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醉踏雲從橋記|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28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7월 열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 이희경(李喜經))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원약허(元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呂生), 정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무관(李懋官 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작별 인사하고 가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았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도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 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하였다. 원덕이 웃으면서,

하고서,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성언이 질책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를 아니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하였으므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三更) 사점(四點)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는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獒〕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싸고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 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과시한다. 세간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犮犮〕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행(使行)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무관이 취중에 그놈의 자(字)를 ‘호백(豪伯)’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무관이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蓮玉 유연(柳연))이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 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無恙)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히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城)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것 같았다.

 

醉踏雲從橋記

 

孟秋十三日夜。朴聖彥與李聖緯,弟聖欽,元若虛,呂生,鄭生,童子見龍。歷携李懋官至。時徐參判元德先至在座。聖彥盤足橫肱坐。數視夜。口言辭去。然故久坐。左右視莫肯先起者。元德亦殊無去意。則聖彥遂引諸君俱去。久之童子還言。客已當去。諸君散步街上。待子爲酒。元德笑曰。非秦者逐。遂起相携。步出街上。聖彥罵曰。月明。長者臨門。不置酒爲懽。獨留貴人語奈何。令長者久露立。余謝不敏。聖彥囊出五十錢沽酒。少醉。因出雲從衢。步月鍾閣下。時夜鼓已下三更四點。月益明。人影長皆十丈。自顧凜然可怖。街上群狗亂嘷。有獒東來。白色而瘦。衆環而撫之。喜搖其尾。俛首久立。甞聞獒出蒙古。大如馬。桀悍難制。入中國者。特其小者。易馴。出東方者。尤其小者。而比國犬絶大。見恠不吠。然一怒則狺狺示威。俗號胡白。其絶小者。俗號友友。種出雲南。皆嗜胾。雖甚飢。不食不潔。嗾能曉人意。項繫赫蹄書。雖遠必傳。或不逢主人。必啣主家物而還。以爲信云。歲常隨使者至國。然率多餓死。常獨行不得意。懋官醉而字之曰。豪伯。須臾失其所在。懋官悵然東向立。字呼豪伯。如知舊者三。衆皆大笑。鬨街群狗。亂走益吠。遂歷叩玄玄。益飮大醉。踏雲從橋。倚闌干語曩時。上元夜蓮玉舞此橋上。飮茗白石家。惠風戱曳鵝頸數匝。分付如僕隷狀。以爲笑樂。今已六年。惠風南遊錦江。蓮玉西出關西。俱能無恙否。又至水標橋。列坐橋上。月方西隨正紅。星光益搖搖圓大。當面欲滴露重。衣笠盡濕。白雲東起橫曳。冉冉北去。城東蒼翠益重。蛙聲如明府昏聵。亂民聚訟。蟬聲如黌堂嚴課。及日講誦。鷄聲如一士矯矯。以諍論爲己任。




 

[주C-001]운종교(雲從橋) : 한양의 종로 네거리 종루(鐘樓 : 종각〈鐘閣〉) 근처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주D-001]박성언(朴聖彦) : 1743~1819. 서자(庶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적형(嫡兄) 박제도(朴齊道)로, 성언은 그의 자이다.
[주D-002]서원덕(徐元德) : 1738~1802. 서유린(徐有隣)으로, 원덕은 그의 자이다.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경기도ㆍ충청도ㆍ전라도의 관찰사와 형조ㆍ병조ㆍ호조ㆍ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주D-003]진(秦) 나라 …… 쫓아내는구려 : 원문은 ‘非秦者逐’인데, 이사(李斯)의 간축객서(諫逐客書)에 나오는 말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객경(客卿) 즉 진 나라 출신이 아닌 관리들을 추방하려 하자 이사가 글을 올려 “진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떠나게 하고, 객경이 된 자는 추방하는〔非秦者去 爲客者逐〕” 축객령(逐客令)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추방을 면하고 복직되었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文選 卷39 上書秦始皇》 여기서 서유린은 그와 같은 표현을 써서, 일행이 아닌 자신을 따돌리려는 것을 농담 섞어 항의한 것이다.
[주D-004]삼경(三更) 사점(四點) : 현대 시각으로 밤 12시 반쯤이다. 3경은 밤 11시에서 다음날 오전 1시까지인데, 1경은 5점으로 1점은 24분이다.
[주D-005]서쪽으로 기울어 : 원문은 ‘西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西墮’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