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영처고서(嬰處稿序)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28. 11:01

영처고서(嬰處稿序)

 

자패(子佩 유연(柳璉))가 말했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이 시를 지은 것이야말로! 옛사람의 시를 배웠음에도 그와 비슷한 점을 보지 못하겠다. 털끝만큼도 비슷한 적이 없으니 어찌 그 소리인들 비슷할 수 있겠는가? 야인(野人)의 비루함에 안주하고 시속(時俗)의 자질구레한 것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오늘날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그러므로 세월이 도도히 흘러감에 따라 풍요(風謠)도 누차 변하는 법이다. 아침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저녁에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으니, 천추만세(千秋萬世)토록 이제부터 옛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일컬어지는 이름이요, ‘비슷하다’는 것은 그 상대인 ‘저것’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무릇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비슷하기만 한 것이어서 저것은 저것일 뿐이요, 비교하는 이상 이것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일치하는 것을 아직껏 보지 못하였다.
종이가 하얗다고 해서 먹이 이를 따라 하얗게 될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과 닮았다 하더라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洞)에 푸른 기와로 이은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얼굴이 붉고 수염을 길게 드리운 이가 모셔져 있으니 영락없는 관운장(關雲長)이다. 학질(瘧疾)을 앓는 남녀들을 그 좌상(座牀) 밑에 들여보내면 정신이 놀라고 넋이 나가 추위에 떠는 증세가 달아나고 만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무서움도 없이 그 위엄스러운 소상(塑像)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데, 그 눈동자를 후벼도 눈을 깜짝이지 않고 코를 쑤셔도 재채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그 맛을 말할 수가 없으며, 이웃 사람의 초피(貂皮)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더불어 계절을 말할 수가 없듯이, 관운장의 가상(假像)에다 아무리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놓아도 진솔(眞率)한 어린아이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릇 시대와 풍속을 걱정하고 가슴 아파한 사람으로는 역사상 굴원(屈原)만 한 사람이 없는데도, 초(楚) 나라 풍속이 귀신을 숭상했기 때문에 귀신을 노래한 구가(九歌)를 지었으며, 한(漢) 나라는 진(秦) 나라의 옛것에 의거하여 진 나라의 땅에서 황제가 되고 진 나라의 성읍에다 도읍을 정하고 진 나라의 백성을 백성으로 삼았으되, 약법삼장(約法三章)에 있어서는 진 나라의 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지금 무관(懋官)은 조선 사람이다. 산천과 기후가 중화(中華) 땅과는 다르고 언어와 풍속도 한당(漢唐)의 시대와 다르다. 그런데도 만약 작법을 중화에서 본뜨고 문체를 한당에서 답습한다면, 나는 작법이 고상하면 할수록 그 내용이 실로 비루해지고, 문체가 비슷하면 할수록 그 표현이 더욱 거짓이 됨을 볼 뿐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구석진 나라이기는 하나 이 역시 천승(千乘)의 나라요, 신라와 고려가 비록 검박(儉薄)하기는 하나 민간에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으니, 그 방언을 문자로 적고 그 민요에다 운(韻)을 달면 자연히 문장이 되어 그 속에서 ‘참다운 이치〔眞機〕’가 발현된다. 답습을 일삼지 않고 빌려 오지도 않으며, 차분히 현재에 임하여 눈앞의 삼라만상을 마주 대하니, 오직 이 시가 바로 그러하다.
아, 《시경》에 수록된 삼백 편의 시는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이름을 들지 않은 것이 없고, 여항(閭巷)의 남녀가 나눈 말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패국(邶國)과 회국(檜國) 사이에는 지리적으로 풍토가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유역에는 백성들이 그 풍속을 각기 달리하므로, 시를 채집하는 사람이 열국(列國)의 국풍(國風)으로 만들어 그 지방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고찰하고 그 풍속을 파악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관(懋官)의 이 시가 예스럽지 않은 점에 대해 어찌 다시 의아해하겠는가. 만약 성인(聖人)이 중국에 다시 나서 열국의 국풍을 관찰한다면, 이 《영처고(嬰處稿)》를 상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고, 우리나라 남녀의 성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조선의 국풍’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子佩曰陋哉。懋官之爲詩也。學古人而不見其似也。曾毫髮之不類。詎髣髴乎音聲。安野人之鄙鄙。樂時俗之瑣瑣。乃今之詩也。非古之詩也。余聞而大喜曰。此可以觀。由古視今。今誠卑矣。古人自視。未必自古。當時觀者。亦一今耳。故日月滔滔。風謠屢變。朝而飮酒者。夕去其帷。千秋萬世。從此以古矣。然則今者對古之謂也。似者方彼之辭也。夫云似也似也。彼則彼也。方則非彼也。吾未見其爲彼也。紙旣白矣。墨不可以從白。像雖肖矣。畵不可以爲語。雩祀壇之下。桃渚之衕。靑甍而廟。貌之渥丹而鬚儼然。關公也。士女患瘧。納其牀下。神褫魄。遁寒祟也。孺子不嚴。瀆冒威尊。爬瞳不瞬。觸鼻不啑。塊然泥塑也。由是觀之。外舐水匏。全呑胡椒者。不可與語味也。羡鄰人之貂裘。借衣於盛夏者。不可與語時也。假像衣冠。不足以欺孺子之眞率矣。夫愍時病俗者。莫如屈原。而楚俗尙鬼。九歌是歌。按秦之舊。帝其土宇。都其城邑。民其黔首。三章之約。不襲其法。今懋官朝鮮人也。山川風氣地異中華。言語謠俗世非漢唐。若乃效法於中華。襲體於漢唐。則吾徒見其法益高而意實卑。軆益似而言益僞耳。左海雖僻國。亦千乘。羅麗雖儉。民多美俗。則字其方言。韻其民謠。自然成章。眞機發現。不事沿襲。無相假貸。從容現在。卽事森羅。惟此詩爲然。嗚呼。三百之篇。無非鳥獸草木之名。不過閭巷男女之語。則邶檜之間。地不同風。江漢之上。民各其俗。故釆詩者以爲列國之風。攷其性情。驗其謠俗也。復何疑乎此詩之不古耶。若使聖人者。作於諸夏。而觀風於列國也。攷諸嬰處之稿。而三韓之鳥獸艸木。多識其名矣。貊男濟婦之性情。可以觀矣。雖謂朝鮮之風可也。


 


 

[주D-001]이것이야말로 …… 점이다 : 원문은 ‘此可以觀’인데,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의 시로써 풍속의 성쇠(盛衰)를 “살필 수 있다.〔可以觀〕”고 하였다.
[주D-002]옛날을 …… 따름이다 : 옛날을 이상화하고 지금을 말세로 여기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복고적 사상을 비판한 말이다.
[주D-003]우사단(雩祀壇) : 서울 남산 서편 기슭에 있었던 기우제 지내던 단(壇)이다. 사방이 40척이고, 구망(句芒), 축융(祝融), 후토(后土), 욕수(蓐收), 현명(玄冥), 후직(后稷)을 모셨다. 유월 상순에 제사를 드렸다. 남관왕묘(南關王廟)가 그 부근인 남대문 밖 도저동(桃渚洞)에 있었는데 선조(宣祖) 때 명 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세웠다고 한다.
[주D-004]구가(九歌) : 태일신(太一神)인 동황태일(東皇太一), 구름신인 운중군(雲中君), 상수(湘水)의 신인 상군(湘君),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상부인(湘夫人) 등 귀신들을 노래한 11수로 되어 있다.
[주D-005]약법삼장(約法三章) : 한 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진 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한 뒤, 진 나라의 가혹하고 번다한 법률 대신 삼장(三章), 즉 살인자는 죽이고 상해자와 도적은 처벌한다는 세 가지 법만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06]실로 : 원문은 ‘實’로 되어 있는데, 이본에는 ‘益’으로 되어 있다.
[주D-007]《시경》에 …… 없고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의 시를 공부하면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주D-008]여항(閭巷)의 …… 않는다 : 주자(朱子)는 시집전서(詩集傳序)에서 《시경》의 국풍(國風)은 여항의 가요에서 나온 것이 많으며, 남녀가 함께 노래하면서 각자의 감정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주D-009]우리나라 남녀의 성정 : 원문은 ‘貊男濟婦之性情’인데, ‘貊男’은 강원도 남자, ‘濟婦’는 제주도 여자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한다. 강원도는 옛날에 맥국(貊國)의 땅이었다고 한다. 《연암집 卷3 送沈伯修出宰狼川序》 또한 《연암집》 권7 ‘이방익의 사건을 기록함(書李邦翼事)’에서 제주도 사람을 ‘제인(濟人)’이라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