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자들의 여성관25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7. 31. 20:05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자들의 여성관

실학자들의 여성관은 어떠했을까?

새로운 학문 경향으로서의 실학은 조선 후기 지식 풍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실학자들은 여성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여전히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고 여성의 지적 활동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지지했다. 기본적으로 실학자들도 유학자라는 태생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작은 변화가 서서히 일고 있었다.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에 대해 다른 견해를 피력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여성들도 ‘다른’ 생각과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신윤복의 <이부탐춘>.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과부(소복을 입은 여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조선 개국 후 개혁가들은 고려 사회와 다른 새로운 풍속을 만들기 위해 부심했다. 신유학을 신봉한 개혁가들은 풍속이야말로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는 원천적인 에너지라 여겼다. 그래서 삼강(충·효·열)의 확립에 눈을 돌렸다. 이 과정에서 여성 규범도 강화했다. 우주론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남자가 땅이라 할 수 있는 여자에 군림하며, 이 보편성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낮은 존재인 여성의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욕망 가운데 성()은 철저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미 중국 고대로부터 음란한 여성들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논리가 공공연히 설득력을 얻었다. 조선 왕조도 이러한 논리에서 힘을 얻어 ‘정’( : 정조 또는 정절)을 여성의 타고난 본성으로 각인시켜 나갔다.

세종의 명으로 직제학 설순을 비롯한 학자들이 지은『삼강행실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를 위해 여성들이 힘써야 할 행동거지를 책자로 만들어 보급했다. 대표적으로 세종은 1434년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충신 · 효자 · 열녀 330명의 사례를 모아 『삼강행실도』를 펴냈다. 오늘날 헌법에 해당하는 위상을 가진『경국대전』(1485년 시행)에는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해 여성들에게 가르치라는 권장 조항이 들어 있다.

전라북도 정읍시에 위치한 언양 김씨 삼강 정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이와 함께 국가에서는 열녀를 발굴하고 기리기 위해 각종 혜택을 주었다. 열녀의 집이나 그 마을 앞에 붉은 문(정려)을 세워 영예를 드높여 주었다. 또 열녀의 집이나 후손에게 쌀이나 옷감 등 각종 물품으로 포상하거나 무거운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노비이면 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파격적인 조치도 시행했다.

국가의 조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종은 양반 여성이 재가하면 그 아들과 손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법까지 제정했다. 즉, 다시 혼인한 여성의 아들과 손자는 문과 · 무과, 생원진사시 같은 과거시험 응시를 금지하고 관직에도 임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벼슬길을 막은 것이었다. 이제 여성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재혼하지 못하고 수절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열녀, 가장 추앙받는 여성상

이수광의 『지봉유설』

그렇다면 실학자들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이수광(1563~1628)은 서울 낙산 아래에 살면서 『지봉유설』(1634년 출간)을 지었다. 이 책은 총 182항목 3,435개 조목으로 구성되었으며 조목별로 내용의 출처를 달았다. 그래서 이 책은 실학의 학풍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 병자호란 이후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로 불리면서,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인조는 이들을 홍제천에서 목욕시켰다고 한다. <출처: 연합뉴스 제공>

이수광은 이 책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사람보다 뛰어난 점 네 가지를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로 부인의 절개를 꼽았다.「열녀」라는 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나섰다가 물에 빠져 자결한 여성을 소개했다. 이 부인은 뱃사공이 손을 끌어당겨 배에 태우자 손이 더럽혀졌다고 비관해서 죽었다. 이수광은 이 일을 장하다고 칭찬하면서, 전쟁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여성들이 왜적과 명 군사들에게 치욕을 당하는 바람에 정절을 잘 지켜온 풍속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고 탄식했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실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인물이다. ‘성호학파’를 형성할 만큼 후대 학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각종 사회 개혁안을 내놓은 이익은 “여자는 안에 위치해야 올바르고 남자는 밖에 위치해야 올바르다.”고 보았다. 또 “부인은 아침저녁으로 춥고 더움에 따라 가족을 공양하고 제사와 손님을 받드는 일이 있으니, 어느 겨를에 책을 읽겠는가?” 하면서 여성의 책 읽기를 경계했다.

이익은 이수광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아름다운 풍속으로 신분이 미천한 여자도 절개를 지켜 재가하지 않는 일을 소개했다. 또 권씨라는 여성이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신랑이 죽자 그 신랑을 따라 굶어죽은 일에 감동을 받아 국가에 정려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익은 이 글에서 권씨의 결심과 행위가 어질다고 칭찬했다.

충남 예산 추사고택에 있는 화순옹주 홍문.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이자 추사 김정희의 증조 할머니이다. 남편 김한신이 죽자 음식을 끊고 14일 후에 죽었다.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다. <출처: 문화재청 –공공누리>

순암 안정복(1712~1791)도 열녀의 길을 강조한 학자였다. 안정복은 이익의 수제자로 경학과 역사학에 주력했다. 안정복은 여성의 절개나 지조에도 등급의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위급한 상황을 당해 목숨을 버려 정조를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봉양해야 할 시부모가 계시고 보살펴야 할 자녀가 있는데도 남편을 따라 죽은 여성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한 여성으로 높게 평가했다.

변화의 움직임, 자결에 대한 비판

이처럼 여러 실학자들은 여성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두 차례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어느 시점부터 조선의 여성들은 남편이 죽은 뒤에 재혼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열(, 절개)’이 보편화되면서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다른 '열’을 보여 주기 위해 남편을 따라 죽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변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남편을 잃은 여성도 살 권리가 있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1737~1805)은 <열녀 함양 박씨전>이라는 글을 지었다. 이 글에서 박지원은 왜 과부가 된 여성들이 기꺼이 남편을 따라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거나, 아니면 독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는지를 묻는다. 친정 부모가 과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재가하라고 핍박하는 것도 아니요, 자손이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는 것도 아닌데도 왜 그런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여성이 과부가 되면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이 이미 온 나라의 풍속이 되는 바람에 옛날에 칭송 받던 열녀들이 오늘날 도처에 있는 과부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 재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남다른 절개를 보일 길이 없어 목숨을 버리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하면서 안타까워했다. 박지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과부이지만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욕망을 긍정했다. 엽전을 굴리며 외롭고 쓸쓸하던 기나긴 밤을 참아낸 어느 노모의 수절담을 소개한 것이다.

경남 함양군에 위치한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 박씨 정려. 박지원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열녀 함양 박씨전>의 주인공인 밀양 박씨의 정려비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이어서 박지원은 이 열녀전의 주인공 박씨가 함양으로 혼인해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뒤에 약을 먹고 자결한 전말을 소개했다. 박지원은 박씨의 행위를 열녀라고 찬탄하면서도 그 여성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마음을 이렇게 헤아렸다. “생각하면 박씨의 마음이 어찌 이렇지 않았으랴! 나이 젊은 과부가 오래 세상에 남아 있으면 오래토록 친척들이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고, 마을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상이 될 터이니, 속히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다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정치적으로 실세한 남인에 속했으며 학문적으로는 이익의 학맥을 잇는 성호학파에 속했다. 정약용은 <열부론>에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연로한 시부모와 어린 자녀를 위해 “마땅히 그 슬픔을 견디며 그 삶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귀중한 목숨을 의로운 상황이 아닌데도 버린다면 쓸데없는 죽음이라고 주장했다.

김홍집이 주도한 갑오개혁은 대표적으로 과부의 재가를 공식으로 허용했고, 이는 남녀 및 부부의 권리가 같음을 의미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가 되면 이와 유사한 시각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의병장 기우만(1846~1916)은 <효열부 신씨 정려기>, <송씨 효열 정려기> 등에서 이 여성들이 남편 사후에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마음을 접고 남편 대신에 시부모와 자식들을 봉양한 것은 바른 도리에 맞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의 마지막 거유로 불린 김택영(1850~1927)도 <절부에 관한 설>에서 따라 죽는 것은 한순간의 고통이지만 죽지 않는 것은 일생을 마칠 때까지의 고통이라면서, 의리상 죽지 않은 여성이야말로 절부라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송씨라는 여성이 시부모를 섬기기 위해 죽으려는 마음을 접고 효성으로 모신 사례를 소개했다.

정약용이 <열부론>에서 지적했듯이 남편의 죽음은 부인뿐만 아니라 위로 시부모로부터 아래로 자녀까지 온 가족의 불행이었다. 이 불행 속에서 며느리이자 어머니인 여성마저 죽는다면 시부모나 자녀는 더 큰 불행에 직면해야 한다. 가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여성의 존재가 부각되던 시대, 이것이 그 시대에 며느리이자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살아남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변화의 길목에 선 여성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는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만으로는 ‘열’을 보여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여성들이 그 길로 간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열녀의 길을 옹호할 때에 또는 죽음으로써 열을 실천하는 행위가 지나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을 때에 여성들이 먼저 변하고 있었다.

자기록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02년(순조 2) 경상도 안동에서 고을 수령을 지낸 사람의 며느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동으로 시집온 이 여성은 일찍 청상과부가 되어 자녀가 없는 상태였다. 당시 지역 사회에서는 호랑이에 물려갔다고 소문이 났다. 하지만 곧 밝혀진 사실은 그 여성이 가출해서 간 곳을 모르는 상태였다(『노상추일기』1802년 8월 11일). 이 양반집 여성은 수절도 거부하고 남편을 따라 죽지도 않은 채,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이다.

18세기 말 서울에 사는 양반 여성 풍양 조씨(1772~1815)는 남편이 죽은 후 죽지 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혼인한 지 6년 만에 동갑내기 남편이 스무 살의 나이로 병을 앓다 죽었다. 풍양 조씨는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고 하다가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설득으로 살아남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후 어린 시절부터 남편이 사고로 병을 앓다가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자기록(긔록)』으로 남겼다.

이 글은 열녀가 되지 못한 여성의 자기 고백서로서 남편의 죽음 앞에서 열녀가 되지 못한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풍양 조씨는 남편을 따라 죽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시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을 보존하기 위해 양자를 얻어 제사를 맡기고 팔자 사나운 여생이나마 살기로 맘먹었다.

“내 생목숨을 끊어 여러 곳에 불효를 하는 것과 참담한 정경을 생각하니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모진 목숨을 기꺼이 받아들일지언정 다시 양가 부모님에게 참혹한 슬픔을 더하랴 하여 금석같이 굳게 정한 마음을 문득 고쳐 스스로 살기를 정했다.” - 『자기록』

강원도 원주에서 매년 열리는 ‘임윤지당 얼 선양 헌다례’. 임윤지당(1721~1793)은 여성 성리학자로 학문 탐구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 공부하려는 여성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출처: 연합뉴스 제공>

위 사례들처럼 여성들 중에는 가족과 사회의 규범에 순응하지 않고 본인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여성도 있었다. 또 죽고자 하나 죽지 않는 것이 가족의 슬픔을 덜어주고 효를 실천하는 일이라 여겨 살아남은 여성들도 많았다. 이 사례들은 조선 후기 여성의 삶과 선택에 대해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변화를 사회 변화의 단초로 볼 것인지, 찻잔 속의 태풍으로 판단할 것인지는 오늘날 우리의 몫이다.

참고문헌
  • 조성을, 「조선시대 사상에 나타난 여성관:실학의 여성관-이익,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20, 2003
  • 강명관, 「순암 안정복의 여성관」, 『한국실학연구』8, 한국실학학회, 2004
  • 이숙인, 『정절의 역사』, 푸른역사, 2014
  • 풍양조씨 지음, 김경미 역주, 『자기록:여자, 글로 말하다』, 나의 시간, 2014

    [네이버 지식백과] 실학자들의 여성관 - 실학자들의 여성관은 어떠했을까?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