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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1 - 조선의 대문호

정조는 치세 당시 문풍(文風)이 예스럽지 못하고 소설이나 패관잡기 등에서 사용되는 자유분방한 패사소품체 (稗史小品體)가 성행하는 것을 두고 그 원인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과 그가 지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죄라고 지적하였다. 정조는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서 사용되는 문체를 배격하고 순정(醇正)한 고문(古文)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조가 생각하는 좋은 문체란 전한(前漢)시대에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나 후한(後漢)의 반고가 쓴 『한서(漢書)』같은 문체, 한대(漢代) 이전의 형식을 제창하여 산문 문체를 개혁한 당나라의 한유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했던 당나라 유종원 같은 문체였다. 정조로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연암 박지원 2 - 학식(學識)

산기슭에 가려 아직도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못 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나자 눈앞이 아찔해지며 눈에 헛것이 보일만치 벌어진 광경이 어마어마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시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제 신대로 다니게 마련임을 알았다. 말을 멈추고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말했다. “한바탕 울만한 자리로구나!” 박지원이 드넓은 요동벌판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다. 好哭場 可以哭矣. “곡하기 좋은 곳이다. 가히 울만하구나!” 생전 처음 접한 광경에 이런 특이하고도 기품있는 감탄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소에 쌓은 학식과 오랜 사고의 훈련이 없다면 불현듯 입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감탄..

연암 박지원 3 - 집안 내력

박지원의 집안은 대대로 가난했다. 벼슬을 못 해서가 아니다. 중종 때의 문신이었던 박소(朴紹) 이후로 집안은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선조들이 대대로 청빈했고 검소했다. 박지원은 이를 자부심으로 여겨 아들들에게 선조들의 검소했던 삶을 전하며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고 가르쳤다. 박지원은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1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 1685 ~ 1760)은 1725년(영조 1)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승지 등을 거쳐, 동의금(同義禁), 경기감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집이 낡고 누추하였지만 평..

연암 박지원 4 - 문체에 대한 생각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는 답안지를 작성하는데 쓰는 문체와 요령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박지원도 친구들과 어울려 과거시험의 글쓰기를 익혔다고 했다. 박지원의 처남인 이재성이 고금의 과체(科體)1를 모아 「소단적치(騷壇赤幟)」2란 책을 지었는데 박지원이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란 글로, 인(引)은 서문(序文)의 의미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兵法)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이란 적국(敵國)이요,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행군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앞뒤의 조응(照應)3이란 봉화를 올리는 것이요, 비유란 기습..

연암 박지원 5 - 연암골

박지원은 1771년에 이덕무, 백동수 등과 어울려 송도, 평양을 거쳐 묘향산 등 명승지를 두루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연암골을 처음 만나게 된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이때의 일을「과정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지께서 개성을 유람하시다가 연암골이라는 땅을 발견하셨다. 당시 백동수(白東脩, 1743 ~ 1816)1의 어린 청지기 김오복이 아버지를 모시고 따라갔었다. 연암골은 황해도 금천군에 속해 있었고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고려 때 목은(牧隱, 이색)과 익재(益齋, 이제현) 등의 여러 어진 이가 그곳에 살았지만 후에는 황폐해서 사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 아버지는 화장사(華藏寺)2에 오르셨는데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하였다. 별천지가 있겠다 싶어 백군과..

연암 박지원 6 - 벗 유언호

박지원을 연암골로 피신하게 만든 유언호는 나이가 박지원보다 7살이나 위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벗으로 지냈고 그 친분은 꽤 오래되고 깊었다. 유언호는 정조에게 박지원을 가리켜 ‘벼슬하기 전에 사귄 벗’이라고 했는데 유언호가 과거에 급제한 것이 32세 때인 1761년이니 박지원으로서는 25세 전부터 유언호와 알고 지낸 사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765년에는 박지원과 유언호가 함께 금강산 유람을 하기도 하였다. 유언호는 박지원을 연암골로 보내고 나서 안심이 안 되었는지 곧 그를 뒤쫓아 왔다. 자원하여 개성유수 (開城留守)로 발령받은 것이다. 이 내용이 「과정록」에 있는데 박종채는 개성유수를 외직(外職)이라고 하였지만 개성유수는 종2품의 경관직(京官職), 즉 내직(內職)이다. 이에 유공(兪公)은 외직을 구..

연암 박지원 7 - 벗 홍대용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에 기록한 글들을 보면 박지원의 사람 사귐이 마냥 털털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말과 의론이 엄정하셨다. 겉으로만 근엄하고 속마음은 그렇지 못한 자나 권력의 부침(浮沈)에 따라 아첨하는 자들을 보면 참지 못하셨으니, 이 때문에 평생 남의 노여움을 사고 비방을 받는 일이 아주 많았다. 외삼촌 지계공(이재성)이 쓴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가장 참지 못한 일은 위선적인 무리와 상대하는 일 그래서 소인배와 썩은 선비들이 늘 원망하고 비방했었지. 라고 하였으니 , 가히 아버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할 만하다. '위선적인 무리’로 번역된 글의 원문은 ‘향원(鄕愿)’이다. 향원(鄕愿)은 시세에 영합하면서도 점잖고 성실한듯이 행동하여 순박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부류..

연암 박지원 8 - 의청소통소(擬請䟽通䟽)

아버지께서 세상과 어긋나자 사람들 또한 발길을 뚝 끊었는데,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 세 검서(檢書)1는 지난날의 제자로서 변함없이 아버지를 흠모하였다. 세 사람은 품성이 착하고 지혜와 식견이 있었으며, 남이 잘 되고 못 되고에 따라 요리조리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한 가지 방대한 책을 엮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계셨는데, 세 사람이 그 해박한 지식과 견문으로 전고(典故)를 대고 변증(辨證)해주었으므로 아버지는 그들을 늘 아끼고 사랑하셨다. 이들의 벗들로 문학에 취미가 있는 서상수, 이희경, 이희명, 이공무, 정수, 김용행 등 여러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아와 아버지를 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다시 아버지가 아무나 사귄다고 막 비방해댔다. (「과정..

연암 박지원 9 - 글짓기

아버지는 금강산을 유람하실 때 라는 시를 한 수 지으셨다. 판서 홍상한(洪象漢)1이 아들 집에서 그 시를 보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도 이런 필력이 있었던가? 이는 거저 읽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중국 붓 크고 작은 것 2백 개를 문객(門客)으로 하여금 갖다 주게 하여 정중한 뜻을 표하였다. 「과정록」 라는 시는 ≪연암집≫에 실려 있지만 ≪열하일기≫에도 실려 있다. 연행 길에 동행들이 청돈대(靑墩臺)에 해 뜨는 구경을 가자고 청해왔지만 박지원은 조용히 잠을 자기 위해 사양하였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예전 총석정에서 해돋이 구경을 하고 지은 시라며 이 시를 실었다. 박지원 자신도 꽤 잘 지은 시라 자부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7언 70구(句)로 된 이 한시(漢詩)는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

연암 박지원 10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박지원이 쓴 아홉 편의 전(傳)이 실려 있는 한문 단편소설집이다. 『연암집』 8권 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맨 앞에 자서(自序)가 있고 이어서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의 순서로 실려 있다. 이 중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은 유실되어 목록만 있고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아들 박종채는 「방경각외전」에 대하여 「과정록」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의 벗 사귐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좇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세태가 꼴불견이었는데,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이런 세태를 미워하셨다. 그래서 아홉 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