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증 사헌부 지평 윤군(尹君) 묘갈명(墓碣銘)
효자의 휘(諱)는 관주(觀周)요, 자는 중빈(仲賓)으로, 칠원(漆原) 사람이다. 그의 7세조 율(霱)이 명 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을 따라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순천(順天)에 머물렀는데, 도독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마침내 남쪽에 그대로 남아 자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군(君)에 이르기까지 6세가 연달아 진사(進士)였다.
군은 효도로써 고을에 알려졌으며, 계모를 섬김에 있어서도 효성이 지극하였다. 군이 죽은 후 고을의 선비들이 이러한 사실을 글로 적어 관찰사에게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 글 속에는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군의 맏아들 모(某)가 또한 효도로써 알려졌는데, 그가 길에까지 쫓아 나와서 그 글을 빼앗아 구기고 울면서 말하기를,
하니, 고을의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향중(鄕中)에서 의논을 모으자 모두들 하는 말이,
하고는, 그 글을 고쳐서 말하기 어려운 사실은 없애 버리고 그 내용을 심오하게 표현하여 관찰사에게 바치니, 관찰사가 그의 효를 살펴보았으나 증빙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내버려 두고 조정에 아뢰지 않았다.
그 후 관찰사가 세 번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장계(狀啓)를 올려 그 사안이 예조(禮曹)에 내려졌다. 그러나 예조에서도 효자가 어버이를 섬긴 시말을 보고한 글이 애매모호하여 그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 역시 내버려 둔 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 이에 고을의 선비 14인이 도내 57개 고을 836인의 연명장을 가지고서 예조의 문 아래에 서서 큰 소리로,
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그 언사가 강개하니, 예관(禮官)이 “알겠다.”고 말하고는 그날로 즉시 아뢰어 효자로 정려(旌閭)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이 도를 안찰(按察)하는 어사(御史)가 장계를 올려, 사헌부 지평에 추증하였다.
묘는 군 소재지 남쪽 10리 지점 곤좌(坤坐)의 묘역에 있다. 세 아들 모(某), 모(某), 모(某)를 두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효자란 외쳐댄다고 해서 만들어지겠는가? / 孝可聲
외쳐대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 如可聲也
크게 탄식하며 명을 썼으리라. / 太息而銘
孝子贈司憲府持平尹君墓碣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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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可聲。如可聲也。太息而銘。
[주D-002]어버이를 …… 있습니다 : ‘어버이를 위해서는 그 잘못을 숨겨 준다〔爲親者諱〕’는 것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오는 말이다.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觀過知仁〕’는 것은 《논어》 이인(里仁)에 출처를 둔 고사성어이다. 또한 《논어》 자로(子路)에서 아비가 양을 훔친 사실을 증언한 아들을 정직하다고 칭찬한 섭공(葉公)에 대해 공자는 “우리 향당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아비는 아들의 잘못을 숨겨 주고, 아들은 아비의 잘못을 숨겨 주나니, 정직은 바로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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