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幻戱記」*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52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幻戱記」*
1)임준철**

 


목 차
1. 문제의 소재
2. 동아시아 전통환술과 연행록의 환술기록
1) 동아시아 문화전통에서의 환술
2) 조선조 지식인의 환술인식
3. 환술논의의 새로운 지평
4. 남는 문제: 결론을 대신하여

 


국문초록
이 글은 동아시아 문화교류란 측면에서 연행록에 담긴 환술기록의 흐름
을 점검하고, 그 흐름 속에서 가장 뛰어난 환술기록인 박지원의 「환희기」
가 갖는 의미를 짚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조선사회는 환술이란 연희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하에서 지식인들의 환술에 대한 인식 역시 부
정 일변도였다. 16세기 許篈이 환술을 관람하고 “傅奕에게 부끄러움이 많
았다 有愧於傅奕多矣”라고 말했던 것은, 환술을 이단인 불교와 동격으로 생

 

* 이 논문은 필자가 한국한문학회 2010년도 전국학술발표대회에서 발표한 다음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임준철, 「幻影의 조건―연행록에 나타난 환술인식
과 박지원의 「幻戱記」―」, ?한국한문학회 2010년도 전국학술발표대회 발표논
문집?(한국한문학회, 2010.10.22~23), 53-77면.
**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222 민족문화연구 제53호

 

각했던 사회적 통념이 바탕이 되었다. 결국, 이단의 邪術이 사람을 홀리는
幻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이런 부정적 인식은 한편으로
환술을 피상적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
의 연행기록들은 오로지 공연자의 속임수라는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눈속임의 기술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의문에 그치는 다수의
기록들이 이를 반영한다.
이런 흐름은 환술 공연에 대한 견문이 쌓여감에 따라 조금씩 질적 변화
를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환술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에 근본적 변화
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환술에 대한 상대적으로 진전된 관심들이 나타
나기 시작했다. 이런 진전은 한편으로 환술을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삼
아 논의하는 단계로 나가게 된다. 眞과 幻이란 대립항으로 幻影 형성의 근
원이 무엇인지를 따져본 權復仁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런 진지한 사유의
또 다른 한편에선 기존 통념의 극단화가 이루어진다. ‘환술=불교’란 통념을
‘西學=환술’이란 새로운 인식으로 변화시킨 姜在應의 예가 그러하다. 그는
幻影의 형성원리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환술 일체를 서학의 惑世誣民 방식
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양의 ‘과학기술=환술’이라는 독특한 퇴
행적 사고가 등장하게 된다.
박지원의 「환희기」는 이러한 지적 풍토에 일대 문제를 제기한 색다른
방식의 환술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환술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조
건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것은 속이는 자의 문제
가 아니라 속는 자의 문제라는 인식론적 전환에 있다. 이는 환술을 단순히
공연자의 속임수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본 전대의 시각과는 다른 문제제기이
다. 幻影 형성의 조건을 보편적인 인식영역으로 끌어들여 사유했다는 점에
서, 환술에 대한 가장 진전된 접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박지
원 역시 眞과 幻을 기준으로 眞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幻戱記序」의 논의들이 이점을 뒷받침한다. 이런 박
지원의 사고에 일정한 충격을 준 것이 趙光連의 환술논의였다고 볼 수 있
다. 趙光連은 현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幻과 다름없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幻戱記後識」에 이를 수용함으로써, 환술논의를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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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차원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우연한 만남이 문화사적으로 유례를 찾
아보기 힘든 수준 높은 환술논의를 낳은 것이다. 그 가치는 무엇보다도 환
술의 문제를 인식론ㆍ존재론적 명제로 환치시켜 논의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주제어 : 연행록, 환술, 환술인식, 許篈, 權復仁, 姜浩溥, 姜在應, 朴趾源,
「幻戱記」, 趙光連

 

1. 문제의 소재
이 글은 동아시아 문화교류란 측면에서 연행록에 담긴 환술기록
의 흐름을 점검하고, 그 흐름 속에서 가장 뛰어난 환술기록인 박지
원의 「환희기」가 갖는 의미를 짚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미 선
행연구를 통해 「幻戱記」에 대해 상당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음에
도 이를 재론하는 것은, 환희기록으로서 「환희기」가 갖는 의미와
가치에 관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 이렇게

 

1) 박지원의 「환희기」 자체를 논제로 삼은 연구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박수밀, 「「幻戱記」에 나타난 연암의 생각 읽기」, ?문헌과 해석? 여름호(문헌과
해석사, 2004), 24-35면; 박수밀, 「박지원의 幻戱記에 나타난 글쓰기 요령」, ?
한문교육연구? 26집(한문교육학회, 2006.06), 517-542면 ; 박상영, 「?열하일기?
에 나타난 산문 시학-「환희기」의 담론 구성 방식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144(국어국문학회, 2006.12), 209-242면 ; 이밖에 「환희기」에 대한 번역과 해설
로 정민의 「눈 뜬 장님」, ?비슷한 것은 가짜다?(태학사, 2000), 49-64면이 있
고, 박지원의 인식론 내지 ?열하일기? 전반의 표현방식의 특징과 서술원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환희기」 내용들이 거론된 바 있다. 이 논의들은 대체로
맹인삽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임형택, 「朴燕巖의 인식론과 미의식」, ?한국
한문학연구? 제11집(한국한문학연구회, 1988), 17-39면. ; 김명호, ?열하일기연
구?(창작과비평사, 1990), 135-139면, 230-232면. ; 송재소, 「盲人揷話를 통해서
본 연암 박지원의 사물인식」, ?한시 미학과 역사적 진실?(창작과비평사, 2001),
359-374면. ; 이종주, ?북학파의 인식과 문학?(태학사, 2001), 499-507면. ; 김혈
조, ?박지원의 산문문학?(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2), 100-1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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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우선 기존 연구들
은 박지원의 환술논의를 가능하게 한 변화의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
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의 환술인식이 어떠했는지, 박지원의 글에
서 어떤 것이 前ㆍ當代의 사고와 달라졌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 글을 해석하는 데 있어 지나치게 기록자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대화라는 측면이 간과되었다. 이 글을 지나치게 맹인삽
화 등 박지원의 말에만 집중하여 읽어냄으로써, 趙光連이란 淸朝
지식인과의 교류란 측면이 홀시되거나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연행록 전반의 환술기
록들 사이에 「환희기」를 위치시키고, 그 성격과 의미를 究明해 볼
것이다. 본 논의는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 전제로부터 출발한다.2)
첫째, 여행은 단기간의 외국 체험이므로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느낌에서 여행자 자신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나타나게 되고 이를 통
한 여행국의 문화에 대한 무의식적인 조작이 이루어지곤 한다. 연
행록을 하나의 여행기록이라고 볼 때, 여행자의 편견을 추적하여
이것이 만들어 내는 여행 대상국의 허상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선 조선조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환술에 대한 왜곡된 인식들이
그 허상에 해당한다. 이러한 편견이 시공간적 특수성과 관련될 때,
우리는 그 허상을 만들어내는 조건들의 검토를 통해 자문화적 특수
성을 점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 시대의 독특한 문화는 그 시기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경험과 가치 및 정서들의 총합체인 특수한 ‘인식의 구조’

 

2) 이하의 서술은 이혜순, 「여행자 문학론 試攷―비교문학적 관점에서」, ?비교문학?
제24집(한국비교문학회, 1999), 71-76면;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 성은애 옮김(문학동네, 2007)의 도움을 받
은 것이다. 윌리엄스가 사용한 용어는 본래 ‘감정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인
데, 필요에 따라 이 글에선 ‘인식의 구조’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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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근거한다고 볼 때, 동일한 문화적 현상에 대한 인식차란 상호간
‘인식의 구조’의 다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환술에 대
한 한국과 중국의 인식차를 비교하고, 그런 차이를 만들어낸 조건
들을 검증해낸다면, 동아시아 문화전통 내에서 양국의 차이를 변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여행기록은 여행자가 여행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기록하
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소재 선택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 선택에는 대부분 여행자의 배경과 관심과 취향
이 큰 역할을 한다고 보인다. 따라서 다른 기록과 변별될 만한 특
정 소재의 선택과 기록방식 및 내용의 변화에는 일정하게 개인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지원의 환술기록이 그런 예
일 것이다.
그동안 연행록에 담긴 환술기록은 주로 민속학적 관점에서 검토
되었다. 필자는 이것이 중국 전통연희에 대한 의미있는 기록이란
의의 외에도, 이질적 문화인소에 대한 우리 지식인의 반응이란 점
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학에서 말하는 ‘면역반응’처
럼 이질적 인소가 우리의 정신세계에 일으키는 반작용들이 어떤 것
인지 구명될 때, 자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동아시아 전통환술과 연행록의 환술기록
1) 동아시아 문화전통에서의 환술

 

幻術은 여러 가지 장치를 이용하거나 숙달된 손놀림 등의 몸동작
을 통해 관중을 착각에 빠지거나 놀라게 하는 일체의 연희들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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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킨다. 동아시아 전통연희의 역사에선 散樂百戱 중의 한 종목으로
분류되며, 현대 중국사회에선 雜技란 명칭으로 포괄하여 부른다. 환
술은 현대의 마술에 가깝다고 하겠지만, 단순히 ‘환술=마술’이란 방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한 점이 있다. 方士의 술법과 같이 마술을
넘어서 비현실적 異蹟을 행하는 것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
다.
幻術은 變戱法, 戱法, 法戱, 眩術, 魔道, 妖術, 雜戱, 幻戱, 把戱 등
으로 불렸다. 기법에 따라 세부명칭이 붙기도 했는데, 송대에 유행
한 손기술 위주의 마술은 별도로 撮弄, 藏擫이라고 부르기도 했다.3)
현재의 마술이란 명칭은 영어의 ‘magic’을 번역한 말로, 19세기말
서양 마술이 전래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4)
字意상 ‘幻術’의 ‘幻’은 속임수로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을
의미한다.5) 元代 胡三省은 ?資治通鑒?의 注에서 “환술이란 없는 것
을 변화시켜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幻術者化無以有, 以眩惑人”라고 설명한 바 있다. 환술 공연자는 幻
人, 幻術人, 騙子, 幻術師, 幻術士 등으로 불렸는데, 騙子란 명칭에도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6)
동아시아 전통환술의 발생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고 알려져 있다. 그 한 가지는 무당의 呪術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서역으로부터의 전래다. 전자는 무당이 신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행

 

3) 傅起鳳ㆍ傅騰龍, ?中國雜技史?(上海: 上海人民出版社, 2004), 207-209면.
4) 안상복, ?중국의 전통잡기?(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293면.
5) 宗福邦ㆍ陳世鐃ㆍ蕭海波 主編, ?故訓匯纂?(北京: 商務印書館, 2003), 687면,
“?玄應音義? 卷九, ‘幻術’ 注, 謂相欺眩以亂人目也.”
6) 李宜顯, ?陶谷集? 卷二十九, ?庚子燕行雜識? 上, 한국문집총간 181(민족문화
추진회, 1997), 469-491면. “衙門入送善幻人, 試其術.”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六十七, ?入燕記? 下, 한국문집총간 259(민족문화추진회, 2000), 219면, “觀
騙子戱, 騙子者, 卽幻術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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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행위들이 환술을 형성했다는 것이다.7) 후자는 ?史記? 「大宛
列傳」과 ?漢書? 「張蹇ㆍ李廣利傳」, 「西域傳」, ?後漢書? 「南蠻西南夷
列傳」의 기록에 기반하여 漢代에 서역으로부터 환술이 전래하였다
는 시각이다.8) 환술사의 존재는 ?列子? 「周穆王」편부터 발견되지만,
환술 역사의 본격적 전개는 漢代의 百戱와 함께 시작된다.9) 張衡의
「西京賦」에는 환술 공연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상을 종합할 때, 동아시아의 환술은 일부 자생적인 부분도 있지
만, 상당부분 서역에서 전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서역은
중앙아시아는 물론이고, 安息이라고 불리던 페르시아, 撣國이라고
불리던 미얀마, 그리고 黎軒이라고 불리던 로마 및 이집트의 알렉
산드리아까지 포함한다.10)
환술 공연은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행해졌다. 신라
의 入壺舞란 고유 환술은 중국에까지 전해졌으며,11) 고려시대에도
李穡이 “불을 토하고 칼을 삼키는 묘기를 펼치네 吐出回祿呑靑萍”
라고 읊었던 吐火와 呑刀 환술의 공연이 있었다.12) ?芝峯類說? 雜技
條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조의 환술은 원나라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온 사람들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한다.13)

 

7) 徐秋, ?魔術?(北京: 中國文聯出版社, 2008), 11-12면; 姚周輝, ?神秘的幻術?,
第3版(南寧: 廣西人民出版社, 2009), 159-162면.
8) 傅起鳳ㆍ傅騰龍, 앞의 책, 58-62면. 이상의 기록들에는 환술사의 전래와 함께
구체적인 환술명칭도 나열되어 있다.
9) ?舊唐書? 「音樂志」에는 한 무제 때 서역에서 환술사들이 유입되었음을 기록
하고 있다. ?舊唐書? 卷二十九, 「音樂志」二(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7),
1073면, “大抵散樂雜戱多幻術, 幻術皆出西域, 天竺尤甚. 漢武帝通西域, 始以
善幻人至中國.”
10) 안상복, 앞의 책, 293-295면; 김은영, 「한ㆍ중 幻術의 역사와 특징」, ?한국민
속학? 제50집(한국민속학회, 2009.11), 209-222면.
11) 전경욱, ?한국의 전통연희?(학고재, 2004), 83-84면.
12) 李穡, 「驅儺行」, ?牧隱藁? 詩藁 卷二十一, 한국문집총간 4(민족문화추진회,
1988), 275면.
228 민족문화연구 제53호

 

하지만, 정작 조선시대의 환술에 대한 기록은 잘 찾아지지 않는
다. 조선초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공연한 백희 중에 ‘魚龍曼
延之戱’ 같은 환술 명칭이 보이고, 吐火ㆍ呑刀 환술이 공연된 흔적
이 있으나 중국사신과 동행한 환술사에 의해 연행되었던 것으로 보
인다.14) 반면, 일본의 경우는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산
가쿠(散樂)안의 주요 종목으로 환술이 비교적 활발하게 공연되어,
18세기 무렵엔 明 陳繼儒(1558-1639)의 환술서인 ?神仙戱術?과 일
본인의 환술서 ?珍曲草?ㆍ?放下筌? 등이 간행되는 단계에까지 이르
게 된다.15) 조선조에 일본을 다녀 온 통신사행 기록에서도 우리는
이점을 엿볼 수 있다. 南龍翼의 ?扶桑日錄?(1655), 洪禹載의 ?東槎錄
?(1682), 趙曮의 ?海槎日記?(1763) 등에는 일본에서 견문한 환술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
李圭景이 ?五洲衍文長箋散稿? 「幻戲辨證說」에서 지금 천하에 환
술이 없는 나라가 없는데 우리나라에만 유독 환술이 없다고 썼던
것처럼,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동아시아 삼국 중 우리에게
만 환술공연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16) 이런 현상은 후술하겠지만,
환술에 대한 조선사회 전반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라고 보인다.
또,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환술을 백성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

 

13) 李睟光, ?芝峯類說?(下), 技藝部 雜技條, 남만성 역(을유문화사, 1975), 369면,
“우리나라의 呈才人은 본래 중국의 배우나 환술하는 자 따위이다. 세상에 전
하기를, 이것은 고려말년에 노국대장공주가 나올 때 따라 온 것이라고 한다.”
14) 유승훈, 「산악백희 중 불토하기의 전개양상」, ?한국민속학? 제35호(한국민속
학회, 2002), 95면.
15) 박전열, 「일본 山樂의 연구」, ?한국연극학? 제8집(한국연극학회, 1996), 165-
195면; 마츠오 아키라, 「일본과 세계 마술사 연대기표」, ?The History of
Magic?, 向上社, 1976, 3-12면.(정성모, 「한국 마술사 연구」, 단국대학교 대중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석사학위논문, 2005, 43-53면에서 재인용)
16) 李圭景, 「幻戲辨證說」,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技藝類 雜技, “今寰宇諸
國, 莫不有此戲, 而我東獨無之, 是則導民有法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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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행위로 보았던 듯하다. 그런데, 우리 연행기록 전반을 통람해보
면 환술을 견문한 기록들이 다수 발견된다. 일부 연행록들은 중국
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상세하게 환술공연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신기함 내지 호기심에서 유발된 역설적인 현
상이라고 할 수 있다.

 

2) 조선조 지식인의 환술인식
조선시대 사행원들은 연행기간 동안 각종 演戱를 관람하곤 했다.
연행록에 담긴 다양한 연희관람 기록을 검토해 보면,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환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17) 하지만, 사행
원들에게 환술은 호기심의 대상인 동시에 가치론적으로 부정의 대
상이기도 했다. 환술이 佛ㆍ仙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유가에서
금하는 ‘怪力亂神’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기록
두 가지를 살펴보자.

 

[1] 幻術이란 귀신을 부르는 것이다. 六壬ㆍ遁甲은 그 유래가 오래다. 귀
신이 간혹 대낮에 형체를 드러내어 변태가 백 가지로 나타나는데,
呪符의 술법이 있으면 비어 있는 속에서도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귀신과 접촉하게 되면, 귀신의 성질이 죽이
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氣魄이 쇠진하여 도리어 귀신에게 해를
받게 되는 것이니, 費長房 같은 류가 이것이다. 그러나 이미 불러서
오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또 반드시 몰아내어 멀리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李瀷, ?국역 성호사설? 卷九 人事門 幻術조)

 


17) 임기중, 「연행록의 환희기」, ?한국민속학? 제31집(한국민속학회, 1999), 257-
328면. ?연행록선집?을 대상으로 한 연행기록 통계에 따르면, 사행기간 중
가장 빈번하게 보았던 것은 환술이고, 창우희ㆍ연희ㆍ등희 등의 그 뒤를 따
른다.
230 민족문화연구 제53호

 

[2] ?列子?를 보면, 周穆王 때에 西域의 化人이 왔다고 했는데, 중들은
幻術에 능하고 온갖 재주를 부리니, 이 또한 불교 계통의 사람일 것
이다. (安鼎福, ?順菴集? 卷十三 雜著, 「橡軒隨筆」下 佛法入中國條)18)
위 인용문에서 환술은 모두 귀신이나 불교와 관련지어 설명되고
있다. 이는 중국쪽 기록으로부터 온 것도 얼마간 있지만, 우리의 경
우 그것을 불교 같은 이단이나 귀신과 같이 미신ㆍ주술적 문제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이익은 ?성호사설?의 다른 항목에서도
환술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뒤부터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으며,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에서 신라 이차돈의 순교를 환술이라고 평
가하고 있다.19) 중국의 환술이 대부분 道敎에 기반한 것임을 고려
할 때, 이런 인식은 실상과는 다소 동떨어진 국면이라고 할 수 있
다. 더구나 연희로서의 환술에 대한 언급은 연행록 외에는 거의 찾
을 수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검토해 보더라도 환술은 대
부분 공연이 아니라 이단의 邪術이나 민간의 미신적 주술로서 일종
의 요술과 같이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0) 조선시대에는 환술
을 심지어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일종의 범죄행위로서 인식

 

18) “列子周穆王時. 西域化人來. 浮屠人, 善幻多技能, 此亦佛類也.” 인용구절 중
“浮屠人, 善幻多技能”이란 표현은 韓愈의 「送高閑上人序」의 “吾聞淨屠人, 善
幻多技能”에서 온 것이다. 이 구절은 환술과 관련해서 조선조 지식인들이 자
주 인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도 환술을 불교로 연관시키는 의식경
향이 발견된다.
19) 李瀷, ?국역 성호사설? 제11권 人事門 仙佛조, “幻術은 佛法이 중국에 들어
온 뒤부터 시작되었으니, 三國 때 左慈와 于吉의 무리는 지극히 괴이하고 허
탄한 자들이었다.” ; 安鼎福, ?국역 동사강목? 제3상, 무신년 신라 법흥왕 15

 

년, 고구려 안장왕 10년, 백제 성왕 6년조, “신라 사인(舍人) 이차돈(異次頓)
이 복주(伏誅)하였다.【안】 西域의 습속이 幻術을 잘하고 技能이 많은데, 불
법은 더욱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여러 가지 靈異한 일이 傳記에 나
타나, 속일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20) 김은영, 앞의 논문, 246-248면. 왕조실록에 기록된 환술들은 대부분 사회를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사기기법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31

 

하였던 측면마저 있었다.
연행록에서 발견되는 환술인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환술공
연을 실제 관람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연희가 아니라 妖法이며
邪術로 보기에 관람의 태도 자체가 경직되곤 하였다.21) 편견을 가
진 채 보았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근거 없는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낳기도 하였다. 이런 거부감이 심한 경우 관람 자체를 거부하는 예
마저 있었다.22) 또한 관람 후 기록을 하더라도 보았다는 사실만 적
시하는 경우가 많았다.23) 특히 18세기 이전 연행록에서 많이 발견
되는 소극적 기술태도는 환술에 대한 우리사회의 부정적 의식에 기
인한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했기 때문에 설혹 환술을 보고
기록하더라도 신기하다거나 허황되다는 片面的 인식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여행자의 편견이 여행국 문화 이해에 지장을 초래한 경우
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극단에 환술의 문제를 西學과 연결
시켜 보는 시각이 있다.
서학의 술법이란 전해들은 바를 참작할 때 한 마디로 지극히 요사스럽
고 괴이하다 할 만하다. …(중략)… 오직 이른바 천당에 올라간다는 일설
은 서학의 궁극적인 교리인데, 백성을 미혹시키는 것이 이 한 조목에 있
는 듯하다. 단지 문자로 가르치고 말로 깨우쳐 주고 직접 눈으로 보고 몸
으로 체험하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도 결단코 참이
라고 확신하여서 죽음에 이르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하는 이치가 결코 없
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幻術 같은 邪術은 예로부터 있었다. 주 목

 

21) 李健命, ?寒圃齋使行日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此乃妖法邪術之
瞞人耳目, 而亦可謂神奇矣.”
22) 張錫駿, ?朝天日記?, ?春皐遺稿? 卷一, 正月 初七日條, 영인본(동보한방병원,
1994), “譯員輩, 招優人技戲者, 眩幻百巧, 妖詭不欲觀, 卽還.”
23) 黃是, ?朝天錄?, ?檜山世稿? 三 ?負暄堂稿?, ?연행록전집? 2(동국대학교 출
판부, 2001), “有優人來鬻技, 傀儡諸技, 極其眩幻.” ; 李海澈, ?慶尙道漆谷石
田村李進士海澈燕行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十五日, 食後有幻術者數人
來, 呈各技, 卽漢人之法戱也.”
232 민족문화연구 제53호

 

왕 때부터 서역에서 환술하는 사람이 왔다는 말이 증명해 준다. 예를 들
어 한대의 장각ㆍ좌자ㆍ우길의 무리나, 당대 張道陵ㆍ장과의 무리가 그런
흐름일 따름이다. 명대에 서홍유 당의 백련교, 왕삼의 문향교 같은 것도
모두 환술유파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나중에는 이것이 점차 익숙해지고
환술하는 자도 잡박해져서 세상에서 기이하게 여겨지지도 않고 또 신령하
다 여기지도 않게 되었다. 지금 중국에서 환술사를 유희의 도구로 삼아
비록 천백가지 괴이한 일을 벌이더라도 별다른 감흥 없이 단지 한 번의
유희로 여기는 것이 이런 이유다. 燕行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공연되
어 환술을 보는 것이 매우 익숙한 일이 되었다. 특별히 괴이하다고 여기
지도 않게 된 것은 환술이 눈에 익어 더 이상 이런 습속을 이상하게 여기
지 않고 단지 유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제 만약 우리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보지 않고 갑자기 환술을 부리는 사람을 보게 한다면,
크게 신이하다 여기고 귀신이나 신선이라고 알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비
록 조금 식견이 있는 자라도 고민하게 되는데 하물며 민간의 어리석은 백
성들이나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은 어떠하겠는가? 생각건대 서양의 환술을
가지고 반드시 사람들이 그 환술을 믿게 해서 죽음에 이르더라도 변하지
않게 하려했던 까닭에 그 술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먼저 사람을 현혹하
는 술법으로 농락하고 미혹시키는 것이리라. 혹자는 말하길 땅에서 재화
와 음식을 산출하며, 혹은 온갖 물건을 변화시키며, 혹은 환상을 만들어내
어 배우는 자로 하여금 그 신통함에 信服하게 한 뒤에 깨달음을 얻어 천
당에 올라가는 형상을 가설하고 눈으로 목도하도록 해서 여러 차례 경험
을 통해 차차 참이라고 믿게하는 때문이라고 한다.24)

 

24) 姜浩溥, ?四養齋外集桑蓬錄?(?桑蓬錄?), 姜在應 編述,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大抵其術以傳聞叅之, 蔽一言曰, 至妖至怪. …(中略)…, 惟其所謂登天
堂一說, 卽渠學之究竟處, 其能令蠱惑民志者, 似在此一款, 而若徒以文字敎之,
口舌諭之, 而無目見身履之驗, 則雖至愚者, 斷无確信認眞, 至死不悔之理. 愚意
則有一焉, 蓋幻術左道者, 從古有之, 自周穆王時, 西極化人云者, 皆可證. 如漢
之張角ㆍ左慈ㆍ于吉輩, 如唐之張天師ㆍ張果之徒, 抑亦其流而已. 皇明時, 徐
鴻儒黨之白蓮敎, 王森之聞香敎者, 亦皆裔類之濫者耳. 後來漸狃於見聞, 術者
亦駁雜, 無他奇世, 又不以爲神. 今中國以幻人爲戲具, 雖千詭百怪, 視之尋常,
只作一場矣. 資我國人之燕者, 亦觀之甚熟, 不以爲怪者, 以習見彼俗, 不以此爲
奇, 而特爲戲玩而已故也. 今若使我國人, 不入中國, 而卒然見人有能幻者, 則未
有不大以爲神異, 而認鬼認仙者也. 雖稍有識見者, 尙或有聰?若之慮, 况閭閻愚
民乎, 况婦女童孺乎? 意者挾洋術者, 必欲人之信其術, 而至死不變, 故乃敎人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33

 

인용문은 姜浩溥의 ?桑蓬錄?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강호부
는 1727년 아버지 姜錫圭의 문인이었던 李世瑾을 따라 연행을 다녀
왔다. 지금 전하는 ?桑蓬錄?은 강호부 자신이 어머니를 위해 한글
로 쓴 ?상봉녹?을 증손 姜在應이 다시 漢譯한 것이다.25) 강호부는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지는 노론 湖論系의 정통선상에
위치하는 학자로, 서학에 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26)
위의 글은 서학에 대한 강호부의 기록 말미에 부기된 강재응이 쓴
「追說」의 한 대목이다. 비록 강호부 자신의 서술은 아니지만, ?상봉
녹? 내용에 대한 부연이란 측면에서 조선후기 보수적 지식인의 사
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강재응은 천주교의 포교방식을 설명하며, 그것을 환술에 빗대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증조인 강호부가 ?상봉녹?에서 천주교
의 교리가 佛ㆍ仙을 합한 것이고, ?天主演義?ㆍ?天主眞經? 등의 책
은 ‘誕妄虛幻’해서 볼 것도 없다고 한 말에 대한 부연설명인 셈이
다.27) 강재응은 이를 다시 환술의 문제와 결부시킴으로서 극력 비

 


其術也, 先以幻人之術, 籠絡迷蠱之. 或曰, 地辦出財貨飮食, 或變化百物, 或假
設幻套, 令學之者, 服其神通, 然後乃設爲得道升天堂之形狀, 使之丁寧目見焉,
屢見屢驗, 浸浸然認以爲眞故也.”
25) 구만옥, 「한문본 ?四養齋外集桑蓬錄? 해제」, 고운기, 「한글본 ?상봉녹? 해제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고서해제 Ⅲ?(
평민사, 2005), 403-416면, 439-450면.
26) 구만옥, 「18세기 정통주자학자의 현실인식과 학문적 대응-四養齋 姜浩溥의 저
술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제31집(한국사상사학회, 2008), 480-486면.
27) 姜浩溥, ?桑蓬錄? 卷七, ?四養齋集? 外集,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天主名耶蘇, 歐羅巴國人也. 名耶蘇者, 方語謂救濟世上也. 尊之者稱爲海外聖
人以天爲主, 故又謂之天主, 蓋其學開口, 則必稱天爲事, 無大小理無淺深, 無
不以天爲本. 其徒之說以爲孔孟以前諸聖人, 其學本於天, 故得其道, 程朱以後
諸賢人, 其學皆不能本於天, 故遂失其說?云. 其誣罔妄誕可憎, 亦可笑也. 又其
學術淸淨以無慾爲工, 以得道坐化爲驗云, 蓋合仙佛而爲一者也. 嘗見其所著書
有所謂?天主眞經?ㆍ?天主演義?等編, 其說往往神奇, 不無可喜, 而究其中, 畢
, . 竟誕妄虛幻不足一覽也”
234 민족문화연구 제53호

 

판하고 있다. 그가 서양의 천문학과 畵法에 대해서도 ‘妖怪之才’라
고 폄하하였던 것도, 서학을 學理의 대상이 아니라 인성을 현혹시
키는 환술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식의 저변에
는 환술을 西域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본 동아시아의 전통적 관념
도 일정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서양에서 온 천주
학은 서역에서 유래한 불교와 마찬가지로 斯文을 어지럽히는 邪敎
였기 때문이다.28)
강재응은 천주교도들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는 이유를 환술에서 찾는다. 마치
환술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환술을 속임수가 아니라 참이라 믿는
것처럼,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와 異蹟를 처음 보는 사람은 속게 된
다는 것이다. 요컨대, 강재응은 서학의 선교사들이 들여온 앞선 과
학문명과 기술마저 환술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강재응의 생각으
론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서학의 교리를 세뇌하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다.29)
이렇게 환술을 異端의 ‘邪術’로서 인식하는 한편, 조선조 지식인
들은 환술을 공연자의 속임수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곤 하
였다.

 

28) 우리가 쓰는 서양이란 말은 서역이란 말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것이다. 원재
연, 「조선시대 학자들의 서양인식」, ?대구사학? 제73집(대구사학회, 2003),
41-94면ㆍ42-46면.
29) 이런 인식은 박지원에게서도 발견된다. 신호열ㆍ김명호 역, 「순찰사에게 답함
」, ?국역 연암집?, 제2권 煙湘閣選本(민족문화추진회, 2005), 221면, “내가 보
기에, 지금 중국에 있는 천주당의 서양 사람들은 비록 曆法에는 정통하지만
모두 환술쟁이이다 吾以爲卽今中國所有天主堂, 西洋人雖精於曆法, 皆幻人
也.”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35

 


[1] 今日雜戲之人, 或抽出玉珮, 或盛開彩花於中虛之器, 此必是幻術, 而余等爲
所眩, 而目不能燭破其邪妄, 有愧於傅奕多矣.”(16세기 許篈, ?朝天記?)30)
[2] 昨來幻術人又來, 其所弄術, 揮霍神變, 莫知端倪, 此乃妖法邪術之瞞人耳
目, 而亦可謂神奇矣.(18세기 李健命, ?寒圃齋使行日記?)31)
[3] 大抵幻術云者, 不過變幻眞假, 眩亂人目, 而終日見之, 滿庭呌奇, 卒不能
覷破其假處, 其術亦巧矣哉.(19세기초 李基憲, ?燕行日記? 下)32)
[4] 大抵變幻眞假, 眩亂人目, 今滿庭千隻眼, 被數箇人愚弄, 終日虛見看, 卒
未有能得其破綻, 雖有一二可疑之端, 而怳惚錯莫, 亦無眞的執臟, 其爲術
亦巧矣.(19세기 중반 李遇駿, ?夢遊燕行錄? 下)33)
이상의 예문들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시대별 환술기록의 일
부분이다. 명대와 청대라는 시간차, 사행목적이라는 배경의 차이에
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결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환술사
의 다채로운 공연방식에 감탄하면서도, 공연 자체보다는 환술사의
속임수(邪妄, 妖法邪術, 假處, 破綻)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저 속임수
를 파악해내지 못한다는 점을 안타까워할 뿐 진전된 인식태도는 보
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허봉의 경우처럼 환술을 불교와 동일시하여
관람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19세기까지도 이런 단선적이고 피상적인 인식태도에 근본적 변화
가 일어나지는 않지만, 환술견문의 축적에 따라 환술 자체에 대한
상대적으로 진지한 접근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환술공연

 

30) 許篈, ?朝天記? 中, 萬曆二年甲戌 八月 十六日條, ?荷谷集?, 한국문집총간
58(민족문화추진회, 1990), 444면.
31) 李健命, ?寒圃齋使行日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32) 임기중 편, ?燕行錄全集? 65(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205-209면.
33) 李遇駿, ?夢遊燕行錄?, 임형택 편, ?藥坡漫錄? 下 附錄(성균관대학교 대동문
화연구원, 1995), 593면.
236 민족문화연구 제53호

 

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과 맞물려 이루어진다. 18세기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환술공연 기록은 이전까지의 한 두 문장 정도의 소감피력
에 그친 기록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초기 양태로 李
宜顯의 ?庚子燕行雜識?(1720)와 강호부의 ?상봉녹?(1727)을 들 수
있다. ?경자연행잡지?에서는 11조목이, 앞서 언급한 ?상봉녹?에는 9
조목의 비교적 상세한 환술공연 내용이 실려 있다. 이 기록들은 또
기록자가 환술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바탕으로 공연내용에 대한 평
가와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환술에 대한
접근 자세의 변화 속에서 18세기말 19세기초에 이르면 환술을 본격
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기록들이 등장하게 된다. 權復仁은 1822
년 副使의 자제군관으로 謝恩使行을 다녀온 뒤 남긴 「幻戱」(?隨槎閒
筆? 下)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眞’에 반대되는 것이 ‘幻’이다. ‘환’을 믿을 수 있을까? 사람이 스스로
믿는 것으론 마음과 눈만한 것이 없다. 눈으로 보면서도 분명히 분별할
수 없고, 마음으로 알면서도 상상할 수 없어야 ‘환’이라고 할 수 있다.34)
권복인의 글은 박지원의 「환희기」를 제외한다면, 환술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많지 않은 예 중의 하나로서 의미가 있다. 권복인은
진과 반대되는 것이 환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환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환이 되기 위해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알면서도,
분별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어야 환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내

 

34) 權復仁, 「幻戱」, ?隨槎閒筆? 下, 종로시립도서관 소장 필사본. “反於眞, 謂之
幻, 幻可以信乎? 人之所自信者, 莫如心與目, 而至若目擊而不能辨詰, 心識而
不能思議, 始謂之幻.” ?隨槎閒筆?에 대한 정보는 김영진의 해제를 참고할 것.
한국문학연구소 연행록해제팀, ?연행록해제 (1)?(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3), 705-722면. 이 글은 권복인의 문집에도 실려 있다. 權復仁, ?天游先生
文集? 二, 한국역대문집총서 591(경인문화사, 1993), 80-82면.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37

 

용 자체는 이 시기 문예론에서 많이 언급되는 眞幻論과 견주어 볼
때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의 幻은 환술을 지칭하
는 것이다. 환술공연의 일반적 원리는 관중에게 일정한 기대치를
설정하게 하여 친숙한 상황에 대한 기대감을 유발시키는 데 있다.
환술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력을 앞질러 감으로써, 우리가 어느 부
분에서 속았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幻影을 완성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환술공연이 성공적으로 幻影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간명하
게 지적했다는 점에 이 글의 가치는 있다. 이런 인식들은 비슷한
시기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드러난다. 朴思浩는 ?心田稿?에서 환술을
‘能見難思’라고도 부른다고 적고 있다.35) 이 단계에 이르면 환술에
대한 기본적 인식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한계는 명확하다. 인용한 권복인의 경우도 환술
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환희」의 결말 부분은
다음과 같다.
구경꾼들은 빙 둘러서서 눈을 닦으며 숨소리도 내지 못한다. 오직 자신
들이 속는 것만 염려하다가 각종 순간적으로 번쩍하는 마술이 있게 되면
도리어 자신들의 마음과 눈이 가리어 가엽게도 멍하니 있다가 꾸물거리며
물러나게 된다. 그것이 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분명히 밝히지 못하
니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돌을 황금으로 만
들지 못하고 쌀을 던져 丹砂로 만들어 단번에 부자가 될 수는 없고, 종일
고생하여 얻는 것으로는 의식도 자급할 수 없으니 幻이 眞에 미치지 못하
며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36)

 

35) 朴思浩, ?心田稿?, 「留館雜錄」, 幻術雜戱條.
36) “觀者堵立拭目疎息, 唯慮其見欺, 及其色色種種儵忽閃鑠, 則反疑自家心與目之
有蔽, 憫然沮苶, 逡巡自退. 明知其幻, 而莫敢辨析, 良可哂也. 然爲斯技者, 不
能點石成黃金, 擲米化丹砂, 立致富奢, 而終日役役所獲錐刀, 衣食無以自給, 則
幻之不及眞, 而不可信也, 明矣.”
238 민족문화연구 제53호

 

권복인은 환술이 거짓으로서 현실에서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일
으키지 못하는 것이기에 眞보다 못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권
복인의 환술논의는 환술을 과장하여 이단으로 연결시키거나, 단순
한 속임수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진전된 양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
만, 그 역시 환술을 가치있는 사고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
다. 그런 측면에서 환술인식에 대한 진정한 변화의 모습은 박지원
의 「환희기」에서 찾을 수 있다.

 

3. 환술논의의 새로운 지평
이상과 같은 문화적 풍토 하에서 박지원의 「환희기」는 탄생했다
고 볼 수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박지원의 환희기는 크게 세부분으
로 나누어 있다. 「幻戱記序」(「幻戱記題辭」), 20조목의 환술기록, 그
리고 「幻戱記後識」가 그것이다. 이 항목에서는 「幻戱記序」와 「幻戱
記後識」를 중심으로 환술논의의 성격과 의의를 짚어보기로 한다.

 


1) 「幻戱記序」
「환희기서」의 내용은 광피사표 패루 앞을 지나가도 우연히 목도
한 환술공연 정경―환술의 유래―중국에서 환술공연을 허용하는 이
유―환술기록을 남기는 목적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지원은 환
술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개 상고 시대부터 이런 환술에 능한 사람이 있어서 자그마한 귀신을
부려 사람의 눈을 현혹했기 때문에 이를 환술이라고 말한다. 하나라 때
유루라는 사람이 용을 길들여서 임금 공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주나라
목왕 때는 언사라는 사람이 춤추는 나무인형을 만들어 놀렸다. 묵적은 점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39

 

잖은 학자인데 나무로 만든 연을 날렸고, 후세 동한 때의 좌자와 비장방
의 무리는 모두 이런 기술을 가지고서 사람들 사이에서 유희를 했으며,
연나라 제나라의 신이하고 괴상한 선비들은 신선을 이야기해서 당대의 임
금을 홀렸다. 이런 것들은 다 환술이건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능히 깨닫
지 못했다. 생각건대 환술은 서역에서 나온 것이므로 구라마십ㆍ불도징ㆍ
달마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환술을 더욱 잘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37)
인용문은 박지원이 환술과 불교와 도교, 환술사와 승려ㆍ방사를
한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환술과 귀신을 부리
는 일을 연결시키는 것은 앞서 인용한 ?성호사설?의 내용과 동일하
다. 그가 실제 기록한 20조목의 환술이 지금의 마술과 같은 일종의
눈속임이란 점을 감안할 때, 박지원의 환술인식은 관찰한 내용을
넘어서 ‘마술+초현실적 현상’이란 포괄적 관점에 기반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조선조 지식인들의 환술에 대한 통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환술공연이 민간에까지 파고들었던 청조
의 인물들은 이와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홍대용과 교유했던
孫有義(호 蓉洲) 같은 이가 환술을 그저 손을 민첩하게 놀리는 재주
를 익혀서 남들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하고, 또한 부적ㆍ주문을 빌
어서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 것이나,38) 錢泳

 

37) 朴趾源, 「幻戱記序」, ?熱河日記?, 한국문집총간 252(민족문화추진회, 2000),
276면, “蓋自上世有此能, 役使小鬼, 眩人之目, 故謂之幻也. 夏之時, 劉累擾龍
以豢孔甲, 周穆王時, 有偃師者墨翟君子也, 能飛木鳶, 後世如左慈ㆍ費長房之
徒, 皆挾此術以游戱人間, 而燕齊迂怪之士, 談神仙以誑惑世主者, 皆幻術, 當
時未之能覺. 意者其術出自西域, 故鳩羅摩什ㆍ佛圖澄ㆍ達摩, 尤其善幻者歟!”
; 박지원, ?열하일기? 3, 김혈조 옮김(돌베개, 2009), 12-37면.
* 이하에서 별도의 언급이 없을 경우 「환희기」의 번역문은 가장 최근에 번
역된 김혈조의 책을 기준으로 하고, 이가원과 리상호의 번역을 참조하는 것
으로 한다. 단, 幻術이란 용어는 현대어의 요술 혹은 마술이란 말로 모두 번
역될 수 있는 만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환술이란 말로 수정하였다. 「환희기」
의 원문은 문집총간본 ?연암집?을 기준으로 하였다.
38) 洪大容, 「與孫蓉洲書」, ?湛軒書? 外集卷一, 杭傳尺牘, 한국문집총간 248(민족
240 민족문화연구 제53호

 

(1759-1844)이 ?履園叢話? 雜戱條에서 환술공연에 대한 기술을 하
면서 방술이나 異蹟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싣지 있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39) 또 조선후기 많이 읽혔던 張潮의 ?虞
初新志?나 이 무렵 우리 지식인들과 교유가 잦았던 紀昀의 ?閱微草
堂筆記? 등에 수록된 雜戱 예인들의 삶은 기예가 생활의 방편일 뿐
임을 드러내고 있다.40) 후대에 정리된 것이긴 하지만, 徐珂의 ?淸稗
類鈔?에 수록된 청대 野史筆記 자료들에도 청대의 환술공연 정경이
비교적 상세히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41) 요컨대 중국의 경우 공연
물로서의 환술과 도교의 방술이나 불교의 異蹟들은 어느 단계부터
별개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반면, 환술을 사회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인자로 인식하는 조선
조 지식인들 입장에선 청나라에서 환술이 궁중의 연회는 물론 민간
에서도 자유스럽게 허용되는 이유가 크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문화추진회, 2000), 124-125면. “盖由習成手敏, 使人目不及窺, 亦有假符呪以障
人眼目者也.”
39) 錢泳, ?履園叢話? 卷十二 藝能, 雜戱條, 上海古籍出版社 編, ?淸代筆記小說
大觀? 4(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7), 3494면.
40) 張潮, 「九牛垻觀抵戱記」, ?虞初新志? 卷二, 上海古籍出版社 編, ?淸代筆記小
說大觀? 1(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7), 251-253면. 抵戱는 角抵戱를 가리킨
다. 전통 각저희의 주요 부분 중의 하나가 환술이다. 그러나 위 글에선 환술
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다만 雜戱를 생업으로 삼은 예의 하나로서
거론하고자 한다.
嚴文儒 注譯, 「戱術」, ?新譯 閱微草堂筆記? 卷一 灤陽消夏錄一(臺北: 三民書
局, 2006), 47-49면. 기윤 자신의 어린시절 견문을 기록한 이 글은 환술의 수
법이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청조 지식인들의 환술지식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41) 徐珂 編撰, ?淸稗類鈔? 第十一冊, 戱劇類(北京: 中華書局, 2010), 5011-5093
면 참조. 이 책은 청말에 편찬된 것이나 이전까지의 野史筆記들을 彙輯한 자
료집이기 때문에 청대의 상황을 짐작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다만, 자료의 출
처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 어떤 야사필기자료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가 없다.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41

 

된다. 조선사회에서 배격 내지 암묵적으로 금지하였던 환술을 중국
은 왜 허용하는가가 의문의 핵심이었다. 「환희기서」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설정하고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중국 땅덩어리가 워낙 광대해서 능히 모든 것을 포용하여 아울러 육성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병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천자가 이를 절박한 문제로 여겨서 환술사들과 법률로
잘잘못을 따져서 막다른 길까지 추격하여 몰아세운다면, 도리어 궁벽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꼭꼭 숨어 때대로 출몰하면서 재주를 팔고 현혹하
여 장차 천하의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환술을 하나의 놀이로서 보게 하니, 비록 부인이나 어린애조차 그것이 속
이는 환술이라는 것을 알아서 마음에 놀라거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임금 노릇하는 사람에게 세상을 통치하는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42)
박지원 역시 공연물로서의 환술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지만,
환술공연이 허용되는 중국 문화현실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시각은 이후의
연행록들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연행
기록들에는 중국사회에서 환술이 하나의 유희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강조한 기록들이 나오게 된다. 앞서 언급한 姜浩溥의 ?桑蓬錄?
에 부기된 姜在應의 「追說」에 “지금 중국에서 환술사를 유희의 도
구로 삼아 비록 천백가지 괴이한 일을 벌이더라도 별다른 감흥 없
이 단지 한 번의 유희로 여기는 것이 이런 이유다 今中國以幻人爲
戲具, 雖千詭百怪, 視之尋常, 只作一場矣.”라고 한 것이나, 李遇駿이

 

42) “所以見中土之大也, 能恢恢焉並育, 故不爲治道之病. 若天子挈挈然與此等較三
尺, 窮追深究, 則乃反隱約於幽僻罕覩之地, 時出而衒耀之, 其爲天下患大矣. 故
日令人以戱觀之, 雖婦人孺子, 知其爲幻術, 而無足以驚心駭目, 此王者所以御
世之術也哉!”
242 민족문화연구 제53호

 

?夢遊燕行錄?에서 박지원의 논의를 그대로 수용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43) 이규경이 「幻戲辨證說」에서 환희공연
을 금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한 말 역시 박지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44)
박지원은 「환희기」의 창작목적을 환술을 보지 못한 우리나라 사
람들에게 견문의 자료로서 제공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는 환술의
위험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환술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
다는 논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환술이란 부정적
대상을 기록하기 위한 하나의 명분으로 설정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그 기록내용의 성격과 후대에 미친 영향을 감안할 때 목
적에 상응하는 실질적 효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박
지원의 환술기록은 단순한 견문담에 그치지 않고 매우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내용구성과 이전과는 다른 기록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
문이다.45) 박지원에 의해 제고된 환술기록의 가치는 후일 金景善의
‘一部의 幻史’를 이루고자 하는 의식에서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46)

 

43) 李遇駿, ?夢遊燕行錄? 下, 己酉正月初五日條, ?藥坡漫錄? 附錄, 임형택 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5), 592-593면. “寧使其售此術以資生, 自在
於王法之外, 而恢恢焉並育, 故不爲治道之病. 若天子契契然, 與此輩較三尺, 窮
追深究, 則乃反隱約於幽僻罕到之地, 時出而衒耀之, 其爲患大矣. 是以日令人
觀之, 雖婦孺皆知其幻戱, 而無足以驚心駭目, 此無乃爲王者御世之一端歟.”
44) 李圭景, 「幻戲辨證說」,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技藝類 雜技, “夫幻者,
卽反眞者也. 其理如形之有影, 如聲之有響, 一如海市蜃樓, 不可名狀. 然卽「王
制」之左道, ?周禮?之怪民, 王法之當禁者, 然自來天地間, 特設此一副幻妄奇奇
怪怪者, 將以明眞定景像有異於幻妄者, 不過倡優傀儡之餘套, 使觀者慣見無怪,
幻者作戲無他, 則雖不禁, 亦無妨, 故中原諸國, 竝無禁者此也.”
45) 박지원이 남긴 환술기록의 형성경로와 기록특성에 관해서는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환술인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글과 상보적 관계
를 이루지만, 원고 매수의 제한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별고를 통해 보고하기
로 한다.
46) 金景善, ?燕轅直指? 卷三, 留館錄 上, 壬辰年十二月二十八日條 , “後至白雲
觀, 見無數幻者, 分設幃幔, 各呈其術, 尤多別技, 始知館中之見, 不過草草塞責.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43

 

2) 「幻戱記後識」
본격적인 환술논의란 측면에서 우리는 「환희기」 중에서도 특히 「
환희기후지」에 주목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논의가 양자
간의 대화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각각의 입장을 나누어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의 순서대로 먼저 박지원의 입장을 살펴보자. 박지원은 옳고
그름과 참 거짓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는 눈의 문제를 제기한다.
환술을 볼 때도 환술공연자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
람 스스로가 현혹된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47) 이것은 이전까지
공연자의 속임수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던 조선조 지식
인들의 관점을 뒤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우리 인식의 부정확성을 설명하기 위해 서경덕과 맹인
의 대화를 담은 일화를 소개한다. 이미 선행연구를 통해 드러난 것
처럼, 이 일화는 兪漢雋에게 답한 편지인 「答蒼厓」에도 실려 있다.
또 맹인삽화에서 등장하는 인식론적 명제란 「一夜九渡河記」 등 ?열
하일기? 전반을 관류하는 문제의식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선행연구에선 맹인이 갖는 의미를 ?渡江錄?에 등장하
는 맹인과 연결하여 세상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가지지 않은 진정
한 平等眼을 가진 존재로 해석하기도 했다.48) 맹인삽화가 갖는 의
미에 관한 논의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바 있으므로 인용문은 생

 

, . 因幷錄以成一部幻史”
47) “余謂趙卿曰, ‘目不能辨是非察眞僞, 則雖謂之無目可也. 然常爲幻者所眩, 則是
目未甞非妄而視之明, 反爲之祟也.’”, “今日觀幻, 非幻者能眩之, 實觀者自眩
爾.”
48) 임형택, 「朴燕巖의 인식론과 미의식」, ?한국한문학연구? 제11집(한국한문학연
구회, 1988), 17-39면; 김명호, ?열하일기연구?(창작과비평사, 1990), 135-139
면ㆍ230-232면; 송재소, 「盲人揷話를 통해서 본 연암 박지원의 사물인식」, ?
한시 미학과 역사적 진실?(창작과비평사, 2001), 359-374면.
244 민족문화연구 제53호

 

략하기로 한다. 다만, 지적해 둘 점은 두 글에 동일하게 인용되어
있는 맹인삽화 간의 의미차이다. 「答蒼厓」에 비해 「환희기후지」의
맹인삽화가 길기도 하지만, 후자가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의 문제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고 시각과 기타 지각과의 관계도 분명히 정의하
고 있다. 전자가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우리가 믿는 감각기관이 도리어 오도된 인식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맹인삽화는 두 글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지만, 문장 안
에서 결국 서로 다른 의미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박지원의 이
런 주장은 이전까지 조선지식인들이 환술에 대해 보여주는 경시의식
과는 상당히 다른 본격적이고 진지한 환술논의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음으로 조광련의 입장을 살펴보자. 그는 박지원이 맹인삽화를
통해 제기한 우리 인식의 한계란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도 논점을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린다.
太伯이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몸에 먹으로 문신을 하고 약초
를 캐러 간 것은 효도로써 환술을 부린 것이요, 豫讓이 [智伯의 원수를 갚
기 위해]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먹어 벙어리가 된 것은 의리로써 환술을
부린 것이요, 紀信이 황제의 수레를 대신 타고 [유방을 대신해서 죽은 것
은] 충성으로써 환술을 부린 것이요, 沛公[漢 고조가 천자가 되기 전의 봉
호]의 환술은 깃발로 부렸고, 張良의 환술은 黃石公에게 얻은 兵書로 부렸
으며, 田單[전국 때 齊의 장수]은 소로써, 黃初平은 양으로써, 趙高는 사슴
으로써, 黃覇[漢 宣帝 때의 승상]는 참새로써, 孟甞君은 닭으로써 환술을
부렸고, 蚩尤의 환술은 銅頭와 鐵額으로 부렸으며, 諸葛亮의 환술은 木牛
流馬로 부렸다. 王莽이 金縢으로 천명을 가장한 것은 환술이 되다가 만
것이요, 曹操가 銅雀臺를 세우고 자기가 죽고 난 뒤에도 분향을 하라고
궁녀들에게 향을 나누어 준 일은 파탄이 난 환술이요, 安祿山이 자신의
불룩한 배에 붉은 충성이 가득하다고 한 것과 盧杞[唐 德宗 때의 간신]가
藍面[얼굴이 귀신의 얼굴처럼 생김]으로 간사한 말을 잘한 것은 모두 서
툰 환술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부인들이 더욱 요술을 잘 부려 褒姒의 烽火
와 驪姬[晉 獻公의 寵姬]의 벌이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성인이 신성한 도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45

 

로써 교화를 베푸는 데도 역시 그런 것이 있으니, 나는 비록 요임금의 뜰
에 난 풀이 아첨쟁이를 가리키고 순임금의 음악(韶樂)을 듣고 봉황이 날
아왔다는 것은 감히 의심 못한다 하더라도, 禹 임금 때 黃龍이 배를 등에
졌다는 것과 무왕이 정벌할 때 하늘에서 붉은 불이 날아와 빨간 까마귀가
되었다는 일은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神聖한 자든 愚凡한 자
든 누구나 한 가지쯤은 알 수 없는 일이 있는데, 혹은 劉邕처럼 상처의
딱지를 즐기는 자가 있고, 혹은 王粲처럼 노새 울음소리 내는 것을 좋아
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비록 환술이라 해도 될 것이고, 비록 타고난 천
성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환술의 술법은 비록 천변만화를 하더라도 족히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가히 두려워할 만한 환술이 있으니,
그것은 크게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체하는 것과 鄕愿이면서도 덕행이
있는 체하는 것일 겁니다.49)
인용된 조광련의 논의는 박지원의 맹인삽화와 전혀 다른 입지점
을 갖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지원이 어디까지나 환술을 바
라보는 자의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했다면, 조광련은 환술을 더 이
상 인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제현상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방식
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환술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며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가 보는 현상이란 실체 없는
虛像을 마치 참인 것처럼 꾸민 일종의 환술이란 것이다.
우선 그는 孝ㆍ忠ㆍ義와 같은 보편적 가치조차 현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환술로서 받아들인다. 따라서,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려 스스

 


49) “太伯之文身採藥, 幻以孝者也. 豫讓之漆身呑炭, 幻以義者也. 紀信之黃屋左纛,
幻以忠者也. 沛公其幻也織, 張良其幻也石, 田單以牛, 初平以羊, 趙高以鹿, 黃
霸以雀, 孟甞君以鷄, 蚩尤之幻銅頭鐵額, 諸葛之幻木牛流馬. 王莽之金縢請命,
幻之未成也. 曹操之銅雀分香, 幻之破綻也. 祿山之赤心, 盧杞之藍面, 皆幻之拙
者也. 自古婦人尤能善幻, 如褒姒之於烽也, 驪姬之於蠭也, 然聖人神道設敎, 亦
有然者. 愚雖未敢致疑於階草之指佞, 庭鳳之儀韶, 而亦未能盡信於負舟之黃龍,
流屋之赤烏. 自古神聖愚凡, 莫不有一番不可知之事, 或有嗜瘡痂者, 或有好驢
鳴者, 雖謂之幻可也, 雖謂之性, 亦可也. 幻之爲術也, 雖千變萬化, 无足畏者,
天下有可畏之幻, 大姦之似忠也, 鄕愿之類德也.”
246 민족문화연구 제53호

 

로 몸을 피한 太伯의 효성이나, 주군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한 豫讓의 의리나, 위기에 빠진 군주를 지키기 위해 거짓 황제
인척 한 紀信의 충성심조차도, 趙高, 黃霸, 王莽, 曹操, 安祿山, 盧杞
와 같은 인물들의 부정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실상이 아닌 환술이
만들어낸 사람을 현혹시키는 幻影일 뿐이다. 공자가 일찍이 ‘至德’
이라고 칭송했던 태백의 행위마저도 진심이 아니라 하나의 거짓 흉
내에 불과한 것이다.50) 그것은 그저 환술의 未成와 完成, 파탄과 완
수, 서툰 솜씨와 능수능란함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
니란 논리다. 조광련은 이어 “예로부터 神聖한 자든 愚凡한 자든
누구나 한 가지쯤은 알 수 없는 일이 있는데 自古神聖愚凡, 莫不有
一番不可知之事”라고 말하여 幻이란 것이 성인과 범인 모두에게 해
당하는 무차별적이고 불가지한 영역에 속하는 문제임을 밝히고 있
다. 타고난 性마저도 幻이라고 해도 좋다고 말함으로써, 결국 모든
것이 幻으로 귀결된다는 인식을 극대화하고 있다.
현실의 제현상을 환술이란 측면에서 보는 조광련의 시각은 현상
계의 모든 존재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幻’관념을 연상
시킨다. ?金剛般若波羅密經?에는 존재 상태의 환상적 본질을 보여
주는 일련의 비유가 있다. 모든 존재 상태는 ‘마술적 환상’(幻)이고
‘꿈’(夢)이며, ‘물거품’(水中泡)이고 ‘그림자’(影)란 말이다. 이러한
일련의 비유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란 단지 환상에 불과함을 보여주
기 위한 것이다.51) 물론, 조광련의 논의와 불교의 ‘환’관념이 완전

 

50) ?論語? 「泰伯」 제1장, “子曰, 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以
稱焉.”
51) 鳩摩羅什 漢譯, ?金剛經?,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김용옥, ?금강경강해?, 제2판(통나무, 2009), 363-368면; 사이구사 미쓰요시(三
枝充悳) 편, ?불교학 세미나 ④: 종교론ㆍ진리론?, 조윤호 옮김(불교시대사,
1998), 323-341면; 慈怡 主編, ?佛光大辭典? 2(北京: 書目文獻出版社, 1989),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47

 

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조광련이 말한 것은 현상을 구성하는 원
리로서의 幻이기에 모든 존재가 환이라는 불교의 ‘환’관념과는 일
정한 차이도 있다. 그러나 양자의 관련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논의의 결말에서 조광련은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은 환술이 아니
라 似而非한 이가 충성을 가장하고 덕을 꾸미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일면 사이비한 이들이 횡행하는 부정한 현실을 비판하
는 언술로도 받아들임직하다. 하지만, 이 논의의 강조점은 그보다
환술이 결코 두려워할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幻之爲術也,
雖千變萬化, 无足畏者”) 조광련이 외교부의 접대담당관쯤에 해당하
는 鴻臚寺 少卿의 직위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는 조선 지
식인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일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말은 환술을 이단의 邪術로서 지나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외국인들에게 짐짓 충고하는 의미일 수 있다.
조광련은 환술이 그저 공연물일 뿐이니 지나치게 정색을 하고 받아
들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환술의 원리가 세상사의 문

 

1390-1392면.
* ?金剛般若波羅密經? 외의 반야경들에도 이와 유사한 비유가 보인다. ?摩
訶般若波羅密經?(?放光般若經?)의 경우 ?금강경?에 비해 비유가 좀 더 다양
하다. 이 책에서는 모든 존재 상태가 ‘마술적 환상’(幻)이며 ‘꿈’(夢)이며, ‘메
아리’(響)이며 ‘투영된 빛’(光)이며 ‘그림자’(影)이며 ‘변형’(化)이며 ‘물거품’
(水中泡)이며 ‘거울에 비친 영상’(鏡中像)이며 ‘신기루’(熱時炎)이며 ‘물에 비
친 달그림자’(水中月)라고 설명하고 있다. 빅터 메어(Victor H. Mair), 「중국
문학의 서사혁명: 존재론적 전제」, ?이야기, 小說, Novel-Topics in Chinese
Classic Novel?(예문서원, 2001), 164-215면에서 재인용.
** 조광련의 논의는 한편으로 장 보드리아르(Jean Baudrillard)가 제기한 ‘시
뮬라크르(simulacres)’란 말을 연상시키는 점마저 있다. 실재한 일도 만들어낸
하나의 환영이라고 보는 조광련의 주장은 해석하기에 따라 ‘참’과 ‘거짓’, ‘실
재’와 ‘상상세계’ 사이의 다름 자체를 부정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란
개념과도 연결될 수있을 것이다. 장 보드리아르(Jean Baudrillard), ?시뮬라시
옹 SIMULACRES et SIMULATION?, 하태환 옮김(민음사, 2001), 1-267면.
248 민족문화연구 제53호

 

제와 다르지 않다는 논의도 그런 까닭에 나온 것이다.
조광련의 대화를 통해 박지원의 환술논의는 인식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일체의 현상을 구성해 내는 방식으로서의 환술이란 문제
에까지 나가고 있다. 이는 환술에 대한 논의의 확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양자가 환술을 보는 시각에 근원적 차이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박지원이 환술을 인식의 문제로 보고 환영을 보는
사람이 현혹되는 과정에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했다면, 조광련은 존
재론의 입장에서 모든 현상이 근본적으로 환술과 다를 것이 없음을
전제로 현실의 幻影이 구현되는 방식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결
국 양자는 환술이 만들어내는 幻影의 구현 조건을 서로 다른 방향
에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환희기후지」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가지 환술논의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환희기후지」에서 두 사람
의 대화는 주고받는 듯하지만, 어느 정도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
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자신의 논점과 다른 환술논
의를 받아들이는 박지원의 대응에 있다고 하겠다. 상대 의견에 대
한 존중으로서 의례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광련의 입장에
동의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된
박지원의 진의는 「환희기후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52) 어떤 측면에서 박지원은 의도적으로 논란의 여지를 남겨
환술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논의를 유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다. 「환희기후지」의 결말은 그러 측면에서 우리에게 미묘한 여운을

 

52) 이 문제는 박지원의 글 중 불교적 ‘환’ 관념과 연계된 글들과의 비교 검토를
필요로 할 것이다. 석가여래의 평등안을 언급한 ?渡江錄?, ?鐘北小選?에 수
록된 「麈公塔銘」, 「觀齋記」 같은 자료들이 하나의 참고자료가 될 터이나, 필
자의 공부가 부족하여 이 문제는 아직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였다. 가르침을
구한다.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49

 

남기고 있다.

 


4. 남는 문제: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을 통해 우리는 박지원의 「환희기」에 나타난 환술인식의 변
화가 갖는 문화사적 의미를 검토할 수 있었다. 조선사회는 환술이
란 연희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하에서 지식인들의 환술에 대한 인식 역시 부정 일
변도였다. 16세기 許篈이 환술을 관람하고 “傅奕에게 부끄러움이
많았다 有愧於傅奕多矣”라고 말했던 것은, 환술을 이단인 불교와 동
격으로 생각했던 사회적 통념이 바탕이 되었다.53) 결국, 이단의 邪
術이 사람을 홀리는 幻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이런 부정적 인식은 한편으로 환술을 피상적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행기록들은 오로지 공연
자의 속임수라는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눈속임의 기술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의문에 그치는 다수의 기록들이 이를 반
영한다.
이런 흐름은 환술 공연에 대한 견문이 쌓여감에 따라 조금씩 질
적 변화를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환술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
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환술에 대한 상대적으로
진전된 관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진전은 한편으로 환술을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논의하는 단계로 나가게 된다. 眞과

 

53) 劉구, ?舊唐書? 卷七十九, 列傳第二十九(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7), 702-
703면. ?舊唐書? 「傅奕列傳」에 따르면, 부혁은 불교를 숭상했던 唐 태종에게
불교의 제거를 주장했을 만큼 강경한 斥佛論者였다. 그는 儒家와 道家 모두
를 존숭했지만, 불교만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부혁은 魏ㆍ晉시기 이래
불교를 논박한 인물들을 모아 ?高識傳? 十卷을 찬술하였다.
250 민족문화연구 제53호

 

幻이란 대립항으로 환영 형성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따져본 權復仁
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런 진지한 사유의 또 다른 한편에선 기존
통념의 극단화가 이루어진다. ‘환술=불교’란 통념을 ‘서학=환술’이
란 새로운 인식으로 변화시킨 姜在應의 예가 그러하다. 그는 환영
의 형성원리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환술 일체를 西學의 惑世誣民 방
식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양의 ‘과학기술=환술’이라는
독특한 퇴행적 사고가 등장하게 된다.
박지원의 「환희기」는 이러한 지적 풍토에 일대 문제를 제기한 색
다른 방식의 환술기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환술이 만들어내
는 幻影의 조건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것
은 속이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 속는 자의 문제라는 인식론적 전환
에 있다. 이는 환술을 단순히 공연자의 속임수라는 측면에서만 바
라본 전대의 시각과는 다른 문제제기이다. 환영 형성의 조건을 보
편적인 인식영역으로 끌어들여 사유했다는 점에서, 환술에 대한 가
장 진전된 접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박지원 역시 眞과
幻(假)을 기준으로 眞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
난 것은 아니었다. 「환희기서」의 논의들이 이점을 뒷받침한다. 이런
박지원의 사고에 일정한 충격을 준 것이 趙光連의 환술논의였다고
볼 수 있다. 조광련은 현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幻과 다름없음
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환희기후지」에 이를 수용함으
로써, 환술논의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우연한
만남이 문화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 높은 환술논의를
낳은 것이다. 그 가치는 무엇보다도 환술의 문제를 인식론ㆍ존재론
적 명제로 환치시켜 논의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박지원과 이런 수준 높은 환술논의를 나눈 조광련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또 조광련과의 만남 이후 박지원의 환술인식은 어떤 방
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51

 


향으로 변화하였는가? 나아가 이후 조선사회의 환술논의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박지원의 「환희기」를 읽으며 떠오르는 자연스런 의
문이다. 아쉽게도 이 문제들에 대해 필자는 아직 분명한 해답을 찾
지 못하고 있다. 조광련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가 이 방면에 상당
한 지식을 축적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되는 정보가 발견되기는 했지
만, 조광련의 환술논의를 낳은 구체적 배경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
히 알 수 없다.54) 그런 측면에서 이 논문은 미완의 글이다. 본고의
미진함은 후속 연구를 통해 채울 것을 약속드린다. ◆

 

54) 조광련에 관한 정보는 ?淸史稿?, ?淸史列傳?, 청대 각종 필기자료 및 인명사
전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건륭제에게 희곡
의 내용을 해설한 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내용에 그의 직위가
홍려시 소경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박지원을 만났을 때와 멀지 않
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그가 황제에게 희곡 내용을 설명
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만큼 연희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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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민족문화연구 제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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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에 나타난 幻術認識의 변화와 박지원의 「幻戱記」 255
【Abstract】
The Transition of Concepts on Illusion in Yeonhaengrok and
Park Ji-won's "Hwanheegi"
55)Lim, Jun-chul*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significance of Park Ji-won's
"Hwanhuigi" within the traditional accounts of illusions and magic
tricks that appear in Yeonhaengrok, literally, Beijing travelogues.
Park Ji-won's "Hwanhuigi" is considered as the best among its
kind.
Chosun society had a negative conception of illusions in general.
This trend translated to intellectual's perception of illusions as well.
In sixteenth century, Heo Bong expressed the feeling of shame after
watching a magic show, as if he had violated the principles of Fu
Yi(傅奕) who was strongly against Buddhism. This can be said to
have derived from the social conventions that identified magic
illusions with Buddhism which were considered heretical in
Chosun. In other words, illusions were considered as the product
of unjustifiable tricks by heretics. Such negative perception, in
turn, hindered people from reaching a concrete understanding of
illusions, thus, making people treat them as a mere abstract object.
Hence, most Yeonhaengrok that dealt with illusions focused on the
performer's tricks and usually ended with the sense of mystery and
confusion that they could not understand the techniques with
which the performers deceived the audience.
Such perception underwent some transformations as people had
* Assistant Professor, Chosun University.
256 민족문화연구 제53호
more chances to experience magic tricks and illusions. This does
not mean that the negative perception has been fundamentally
removed, but people started to treat illusions as an object of more
serious thinking and discussion. Gwon Bok-in who sought the
source of illusion-making in terms of the dichotomy between truth
and falsehood is a case in point. However, extreme cases of
reinforcing the social conventions also existed along with this
trend. Gang Jae-eung who merely replaced the equation of
Buddhism and illusion with that of Western Studies and illusion is
a typical example of these cases. He did not pay attention to the
forming principle by which the illusions are created, but dismissed
them altogether as deceptive means of the Western Studies. Within
this context, a peculiar degenerative idea of identifying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with illusions emerged.
Park Ji-won's "Hwanhuigi" was a very unique piece of writing
that raised an entirely different question in this intellectual climate
of Chosun. Instead of questioning the performer as the
conventional writers and intellectuals did, he problematized the
audience who were being cheated. This could be marked as an
epistemological change to the perception of illusions in that Park
thought of illusions and their forming principles in terms of
universal perception. However, this does not mean that he went
beyond the dichotomy between the truth and the falsehood. Zhao
Guanglian's discussion of illusions brought on certain impact to
Park Ji-won's such thinking. Zhao argued that things which
constructed reality are no different from illusions. This chance
encounter gave rise to a high-level discussion of illusions that is
unprecedented in Chosun's cultural history as Park adopted this
idea in his "Epilogue to the Hwanhuigi" Its significance lies in
displacing the question of illusions with the epistemological and
ontological theses.
연행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