장년 시절에도 ”세상에 떠드는 쓸모 있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떠들어대는 쓸모없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에서도 확인된다.32) 세상에서 흔히 쓸모 있는 사람이란 권력을
쥐고 있고 신분과 명성이 높은 사람을 가리킨다. 쓸모없는 사람이란 아무런 힘도
신분이 낮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연암이 보기에는 세상에는 한갓 허세만
부리고 마음속에 간사한 생각을 품고서, 명예와 실리만을 좇는 위선적인 사람들이
날뛰고 있었다. 오히려 쓸모없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진실하고 정직하며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다. 누가 진정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글쓰기 태도에 관해 말할 때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통적인
글쓰기에서는 고상하고 전아한 글자만이 미적가치를 지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연암은 말이란 굳이 거창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道)에 부합하기만 하면
기와조각이나 벽돌도 쓸모가 있다고 했다.33) 기와조각이나 벽돌은 사람들이 꺼리는
소재이고 속된 말이다. 고문의 관점에서보자면 폐기되어야 할 말이다. 그러나 연암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진실함을 드러내는데 소용이 있다면 써도 상관이 없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굳이 가려 쓰는 글자가 없어야 한다. “마치 좋은 장군을 얻으면 호미나

 

32) 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연암집』중, 돌베개, 2007, p. 402.
33) 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연암집』중, 돌베개, 2007, p. 15.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29

 

곰방메도 굳세고 날랜 무기가 될 수 있고, 헝겊을 찢어 장대에 매달면 정치한 깃발이
될 수 있다.”34) 이치를 터득하기만 하면, 집에서 쓰는 상스런 말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고, 동요와 속담 따위도『이아(爾雅)』35)에 넣을 수 있다.36) 상황에 맞기만
하면 추한 언어와 고상한 언어의 구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렇게 볼 때 존재 자체가 좋고 나쁘다거나 아름답고 추하다고 결정지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 얼마나 적합한가이다. 사물의 좋고 나쁨과
아름답고 추함은 생래적으로 갖추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은 각각이 나름의
쓰임새를 갖고 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물들일지라도, 이를테면 풀, 꽃, 새, 벌레
따위도 모두 ‘지극한 경지’(至境)를 갖고 있다. 지극한 경지란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참된 이치를 말한다. 풀, 꽃, 새, 벌레 따위는 기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극히 하찮은 지미(至微)한 존재들이다. 귀천(貴賤)이라고 하는 엄격하게 분리된
성리학적 사고에서는, 하찮은 사물은 어디까지나 하찮은 존재일 따름이다. 하지만
연암에게는 지극히 하찮은 사물에도 최고의 경지가 담겨있다. 기존의 가치관이
전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사물의 존재가치는 본래 갖추고 있는 귀함과 천함, 아름다움과 추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쓰임새에 의해 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암은 문학의 허와
실을 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그대는 강정이라는 조과를 보지 못했는가? 쌀가루를 빻아서 술에 재였다가 누
에만큼씩 잘라서 뜨거운 구들에 말리고 끓는 기름에 튀기네! 그만 부풀어 올
라서 고치와 같은 모양으로 되면 보기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우나 속은 텅 비었
네. 아무리 먹어도 배는 부른 줄 모르고 부서져서는 눈가루처럼 되어버리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물건이나 겉만 치레하고 속이 텅빈 것을 강정이라고 한단
말일세. 그런데 개암, 조, 벼와 같은 것은 사람들이 대단히 여기지는 않을망정
실상 속이 차고 배가 부른 것일세. 그것으로 하늘에 제사로 지낼 수 있고 큰
손님도 모실 수 있는 것일세. 대개 문장의 묘리도 역시 이런 것인데 사람들이
개암, 조, 벼와 같은 것으로 쳐서 대단히 여기지 않기 쉬운 거지.37)

 

34) 『燕巖集』卷一, 「騷壇赤幟引」
35)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서(字書)인 『시경』과 『서경』에서 글자를 뽑아 고어를 용
법과 종목별로 19편으로 나누고, 글자의 뜻을 전국시대와 진한대(秦漢代)의 말로 풀이
하였다.
36) 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연암집』상, 돌베개, 2007, p. 130.
130 동양예술 제32호

 

그는 강정의 비유를 들면서, 겉만 번지러하고 실제적인 실속이 없음을 비판하는
가운데 문학의 실과 허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강정은 겉보기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물이다. 하지만 배부르게 하는 음식으로는 소용이 되지 못한다. 반면에
개암, 조 벼 따위는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사물이지만 배를 부르게 한다. 이렇게
보면 아름다운 강정은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하찮은 개암은 아름다운 사물이 된다.
배를 부르게 하는 음식의 기능에서 바라보면 가치의 전도가 생긴다는 것이다. 조건이
달라지자 아름다움의 기준도 바뀌고 사물의 가치가 달라졌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묵은 장(醬)도 그릇을 바꾸면 입맛이 새로워지고 일상의 생각도 환경이 달라
지면 마음과 눈이 모두 옮겨간다.38)
‘묵은 장’과 ‘일상의 생각’은 입이 질리도록 귀가 따갑도록 익숙해져버려서
하찮고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건과 환경을 바꾸자 새로운 입맛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눈길을 끌어 모은다. 아무리 하찮고 변변치 못한 사물도 조건이나
환경이 바뀌면 아름다운 가치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아름다운 사물도 조건에 따라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려질 수도 있다. 천하에는 버릴 것이 없다고 하는 연암의
생각이 하찮은 것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무관심하게 버려진 것, 보잘 것 없이 보이는
것의 가치를 재인식함으로써, 과연 정말로 쓸모없는 것은 무엇이며,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가에 대한 재고를 호소하였다.
이러한 연암의 사고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는 실학적 사고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기왕에 버려진 사물이나 자연이라도 쓸모 있게 만들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매 나는 힘차게 말할 수 있다. 기와조각. 냇가의 돌이 장관이라고, 똥거름
이 틀림없는 장관이라고. 하필 성곽과 연못과 궁실과 누각과 점포와 사찰과
목축과 광막한 벌판, 자욱한 수림의 꿈 속 같은 풍광만을 장관이라고 부를 것
인가?39)

 

37) 『燕巖集』卷七,「旬稗序」
38) 『燕巖集』卷七, 「旬稗序」
39) 『燕巖集』卷四,「馹迅隨筆」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31

 

이처럼 버려진 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기와조각. 냇가의 돌, 똥거름 따위가
인간의 삶에 실제적인 이로움을 주는 진정한 장관(壯觀)이라고 설파함으로서,
독자적인 생태학적 미의식을 표명하였다. 그의 이용후생 사상은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는 공생(共生)의 미학을 바탕으로 삼았다.
인간우월주의나 고착화된 인습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연사물의 본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쓸모 있게 잘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의 질서를 거슬리는 일,
지나친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는 행위에 반대하였다. 그의 이용후생사상의 근저에는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생태학적 지혜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Ⅳ. 맺음말: 자연의 몸짓을 배우자
연암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실로 소중하다. 연암은 자신이
살고 있던 현실사회가 깊이 병들었다고 진단하였다. 그는 인간사회의 위선과 부조리를
목도하고 깊은 실의에 빠졌다. 권세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자기 당파만을
옳다고 고집하고 반대편은 무조건 배척하는 붕당정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지식인들이 사회를 추악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연암은 그 치유를
자연사물에서 찾았다. 그는 사회현실을 치유하는 돌파구로서 또 문학행위의
출발점으로서 ‘자연사물’에 주목하였다. 그는 자연사물로 돌아가 자연의 몸짓을 배울
때 사회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 많은 선현들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일치를
이야기했지만, 연암은 ‘자연의 생태’를 들어 인간과 사회를 비판했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는 ‘변화와 창조의 공간’으로 인식했으나, 인간과 사회는 모순되고 병들었다고
인식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은 물론 위선적인 유학자, 편견과 고정관념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연암의 생태적 사고는 실학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자연사물의 원리를 들어 인간과 사회의 모순과 폭력성을 비판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정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여겨진다.40)
그에게서 자연은 실체이며, 예술은 외양이고 표면일 따름이었다. 생명으로 가득
찬 자연의 삼라만상은 성(聲), 색(色), 정(情), 경(景)을 갖고 있는데, 예술창작을
위해서는 미적 감수성을 발휘하여 그러한 자연의 생동적인 모습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올바른 사고와 가치관을 습득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생태학적 관점에 입각한 연암의 심미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40) 박수밀,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의식”, 『동아시아문화연구』제47집, 한양대학교 동아
시아문화연구소, 2010, p. 652.
132 동양예술 제32호

 

1)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 그 본래의 모습이 있다. 자연의 사물과 현실은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따라서 자연 그 자체가 예술이며 시이다.
2) 하찮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인 미물(微物)도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
쓰임새에 따라 빛을 발할 수가 있다.
3)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는 유기체는 아름답다.
4) 인간은 창조와 변화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자연과의 교감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한다.
자연은 예부터 있어온 것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는 연암으로부터 “자연에서
배운다.”는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자연은 결코 인간에게 대해서 단순히 재료나
환경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는 자연 앞에서 겸허하게 배운다는
태도를 갖고 자연을 교사로 섬겨야한다“41)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인간과 자연을 인간과 환경이라는 말로 그대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연암이
강조하듯이 인간과 사물은 그 근원에서 동일하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연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이외의 다른 자연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인간은 그간 자연을 단지 재료로서 또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서 여겨왔다. 그러나 실로
자신의 내면적 삶을 가르쳐주는 존재로서 다른 자연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목적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고 주민들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잊고 있는 더욱 중요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진실로 자기의 ‘내면을
차분히 정착시키는’ 일, 그리고 ‘기다림’의 의미를 인생에서 되살리는 일이다.
자연보호라는 사고도 실은 이러한 윤리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미적 생태학은 이러한
윤리학과의 밀접한 연관에서 성립한다. 참는다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결코
봉건적인 가부장제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며 참는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덕목이다. 기다린다거나 참는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이 교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측면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윤리가 필요하고 미학이 요청된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공해가 큰 문제이고, 자연미가 손상되어 경관이 꼴사납게
되었으며, 자연이 파괴되어 건강을 해치고 재해를 자초하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이러한 현세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을 확실하게 보호해야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41)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정명환 역, 『에코에티카: 기술사회의 새로운 윤리학』솔,
1993, p. 170.
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33

 

주장들은 모두 중요하며 우리가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측면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연암으로부터 깨우치게 되는 바이기도 하다. 요컨대 자연 속에
있는 자연이기도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실로 살리기 위해서는,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그러기에 인간은 스승인 자연을 섬긴다고 하는
윤리적 관념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하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자연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 드러내는
활동이며, 과학이라는 활동도 결국 자연이 나타내 보인 것을 인간이 보고 배운 성과인
것이다.
134 동양예술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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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생태 미학적 관점 135
ABSTRACT
Yeonam Park Jiwon’s Thoughts on Ecological Aesthetics
Min, Joosik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trace the viewpoint of ecological aesthetics
in the traditional Korean thoughts. Especially, we examine yeonam
Park Jiwon’s ecological thoughts which emphasized a new attitude
on the recognition of nature on the ground of deliberation on natural
things and life phenomena and discussed on the right usage of things.
Yeonam observed live features of nature and paved the way of creative
writing from the wisdom of nature. He broke a long-established usages
and preconceived ideas. He showed a peculiar power of precise observation
most satisfactorily. He gave us a new impact on the way of
seeing through his own sensibility and insight. His message is very important
for us today. He diagnosed his period and society as to be
sicked deeply. He payed attention to natural things as a breach to cure
the sicked society and as a start-point to write a literary work. He believed
that the society could be cured only if we went back to and learn
heartily the gestures of nature. He criticized the contradiction and violence
of human society in view of the law of natural things.
According to him, nature was substance and art was appearance and
surface. We should display our sensibility and grasp the vivid appearance
of nature in order to crate a work of art. Then we could acquire
right thinking and measure of value.
Yeonam’s aesthetic viewpoint can be summarized in view of ecology as
following. 1) The origin of beauty is among nature. Natural things and
real society is the source of beauty. Consequently, Nature itself is to be
art and poem. 2) Even the worthless things and trifle things also have
their own beauty. They can radiate light if they are used adequately. 3)
Living organisms, constantly moving and changing, are beautiful. 4)
Human being is renewing his own life by corresponding with nature
136 동양예술 제32호
which executes creative changes incessantly.
We need to reexamine yeonam’s word “to learn from nature.” Nature does
not simply exist for human being as material or environment. We should
be devoted to nature as teacher with modest attitude of learning. As
yeonam emphasized, both human beings and things are equal in their
origin, and in that sense human being must be nature. We should not
forget that human being also should be nature.
We should regard the nature as the subsistence which instructs on our
inner life. The purpose to preserve and protect the nature is related
with this way of thinking. Surely, the preservation and protection are
needed to satisfy our aesthetic demand and to maintain our health.
However, there is another thing which we are forgetting. That is to establish
quitely our inner world to hold the durability of human life, and
to revive the meaning of waiting in our life. The idea of nature conservation
also comes from this sense of ethics. Aesthetic ecology comes
into existence in the close interrelation with this ethics. Art is the human
activity to reveal the concealed beauty in nature, and science is
nothing but the result of observing and learning the natural
phenomenon.
Keywords: Yeonam Park Jiwon, Ecology, Ecological Aesthetics, Recognition of
Nature, Beauty, Art, Nature
투고일: 2016. 7. 4. / 심사개시일: 2016. 7 . 21. / 심사완료일: 2016.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