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앙(公孫鞅)이 진(秦) 나라에 들어가다
신(臣) 아무개는 삼가 답합니다.
예로부터 신하가 그 임금에게 간언을 올림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든 지성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풍언(諷言 넌지시 풍자함)으로써 간하는 것이 배우의 익살에 가깝고, 궤변으로써 대답하는 것이 회휼(回遹)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옛사람을 논한 후세의 논자(論者)들은 또한 그들의 간언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비난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죽은 뒤에 자신의 시신을 늘어놓게 한 일도 있었으나 군자가 오히려 그의 곧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숙좌가 위앙을 천거한 것은 곧은 점으로는 사어(史魚)와 같고, 속임수를 쓴 점으로는 소하(蕭何)와 같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앙의 나라 다스림과 한신(韓信)의 군사 거느림은 오직 크게 써야 할 능력이지 작은 일로써 시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길가에 재를 버리는 데에서 법을 세우고, 목재 하나 옮기는 데에서 상(賞)을 미덥게 한 것은 곧 나라를 부유케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는 술책으로서, 이를 작은 관직에서나 일개 현(縣)에서 시험했다면, 대중의 생각과 어긋나고 풍속을 놀라게 하여 당장에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며, 아무리 하루아침에 경상(卿相)의 자리에 앉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맡기지 않았다면 위앙이 큰 일을 하지 못하였을 것 또한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평상시 일 없는 날에 위앙을 추천하고 아뢸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하는 자도 힘이 되지 못할까를 항상 걱정하고, 듣는 자도 깊이 신뢰할 수 없음을 늘 괴로워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는 일과 그의 말을 살피는 방법은 인재를 등용하는 보통의 방법에 불과하며,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은 단지 약한 나라의 대부(大夫)에게나 적용할 방법일 뿐이니, 도리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침저녁 좌우로 모시던 날에는 우선 참고 있다가 병문안을 온 임금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위앙을 천거한 것은, 죽음에 임박하여 비장한 말로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자신의 말을 반드시 믿게 하기에 부족하다 여겨 마지막에는 그를 죽여 버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비단 임금을 격동하여 그 부탁을 굳히자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를 놓아주어 국경을 벗어나게 한다면 진실로 위(魏) 나라에 후일의 근심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충신이 나라를 근심하는 고심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시신을 늘어놓게 한 직간(直諫)에도 부끄럼이 없다 할 것입니다.
소하가 한신을 천거한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소하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한 고조가 등용하지 않자, 결국은 한신을 추적했노라는 궤변을 하여 고조를 격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 한신은 적국의 한 도망병에 불과한데, 그를 위해 하루아침에 단장(壇場)을 만들고 갑작스레 상장(上將)의 인(印)을 수여하는 것이 충격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공숙좌의 지혜가 한 고조의 총명함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공숙좌는 단지 혜왕의 일개 구신(具臣)이요 위앙의 하류(下流)에 불과한 자입니다. 맹자(孟子)도 일찍이 위 나라에 갔었는데 공숙좌가 그 임금에게 천거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인의(仁義)의 설이 천하를 통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진 효공(秦孝公)을 논하는 자들은 그가 위앙을 등용했다 해서 현명하다 하고, 양 혜왕(梁惠王)을 논하는 자들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해서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설령 맹자가 진 나라에 갔다 해도 효공(孝公)은 반드시 그를 등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럴 줄을 아느냐 하면, 위앙이 먼저 제왕(帝王)의 도로써 말하자 효공이 이따금 졸았으니, 맹자라면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펴는 따위는 반드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약에 혜왕이 위앙을 직접 보았다면 반드시 허둥지둥 빗자루를 끼고 맞았을 것이니, 공숙좌의 천거가 없었더라도 나라를 들어 그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느냐 하면, 처음 맹자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 할지를 물은 것으로 보아, 공실(公室)을 강화하고 사문(私門)을 막아야 한다는 위앙의 주장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술책이 아닌 것이 없으며 모두 혜왕이 듣기 좋아하는 말들이었으니, 혜왕이 부국강병의 공렬을 이루는 것이 어찌 진 효공보다 뒤졌겠습니까.
公孫鞅入秦
[주D-001]남이 …… 있겠는가 : 위(魏) 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가 병이 위중하자 혜왕(惠王)이 병문안을 가서 그가 죽은 후의 대책을 물었더니 공숙좌가 대답하기를, “공손앙(公孫鞅)이 나이 비록 젊으나 기재(奇才)가 있으니 왕께서 온 나라를 들어다 맡기소서.” 하니,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려 하였다. 이에 다시 “왕께서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시겠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서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런 다음 공손앙을 불러다 “신하보다 임금을 우선시하는 마음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빨리 도망치거라.” 하니, 공손앙이 “왕이 나를 등용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니 나를 죽이라는 말 또한 어찌 듣겠습니까?” 하고는 끝내 도망가지 않았다. 한편 혜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공숙이 병이 심하니 슬픈 일이오만, 나더러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게 하려 하니, 어찌 앞뒤 안 맞는 소리가 아니오.〔豈不悖哉〕”라고 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02]한신을 …… 없다 : 승상 소하(蕭何)가 도망친 한신(韓信)을 데려와 한 고조에게 천거하면서, “왕께서 한중(漢中)에서 영원히 왕으로 지내고 싶으시면 한신을 쓸 일이 없겠으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와도 일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03]성실하고 …… 때문이다 : 원문은 ‘老實無 缺’로 되어 있으나,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老實無妄耳’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4]회휼(回遹)함 : 간사하고 편벽되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정책이 회휼하니 언제 멈출 건가.〔謀猶回遹 何日斯沮〕”라고 하였다.
[주D-005]심지어는 …… 인정하였습니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곤서(困誓)에 위(衛) 나라 영공(靈公)이 어진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지 않고 어질지 못한 미자하(彌子瑕)를 등용하자 대부(大夫) 사어(史魚)가 달려가 이를 간하였으나 영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어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하자 아들을 불러다 놓고, “내가 위 나라 조정에 거백옥을 등용하지도 못하고 미자하를 물리치지도 못하였다. 이는 내가 임금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니 죽어도 장례를 치를 수가 없구나.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창문 아래에다 그냥 두거라.”라고 하였다. 영공이 조문을 왔다가 이상하게 여겨 아들에게 물어서 그 연유를 알고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곧바로 거백옥을 등용하였다. 이에 대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孔子)는 “곧도다,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구나.”라는 말로 그를 칭송하였다.
[주D-006]길가에 …… 세우고 : 공손앙이 변법(變法)을 만들면서 길가에 재를 버리는 사소한 잘못을 중형에 처함으로써 큰 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였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주D-007]목재 …… 것 : 공손앙이 변법을 제정한 다음 이를 시행하기에 앞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도성의 남문에 세 길〔丈〕이 되는 목재를 세워 놓고 이를 북문까지 옮겨다 놓는 사람에게는 50금(金)을 상으로 주겠다고 선포한 후 목재를 옮기는 사람이 나오게 되자 곧바로 50금을 주어 백성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08]병문안을 …… 때 : 원문은 ‘東首拖紳之除際’이다.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는 “병이 들어, 임금이 와서 살펴보시거든, 동으로 머리를 두시고, 조복(朝服)을 몸에 덮고 그 위에 큰 띠를 얹으셨다.〔疾 君視 東首 加朝服拖紳〕”고 하였다.
[주D-009]구신(具臣) : 단지 수효만 채우고 있는 쓸모 없는 신하를 말한다.
[주D-010]위앙이 …… 졸았으니 : 위앙이 진(秦)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霸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11]한 자를 …… 따위 : 원문은 ‘枉尺直尋’인데,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자존심을 조금 굽힘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짓을 말한다.
[주D-012]빗자루를 …… 것이니 : 고대 중국에서는 귀빈을 맞을 때 길을 먼저 청소하고, 주인이 빗자루를 끼고 대문에서 손님을 맞음으로써 경의를 표하는 풍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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