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제4대 세종실록] 6. '세종실록' 편찬 경위,세종 시대의 세계 약사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7. 11. 02:32


6. '세종실록' 편찬 경위

 

'세종실록'은 총 163154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명은 '세종장헌대왕실록'이다.

책은 14188월부터 14502월까지 세종 재위 316개월 동안의 각 방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에 따른 편년체와 각 주요 항목에 대한 세부 기록인 지(뜻 지)로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 편찬 작업은 14522'고려사''고려사절요'가 완성된 이후 시작되었다. 편찬

작업의 감수는 김종서, 황보 인, 정인지 등이 맡았고, 허후, 김조, 정창손, 박중림, 이계전,

신석조 등 6명이 재위 기간을 여섯으로 나눠 실질적인 편찬 업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실록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인물 중에 김종서, 황보 인 등이 계유정난으로 피살되자 정인지 혼자서

감수를 책임지게 되었다. 또한 6방의 책임수찬관 가운데 박중림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어 최항이 그 일을 대신 맡기도 했다.

 

'세종실록'은 단종 원년인 1452년 정월에 거의 마무리되었지만, 감수 작업은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어 21개월만에 완성을 보았다. '세종실록'은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처음에는 한

벌만 만들어 춘추관에 두었다가 1466(세조 12) 11월 양성지의 건의로 당시에 이미

편찬되어 있던 '문종실록'과 함께 주자로 인쇄를 시작해 6년 후인 14723부를 더 찍어냈다.

이때 간행된 '세종실록'은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에 봉안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 사고본을 바탕으로 1603년부터 1606년에 걸쳐

'태종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각각 3부를 다시 간행하였다. 이 당시 최종 교정본을 포함하여

전주사고본과 함께 총 5부를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에 보관했다.

 

그 뒤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의 난을 겪으면서 춘추관실록이 소실되고 일부 실록이

파괴되었으나 다시 복구하여 인조 대 이후 실록은 정족산(강화도), 태백산, 적상산(전북 무주),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다. 그 뒤 일제 강점기인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영인본을 만들었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영인본을 보급하였다.

 

'세종실록'1권부터 127권까지는 편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128권에서 163권까지는

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을 하게 된 이유는 세종의 재위 기간이 길고 사료의

양이 방대하여 편년체로는 도저히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지(뜻 지)는 일종의 주제별, 사건별 정리 방식으로 오례(128-135), 악보(136-147),

지리지(148-155), 칠정산(156-163) 등으로 되어 있다.

 

세종 대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 제도, , 악 및 기타 문화 방면에서 획기적인

사업이 이루어진 시기다. 세종 대는 조선 사회가 전체적으로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되어

정착기에 진입한 시기였다. '세종실록'은 이렇게 발전되는 과정을 총체적이고 포괄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세종 시대의 세계 약사

 

세종 시대에 중국의 명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했으며, 유럽은 1419년 종교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신성로마제국에서 후스전쟁(보헤미안전쟁)이 발발한 이래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국가들이 30년전쟁, 백년전쟁, 도시전쟁 등으로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그 전란의

와중에서 프랑스의 잔다르크가 화형되었으며, 독일에서는 1445년에 쿠텐베르크의 인쇄본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