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환재 박규수의 한시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21. 6. 18. 23:06

박규수(朴珪壽,1807,순조71877,고종14)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자는 환경(桓卿)이고 호는 환재(瓛齋)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다. 젊어서 효명세자(孝明世子)와 교유했으나 세자의 급서(急逝)와 부모의 연이은 사별로 칩거하여 <연암집(燕巖集)>을 읽고 실학적 학풍을 마련했다. 1848(헌종14)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병조정랑, 용강현령, 1850(철종1) 부안현감, 이듬해 장령, 교리, 1854년 동부승지, 경상좌도 암행어사, 1858년 곡산부사, 1861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중국에 가서 국제정세를 보고 왔다. 1862년 진주민란 안핵사, 이듬해 이조참의, 1864(고종1) 도승지, 대사헌, 제학, 이조참판, 1865년 한성판윤, 공조판서로 경복궁 영건도감 제조(提調)를 겸하였다. 예조판서, 대사간, 1866년 평안감사로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키고, 천주교 박해에 대해 당국의 교화를 주장하였다. 1869년 한성판윤, 형조판서, 대제학, 1872년 진하사로 중국에 가서 개화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873년 우의정, 1875년 판중추부사, 운양호(雲揚號)사건이 일어나자,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수원유수로 있다가 죽었다.

 

 석경루 (石瓊樓)

 

복건을 쓰고 당나귀 타고서 성곽을 나서 산속 누각에 오르네.

산속 누각이 산골 시냇물에 다다라 있어 저녁 서늘함이 문득 가을 같네.

 

 

幅巾驢子背出郭上山樓山樓臨澗壑晩凉翻似秋(大東詩選 卷9)

 

 이 시는 1820(순조20) 그가 14살 때에 지은 오언절구로 우()운이다. <환재집(瓛齋集)>에는 제목이 석경루 잡절 20(石瓊樓雜絶 二十首)’로 되었고 병서(並序)가 붙었으며, 스무 수 중 둘째 수로 결구의 ()”()”로 되었다. 병서는 이렇다. “경진년 4월말에 외종조 지산공께서 형조참판이 되었으므로 휴가를 내어 도성 북쪽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나귀를 보내 나를 불렀다. 석경장원의 여러 경치 좋은 곳을 찾아보고 시를 지으라 명하시기에 문득 우승 왕유(王維)의 망천 절구를 본받아 20수를 지었다.(朴珪壽, 瓛齋集 卷1, 石瓊樓雜絶. 庚辰四月末 外從祖芝山公以小司寇告暇出城北 送驢招余 尋石瓊張園諸勝 命賦小詩 輒倣王右丞輞川絶句作二十首.) 초여름에 창의문 밖의 석경루에서 느끼는 시원함을 읊었다. 기구는 행장이다. 복건을 쓰고 외종조부가 보내준 당나귀에 오른 자신의 모습이다. 승구는 가는 곳이다. 성곽을 나서서 북쪽 계곡으로 가서 산속 누각에 올랐다고 하였다. 전구는 산정(山亭)의 위치다. 산속 누각은 산골 시냇물 곁에 다다라있다고 했다. 결구는 저녁의 서늘함이다. 초여름이라 낮에는 조금 더운 기운이 돌았을 것이지만 새벽이나 저녁에는 서늘함이 가을 기운 같다고 하였다. 담담하게 자연을 읊은 분위기가 당나라 왕유의 시풍을 살렸다고 할 만하다.

 

 강양 죽지사 (江陽竹枝詞)

 

바린 가야산은 한쪽 반이 서리인데 산은 깊고 구름이 에워싸 불경이 향기롭네.

이끼에는 청학이 남긴 흔적이 없고 붉은 잎만 독서당에 어지럽게 날리네.

 

강양에 가을이 왔으나 물결 일지 않고 구름 위의 석탑은 희고 높게 솟았네.

숲속 성긴 비에 단풍진 길로 누가 다시 소를 타고와 삿갓 벗은 이를 찾으리.

 

渲染伽倻一半霜山深雲擁貝多香莓苔靑鶴行無跡紅葉繽紛讀書堂//

秋入江陽水不波凌雲石塔皓嵯峨一林疎雨紅流路誰復騎牛訪脫簑 (大東詩選 卷9)

 

 이 시는 <환재집>의 편차로 보아 1821(순조21)에서 1823년 사이에 지은 칠언절구로 각각 양()운과 가()운이다. <환재집>에는 제목이 강양 죽지사 열세 수, 천수재 이공의 부임에 이별하여 절함(江陽竹枝詞十三首 拜別千秀齋李公之任)’으로 되었고, 병서(幷序)강양은 지금의 합천군이다. 신라 때에는 대량주였고 일명 대야주였다. 경덕왕이 강양군으로 바꾸었다.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으로 즉위하였으므로 합주지사로 승격하였다. 본조에 이르러 태종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고 군으로 했다. 대개 옛 가야국이다. 가야산이 동북쪽에 있어 나라의 진산이 되었다. 그래서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같은 책, 1, 江陽竹枝詞十三首 拜別千秀齋李公之任 幷序. 江陽 今之陜川郡 新羅時爲大良州 一名大倻州 景德王改爲江陽郡 高麗顯宗由大良院君卽位 陞知陜州事 至本朝太宗時改今名爲郡 葢古伽倻國 以伽倻山在東北爲國鎭 故因以爲國號.) 인용한 시는 열세 수 중 넷째, 다섯째 수로 최치원의 독서당과 남명 조식(曹植)과 이민구(李敏求)의 만남을 읊은 것이다. 인용한 첫 수의 기구와 승구는 가야산의 경치다. 색을 점점 엷게 칠한 듯한 가야산은 반이 서리에 덮였는데 깊은 골짜기 속에 있는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구름에 싸여 향기롭다고 했다. 가야산의 경치와 해인사의 불경을 아울러 응축시킨 구절이라고 하겠다. 전구와 결구는 최치원이 머물던 독서당이다. 이 구절 뒤에 달린 주에는 최치원이 하루아침에 숲속으로 사리진 후 해인사 중이 그가 머물던 독서당의 그림을 그려 명복을 빌었다고 했는데,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신선이 되어 날아간 후에 그가 머물던 독서당에는 붉은 잎만 날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용한 둘째 수의 기구와 승구는 해인사의 가을 풍경이다. 합천에 가을이 와서 해인사의 석탑은 하늘 높이 솟았다고 했다. 전구와 결구는 조식과 이민구의 만남이다. 이 구절 뒤에 달린 주에 조식과 이민구가 해인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남명이 소를 타고 가다가 비를 만나 늦었는데 동주는 이미 먼저 해인사에 와서 삿갓을 벗고 있었다고 했다. 옛날 선비들의 고사를 읊어서 그곳의 군수로 가는 이에게 송별의 정을 표한 것이다.

 

 원상 이재항이 보은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며 (送李元常在恒歸報恩)

 

서생이 너무 영락하여 마음이 상해 강개한 노래 부르네.

주머니엔 산을 살 돈이 없으나 항상 바위 골짜기에 있기를 바랐네.

 

산중 비바람 부는 저녁에 무엇으로 서로 생각함을 위로할까.

한 동이 술이 없지 않다면 쓸쓸해 거듭 지탱하기 어려우리라.

 

書生太濩落中觴歌慨慷囊無買山錢恒存巖壑想//

山中風雨夕何以慰相思非無一樽酒怊悵難重持(大東詩選 卷9)

 

 이 시는 <환재집>의 편차로 보아 1831(순조31)에서 1841년 사이에 지은 오언절구 6수 중 첫째와 다섯째 수로 각각 양()운과 지()운을 썼다. <환재집>에는 첫째 수 뒤에 이런 주가 달려 있다. “나와 원상은 이웃하여 살았는데 아침저녁으로 서로 만났다. 말이 옛날 산수에 노닐던 데 이르렀으나 뜻을 아직 가벼이 정하지는 못했다. 대개 원상은 근방의 명승을 거의 답파했다. 문득 산을 사서 함께 숨어살자고 했고 원상이 지금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는데 나를 돌아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같은 책, 3, 送李元常在恒歸報恩. 余與元常比隣而居每晨夕相遌語到山水舊游意未嘗不僊僊也葢元常於方內名勝筇屐殆遍輒有買山偕隱之語元常今能遂其素志而顧余未能也。) 이 시는 영락한 선비가 시골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며 그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첫째 수의 기구와 승구는 영락한 서생이다. 선비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고 생활이 어려워서 세상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당색으로 인재를 버리는 세도정권 하의 실정을 암시한 것이다. 전구와 결구는 서생의 소망이다. 벼슬길이 막혔으니 시골에 돌아가 산전을 일구며 살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산전을 살만한 돈이 없으니 불가능한 소망일뿐이었다. 다음 수의 기구와 승구는 시골로 돌아간 그의 심정을 위로함이다. 산중에서 비바람 부는 저녁이면 벗이 생각날 텐데 무엇으로 그 심정을 위로하겠느냐고 하여 헤어지는 아쉬움을 일깨웠다. 전구와 결구는 술의 위안이다. 한 동이의 술로 헤어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