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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3 - 집안 내력

박지원의 집안은 대대로 가난했다. 벼슬을 못 해서가 아니다. 중종 때의 문신이었던 박소(朴紹) 이후로 집안은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선조들이 대대로 청빈했고 검소했다. 박지원은 이를 자부심으로 여겨 아들들에게 선조들의 검소했던 삶을 전하며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고 가르쳤다. 박지원은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1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 1685 ~ 1760)은 1725년(영조 1)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승지 등을 거쳐, 동의금(同義禁), 경기감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집이 낡고 누추하였지만 평..

연암 박지원 4 - 문체에 대한 생각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는 답안지를 작성하는데 쓰는 문체와 요령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박지원도 친구들과 어울려 과거시험의 글쓰기를 익혔다고 했다. 박지원의 처남인 이재성이 고금의 과체(科體)1를 모아 「소단적치(騷壇赤幟)」2란 책을 지었는데 박지원이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란 글로, 인(引)은 서문(序文)의 의미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兵法)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이란 적국(敵國)이요,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행군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앞뒤의 조응(照應)3이란 봉화를 올리는 것이요, 비유란 기습..

연암 박지원 5 - 연암골

박지원은 1771년에 이덕무, 백동수 등과 어울려 송도, 평양을 거쳐 묘향산 등 명승지를 두루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연암골을 처음 만나게 된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이때의 일을「과정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지께서 개성을 유람하시다가 연암골이라는 땅을 발견하셨다. 당시 백동수(白東脩, 1743 ~ 1816)1의 어린 청지기 김오복이 아버지를 모시고 따라갔었다. 연암골은 황해도 금천군에 속해 있었고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고려 때 목은(牧隱, 이색)과 익재(益齋, 이제현) 등의 여러 어진 이가 그곳에 살았지만 후에는 황폐해서 사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 아버지는 화장사(華藏寺)2에 오르셨는데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하였다. 별천지가 있겠다 싶어 백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