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박규수: 노원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0. 9. 28. 17:53

 

박규수: 노원구의 자랑스러운 인물

한글고비 맞은편 서라벌 고등학교 자리인 하계동 산 20-3번지에는 구한말 개화사상의 선구자인 박규수 묘가 있었는데 1980년대 말 하계동 아파트 단지 개발공사로 이곳에 있던 묘소를 1989년 8월 2일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불목리로 이장하였다. 박규수는 서울 출신으로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로 본관은 반남, 호는 환재(環齎)·환재거사(環齎居士)라고 하였다.

박규수는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외족인 이정리, 유지산 등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일찍이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20세 무렵에 효명세자와 교유하였으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양친 또한 연이어 세상을 뜨자 이로 인한 상심이 커서 20여년간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자와 호의 환(桓)이라는 글자에서 환(環)자로 바꾼 것도 세자의 죽음에 연유한 것이었다.

20년간의 칩거생활 중에 이미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 燕巖集]을 통해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고 윤종의, 남병철, 김영작 등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실학적 학문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그 후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1848년)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관직에 나간 이후 병조정랑, 용강현령, 부안현감, 사헌부 장령, 동부승지, 경상좌도 암행어사, 곡산부사를 역임하였다. 1861년에는 약 6개월간에 걸쳐 연행사절(燕行使節)의 부사(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때 국제 정세를 목격하고 심병성 등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견문을 넓혔다.

박규수는 이 시기에 [연암집]과 서양의 새로운 사상을 강의하면서 개화운동의 인물들을 배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본이 운양호 사건(1875년)을 일으켜 수교를 강요해오자 오경석 등과 함께 강화도 조약의 체결에 영향을 미쳤다. 그 해 1월 고희(古稀)를 넘겨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서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다가

사망했다. 박규수는 북학파와 개화파를 결합시켜준 인물로서 정약용, 서유구,

김매순, 조종영, 홍석주, 윤정현 등에게 사숙하였고, 문우로서 남병철, 김영작,

김상현, 신응조, 윤종의, 신석우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김옥균, 박영호, 김윤식, 유길준 등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다.

즉 박규수는 북학파와 개화파를 연결시킨 중심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는 [환재집環齎集], [환재수계環齎隨啓]가 있고

편저로는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으로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