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김신선전(金神仙傳)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09:49

김신선전(金神仙傳)

 

김 신선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들어 아내와 한 번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서는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화식(火食)을 물리치고 벽을 향하여 앉아서,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만에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국내의 명산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항상 수백 리 길을 걷고서야 때가 얼마나 되었나 해를 살폈으며, 5년에 신을 한 번 바꿔 신고, 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걸음이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도 그는,

“물을 만나 바지를 걷고 건너기도 하고,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느라 이렇게 늦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신선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듣자니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더욱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윤생(尹生)과 신생(申生)을 시켜서 가만히 찾아보게 하여, 한양 안을 열흘 동안 뒤졌으나 만나지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홍기가 서학동(西學洞)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 바로 그 사촌 형제의 집으로 거기다 처자를 맡겨 두었습디다. 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의 부친은 한 해에 대략 서너 번 찾아올 뿐이지요. 부친의 친구 분이 체부동(體府洞)에 살고 있는데 그분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김 봉사(金奉事)라 하더군요. 누각동(樓閣洞) 김 첨지(金僉知)는 바둑을 좋아하고, 그 뒷집 이 만호(李萬戶)는 거문고를 좋아하고, 삼청동(三淸洞) 사는 이 만호는 손님을 좋아하고, 미원동(美垣洞) 사는 서 초관(徐哨官)모교(毛橋) 사는 장 첨사(張僉使)와 사복천(司僕川) 가에 사는 지 승(池丞)은 모두 손님을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안〔里門內〕 조 봉사(趙奉事)라는 분도 역시 부친의 친구 분인데 그 집엔 이름난 화초가 가득 심겨져 있고, 계동(桂洞) 유 판관(劉判官)은 기서(奇書)와 고검(古劍)을 가지고 있어, 부친이 늘 그분들 집에서 놀며 지내고 있으니, 그대가 만나 뵙고 싶으면 이 몇 집을 찾아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집을 다니며 일일이 물어보았으나 어느 집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저물녘에 한 집에 들렀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타고 있고 두 손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허연 머리에 관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김홍기를 만났구나 생각하고 한참 동안 서서 기다렸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 가기에 나아가, ‘어느 분이 김 장인(金丈人 장인은 노인에 대한 경칭이다.)이신지 감히 여쭙습니다.’ 했지요. 주인이 거문고를 밀쳐 놓고 대답하기를, ‘좌중에 김씨 성 가진 사람은 없소. 그대는 왜 묻는가?’ 하기에, ‘저는 목욕재계하고서 감히 찾아와 뵙는 것이오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소서.’ 하였더니, 주인이 웃으며, ‘그대가 아마 김홍기를 찾는가 보오. 홍기는 오지 않았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오시는지 감히 여쭙습니다.’ 하였더니, ‘홍기란 사람은 묵어도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놀아도 일정한 곳이 없으며, 와도 온다고 예고하지 않고 가도 다시 오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으며, 하루에 두세 번 올 때도 있는 반면 안 올 때는 해가 지나도 오지 않소. 듣자니 홍기가 창동(倉洞)이나 회현방(會賢坊)에 주로 있고, 또 동관(董關)ㆍ배오개ㆍ구리개ㆍ자수교(慈壽橋)ㆍ사동(社洞)ㆍ장동(壯洞)ㆍ대릉(大陵)ㆍ소릉(小陵) 등지에도 오락가락하며 놀고 자곤 한다는데, 내가 그 주인의 이름은 거의 다 모르고 유독 창동만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서 물어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가 오지 않은 것이 벌써 두어 달 되었소. 내 들으니 장창교(長暢橋)에 사는 임 동지(林同知)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홍기와 더불어 술 겨루기를 한다는데, 지금 임씨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집을 찾아갔더니, 임 동지라는 이는 나이 80여 세여서 자못 귀가 먹었는데, 하는 말이, ‘쯧쯧, 어젯밤에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오늘 아침에 취기가 남은 채로 강릉(江陵)에 간다고 떠났소.’ 하였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있다 묻기를, ‘김홍기란 이에게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하니,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단지 밥 먹는 것을 못 보았소.’ 하였고, ‘생김생김이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키는 7척이 넘고 몸집은 여위고 수염이 좋으며, 눈동자는 파랗고 귀는 길고 누렇지요.’ 하였으며, ‘술은 얼마나 마시오?’ 하였더니,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데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소. 예전에 취하여 길에 누워버린 적이 있었는데, 포리(捕吏)가 잡아다가 이레 동안 구속했으나 그 술이 깨지 않으므로 마침내 놓아주었다오.’ 하였습니다. ‘말할 때는 어떱습디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앉아서 졸고 있다가, 그 말이 끝나면 계속해서 웃기만 한다오.’ 하였으며, ‘몸가짐은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조용한 품은 참선(參禪)하는 중 같고, 꾸밀 줄 모르기는 수절하는 과부 같았지요.’ 하였습니다.”

나는 한때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나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신생 역시 수십 집을 찾아다녔어도 다 못 만났고, 그의 말도 윤생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기는 나이가 백여 살이고, 더불어 노는 사람들도 모두 노인이다.”

하고, 어떤 이는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김 신선이 지리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지 지금 하마 수십 년이 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지금도 컴컴한 바위굴에 번쩍번쩍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게 바로 노인의 눈빛이다. 산골짜기에서 이따금 기지개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홍기는 단지 술을 잘 마실 뿐이요, 딴 방술(方術)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그 이름을 빌려서 행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동자 복(福)을 시켜서 가서 찾아보라 했으나 끝내 만나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때는 계미년(1763, 영조 39)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에 나는 동으로 바닷가를 여행하다가 저녁나절 단발령(斷髮嶺)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만이천 개나 된다고 하는데 흰빛을 띠고 있었다. 산에 들어가 보니 단풍나무가 많아서 한창 탈 듯이 붉었으며, 싸리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예장(豫章)나무는 다 서리를 맞아 노랗고, 삼나무, 노송나무는 더욱 푸르르며, 사철나무가 특히나 많았다. 산중의 갖가지 기이한 나무들은 다 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둘러보고 즐거워했다. 가마를 멘 중에게 묻기를,

“이 산중에 도승이 있느냐? 있다면 그 도승과 더불어 놀 수 있느냐?”

하니,

“그런 중은 없고, 선암(船菴)에 벽곡(辟穀)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소. 누구는 말하기를 영남 선비라고 하는데, 꼭 알 수는 없습니다. 선암은 길이 험하여 당도하는 자가 없습니다.”

했다. 내가 밤에 장안사(長安寺)에 앉아서 여러 중들에게 물으니, 모두 처음의 대답과 같았으며, 벽곡하는 자가 100일을 채우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지금 거의 90일 남짓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몹시 기뻐서 ‘아마 그 사람이 선인(仙人)인가 보다.’ 생각하고 당장에 밤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 이튿날 아침을 기다려서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 같이 갈 사람을 기다렸다. 거기서 한참 동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약조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게다가 관찰사가 군읍(郡邑)을 순행하다가 마침내 산에 들어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쉬고 있었으므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고 음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했으며, 매양 구경 나갈 때는 따라다니는 중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선암은 길이 끊기고 험준하여 도저히 혼자 도달할 수는 없으므로 영원(靈源)과 백탑(白塔) 사이를 스스로 오가며 애만 태운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날이 오랫동안 비가 내려 산중에 엿새 동안을 묵고서야 선암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선암은 수미봉(須彌峯) 아래에 있었으므로 내원통(內圓通)으로부터 20여 리를 들어갔는데, 큰 바위가 깎아질러 천 길이나 되었으며 길이 끊어질 때마다 쇠줄을 부여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 당도하고 보니 뜨락은 텅 비어 우는 새 한 마리도 없고, 탑(榻) 위에는 조그마한 구리부처가 놓여 있고 신 두 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이리저리 서성이며 우두커니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암벽 아래에다 이름을 써 놓고 탄식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노상 구름 기운이 감돌고 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어떤 책에는 “신선〔仙〕이란 산사람〔山人〕을 의미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책에는 “ ‘산에 들어가 있는 사람〔入山〕’을 신선〔屳〕이라고 한다.” 하기도 한다. 또한 신선〔僊〕이란 너울너울〔僊僊〕 가볍게 날아오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벽곡하는 사람이 꼭 신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뜻을 얻지 못해 울적하게 살다 간 사람일 것이다.

 

金神仙名弘基。年十六娶妻。一歡而生子。遂不復近。辟糓面壁坐。坐數歲。身忽輕。遍遊國內名山。常行數百里。方視日早晏。五歲一易屨。遇險則步益捷。甞曰。褰而涉。方而越。故遲我行也。不食故人不厭其來客。冬不絮。夏不扇。遂以神仙名。余甞有幽憂之疾。盖聞神仙方技。或有奇效。益欲得之。使尹生申生陰求之。訪漢陽中。十日不得。尹生言甞聞弘基家西學洞。今非也。乃其從昆弟家。寓其妻子。問其子。言父一歲中率四三來。父友在體府洞。其人好酒而善歌。金奉事云。樓閣洞金僉知好碁。後家李萬戶好琴。三淸洞李萬戶好客。美垣洞徐哨官。毛橋張僉使。司僕川邊池丞。俱好客而喜飮。里門內趙奉事。亦父友也。家蒔名花。桂洞劉判官。有奇書古釖。父常遊居其間。君欲見。訪此數家。遂行歷問之。皆不在。暮至一家。主人琴。有二客皆靜默。頭白而不冠。於是自意得金弘基。立久之。曲終而進曰。敢問誰爲金丈人。主人捨琴而對曰。座無姓金者。子奚問曰。小子齋戒而後。敢來求也。願老人無諱。主人笑曰。子訪金弘基耶。不來耳。敢問來何時。曰。是居無常主。遊無定方。來不預期。去不留約。一日中或再三過。不來則亦閱歲。聞金多在倉洞會賢之坊。且董關梨峴銅峴慈壽橋社洞壯洞大陵小陵之間。甞往來遊居。然皆不知其主名。獨倉洞吾知之。子往問焉。遂行訪其家問焉。對曰。是不來者甞數月。吾聞長暢橋林同知喜飮酒。日與金角。今在林否也。遂訪其家。林同知八十餘。頗重聽曰。咄夜劇飮。朝日餘醉。入江陵。於是悵然久之。問曰。金有異歟。曰。一凡人。特未甞飯。狀貌何如。曰。身長七尺餘。癯而髯。瞳子碧。耳長而黃。能飮幾何。曰。飮一杯醉。然一斗醉不加。甞醉臥塗。吏得之。拘七日不醒。乃釋去。言談何如。曰。衆人言輒坐睡。談已輒笑不止。持身何如。曰。靜若參禪。拙如守寡。余甞疑尹生求不力。然申生亦訪數十家。皆不得。其言亦然。或曰。弘基年百餘。所與遊皆老人。或曰。不然。弘基年十九娶。卽有男。今其子纔弱冠。弘基年計今可五十餘。或言金神仙。採藥智異山。隳崖不返。今已數十年。或言巖穴窅冥。有物熒熒。或曰。此老人眼光也。山谷中。時聞長欠聲。今弘基惟善飮酒。非有術。獨假其名而行云。然余又使童子福往求之。終不可得。歲癸未也。明年秋。余東遊海上。夕日登斷髮嶺。望見金剛山。其峯萬二千云。其色白。入山。山多楓。方丹赤杻梗柟豫章。皆霜黃。杉檜益碧。又多冬靑樹。山中諸奇木。皆葉黃紅。顧而樂之。問轝僧。山中有異僧。得道術可與遊乎。曰。無有。聞船菴有辟糓者。或言嶺南士人。然不可知。船菴道險。無至者。余夜坐長安寺。問諸僧衆。俱對如初言。辟糓者。滿百日當去。今幾九十餘日。余喜甚。意者其仙人乎。卽夜立欲往。朝日坐眞珠潭下。候同遊眄睞久之。皆失期。不至。又觀察使巡行郡邑。遂入山。流連諸寺間。守令皆來會。供張廚傳。每出遊。從僧百餘。船菴道絶峻險。不可獨至。甞自往來靈源白塔之間。而意悒悒。旣而天久雨。留山中六日。乃得至船菴。在須彌峯下。從內圓通行二十餘里。大石削立千仞。路絶。輒攀鐵索。懸空而行。旣至。庭空無禽鳥啼。榻上小銅佛。唯二屨在。余悵然徘徊。立而望之。遂題名巖壁下。歎息而去。常有雲氣風瑟然。或曰。仙者山人也。又曰。入山爲仙也。又僊者。僊僊然輕擧之意也。辟糓者。未必仙也。其鬱鬱不得志者也。




 

[주D-001]홍기(弘基) : 김홍기는 당시의 실존 인물로,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권3에는 ‘金洪器’로 소개되어 있다.
[주D-002]윤생(尹生)과 신생(申生) :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에서 연암은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에게 여염에서 일어난 얘깃거리가 될 만한 일들을 물었다고 했는데, 윤생과 신생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듯하다.
[주D-003]서학동(西學洞) : 한양의 사학(四學)의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던 동네로, 현재 태평로 1가 조선일보사 부근이다.
[주D-004]누각동(樓閣洞) : 누각골이라고도 한다.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府洞)에 걸쳐 있었던 마을이다. 서리(胥吏)들의 거주지로 인왕산 아래 누각이 있었으므로 누각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주D-005]미원동(美垣洞) : 미동(美洞)을 가리키는 듯하다. 미동은 현재 을지로 1가 소공동 북쪽에 해당한다.
[주D-006]서 초관(徐哨官) : 초관(哨官)은 군대의 편제인 초(哨)의 우두머리로 종 9 품의 벼슬이다.
[주D-007]모교(毛橋) : 청계천에 놓인 다리의 하나로, 모전교(毛廛橋)라고도 한다. 현재의 무교동과 서린동의 사거리 지점에 있었다.
[주D-008]사복천(司僕川) : 한양 중부 수진방(壽進坊 현재 수송동 일대)에 있던 사복시(司僕寺) 앞의 계천(溪川)이다.
[주D-009]지 승(池丞) : 승(丞)은 서(署)ㆍ시(寺)ㆍ감(監) 등 중앙의 각 관청에 있었던, 종 5 품에서 종 9 품에 걸친 벼슬이다.
[주D-010]이문안〔里門內〕 : 한양 중부에 있던 동네로, 이문동(里門洞)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종로구 공평동 삼성타워(예전 화신백화점 자리) 뒤편에서 태화빌딩(옛날 順化宮과 태화관 자리)에 이르는 골목 일대에 해당한다.
[주D-011]창동(倉洞) : 남대문 안 선혜청(宣惠廳)의 창고 부근에 있었던 동네로, 현재 남대문 시장이 있는 남창동 일대이다.
[주D-012]동관(董關) …… 소릉(小陵) : 동관은 미상(未詳)이다. 배오개는 현재 종로 4가 인의동에 있었던 고개이고, 구리개는 현재 을지로 입구, 롯데백화점 맞은편에 있었던 고개이다. 자수교는 현재 옥인동과 효자동ㆍ궁정동이 만나는 곳에 있던 다리로, 조선 시대에 후궁들의 거처로 쓰인 자수궁(慈壽宮)이 있었던 곳이어서 자수궁교라고도 하였다. 사동은 사직단(社稷壇 : 현재 사직공원) 부근의 동네이다. 장동은 장의동(壯義洞)이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효자동ㆍ궁정동ㆍ청운동 일대이다. 대릉과 소릉은 각각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을 가리킨다. 원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중구 정동 일대이다.
[주D-013]장창교(長暢橋) :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의 하나로 한양 중부 장통방(長通坊 : 현재 장교동, 관철동 일대)에 있었다. 장창교(長倉橋), 장통교(長通橋), 장교(長橋)라고도 불렸다.
[주D-014]홍기가 …… 것이다 :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작품의 서두에서는 김홍기가 16세에 장가들었다고 하였다. 설령 그가 열아홉에 장가들었다고 해도 그때 낳은 아들이 스무 살 전후가 되었다면 홍기의 현재 나이는 마흔 살쯤이라야 한다.
[주D-015]그 이듬해 …… 바라보았다 : 박종채의 《과정록》에는 연암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2년 뒤인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주D-016]선암(船菴) : 내금강(內金剛) 표훈사(表訓寺)에 딸린 암자이다.
[주D-017]진주담(眞珠潭) : 금강산 입구 만폭동(萬瀑洞)의 팔담(八潭) 중 가장 장대한 명승지이다.
[주D-018]영원(靈源)과 백탑(白塔) : 골짜기의 이름으로, 내금강 명경대(明鏡臺) 구역에 있는 명승지들이다.
[주D-019]신 …… 뿐이었다 : 신선이 득도하여 승천(昇天)한 증거로 흔히 신발만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든다.
[주D-020]나는 : 원문은 ‘余’인데, 이본에는 ‘除’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자면 ‘除’는 섬돌의 뜻으로 앞 구에 연결되어 “신 두 짝만 섬돌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로 해석된다.
[주D-021]어떤 …… 의미한다 : 《석명(釋名)》이나 《자휘(字彙)》 등의 사전류에서 ‘仙’ 자를 풀이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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