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 공부

제3장 팔일편(八佾篇)|論 語 ( 논 어 )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4. 1. 30. 14:18

 

 

 

본 해석은 대양서적(大洋書籍)의 중국사상대계 중의 공자(論語) 편을 참고했습니다.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공자께서 계씨의 행동을 말씀하셨다.
"8佾(64명의 群舞)로 뜰에서 춤을 추게하였다고 하니 이것까지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참겠는가?"

三家者以雍徹. 子曰, “‘相維辟公, 天子穆穆’,

 

奚取於三家之堂?”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의 세 세도가에서는 옹(雍)의 음악에 맞추어 제단(祭檀)을 철거하곤 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제후들 모여 제사를 돕나니, 천자의 용안에 기쁘신 기색이여. 라는 대목을 그 세 집안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雍은 천자가 지내는 제사 이름.
相維辟公: 相은 도움. 維는 의미 없는 조합된 글자. 辟公은 제후를 말함.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으로서 사람다움이 결여되었다면, 예를 배워 무엇하랴. 사람으로서 사람다움이 결여되었다면 악(樂)은 배워 무엇하랴.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 與其奢也寧儉, 喪,

 

與其易也寧戚.”

 

임방이 예의 근본에 대해 여쭈었더니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큰 문제를 질문했도다.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검소한 쪽이 나으며, 장례식은 막힘 없이 집행하기보다는 애도의 정이 표시되도록 행해져야 하느나라."
易: 鄭玄은 簡이라 주했으니 손쉽게, 재빠르게, 요령 좋게 장시지내는 것.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오랑캐에게 비록 임금이 있다해도, 임금 없이 문화가 진보한 한족의 나라만은 못하다."
諸夏: 하나라는 우임금이 세운 나라이고 중국인들은 이 우임금의 자손으로 자처하므로 여기서는 중국 내의 여러 한족 나라들임.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女弗能救與?”

 

對曰, “不能.” 子曰, “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계씨가 태산에서 대제를 올렸다. 공자께서는 곧 염유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계씨를 섬기는 몸으로 어찌 말리지 않았느냐?"
염유가 대답했다.
 "아무리 애써도 불가능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 너는 대체 태산의 신이 저 번 나와 문답했던 임방이라는 사람보다도 예에 대해 무식하다고 생각하느냐?"
旅: 정기적으로 올리는 제사가 아닌 임시로 올리는 大祭.

子曰“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남과 다투지 않지만 궁술 경기만은 예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덮어놓고 경쟁만 하는 것은 아니고 당에 올라 주인에게 인사할 때, 뜰에 내려가 활을 쏠 때, 서로 읍을 하면서 양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승리자에게는 술을 대접한다. 경쟁이면서도 그 방식은 참으로 군자답지 않은가."
升下: 사례할 때 주인의 초대에 응해 집으로 올라가는 것이 升이요, 활을 쏘기 위해 뜰로 내려서는 것이 下이다.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何謂也?”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하가 물었다.
"빙그레 웃으면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매여, 까만 눈동자.
흰 빛으로 드러나는 눈부신 무늬. 라는 시는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공자 말씀하시길
 "그림 그릴 때 흰 빛을 나중에 칠한다는 소리로다."
자하가 즉시 말했다.
 "예가 마지막 단계라는 말씀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잘도 내 뜻을 발전시켰구나. 자하야. 너쯤 되면 시를 더불어 말할 수 있으리라."
素以爲絢: 이것은 지금의 시경에는 안 보인다. 아마 실전된 듯. 자하는 이 문구가 이해가 안 가서 질문한 것이리라.
繪事後素: 정현의 주에 의하면, 繪란 무늬이다. 5색 색실로 수를 놓고, 마지막에 그 색 사이를 흰 실로 두르면, 5색의 무늬가 한층 드러나 보이는 것이라 해석했다. 서양화에 있어서도 마지막 단계에 가서 화이트를 가지고 하이라이트를 그려 넣으면 이것으로 해서 그림이 확 눈에 띄게 된다.

子曰,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라의 제도는 나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하의 자손인 杞나라에 의해 그것을 실증할 수가 없다. 은나라의 제도도 나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은의 계통을 이은 宋나라에 의해 그것을 실증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기나 송에는 책과 박식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만 충분히 남아 있다면, 나는 자기의 학설을 실증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微: 증거를 가지고 확인하는 것.

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공자 말씀에
"나라의 종묘에 올리는 제사에서 술을 땅에 붓는 의식 다음부터는 나는 눈을 감고 안 보기로 하고 있다."
*노나라에서 먼 조상들의 넋을 제사하는 큰 의식을 체(褅)라 함. 당시에는 조상들의 위패를 사당 정면에 세워놓고 제사를 올리는데 이 위패의 서열에 문제가 있었다. 노국 조상 중 4대의 민공(閔公)과 5대의 희공(僖公)은 형제였으나 민공은 적자요 나이가 아래였고 희공은 서자인데다가 나이가 위였다. 희공의 아들 문공이 즉위하자 일부러 자기 부친인 희공의 위패를 민공 위에 놓고 제사를 드렸다. 이것은 그대로 계승되어 내려와 예에 어긋나는 이 위패 배치를 공자는 차마 볼 수 없었던 듯. 신주(新注)에는, 제사에 성의가 결여되어 있어서 차마 못 보았던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或問禘之說. 子曰, “不知也,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어떤 분이 체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공자께서는 말씀하시길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체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천하 일에 대해서도 마치 이것 들여다보듯 할 것입니다."
하시면서 손바닥을 가리켰다.

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吾不與祭, 如不祭.”

 

공자께서는 죽은 사람을 제사하는 경우에 마치 그 사람이 살아서 거기 있는 듯 대하셨다. 또 신을 제사할 때도 신이 거기 와 있는 듯 대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 자신 무슨 사고가 있어서 실제로 제사에 참가 못하면 제사를 지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왕손가가 물었는데
"-잘보이려면 안방 신(神)보다는 부엌신에게-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을 말씀해 주세요."
공자 말씀하시길
"그렇지 않소이다. 만약 하늘의 신에게 죄를 범한 자라면 어디에 용서를 빌 데가 있겠습니까?"
*공자가 위나라로 망명했을 때의 일일 것이다. 위의 실권을 쥐고 있던 왕손가는 망명객인 공자가 자기에게 인사 오지 않는 것에 분개하여 군주인 영공에게 접근하기보다 자기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은근히 비친 것이다. 그러나 정의파인 공자는 일축해 버렸다.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공자 말씀에
"주나라의 문화는 하나라 은나라 2대를 거울로 하여 꽃이 피어 향기를 풍기는 듯, 그 얼마나 아리따운 것이랴. 나는 주의 문화를 취하는 자이다."

子入太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太廟,

 

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 제사에 참여하셨을 때 일일이 의식을 담당자에게 물으셨다. 어떤 분이 말씀하기를
"누가 추땅의 시골뜨기를 예에 밝다고 했는가. 태묘에 들어가자 하나하나를 담당자에게 묻지 않았느냐?"
이 소문을 듣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신중을 기하는 것이 바로 예이니라."

子曰,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古之道也.”

 

공자 말씀하시길
 "-궁술은 가죽 과녁을 얼마나 맞추는가를 경쟁하지는 않는다. 사람에 따라 타고난 힘에 등급이 있으니까-라는 말은 참으로 고대의 성스러운 임금이 남기신 가르침이다."

子貢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자공이 매월 초하루 산 양을 종묘에 바치는 의식을 폐지하자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공자께서는 말씀하시길
"자공아, 너는 희생으로 쓰는 양이 아까우냐? 나는 그 예(禮)가 아깝다."
告朔之餼羊: 매월 초하루가 되면 산 양을 희생으로 종묘에 바쳐 초하루임을 보고하는 의식이 노나라에 있었다.
*수제자인 자공은 재정 경제에 밝은 정치가였다. 노나라에 벼슬하자 양을 바치는 고삭의 의식을 폐지하고자 했다. 의식은 형식만 남아서 아무 예식도 없이 양만 바치는 실정이어서 그럴 바에야 아주 폐지해서 재정의 부담이나 덜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문화적 유산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도 보존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子曰,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공자 말씀히시길
"주군에 대해 예를 다해 섬기고 있으면, 남들은 아첨을 한다고 하는구나."
*바로 아래의 문장과 거의 같은 시기에 공자는 노나라의 정공(定公)의 신임을 얻어 삼환씨(三桓氏)를 제거하려던 당시일 것이다. 공자를 아첨한다고 중상한 사람들이란 대개 삼환씨나 그 동조자였을 것이다. 애국 일념으로 정공을 섬기다가 어느덧 정쟁에 휩쓸리게 되어 당황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

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정공이 묻기를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어떤 마음씨가 필요하겠소?"
공자께서 대답하기를
"군주가 신하를 부리시는 데는 예를 지키셔야 하며,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데는 진심을 다해야 합니다."
忠 : 원래는 군신간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진심을 가지고 수행하는 뜻이었는데 후세에 와서 임금에 대한 신하의 의무만 강조하게 되었다.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관저의 노래는 즐거워하면서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슬퍼하면서 슬픔에 꺾이지 않는 곡이다."
*관저는 시경 국풍 첫머리에 나오는 시 이름이지만 이 공자 시대에는 관현(管絃)의 반주에 맞추어, 처음에 관저, 다음에 갈담(葛담), 세 번째 권이(卷耳)의 순서로 세 편을 으례히 같이 노래하는 관례였다. 여기서 관저라 하는 것도 세 노래의 총칭이라 생각됨.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栢,

 

周人以栗, 曰, 使民戰栗.” 子聞之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노나라 애공이 재아에게 사(社)의 신목에 대해 물으셨다. 재아가 삼가 대답했다.
"하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쓰고, 은나라에서는 측백나무를 쓰고,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를 썼습니다. 밤나무를 쓰는 데에는 백성을 전율케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이 소식을 듣고 말씀하시길
"이미 끝난 사건에 대해 논해서는 안 되며, 낙찬된 사건에 대해 간해서도 안 된다. 지난 일에 대한 책임은 물어서는 안 된다."
*애공과 공자의 제자인 재아와의 이 문답은 공자가 긴 망명길에서 귀국한 애공 11년에서 공자가 돌아가는 애공16년 사이에 있었던 일로 생각된다. 갖은 풍상을 겪은 끝에 정계를 떠나 인생을 달관하게 된 공자 만년의 이야기임을 유념하지 않고는 재아에 대한 공자의 사후 비평의 뜻이 잘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노나라에는 군주와 귀족들을 위해 세운 주사(周社)와 일반 백성을 위해 세워진 박사(亳社), 은사(殷社)가 있다. 사(社)는 토지의 신으로 보통 풍년 들기를 비는 곳이었으나 이  신목 앞에 모여 재판과 형벌을 집행하는 수도 있었다. 노 정공 때 계씨의 집사인 양호(陽虎)가 계환자를 잡아 가두고 일시 정권을 장악한 일이 있었다. 그는 새 정권을 인정받기 위해 정공과 삼환씨를 협박하여 주사에 나와 맹세케 했고, 백성들을 박사에 모아놓고 맹세케 했다. 이 사의 광장을 무대로 해서 연출된 쿠데타의 기억은 애공 때가 되어서도 아직 남아 있었다고 여겨진다. 재아가 주나라의 신목은 율, 즉 밤나무요, 백성들을 전율시킨다는 뜻을 지녔다는 데는 이런 기억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물론 밤나무의 율(栗)과 전율의 율(慄)이 동음이라는 점도 있다. 애공에게 계씨 일파를 몰아내기 위해 다시 한번 쿠데타를 해 보는 것이 어떻냐는 암시를 던진 것이리라. 이 대화를 전해들은 공자는 쿠데타를 해 봐도 뜻대로 되기 어려우니 나이 어린 애공을 충동해서 도리어 사태를 한층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옛말을 인용해 훈계한 것이 공자의 뜻이었을 것이다.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

 

歸, 官事不攝, 焉得儉?” “然則管仲知禮乎?” 曰, “邦君樹塞

 

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공자 말씀하시길
"대정치가라는 관중이지만, 그 그릇은 작았구나."
어떤 분이 물었다.
"관중은 검소했소?"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관중은 세 성씨로부터 부인을 얻었고, 가신을 많이 채용해서 겸직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어찌 검소하였겠습니까?"
그 분이 다시 물었다.
"그런 즉 관중은 예는 알고 있었던가?"
공자 말씀이
"군주는 대문 안 정면에 담을 쌓아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예입니다만, 관중도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군주는 타국과 우호조약을 맺을 때 헌수하는 술잔을 놓는 특별한 대를 갖추는 것이 예입니다만, 관중도 또한 그런 것을 만들었습니다. 관중이 예를 안다고 하면, 세상의 누구를 예를 모른다 하겠습니까?"
樹 : 대문 안쪽 정면에 낮은 담을 쌓아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은 제후의 특권.
坫 : 당(堂)의 기둥 사이에 흙으로 단을 모으고 주연 때 헌수(獻酬)하는 술잔을 놓는 장소로 썼다. 이 역시 제후의 특권.

子語魯大師樂, 曰, “樂其可知也, 始作, 翕如也, 從之,

 

純如也, 皦如也, 繹如也, 以成.”

 

공자께서 노국 악단의 단장과 음악을 논하였을 때 말씀하시길
"음악의 구성은 대개 알겠습니다. 최초에 종이 크게 울리면 다음을 이어 합주가 은은하게 흐르고, 다시 관현의 각 분야가 따로따로 명확하게 음율을 연주하고 마지막으로 여운이 뇨뇨하여 완결하는 것이군요."
大師 : 노나라 음악부의 장관.
翕如 : 처음에 열 둘로 한 조를 이루는 종이 울리는 모양.
皦如 : 또렷이 울리는 것. 아마도 관악, 현악, 타악 등의 각 파트가 교대로 독주함을 말하는 듯.
繹如 : 소리가 길게 울리는 것.

儀封人請見, 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從者

 

見之. 出曰, “二三子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爲木鐸.”

 

위나라 의(儀) 땅의 국경 수비관이 공자께 뵙기를 청하였다.
"훌륭한 분이 이곳을 지나실 때면 저는 언제나 뵙고 인사드립니다."
종자가 뵙도록 하였더니 뵙고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 이 망명 길에 대해 아무 것도 근심하실 것은 없습니다. 천하가 도의를 잃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늘은 이 망명을 통해 여러분의 선생님을, 도의를 회복하도록 천하에 알리는 목택으로 삼으시려 하는 것이니까요."
儀封人 : 儀는 읍 이름. 국경의 표시로 높은 흙무더기를 여기저기 쌓는데 여기에는 토지신을 모셨으니, 이것을 封이라 한다. 封人은 이를 관리하고 국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가짐.
喪 : 국왕이나 귀족이 망명할 때 국경에서 고국을 향해 이별을 고하는 의식을 말함.
木繹 : 관에서 백성을 모아놓고 포고를 할 때 흔드는 나무. 선각자를 일컬음.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공자께서 순임금의 음악인 소를 배평하여 말씀하시길
"미적(美的)으로 완전할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완전하다."
또 주나라의 무왕의 음악인 무를 이렇게 평가하셨다.
"미적으로 완전하기는 하나, 도덕적으로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관용의 덕을 지니지 못하고, 의식을 거행하면서 경건한 마음이 결여되고, 장례식에 임석하여 애도의 정이 없는 사람들을 내 어찌 차마 보랴."
* 공자는 계씨를 비롯한 노국 고위층의 교양 없고 후안무치한 소행을 은근히 비난하였다. 권두의 팔일장에 대해 이것을 종장에 놓은 그 격렬한 어조에서는 읽는 이의 옷길을 바로잡게 하는 엄숙한 기개가 넘친다.(옮기면서 현대적인 어구로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又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