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朴珪壽 1807년(순조 7)~1877년(고종 14)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박규학(朴珪鶴), 초자(初字)는 환경(桓卿), 자는 환경(瓛卿) 또는 정경(鼎卿), 초호(初號)는 환재(桓齋), 호는 환재(瓛齋) 또는 환재거사(瓛齋居士). 서울 출신. 북학파 거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 현령 박종채(朴宗采)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유영(柳詠)의 딸이다.생애 및 활동사항가세가 빈한해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 수학했고, 소년시절에는 진외당숙(陳外堂叔) 이정리(李正履)·이정관(李正觀)과, 외종조부 유화(柳訸) 등에게서 훈도받았다.15세경에는 이미 조종영(趙鍾永) 등과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을 만큼 학문적으로 성장하였다. 20세 무렵 효명세자(孝明世子)와 교유할 때는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그러나 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어머니·아버지의 연이은 사별로 인한 상심으로 20년간 칩거(蟄居)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자와 호의 ‘환(桓)’이라는 글자를 ‘환(瓛)’자로 바꾼 동기도 세자의 죽음에 말미암은 것이었다.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을 통해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다.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김영작(金永爵) 등 당대 일류 학자와의 학문적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문 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1848년(헌종 14)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해 사간원 정언으로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그 해 병조정랑으로 옮겼다가 그 해 다시 용강현령에 부임하였다. 1850년(철종 1) 부안현감, 이듬해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1854년 동부승지가 되고, 그 해 경상좌도 암행어사로서 민정을 시찰하였다. 1858년 다시 곡산부사로서 외직에 보임되었다.1861년 약 6개월간에 걸쳐 연행사절(燕行使節)의 부사(副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856년의 애로호 사건(Arrow號事件)이 일어나 영·프랑스 양군이 베이징[北京]·톈진[天津]을 점령하자 당시 청나라의 함풍제(咸豊帝)는 러허(熱河)에 피난하였다. 이 때 문안 사절로 간 그는 국제정세를 목격할 수 있었고, 심병성(沈秉成) 등 8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의 교유를 통해서도 견문을 넓혔다.귀국하자 곧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62년 2월 진주민란 수습을 위한 안핵사(按覈使)에 임명되어 민란의 진상을 조사해 보고하였다. 이는 국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안핵사로서 맡은 임무를 수행한 후, 그 해 10월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1864년(고종 1) 고종이 즉위하자 특별 가자(加資)되어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는 새로 즉위한 고종을 익종(翼宗)의 뒤로 승계하도록 한 조대비(趙大妃)가 지난 날 익종과 절친했던 박규수를 우대한 때문이다. 이어 사헌부대사헌·홍문관제학·이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곧 이어 지경연사(知經筵事) 겸 공조판서에 전임되었다. 이 무렵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을 때,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대사간을 거쳐 그 해 8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그 해 7월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이 발생하였다. 10월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다.민중이 천주교를 좇는 것은 결국 당국이 이들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처벌보다 선도해야 한다고 주장, 박규수의 관내에서는 천주교 박해로 인한 희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았다. 이 밖에도 여러 선정을 베풀어 1869년 4월까지 만 3년 2개월 동안 평안도관찰사 직에 있었다.1869년 4월 한성판윤에 임명되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 뒤 대제학 재임 중 1872년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을 대동, 두번째 중국에 다녀왔다.제2차 중국사행을 통해 박규수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 개국(開國)·개화(開化)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 후 1873년 5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그 해 12월 우의정에 승진되었다.이 무렵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실현되지 않자 1874년 9월에 사직하였다. 1875년 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국정의 제일선에서 물러나 한거 생활에 들어갔다.이 시기에 박규수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자제들에게 『연암집(燕巖集)』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 그 가운데서 나타나게 되었다.문호 개방을 위해 계속 진력하던 중, 1875년 9월 일본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수교를 강요해 오자 오경석 등과 함께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해 1876년 2월, 드디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그 해 1월 고희(古稀)를 넘겨 기사(耆社)주 01)에 든 뒤 한직(閑職)인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다가 죽었다.박규수의 실학파적 학문 경향은 가문이나 교유했던 인물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박규수의 학풍은 문인 김윤식(金允植)이 지적한 바와 같이,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고고(考古)·의기(儀器)·잡복(雜服) 등의 일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한” 실학파의 학풍이었다.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박규수가 사숙한 선배 중에는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서유구(徐有榘) 등이 있다. ‘실학’으로부터 ‘개화’에로의 박규수의 사상적 전환은 1860년대부터 1870년대에 걸쳐서 대외적 위기에 대응한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1861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서 청나라를 방문, 국제 정세를 목격하였다. 1862년 진주민란의 안핵사로서 현지에 파견되었다. 1866년에는 평안감사로서 대동강에 불법 침입한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격침을 직접 지휘하였다.그로부터 1871년의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양요(洋擾)에 관련되는 청나라에의 자문(咨文) 및 미국측의 힐문(詰問)과 통상 요구에 대한 답장은 대부분 박규수가 기초하였다. 이러한 대외활동이 실학적인 경향으로부터 점차 개화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졌던 것이다.요컨대 박규수의 개화 사상은 실학 사상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위에 외발적 요인이 작용해 촉발된 것으로, 일찍이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이용후생(利用厚生) 바로 그것이었다.1866년의 셔먼호 사건과 그것을 구실로 무력 개국을 시도한 1871년의 신미양요에도 불구하고, 박규수는 미국을 “미국은 지구 상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공평하다고 일컬어지고, 난리의 배제와 분쟁의 해결을 잘하며, 또 6주(洲)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이 없다고 하니, 저쪽에서는 비록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먼저 수교 맺기를 힘써 굳은 맹약을 체결하면 고립되는 우환은 거의 면할 것이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는 당시 유학자들의 세계관과는 비교될 수 없는 진취적인 것이었다.그러나 현직자로서의 박규수는 주화(主和)는 곧 매국이라고 규정짓는 흥선대원군의 집정 하에서 개국론을 공식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었다. 셔먼호 사건에서처럼 무력에 호소하는 무법 행위를 단호히 격퇴한 것이라든지, 신미양요에 관한 미국에의 자문에서 “저쪽이 호의로써 오면 우리도 호의로써 응하고, 저쪽이 예(禮)로써 오면 나도 예로써 접대할 것이니, 곧 인정이 진실로 그런 것이며 나라의 통례이다.”라고 말한 것 등은 국가 시책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공적 입장에서였다.문인 김윤식에 의하면, 여러 자문과 답장에 나타난 박규수의 주장은 “이치에 근거해 자세히 말하고 그 말을 완곡하게 굴려서 국가의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문호를 닫고 수호를 물리치는 등의 일은 선생의 뜻이 아니었고 부득이한 것이었다.”는 것이다.박규수가 개국에의 확신을 깊이하고 공공연히 주장하게 된 시기는, 대체로 1872년 진하사의 정사로서 두번째 중국을 방문, 양무운동을 상세하게 목격하고, 특히 1871년 청나라의 사죄사로서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온 숭후(崇厚)의 형 숭실(崇實)을 만나 서양제국의 사정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던 때부터라고 생각된다.1873년 12월, 우의정에 승진하던 무렵에 고종의 친정(親政)이 선포되었다.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을 대신해 민씨 일족이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대외관계에 있어 초점은 일본이 왕정복고를 통고해 온 서계문제(書契問題)였다.그 서계는 종전의 서계 격식과 달리 조선 국왕에 대한 일본의 ‘황(皇)’·‘칙(勅)’, 조선국에 대한 ‘대일본(大日本)’ 등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수리하기를 거부하였다.이 문제에 대해 박규수는, “직함(職銜)을 가서(加書)한 것은 저네들 자신 그 나라의 정령(政令)이 일신되어 그 인군의 우상(優賞)을 입은 것을 과시한 것뿐이다. 소위 관작(官爵)을 승진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종래의 격식과 다르다고 하여 이를 힐책하며 받지 않는데, 이것이 일개 통역관의 견해라면 괴이할 것이 없겠지만, 하필 조정 스스로가 이를 교계(較計)하려 하는가? 가히 일소에 붙일 일이다.”라고 서계의 문구에 구애되지 말라고 하였다.나아가 저들이 나라의 제도를 변경해 옛날같이 통호(通好)하려는 뜻을 표명하는 한, 대국적 견지에서 서계를 받아들일 것을 대원군에게 역설하였다.1875년 5월 대원군에게 “만약 저들이 포성을 한 번 발(發)하기에 이르면 이후 비록 서계를 받고자 하여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를 욕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왜양일편(倭洋一片)인 상황에서 일본과의 수호를 거부하는 것은 조선의 약점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력 행사의 구실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875년 6월 13일, 서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의 어전회의가 열렸을 때도 저들 일본의 인호(隣好)를 거부하면 반드시 한을 품어 불화를 낳을 단서가 될 것이므로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하였다.그러던 중 그 해 9월 25일 강화도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측의 패배는 박규수가 우려한 바대로 최악의 사태로 발전하였다. 1876년 2월의 강화도 담판은 승자 일본의 무력적 협박 하에 진전되었다. 1876년 2월 26일에 조인된 12개 조항의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는 이렇게 하여 체결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박규수의 개국론은,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바와 같이,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박규수의 의도와는 반대 방향으로 진전되어버렸던 것이다.문인 김윤식은 박규수의 만년을 “나라 사정이 날로 그릇쳐지매 공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라고 적고 있다.정약용·서유구·김매순(金邁淳)·조종영·홍석주(洪奭周)·윤정현(尹定鉉)을 선배로서 사숙하였고, 문우로서 남병철·김영작·김상현(金尙鉉)·신응조(申應朝)·윤종의·신석우(申錫愚) 등과 주로 교유하였다.그리고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김윤식·유길준(兪吉濬) 등은 그 문하에서 배출된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다. 박규수는 북학파와 개화파를 결절(結節)시킨 중심 인물었던 것이다.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환재집(瓛齋集)』·『환재수계(瓛齋繡啓)』가 있다. 편저로는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절록한 환재 선생의 행장 초본 원 행장은 온재공이 찬술한 것이고, 문인 김윤식이 산삭 증보하였다.〔節錄瓛齋先生行狀草 原狀溫齋公所撰 門人金允植刪補〕
공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규수(珪壽), 자는 환경(桓卿), 호는 환재(桓齋)이다. 환규(桓圭)의 환(桓)은 고문(古文)에 옥(玉)과 헌(獻)을 따르므로 중년에 자호(字號)를 환(瓛)으로 바꿔 행세하였다.
박씨의 근원은 신라 시조에서 나왔고, 자손들은 반남(潘南)을 관적으로 삼았다. 고려 말에 판전교사(判典校事) 휘 상충(尙衷)은 도학(道學)이 순수하여 세상에서 반남 선생(潘南先生)으로 칭송되었고,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분이 휘 은(訔)을 낳으니, 우리 태종(太宗)을 보좌하여 태평세상을 이루었고, 관직이 우상(右相)에 이르러 평도(平度)란 시호를 받았다. 5세를 내려와 야천 선생(冶川先生) 휘 소(紹)에 이르러 곧은 도와 바른 학문이 온 세상의 존중을 받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강(文康)이란 시호를 받았다. 손자 휘 동량(東亮)은 임진년에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고, 관직은 참찬(參贊)에 올랐으며 충익(忠翼)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분이 휘 미(瀰)를 낳으니, 선조(宣祖)의 제5녀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고, 문학과 곧은 절개로 세상에서 어진 부마로 일컬어졌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증손 휘 필균(弼均)은 영조 때에 관직이 지돈녕(知敦寧)에 이르렀으며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났고 장간(章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사유(師愈)로 말수가 적고 행실이 독실하며 문장이 풍부하면서 통창하였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지원(趾源)으로 경제와 문장 및 자신을 지키는 큰 방도로 당시에 명성을 떨쳤고, 세상길에 험난함이 많음을 근심하여 이른 나이에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 문장과 사실은 모두 의정공(議政公)이 찬술한 《과정록(過庭錄)》에 실려 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으니, 세상에서 연암 선생(燕巖先生)으로 일컫는다. 부친의 휘는 종채(宗采)로 몸가짐이 신중하며 성실하였고 장고(掌故)에 견문이 넓었으나, 관직은 경산 현령(慶山縣令)에 그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상 3대가 추증을 받은 것은 환재공이 현귀해졌기 때문이다.
비(妣) 유씨(柳氏)는 통덕랑(通德郞) 휘 영(詠)의 딸로 순조 7년 정묘년(1807) 9월 27일에 가회방(嘉會坊)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유씨가 문중에 시집올 때에 온순한 학이 앞길을 인도하였고, 의정공의 꿈에 연암 선생이 옥판(玉版)을 내려 주는 꿈을 꾸고서 얼마 후에 임신하였으므로 어릴 적 이름을 규학(珪鶴)이라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며 영특하였고, 풍채가 엄숙하고 방정하였다. 7세에 《논어》를 읽으면서 분판(粉板)에 글씨를 쓰기를 “효성스런 백성이라야 신하가 될 수 있다.〔孝民可以爲臣〕”라고 하였고, 또 “군자는 공경해야하고 업신여겨선 안 되고, 소인은 업신여길 수 있어도 공경해선 안 된다.〔君子可敬而不可侮, 小人可侮而不可敬.〕”라고 하였다. 의정공이 이것을 보고서 기뻐 웃으며 “법언(法言)이다. 문중자(文中子)도 이만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문리가 깨어 날마다 수천 자를 외었고, 14, 5세 때에는 문장이 크게 진보하였다. 북해(北海) 조 충간공(趙忠簡公) 종영(鍾永)이 다른 좌석에서 공이 지은 시를 보고서, 그 날로 방문하여 온종일 경술(經術)과 사업(事業)을 토론하고는 드디어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 공이 선배 중에 지우(知遇)의 감정을 느낀 것은 북해가 가장 으뜸이라고 하였다.
을유년(1825) 여름, 익종(翼宗 효명세자)이 세자로서 경우궁(景祐宮)을 배종하여 후원(後苑)의 문을 걸어 나와 공의 집에 왕림하였다. 공의 집안은 그때 계산(桂山)의 언덕에 있었으니, 바로 연암(燕巖)의 구택(舊宅)이다. 사실(私室)에 세자의 행차가 친히 이른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었으므로, 공은 창졸간에 인견(引見)을 받았음에도 단정하고 엄숙한 태도로 응대가 자세하고 분명하였다. 세자가 글을 읽고 글씨를 써 보라고 명하고서 크게 칭찬을 하였고, 밤이 깊어서야 궁으로 돌아갔다.
정해년(1827) 2월, 세자가 대리청정하게 되어 공은 일차유생(日次儒生)으로서 《주역(周易)》을 진강하고 물러나왔다. 세자가 근신에게 말하기를 “박모(朴某)의 문학에 대해 사람들은 무어라 하느냐.”라고 하였으니, 이에 온 세상이 공이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을 알았다.
무자년(1828) 봄, 《연암집(燕巖集)》을 올리라는 명이 내리고, 또 “너도 필시 저술이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모두 올리라.”는 하교가 있었다. 이에 평소 저술한 《상고도설(尙古圖說)》 80부(部) 480조목을 진상하였으니, 이 책의 범례는 예로부터의 명석(名碩)ㆍ충량(忠良)ㆍ의열(義烈)의 사적을 뽑아서 안설(案說)을 덧붙인 것으로, 국가의 치란(治亂)의 기미, 민생의 안위(安危)의 요체, 군자와 소인이 진퇴(進退)하고 소장(消長)하는 즈음에 이르기까지 생각을 다해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세자가 필묵(筆墨)과 부채를 하사하면서 “저술한 글을 자세히 열람하니, 문장저술이 풍부함을 볼 수 있다. 너는 모범이 될 만한 조종조의 성덕(盛德)에 대해 찬술하여 올려라.”라고 하교하였다. 이에 열성조의 역사사실을 채록하여 《봉소여향(鳳韶餘響)》 1백 수를 올렸다. 이때에 명성이 자자하여 사람들이 모두 조석 간에 과거에 급제하리라 여겼으나, 공이 오래도록 과거에 낙방한 것은 그의 재주를 숙련시켜 등용하고자 한 까닭이리라.
경인년(1830) 5월에 세자가 죽자 공은 여러 날 동안 슬퍼하면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였다. 이윽고 생각을 바꿔 “이 일은 내가 종신토록 해야 할 일인데, 어찌 아녀자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환(桓)이란 자(字)를 환(瓛)으로 고쳤으니, 이는 ‘스스로 의리에 편안하여 사람마다 선왕께 의로운 뜻을 바친다〔自靖, 人自獻于先王.〕’는 의미를 붙인 것이다. 이로부터 과거를 그만두고 경전과 역사서를 읽는 일로 즐거움을 삼았고, 집이 가난하여 책을 빌려 한번 읽으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오랜 뒤에 혹자가 벼슬에 나가기를 권하자 공은 “냉철한 눈으로 시무를 살피고, 겸허한 마음으로 고서를 읽네. 추위에 피는 매화나무를 가장 사랑하노니, 맑은 향기 본래 넉넉하기 때문이네.〔冷眼看時務, 虛心讀古書. 最愛寒梅樹, 淸芬自有餘.〕”라는 시를 지어 답하였다.
헌종(憲宗) 때에 다시 익종 때의 정치를 닦아 현신(賢臣)을 우대하고 외척을 억눌러 퇴폐한 기강을 만회할 조짐이 있어 14년 무신년(1848)에 증광시를 설치하자, 이에 공이 대책(對策)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나가니, 당시 공의 나이는 이미 40이 넘었다.
헌종이 공이 일찍부터 익종의 은혜를 입었음을 알고 장차 발탁해 쓰려고 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헌종이 승하하는 애통함을 만나자, 공은 몇 달 동안이나 슬픔에 잠겨 몸이 축나도록 울부짖었다.
경술년(1850)에 부안 현감(扶安縣監)과 자리를 바꿔 제수되었다.
철종(哲宗) 원년 신해년(1851)에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6월에 헌종을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할 때에, 공은 진종(眞宗)을 마땅히 조천해야 한다는 논의를 올렸는데, 대신들이 이를 반대하지 못하였다.
- 글은 문집에 실려 있다. -
8월에 호남(湖南)에 가서 선비를 선발하고서 조정에 돌아와 삼사(三司)를 두루 거쳤고, 강연(講筵)과 소대(召對)에서 임금을 보좌함이 매우 많았다.
갑인년(1854) 영남 좌도에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관리를 탄핵하는 데 피하는 바가 없었고, 편의(便宜)를 도모한 수십 가지 일을 조목별로 아뢰었으며, 복명(復命)해서는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무오년(1858)에 곡산 부사(谷山府使)에 임명되었다.
경신년(1860) 11월에 청 황제(淸皇帝)가 열하(熱河)에서 난리를 피하자, 조정에서 장차 위문사를 파견하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모면하려 하여 공이 열하 부사(熱河副使)에 임명되었다.
신유년(1861) 봄에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임술년(1862) 봄에 영남 지방에 소요가 크게 일어나 지방관을 몰아내고 아전을 죽이며 관사를 불태웠는데, 가는 곳마다 어디나 그러했음에도 진주(晉州)가 유독 심했다.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공이 평소 명망이 높다하여 영남 안핵사(嶺南按覈使)에 임명하였다. 공은 이들은 모두 양민(良民)인데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떼로 일어나 소요를 일으킨 자들이니, 먼저 민심을 위무하지 않는다면 옥사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격문을 내어 영남의 온 고을을 효유하여, 먼저 포리(逋吏)들이 여러 해 동안 농간을 부린 정황을 조사하여 참빗으로 서캐를 빗고 키로 쭉정이를 날리듯 다스리니 민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옥사를 심리하여 주동자와 가담자를 분별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온 고을이 흡족하게 여겼고, 여러 고을에서 선동하던 자들도 지레 겁을 먹고 수그러들었다. 대신들이 옥사를 안찰하면서 시일을 지체하였다고 상주하자 삭탈관작의 처분이 내렸다가 10월에 서용되어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금상(今上 고종) - 덕수궁(德壽宮) - 원년 갑자년(1864) 정월에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박모(朴某)는 포의(布衣) 때부터 익종의 특별한 지우를 입었으되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이런 사람에게 성의를 보여 주는 조치가 없을 수 없다.”라고 하고서 공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내리니, 당시 동조(東朝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므로 이런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마침내 차례대로 동의금ㆍ경연ㆍ춘추관사, 병조 참판, 의정부 유사당상(有司堂上),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ㆍ예문관 제학, 사헌부 대사헌, 이조 참판, 승문원ㆍ전설사(典設司) 제거(提擧)에 제수되었다.
2월에 자헌(資憲)의 품계에 올라 한성부 판윤, 선혜청ㆍ내의원 제거를 거쳐 공조ㆍ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2년 사이에 현달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겉으로는 헛된 명성이 높았으나 조정의 사무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못했으니, 이는 공이 바르고 정직하여 당시 권력자의 뜻을 구차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인년(1866) 2월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7월에 서양 선박이 대동강에 들어와 몹시 소요를 일으키다가 암초에 좌초하여 배가 불에 타는 사건이 있었다. 미국 수군 총병관(摠兵官)이 문서를 보내 힐문하니, 공은 청국(淸國)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 그 당시의 사정을 분명히 밝혔다.
- 글은 문집에 실려 있다. -
공은 서해 연안의 해안방비가 허술함을 들어 동진 첨사(東津僉使)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과 또 후창(厚昌)과 자성(慈城) 두 군(郡)을 설치하여 유민(流民)을 처리해야 함을 건의하였다.
기사년(1869)에 관상감 제거에서 해임되어 형조 판서, 홍문관ㆍ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었다.
임신년(1872) 5월에 청 황제가 대혼(大婚 동치제의 혼인)을 거행하자, 공이 진하 정사(進賀正使)에 뽑혔다. 공은 두 번째로 연경에 사신을 가서 당시의 명사들과 교제하였으니, 심병성(沈秉成), 풍지기(馮志沂), 황운곡(黃雲鵠), 왕헌(王軒), 동문환(董文煥), 왕증(王拯), 설춘려(薛春黎), 정공수(程恭壽), 만청려(萬靑藜), 공헌각(孔憲殼), 오대징(吳大澂) 등 백여 인인데, 모두 동남 지방의 아름다운 인재들로서 오랜 벗처럼 어울리며 문주(文酒)의 고상한 모임을 열어 헛되이 보낸 날이 없었다. 기미(氣味)가 서로 어울리고 도의(道誼)로 서로 권면하였으니, 심중복(沈仲復)- 심병성의 자(字)이다. -은 늘 “환경(瓛卿)의 말은 문문산(文文山)과 사첩산(謝疊山)의 입에서 나온 것과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일으킨다.”라고 칭송하였으니, 공이 그들의 추앙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조선으로 돌아온 뒤로 옛날의 성대한 교유에 대해 말할 때마다 감탄하며 상상해 마지않았으니, 조문자(趙文子)가 ‘내게 다시 이런 즐거움이 없으리라.〔吾不復此樂.〕’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계유년(1873) 12월에 규장각 제학에 제수되었다가 우의정에 올랐다.
갑술년(1874) 9월에 상소하여 스스로 물러나고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을해년(1875) 정월에 일본국 사신이 동래(東萊)에 와서 서계(書契)를 받아주기를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무진년(1868)에 일본 황실이 대마수(對馬守)를 복권시키면서 그 나라의 국서(國書)를 우리나라 예조(禮曹)에 보냈는데, 조정에서는 국서가 옛 규식과 다르다고 거절하였다. 7년이나 지나 이때에 또 받아주지 않으니 일본사람이 매우 유감을 품고서 선박을 보내 연달아 내항(內港)까지 들어오니, 사태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었다. 공이 비록 산위(散位 품계만 있고 맡은 일이 없는 지위)에 있었으나 국가의 위태로움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닦지 않아선 안 되고, 서계를 받지 않아선 안 됨을 항변하여 여러 차례 주무부서를 일깨웠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오히려 막연히 귀담아 듣지 않고서 또 다시 1년이나 끌었고, 마침내 핍박을 받은 후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외교문서를 작성할 즈음에 사리에 맞게 대처함에 실수가 많아 공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당시는 위아래가 꽉 막혀 좋은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정치는 문란하고 민심은 흩어져 시사(時事)가 날로 잘못되니, 공은 늘 천장을 올려다보며 “윤리와 기강이 끊어져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니, 애달픈 백성들이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라고 장탄식하곤 하다가 마침내 울분과 근심이 질병이 되고 말았다.
병자년(1876) 정월에 나이 70으로 기사(耆社)에 들어갔고, 8월에 수원 유수(水原留守)에 제수되었다. 이해 12월 27일에 북부(北部)의 재동(齋洞)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예에 따라 조부(弔賻)가 내렸고, 정축년(1877) 3월 11일에 양주(楊州)의 노원(蘆原)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문익(文翼)이란 시호가 내리니, 부지런히 공부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생각이 깊고 원대함이 익(翼)이다.〔勤學好問曰文, 思慮深遠曰翼.〕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 군수 준수(俊秀)의 딸로 공보다 1년 늦은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 현덕(賢德)으로 군자의 짝이 되어 서로 공경하며 해로하였고,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기르지 못하여 아우 선수(瑄壽)의 아들 제정(齊正)을 아들로 삼았으나 나이 열아홉에 요절하였으므로 가까운 친족 희양(羲陽)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공은 총명하고 준수한 자질을 타고나 체용(體用)을 겸비한 학문을 닦았고, 몸을 지킴에 곧고 바름으로 하였고, 학문을 닦음에 경제와 계책을 우선하였으니, 옛사람이 칭한바 ‘성인의 덕성이고 경국의 재주’이다.
이른 나이에 세자에게 인정을 받는 은총을 받으니, 공은 이 때문에 더욱 몸을 소중히 여겨 마치 옥을 잡고 물그릇을 받든 듯이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임금이 알아주신 뜻이 천지에 고하고 귀신을 감읍시킬 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의 중년 이후의 출처(出處)는 환히 알 수 있으니, 하나는 무신년(1848) 사이에 헌종이 익종 때의 정치를 닦고자 했을 때 출사한 것이고, 하나는 갑자년(1864) 초년에 동조(東朝 대왕대비)께서 전교하여 지난날의 고사를 진술하며 벼슬을 권했을 때 출사한 것이다. 이는 특별한 지우에 감격하여 선왕을 추모하여 폐하께 보답하고자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공의 평생의 뜻과 사업이다.
공이 초년에 임금의 은총을 받은 것과 임금이 승하하는 애통함을 만난 것은 마치 하서(河西)가 인묘(仁廟)에 대한 것과 같았으나, 중년 이후로 임금의 인정을 받음은 하서보다 나아 마치 큰일을 할 수 있을 듯하였다. 그러나 뜻만 지니고 펴지 못한 채 결국 한을 품고 죽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은 나이 22세에 삼례(三禮)를 연구하기를 《의례(儀禮)》로부터 시작하여 “옛사람들이 의례를 읽기 어렵다고 한 까닭은 경문이 간고(簡古)하여 서로 대조해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의례의 주석 가운데 호문(互文)이 되어 서로 생략된 구절을 대상으로 의주(儀註)를 경문 아래에 붙이고, 안설(案說)을 덧붙여서 《심정의례수해(審定儀禮修解)》라고 이름 붙였다. 사관(士冠), 사혼(士昏), 향음(鄕飮), 향사(鄕射)의 예를 모두 면체(綿蕝)로써 익히고, 범례(凡例)에 드러냈다.
옛날에 선비의 성복(盛服 격식을 갖춰 입은 옷)에 세 가지가 있으니, 현단(玄端), 피변(皮弁), 작변(爵弁)이 그것이다. 면복(冕服)을 제외하면 오직 현단(玄端)과 심의(深衣)의 쓰임이 가장 넓으므로 〈거가잡복고(居家雜服考)〉와 〈심의광의(深衣廣義)〉를 저술하였다.
제작한 의기(儀器)를 평혼의(平渾儀), 지세의(地勢儀)라고 하는데 그 설명은 모두 문집에 실려 있다.
연재(淵齋) 윤공(尹公)이 《벽위신편(闢衛新編)》을 저술하자 공이 13단락의 제평(題評)을 지으니, 연경의 여러 문사들이 다투어 감상하였고, 평론하기를 “주공ㆍ공자께서 해와 달처럼 아래로 간사함을 귀신처럼 비추시듯 하니, 소대(昭代)의 《경세문편(經世文編)》도 이런 높고 깊은 계책을 싣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기유년(1849)에 조천하자는 논의는 더욱 여러 인사들의 감탄을 자아냈으니 “부묘(祔廟)에 대한 한 가지 논의는 명교(名敎)에 공이 있다. 대례(大禮)를 밝게 논쟁하는 사람의 견해가 여기에 미치지 못함이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공이 비록 이단을 배척함에 엄정하였으나 늘 인서(仁恕)의 마음을 지녔다. 평양에 관찰사로 있을 때에 조정에서는 한창 서교(西敎)를 배척하여 각지의 교인들을 남김없이 수색하여 죽이라는 명이 내렸다. 평양은 평소 서교를 신봉하는 백성이 많았는데, 공은 “백성들이 교화의 은택을 입지 못하여 정도를 등지고 사교로 달려간 것이다. 만약 선도로써 인도할 수 있다면 모두 우리의 양민이니 많이 죽여서 어쩌겠단 말인가.”라고 하고서 마침내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공은 평소 깨끗한 지조를 지녀 염치를 중시하고 명절(名節)을 숭상하였고, 사양하고 받는 일에 터럭만큼도 구차하지 않았으니, 높은 관직에 올랐을 때에도 처자들은 늘 주린 기색이 있었다. 공이 평안도 관찰사를 맡았을 때, 집안사람이 공의 집안이 가난함을 염려하여 훗날의 계책을 도모하려고 몰래 봉급의 나머지로 한 구역의 전답 수십 결을 사려고 도모한 일이 있었다. 공이 조정에서 돌아오니 어떤 시골 사람이 찾아와 “소생이 근래 장토(庄土) 하나를 샀는데, 듣자니 공의 집안에서 먼저 샀다고 하더이다. 사실입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그런 일 없소”라고 하고서 집안사람을 불러 물어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공은 전답의 문권을 가져오라 명하여 그 시골사람에게 보여주니, 그 사람이 놀라며 “과연 이것이 진짜 문서이고, 소생이 산 것은 가짜 문서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그렇다면 가짜 문서는 쓸모가 없으니, 이 진짜 문서를 가지고 가시오.”라고 하였으나, 그 사람은 굳이 사양하며 감히 받지 못하였다. 집안사람이 “저 사람은 스스로 속임을 당한 것이니 속여 판 사람에게 따지면 되는데, 어찌하여 먼저 산 진짜 문서를 내준단 말입니까?”라고 하자, 공이 노하여 꾸짖으며 “조정의 높은 관원이 어찌 힘없는 백성과 이익을 다툰단 말이오.”라고 하고서, 이윽고 탄식하기를 “사대부가 명절(名節)을 훼손하는 것은 모두 이런 무리들의 작은 충성심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 시골사람은 거듭 감사해하면서 떠나갔으니, 공의 청백(淸白)한 처사가 대개 이와 같았다.
공의 중제(仲弟)는 휘가 주수(珠壽), 자는 조경(藻卿)으로 지혜가 일찌감치 깨어 식견이 또래에서 뛰어났는데, 불행히 일찍 죽어 공은 일생동안 애통해 하였다.
공은 보통의 체격으로 용모가 엄숙하고 온화하였으며 목소리가 맑고 편안하였다. 문장을 지음에 오로지 말이 통하고 논리가 뛰어난 것을 위주로 하고 기승전결(起承轉結)이나 조응(照應)하는 번거로움은 일삼지 않아, 옛것을 법도로 삼아 변화할 줄 알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도 전아하였다. 글씨는 명가의 반열에 들었고, 그림도 일품(逸品)에 들었으니, 공의 서화 한 조각이라도 얻으면 사람들은 모두 보배로 여겼다.
공의 학술은 가정에 연원을 두었고, 또 사우(師友)들이 절차탁마해준 도움도 매우 많았다. 외척으로는 순계(醇溪) 이공(李公), 지산(芝山) 유공(柳公), 염재(念齋) 이공(李公)이다. 선배로는 북해(北海) 조공(趙公), 연천(淵泉) 홍공(洪公), 항해(沆瀣) 홍공(洪公), 대산(臺山) 김공(金公), 다산(茶山) 정공(丁公), 풍석(楓石) 서공(徐公), 침계(梣溪) 윤공(尹公)이다. 지우(知友)로는 연재(淵齋) 윤공(尹公), 계전(桂田) 신공(申公), 규재(圭齋) 남공(南公), 소정(邵亭) 김공(金公), 해장(海莊) 신공(申公), 위사(韋史) 신공(申公), 경대(經臺) 김공(金公), 규정(圭庭) 서공(徐公), 산북(汕北) 신공(申公)이다. 모두가 경술과 문장이 당대의 으뜸이었으니, 한 시대의 성대함을 다 망라했다고 하겠다.
節錄瓛齋先生行狀草 原狀溫齋公所撰。門人金允植刪補。 [朴瑄壽]
公姓朴氏諱珪壽字桓卿號桓齋。桓圭之桓。古文从玉从獻。
故中歲字號以瓛行。朴氏源出羅祖。子孫籍潘南。高麗末判典校事諱尙衷。以道學純粹。世稱潘南先生謚文正。生諱訔。佐我太宗致太平。官右相謚平度。五世至冶川先生諱紹。直道正學。爲一世推重。贈領相謚文康。孫諱東亮。壬辰扈駕功封錦溪君。官參贊謚忠翼。生諱瀰。尙宣祖第五女貞安翁主封錦陽君。文學直節。世稱賢駙馬謚文貞。曾孫諱弼均。英宗時官知敦寧。以直諫名謚章簡。寔公之高王考也。曾祖諱師愈。寡言篤行。文詞贍暢。贈吏曹判書。祖諱趾源。經濟文章。行己大方。炳曜當世。憂世路多艱。蚤年廢擧。棲遲蔭途。其文篇事實。俱載議政公所撰過庭錄。贈左贊成謚
文度。世稱燕巖先生。考諱宗采。敬愼篤實。掌故多聞。官止慶山縣令贈領議政。以上三代貤贈。以公貴也。妣柳氏通德郞諱詠之女。以純祖七年丁卯九月二十七日。生公于嘉會坊之第。柳氏入門時。有馴鶴前導。議政公夢燕巖先生授以玉版。旣而有娠。命小字曰珪鶴。幼而端方聦穎。風彩峻整。七歲讀論語。書鉛槧曰孝民可以爲臣。又曰君子可敬而不可侮。小人可侮而不可敬。議政公見之嬉笑曰法言。文中子不如也。自是文理透悟。日誦千言。十四五文詞大進。北海文簡公鍾永見公詩於他座。卽日來訪。盡日論經術事業。遂訂忘年之交。公於先輩知遇之感。以北海爲最云。乙酉夏。
翼宗以世子。陪從景祐宮。步出後苑門。來臨公家。公家時在桂山之阿。卽燕巖舊宅也。私室之鶴駕親臨。曠古罕有。公倉猝被引見。端拱肅敬。應對詳明。命讀書寫字。大加奬詡。夜漏報三皷。乃旋玉趾。丁亥二月。世子代聽庶政。公以日次儒生。進講周易退。春宮語近臣曰朴某文學。人謂何如。於是擧世皆知有殊眷。戊午春。命進燕巖集。且敎曰爾必有著述。其畢進無隱。乃進所著尙古圖說八十部四百有八十目。其書義例。採取古來名碩忠良義烈之事。附以案說。至於國家治亂之幾。民生安危之要。君子小人進退消長之際。未嘗不三致意焉。春宮賜筆墨摺扇。敎曰熟覽所著。
可見富於文述。爾其撰述祖宗盛德可爲模範者以進也。於是採列朝故實。進鳳韶餘響一百首。是時聲名籍甚。人皆謂朝夕登第。而蹉跎逾時。盖欲老其才而用之也。庚寅五月。鶴駕上賓。公哀毁屢日。如不欲生。旣而幡然曰此吾所終身者也。惡用兒女子任情爲哉。遂改字以桓爲瓛。盖寓自靖人自獻于先王之意也。自是廢擧。以書史自娛。家貧借書一讀。終身不忘。久後或勸圖進取。公以詩答之曰冷眼看時務。虛心讀古書。最愛寒梅樹。淸芬自有餘。憲宗時復修翼廟之政。右賢左戚。有挽回頹綱之漸。十四年戊申。設增廣試。於是公對策中第。拜司諫院正言,兵曹正郞。出爲龍岡縣
令。時公年已逾四十矣。憲宗知公早被先朝眷注。將加擢用。未幾又遭弓劒之慟。公哀號喘瘠。沈綿數朔。庚戌換授扶安縣監。哲宗元年辛亥。除司憲府持平弘文舘修撰。六月憲宗祔太廟。公獻眞宗當祧議。大臣不能絀。文載集中八月試士湖南。還朝周流三司。及講筵召對。啓沃弘多。甲寅按廉嶺左。擧劾無所避。條上便宜數十事。復命特授同副承旨。戊午任谷山府使。庚申十一月。淸皇帝避亂熱河。朝廷將派使慰問而人皆圖免。充公爲熱河副使。辛酉春。至燕京而還。拜成均舘大司成。壬戌春嶺南民擾大起。逐長吏殺掾史燒廬舍。所在皆然。而晉州尤甚。廷議以公聞望素著。充嶺
南按覈使。公以爲此皆良民也。不堪長吏剝割之苦。而羣起爲擾者也。不先慰民心。不可按獄。乃發檄曉諭一道。先査逋吏之積年幻弄者。櫛搔而簸核之。民情大悅。遂按獄而分別首從以聞。一道洽然。列郡扇動者望風而息。大臣以按獄稽緩奏。施刊削之典。十月叙用。除吏曹參議。今上 德壽宮 元年甲子正月。大王大妃敎曰朴某受翼廟特達之遇於布衣之時。而未及試用。此時此人。不可無示意之擧。其授嘉善階。時東朝垂簾同聽政。故有是命也。遂歷拜同義禁,經筵,春秋館事。兵曹參判,政府有司堂上。承政院都承旨。提學弘文藝文舘。司憲府大司憲。吏曹參判。提擧承文院典設司。
二月陞資憲階。漢城判尹。提擧宣惠廳,內醫院。拜工禮曹判書。二年之內。歷敭華顯。雖外崇虛名。而廟務一無與聞。葢以公正直不肯苟從時意故也。丙寅二月。出爲平安道觀察使。七月洋船入大同江滋擾。擱淺被燒。美國水師摠兵官移文詰問。公移咨于淸國禮部。辨明其時事狀。文載集中 公以西陲沿海障戍虛踈。議寘東津僉使。又置厚昌,慈城二郡。以處流民。己巳解任提擧觀象監。拜刑曹判書,弘文舘藝文舘大提學。壬申五月。淸皇帝行大婚。公充進賀正使。公再使燕京。所與交皆一時名士。如沈秉成,馮志沂,黃雲鵠,王軒,董文煥,王拯,嶭春黎,程恭壽,萬靑藜,孔憲殼,吳大澂等百餘人。盡東南之
美。傾葢如舊。文酒雅會。殆無虛日。氣味相投。道誼相勖。沈仲復 秉成字 常稱瓛卿之言。如出文文山,謝疊山口中。使人不覺起敬。其見推服如此。公東還以後。語到昔日交遊之盛。輒嘆想不已。有趙文子吾不復此樂之意也。癸酉十二月。拜奎章閣提學。進拜右議政。甲戌九月疏免爲判中樞。乙亥正月。日本國使至東萊。請納書契。先是戊辰歲。日本皇室復權對馬守。以其國書通于我禮曹。朝廷以書非舊式却之。爲七年之久。至是又不受。日人大爲挾憾。使船絡繹深入內港。事將不測。公雖在散位。不忍見國家之危。抗論隣好不可不修。書契不可不受。屢警主務。時議猶漠然不以爲意。又拖至一年
之久。竟乃迫而後受之。然修辭之際。多失機宜。公亦無如之何。時上下否隔。良謨不入。政亂民散。時事日非。公常仰屋長呼曰倫紀絶矣。國將隨亡。哀我生民。何辜于天。遂憂憤成疾。至丙子正月。以年七十入耆社。八月授水原留守。是年十二月二十七日。考終于北部齋洞第。訃聞吊賻如例。丁丑三月十一日。葬于楊州之蘆原坐艮之原。贈謚文翼。勤學好問曰文。思慮深遠曰翼。配貞敬夫人延安李氏。郡守俊秀之女。生後公一年而月日正同。賢德作對。相敬偕老。生一子不育。以弟瑄壽子齊正爲子。年十九夭。取近族羲陽以繼之。公禀聦明俊乂之姿。致體用兼該之學。立身以直方正大。居業以
經濟謨猷。古所稱成人之德經國之才也。蚤蒙儲君奬許之寵。公之所以益自貴重其身。如執玉奉盈之不敢怠忽。以實其知照之志。可以告天地而泣鬼神矣。故公之中年以後出處皎然可知。其一戊申年間。憲廟欲修先朝時政則出。其一甲子初元。東朝傳敎稱述先故以褒進之則出。盖感激殊遇。欲追先帝報陛下。卽公之平生志事也。公之初年巷遇與夫攀慕梧雲之痛。如河西之於仁廟。其中年以後。際遭勝於河西。若將有爲焉。而有志未就。竟齎恨而沒。豈非命耶。公年二十二治三禮。始自儀禮。以爲昔人稱儀禮難讀者。以經文簡古。參互以見也。乃爲儀註凡互文相略者。
以儀註係之經文下而附以案說。名曰審定儀禮修解。士冠士昏鄕飮鄕射。皆以綿蕝習之。著爲凡例。古者士之盛服有三。玄端皮弁爵弁是也。除冕服之外。惟玄端深衣其用最廣。故著有居家雜服考深衣廣義。所製儀器曰平渾儀曰地勢儀。其說俱載集中。淵齋尹公著闢衛新編。公有題評十三段。燕中諸文士爭相傳翫。評之曰周孔日月。下燭神姦。昭代經世文編。無此高深籌畫。己酉祧議。尤爲諸公所稱歎曰。祔廟一議。有功名敎。惜有明爭大禮諸人。見不到此也。公雖嚴於闢異。常存仁恕之心。其在平壤時。朝廷方大斥西敎。所在敎人。令搜殺無遺。平壤素多奉敎之民。公曰民不蒙敎化之澤。
背正趨邪。苟能導之以善。皆吾良民。多殺何爲。遂不戮一人。公素有氷蘗之操。厲廉耻崇名節。辭受取與。一毫不苟。雖至大官。妻子恒有飢色。其任關西觀察時。家人念公家貧。爲後日地。潛謀以俸餘買田一區數十結地。及還朝。有鄕人來謁公曰生近買一庄土。聞爲公家所先買云。果然否。公曰無是也。招問家人。對曰有之。命持田券來。出示其人。其人驚曰果是實券。生之所買。卽僞券也。公曰然則僞券無用。持此實券去。其人固辭不敢受。家人曰彼自見欺。當徵於盜賣。何爲出給先買之實券乎。公怒叱曰朝廷大官。豈可與細民爭利乎。仍歎曰士大夫壞損名節。皆由於此輩之小忠也。其人僕僕
泣謝而去。其淸白類如此。公之仲弟諱珠壽字藻卿。明達夙成。識悟邁倫。不幸蚤沒。公之所終身痛恨者也。公體材中身。容儀莊和。聲音淸穩。爲文章專主辭達理勝。而不事起承轉結照應之陋。法古而知變。刱新而能典。書造名家。畵入逸品。得其零箋片墨。皆爲人所寶。其學術淵源乎家庭。又得師友麗澤之益爲多。外戚則醇溪李公,芝山柳公,念齋李公也。先輩則北海趙公,淵泉洪公,沆瀣洪公,臺山金公,茶山丁公,楓石徐公,梣溪尹公也。知友則淵齋尹公,桂田申公,圭齋南公,邵亭金公,海莊申公,韋史申公,經臺金公,圭庭徐公,汕北申公也。皆以經術文章冠冕當世。極一時之盛云。
[주-D001] 北海 : 北海下漏趙字[주-D002] 文 : 忠[주-D003] 午 : 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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