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함양 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병서(幷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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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 나라 사람의 말에,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얻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를테면 《시경》 용풍(鄘風) 백주(柏舟)의 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개가(改嫁)한 여자의 자손은 정직(正職)에는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반 백성과 무지한 평민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랴.
마침내 우리 왕조 400년 동안 백성들이 오랫동안 앞장서 이끄신 임금님들의 교화에 이미 젖어, 여자는 귀하든 천하든 간에, 또 그 일족이 미천하거나 현달했거나 간에 과부로 수절하지 않음이 없어 드디어 이로써 풍속을 이루었으니, 옛날에 칭송했던 열녀는 오늘날 도처에 있는 과부들인 것이다.
심지어 촌구석의 어린 아낙이나 여염의 젊은 과부와 같은 경우는 친정 부모가 과부의 속을 헤아리지 못하고 개가하라며 핍박하는 일도 있지 않고 자손이 정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는 것도 아니건만, 한갓 과부로 지내는 것만으로는 절개가 되기에 부족하다 생각하여, 왕왕 한낮의 촛불처럼 무의미한 여생을 스스로 끝내 버리고 남편을 따라 죽기를 빌어,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거나 독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기를 마치 낙토를 밟듯이 하니,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예전에 이름난 벼슬아치 형제가 있었다. 장차 남의 청환(淸宦)의 길을 막으려 하면서 어머니 앞에서 이를 의논하자, 어머니는
“그 사람에게 무슨 허물이 있기에 이를 막으려 하느냐?”
하고 물었다. 아들들이 대답하기를,“그 윗대에 과부된 이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바깥의 논의가 자못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그 일은 규방의 일인데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하자, 아들들이 대답하기를,“풍문(風聞)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어머니는 말하였다.“바람이란 소리는 있으되 형체가 없다. 눈으로 보자 해도 보이는 것이 없고, 손으로 잡아 봐도 잡히는 것이 없으며, 허공에서 일어나서 능히 만물을 들뜨게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무형(無形)의 일을 가지고 들뜬 가운데서 사람을 논하려 하느냐? 더구나 너희는 과부의 자식이다. 과부의 자식이 오히려 과부를 논할 수 있단 말이냐? 앉거라.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게 있다.”
하고는 품고 있던 엽전 한 닢을 꺼내며 말하였다.“이것에 테두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에 글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드리우며 말하였다.“이것은 너희 어미가 죽음을 참아 낸 부적이다. 10년을 손으로 만졌더니 다 닳아 없어진 것이다. 무릇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뿌리를 두고, 정욕은 혈기에 모이며, 그리운 생각은 고독한 데서 생겨나고, 슬픔은 그리운 생각에 기인하는 것이다. 과부란 고독한 처지에 놓여 슬픔이 지극한 사람이다. 혈기가 때로 왕성해지면 어찌 혹 과부라고 해서 감정이 없을 수 있겠느냐?
가물거리는 등잔불에 제 그림자 위로하며 홀로 지내는 밤은 지새기도 어렵더라. 만약에 또 처마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거나 창에 비친 달빛이 하얗게 흘러들며, 낙엽 하나가 뜰에 지고 외기러기 하늘을 울고 가며, 멀리서 닭 울음도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면 이런저런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 고충을 누구에게 호소하랴.
그럴 때면 나는 이 엽전을 꺼내 굴려서 온 방을 더듬고 다니는데 둥근 것이라 잘 달아나다가도 턱진 데를 만나면 주저앉는다. 그러면 내가 찾아서 또 굴리곤 한다. 밤마다 늘상 대여섯 번을 굴리면 먼동이 트더구나. 10년 사이에 해마다 그 횟수가 점차 줄어서 10년이 지난 이후에는 때로는 닷새 밤에 한 번 굴리고, 때로는 열흘 밤에 한 번 굴렸는데, 혈기가 쇠해진 뒤로는 더 이상 이 엽전을 굴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것을 열 겹이나 싸서 20여 년 동안이나 간직해 온 것은 엽전의 공로를 잊지 않으며 때로는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마치고서 모자는 서로 붙들고 울었다. 당시의 식자(識者)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이야말로 열녀라고 이를 만하다.”
고 했다.아! 그 모진 절개와 맑은 행실이 이와 같은데도 당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이름이 묻혀 후세에도 전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부가 의를 지켜 개가하지 않는 것이 마침내 온 나라의 상법(常法)이 되었으므로, 한번 죽지 않으면 과부의 집안에서 남다른 절개를 보일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정사를 보던 이듬해 계축년(1793, 정조 17) 의 어느 달 어느 날이다. 밤이 새려 할 무렵 내가 잠이 살짝 깼을 때, 마루 앞에서 몇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다가 또 탄식하고 슬퍼하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급히 알릴 일이 있는 모양인데, 내 잠을 깨울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를 높여,
“닭이 울었느냐?”
하고 묻자 좌우에서,“이미 서너 머리 울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밖에 무슨 일이 있느냐?”
“통인(通引) 박상효(朴相孝)의 조카딸로서 함양(咸陽)으로 출가하여 일찍 홀로 된 이가 그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약을 먹어 숨이 끊어지려 하니, 와서 구환해 달라고 급히 연락이 왔사옵니다. 그런데 상효가 마침 숙직 당번이라 황공하여 감히 사사로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빨리 가 보라고 명하고, 늦을녘에 미쳐서“함양의 과부가 소생했느냐?”
고 물었더니, 좌우에서“이미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길게 탄식하며“열녀로다, 그 사람이여!”
라고 하고 나서 뭇 아전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함양에 열녀가 났는데, 본시 안의(安義) 출신이라니 그 여자의 나이가 방금 몇 살이나 되고, 함양의 뉘 집에 시집갔으며, 어려서부터 심지와 행실은 어떠했는지 너희들 중에 아는 자가 있느냐?”
그러자 뭇 아전들이 한숨지으며 나아와 아뢰었다.“박녀(朴女)의 집안은 대대로 이 고을 아전입니다. 그 아비 이름은 상일(相一)이온대, 일찍 죽었고 이 외동딸만을 두었습니다. 어미 역시 일찍 죽어서 어려서부터 그 조부모에게서 자랐사온대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자 출가하여 함양 임술증(林述曾)의 처가 되었는데, 그 시댁 역시 대대로 고을 아전입니다. 술증이 본디 약하여 한 번 초례(醮禮)를 치르고 돌아간 지 반년이 채 못 되어 죽었습니다. 박녀는 지아비상을 치르면서 예(禮)를 극진히 하였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도 며느리된 도리를 다해 두 고을의 친척과 이웃들이 그 어짊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이러한 일이 있고 보니 과연 그 말이 맞습니다.”
어느 늙은 아전이 감개하여 말하였다.“박녀가 아직 시집가기 몇 달 전에 ‘술증의 병이 이미 골수에 들어 부부 관계를 맺을 가망이 만무하다 하니 어찌 혼인 약속을 물리지 않느냐.’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조부모가 넌지시 박녀에게 일러 주었으나 박녀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혼인 날짜가 박두하여 여자의 집에서 사람을 시켜 술증의 상태를 엿보게 하였더니, 술증이 비록 용모는 아름다우나 노점(勞漸 폐결핵)에 걸려 콜록콜록거리며 버섯이 서 있는 듯하고 그림자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으므로, 집안에서는 모두 크게 두려워하여 다른 중매쟁이를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박녀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전날 재봉한 옷들은 누구의 몸에 맞게 한 것이며, 누구의 옷이라 불렀던 것입니까? 저는 처음 지은 옷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하기에 집안에서는 그 뜻을 알고 마침내 기일을 정한 대로 사위를 맞이했으니, 비록 명색은 혼례식을 치렀다 하나 사실은 끝내 입혀보지 못한 옷만 지켰다고 합니다.”
얼마 후 함양 군수인 윤광석(尹光碩) 사또가 밤에 이상한 꿈을 꾸고 느낀 바가 있어 열부전(烈婦傳)을 지었고, 산청 현감(山淸縣監) 이면제(李勉齊) 사또도 박녀를 위해 전(傳)을 지었으며, 거창(居昌)의 신돈항(愼敦恒)은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고자 하는 선비였는데, 박녀를 위하여 그 절의의 전말을 엮었다.생각하면 박녀의 마음이 어찌 이렇지 않았으랴! 나이 젊은 과부가 오래 세상에 남아 있으면 길이 친척들이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고, 동리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상이 됨을 면치 못하니 속히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다고.
아! 슬프구나. 성복(成服)을 하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장사 지내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요, 장사를 지내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소상(小祥)이 있었기 때문이요, 소상을 지내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대상(大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상이 끝이 났으니 상기(喪期)가 다한 것이요, 한날 한시에 따라 죽어 마침내 처음 뜻을 완수했으니 어찌 열녀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주D-001]제(齊) 나라 …… 하였으니 : 제 나라의 현자 왕촉(王蠋)이 제 나라를 침략한 연(燕) 나라가 자신을 장수로 기용하겠다는 제안을 거부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숙한 여자는 지아비를 두 번 얻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02]백주(柏舟) : 《시경》 용풍(鄘風)의 편명으로, 위(衛) 나라 세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고 그의 아내인 공강(共姜)이 절개를 지키려 하였는데, 그녀의 부모가 이를 막고 재가를 시키려 하자 공강이 자신의 의지를 노래한 시라고 한다.
[주D-003]《경국대전(經國大典)》에 …… 하였으니 : 정직(正職)은 문무반(文武班)의 정식 벼슬을 가리킨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조에 “실행(失行)한 부녀와 재가(再嫁)한 부녀의 소생은 동반직(東班職)과 서반직(西班職)에 서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규정은 정조(正祖) 9년(1785) 《경국대전》과 《속대전(續大典)》 등을 통합하여 편찬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주D-004]오랫동안 …… 교화 : 원문은 ‘久道之化’인데, ‘久道’는 ‘久導’와 같다.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연암제각기(燕巖諸閣記)》 등에는 바로 위의 ‘우리 왕조〔國朝〕’ 앞에 공백을 둠과 동시에 이 구절에서도 ‘久道之 化’라 하여 중간에 공백을 두어 경의를 표했다.
[주D-005]한낮의 …… 버리고 : 당시 풍속에 과부는 외간 남자와 접촉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하는 방에 대낮에도 촛불을 켜 두었다. 죽기로 결심했으므로 더 이상 그러한 구차스러운 조치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주D-006]청환(淸宦) : 봉록은 많치 않으나 명예롭게 여겨졌던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의 하위 관직을 가리킨다. 학식과 문벌을 갖춘 인물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주D-007]제 그림자 위로하며 : 원문은 ‘弔影’인데, ‘형영상조(形影相弔)’라 하여 아무도 없고 자신의 몸과 그림자만이 서로를 위로한다는 뜻으로 의지할 데 없는 외톨이 신세를 표현한 말이다.
[주D-008]제(齊) 나라 …… 때문이다 : 이 부분이 열녀 함양박씨전의 서문에 해당된다.
[주D-009]통인(通引) :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던 아전을 말한다.
[주D-010]입혀보지 못한 옷만 지켰다고 합니다 : 부부 관계가 한 번도 성사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주D-011]이면제(李勉齊) : 원문은 ‘李侯勉齊’라고 되어 있는데, 후(侯)는 고대 중국의 제후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사또에 붙이는 경칭이다. 원문에는 이면제의 ‘齊’ 자가 ‘齋’ 자로 되어 있으나, 여러 이본들에 따라 바로잡았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의하면 이면제는 1743년생으로, 1783년 진사 급제하였다.
[주D-002]백주(柏舟) : 《시경》 용풍(鄘風)의 편명으로, 위(衛) 나라 세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고 그의 아내인 공강(共姜)이 절개를 지키려 하였는데, 그녀의 부모가 이를 막고 재가를 시키려 하자 공강이 자신의 의지를 노래한 시라고 한다.
[주D-003]《경국대전(經國大典)》에 …… 하였으니 : 정직(正職)은 문무반(文武班)의 정식 벼슬을 가리킨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조에 “실행(失行)한 부녀와 재가(再嫁)한 부녀의 소생은 동반직(東班職)과 서반직(西班職)에 서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규정은 정조(正祖) 9년(1785) 《경국대전》과 《속대전(續大典)》 등을 통합하여 편찬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주D-004]오랫동안 …… 교화 : 원문은 ‘久道之化’인데, ‘久道’는 ‘久導’와 같다.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연암제각기(燕巖諸閣記)》 등에는 바로 위의 ‘우리 왕조〔國朝〕’ 앞에 공백을 둠과 동시에 이 구절에서도 ‘久道之 化’라 하여 중간에 공백을 두어 경의를 표했다.
[주D-005]한낮의 …… 버리고 : 당시 풍속에 과부는 외간 남자와 접촉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하는 방에 대낮에도 촛불을 켜 두었다. 죽기로 결심했으므로 더 이상 그러한 구차스러운 조치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주D-006]청환(淸宦) : 봉록은 많치 않으나 명예롭게 여겨졌던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의 하위 관직을 가리킨다. 학식과 문벌을 갖춘 인물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주D-007]제 그림자 위로하며 : 원문은 ‘弔影’인데, ‘형영상조(形影相弔)’라 하여 아무도 없고 자신의 몸과 그림자만이 서로를 위로한다는 뜻으로 의지할 데 없는 외톨이 신세를 표현한 말이다.
[주D-008]제(齊) 나라 …… 때문이다 : 이 부분이 열녀 함양박씨전의 서문에 해당된다.
[주D-009]통인(通引) :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던 아전을 말한다.
[주D-010]입혀보지 못한 옷만 지켰다고 합니다 : 부부 관계가 한 번도 성사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주D-011]이면제(李勉齊) : 원문은 ‘李侯勉齊’라고 되어 있는데, 후(侯)는 고대 중국의 제후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사또에 붙이는 경칭이다. 원문에는 이면제의 ‘齊’ 자가 ‘齋’ 자로 되어 있으나, 여러 이본들에 따라 바로잡았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의하면 이면제는 1743년생으로, 1783년 진사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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