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경북 봉화 청량사 79세의 노인과 할머니는 죽은 소의 명복을 빌며 절을 올리는 것으로
워낭을 손에 들고 환청인지도 모르는 워낭소리를 듣고 언덕에 홀로 앉아 상념에 잠긴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의 첫 시작임을 알리며...
지저귀는 산새 소리 구슬픈 뻐꾸기 소리 온갖 종류의 벌레소리 매미에 개구리 소리까지
우리가 농촌이라는 곳에 관해 상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소리는 농촌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오랫동안 안 보던 영화를 보곤 어린 시절 추억의 감상에 젖어 눈시울을 적신 감동적인
영화였다. 옛 생각에 간간히 미소도 지어보기도 하고 눈물도 훔치게 한
한편의 영화 “워낭소리”
평생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농부 최 노인과 소의 평균연령을 훌쩍 넘긴 마흔 살이나 된
“최 노인의 소” 와 무덤덤하면서도 주인과의 깊은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그려낸 가슴
찡한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어릴 적 농촌에는 지금처럼 농기계가 없어 집 마다 소가 사람대신 갖은 혹사당하면서도
왕방울만한 눈만 꿈뻑꿈뻑 하면서도 힘든 농사일을 해 오고 어미 소가 새끼라도 낳을라
치면 집안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던 시절이었다.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이 소는 최노인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이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른다.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 할아버지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 하면서 최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른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짝꿍이 아닐 수 없다.
79살의 최 노인이 삐쩍 마른 40살소를 데리고 와서 팔려고 한다. 사람들은 빈정대고
한 상인은 “이런 소 있으면 다른 소도 안 팔리니 빨리 데리고 가라”고 차갑게 쏘아붙인다. 이젠 고기값도 받을 수 없는 노쇠한 소 30년을 함께 산 그 소를 더 먹일 기력조차 남지
않아 마지못해 시장에 끌고 온 병들고 휘어진 노인 무지막지한 노동으로만 채워진 생의
마지막 문턱에 선 두 비루한 육체를 향한 세상의 냉소와 멸시.
그러던 어느 봄날, 최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선고를 듣는다.
소와 할아버지를 보면 안타까움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세월 속에서 쌓인 둘의 정 참 말없는 그것에 감동이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은 인간
누구나 삶을 살아가며 느껴가는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할아버지에게도 소리가 신음입니다. 할아버지는 계속 ‘아, 아파!’ 하고
나지막이 또 높이 소리 지릅니다. 영화에서 노동의 고통을 구체적인 소리로 표현하는 단 하나의 인물이 바로 이 할아버지입니다. 물론 일하는 소가 ‘음메!’ 하고 내지르는 소리 또한 노동의 고통이 자아내는 소리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신음만큼 절절하게 와 닿지는 않습니다.
소는 이미 워낭소리로 그 표현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할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할머니에 견주어본다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나머지 뱉어내는 신음은 오로지 할아버지 뿐 입니다.
여기서 문득 할머니의 태도가 신기합니다.
할머니도 분명히 노동을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할머니는 할아버지처럼 신음을 내뱉지는 않습니다. 물론 할머니의 지청구가 신음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할머니는 바가지 긁는 것으로 고통의 신음을 대신하는 어쩌면 할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의
발로일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할머니가 바가지를 긁는 대신 할아버지처럼 고통의 신음을 줄기차게 내뱉고 살았다면 벌써 할아버지는 소한테 워낭을 잘라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계를 들이고 농약을 뿌리며 농사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할아버지는 소를 진즉에 ‘5백만 원’ 받고 팔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워낭소리”라는 영화도 없었겠지요. 어쩌면 이 영화는 소의 덕분도 할아버지의 덕분도 아니라 바로 할머니의 덕분으로 찍을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할머니의 바가지가 이 영화를 있게 한 원동력인 셈입니다.
한데 이 할아버지의 고통에 찬 신음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장차 우리도 이 할아버지처럼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연명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나 사람이나 모두 늙어서 더는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어떻게든 일을 하며 살아야 하고 고생해야 합니다. 그 노동의 낙인이 우리 몸에 고스란히 남아 노년에 우리 육체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처럼 ‘아, 아파!’ 하고 신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때 그 신음은 머지않아 닥쳐올 그 앞날에 우리 몸이 질러낼 소리일 것입니다.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세 가지 소리가 환청처럼 잇달아 들려오는데...
첫 번째는 워낭의 소리이고 두 번째는 할머니가 바가지 긁는 소리 마지막은 할아버지의
신음소리입니다. 이 세 가지 소리는 더 징하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공평하게 또렷한 환청으로 들려오기도 합니다. 저한테 가장 현실적인 것은 할아버지의 신음소리 언젠가는 제 몸이 빚어낼 소리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 속 할아버지처럼 제 몸이 그런 신음을 뱉어내야만 할 때 제 곁에도 할아버지한테처럼 할머니의 징하디 징한 바가지 긁는 소리와 워낭의
정겹디 정겨운 딸랑거리는 소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것도
세상일이 제 뜻대로만 되겠습니까만 나름대로 소망해볼 따름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영화 속 할머니의 소망처럼 소가 아니라 기계로 농사를 짓기로 이미 오래 전부터 작정을 했었고 농사짓기가 힘겨워졌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수지타산도 맞지 않겠지만 워낭소리가 난다는 것은 결국 기계로 농사를 짓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나아가 이 영화 속 할아버지처럼 소한테 해로울까봐 농약도 함부로 치지 않는다면 소가 기운차게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인데 말 그대로 진짜배기 향토 유기농인 셈입니다.
그 소를 부리는 인간 사이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뛰어넘는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다는
뜻도 된다지만 행여 해로운 것을 소가 먹을세라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끊임없는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끝내 농약을 치지 않더이다. 이 정도의 정성은 사람한테도 기울이기 힘든 것이 아닌가 싶지만 워낭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들린다는 것은 이 관계가 파탄나지 않고 계속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사는 별로 없지만 진정한 감동 늙어간다는 액(厄) 함께 늙어간다는 행(幸).
사람과 소의 기묘한 삼각 멜로 팔순 농부와 마흔 살 소 삶의 모든 것이 기적 이였습니다.
영화 속의 할머니를 보니 고향이 생각났다. 할머니가 살고 계셨던 대청호로 잠수된
시골이라든지 그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이라든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던 미소라든지.
남편인 할아버지를 상대로 할머니가 늘어놓는 지청구를 가리켜 그저 잔소리라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라는 느낌은 바가지 긁는 소리입니다. 그것도 아주 못살게 박박 긁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참, 징하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네요.
영화에서 워낭의 소리만큼이나 계속되는 또 하나의 소리가 바로 이 할머니의 바가지 긁는 소리입니다. 내가 당하면 괴로운 소리지만, 남이 당하는 것을 보면 즐겁기만 한 것이 바로 이 바가지 긁는 소리임을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도 흔히 듣는 그 숱한 마누라들이 못난 남편 한심한 남편 고집불통의 남편들한테 줄기차게 늘어놓는 바가지 긁는 소리임을...
워낭소리만 계속 울려 퍼졌다면 영화의 매력은 절반쯤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가 바가지 긁어대는 소리는 이 영화를 끝까지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요 바가지 긁는 소리는 우리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데만 이바지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바가지가 그렇듯 이 할머니의 바가지도 삶의 한 요소 없으면 더는 살아갈 흥이 나지 않는 필수요소가 아닌가 싶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할머니한테는 분명 낙 살아가는 낙 그것도 거의 유일한 낙이 아닐런지요.
그렇게 세월은 흘러 소가 임종을 한다. 할아버지가 소를 위해 풀을 베었던 조선낫으로
목에 감긴 소고삐와 코뚜레를 벗겨주는 장면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죽음에 이르러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는구나! 라는 장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삶은 고달프지만 세월은 가는거고 끝내 막은 내리는 것 하지만 밭두렁 옆 외로운
고목에서 할아버지 넋 놓고 앉아 소목에 걸려 있던 워낭을 쥐고 상념에 젖어있는 모습,
죽은 소를 그리워하는 표정은 내 머릿속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민들레꽃 한 송이가 소담스레 피어 있는 무덤가엔 쓸쓸하기 그지없네..
덩그렁 덩그렁 -워낭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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