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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앙(公孫鞅)이 진(秦) 나라에 들어가다 -책문 문답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26

공손앙(公孫鞅)이 진(秦) 나라에 들어가다

 

임금께서 지으신 책문(策問)은 이러하다.
남이 자기를 비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 두려워하며 그 화를 피하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공손앙은 끝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으니 계책이 밝은 사람이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에게 범인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음을 공숙좌(公叔座)가 알기는 하였으나, 위앙(衛鞅 공손앙)이 쓸 만한 인물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혜왕(惠王)이 등용하지 못하리라는 점은 알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신하가 임금에게 고할 적에 지성으로 고하지 않고서 그 청을 받아들이게 한 사람은 없었다. 혜왕에게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청한 말을 보건대, 이는 대체로 공손앙을 기재(奇才)라고 한 칭찬과 임금을 신하보다 우선시하는 의리를 실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온 나라를 들어다 그에게 맡기라고 청해 놓고 또다시 그를 죽이라고 권했으니, 어찌 앞뒤가 어긋난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소하(蕭何)가 한신(韓信)을 천거할 때 ‘한신을 쓸 일이 없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한 고조(漢高祖)가 선뜻 그의 말을 따랐는데, 이는 단지 한 고조가 한 고조다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소하 또한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공숙좌가 진작에 지성으로 천거하고 충심으로 아뢴 다음, 위앙이 하는 일과 말을 살피고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을 다하게 했더라면, 혜왕이 과연 온 나라를 들어서 위앙에게 맡겼을 뿐만 아니라 진 효공(秦孝公)이 이룩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공렬(功烈)도 이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신(臣) 아무개는 삼가 답합니다.
예로부터 신하가 그 임금에게 간언을 올림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든 지성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풍언(諷言 넌지시 풍자함)으로써 간하는 것이 배우의 익살에 가깝고, 궤변으로써 대답하는 것이 회휼(回遹)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옛사람을 논한 후세의 논자(論者)들은 또한 그들의 간언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비난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죽은 뒤에 자신의 시신을 늘어놓게 한 일도 있었으나 군자가 오히려 그의 곧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숙좌가 위앙을 천거한 것은 곧은 점으로는 사어(史魚)와 같고, 속임수를 쓴 점으로는 소하(蕭何)와 같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앙의 나라 다스림과 한신(韓信)의 군사 거느림은 오직 크게 써야 할 능력이지 작은 일로써 시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길가에 재를 버리는 데에서 법을 세우고, 목재 하나 옮기는 데에서 상(賞)을 미덥게 한 것은 곧 나라를 부유케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는 술책으로서, 이를 작은 관직에서나 일개 현(縣)에서 시험했다면, 대중의 생각과 어긋나고 풍속을 놀라게 하여 당장에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며, 아무리 하루아침에 경상(卿相)의 자리에 앉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맡기지 않았다면 위앙이 큰 일을 하지 못하였을 것 또한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평상시 일 없는 날에 위앙을 추천하고 아뢸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하는 자도 힘이 되지 못할까를 항상 걱정하고, 듣는 자도 깊이 신뢰할 수 없음을 늘 괴로워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는 일과 그의 말을 살피는 방법은 인재를 등용하는 보통의 방법에 불과하며,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은 단지 약한 나라의 대부(大夫)에게나 적용할 방법일 뿐이니, 도리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침저녁 좌우로 모시던 날에는 우선 참고 있다가 병문안을 온 임금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위앙을 천거한 것은, 죽음에 임박하여 비장한 말로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자신의 말을 반드시 믿게 하기에 부족하다 여겨 마지막에는 그를 죽여 버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비단 임금을 격동하여 그 부탁을 굳히자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를 놓아주어 국경을 벗어나게 한다면 진실로 위(魏) 나라에 후일의 근심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충신이 나라를 근심하는 고심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시신을 늘어놓게 한 직간(直諫)에도 부끄럼이 없다 할 것입니다.
소하가 한신을 천거한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소하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한 고조가 등용하지 않자, 결국은 한신을 추적했노라는 궤변을 하여 고조를 격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 한신은 적국의 한 도망병에 불과한데, 그를 위해 하루아침에 단장(壇場)을 만들고 갑작스레 상장(上將)의 인(印)을 수여하는 것이 충격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공숙좌의 지혜가 한 고조의 총명함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공숙좌는 단지 혜왕의 일개 구신(具臣)이요 위앙의 하류(下流)에 불과한 자입니다. 맹자(孟子)도 일찍이 위 나라에 갔었는데 공숙좌가 그 임금에게 천거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인의(仁義)의 설이 천하를 통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진 효공(秦孝公)을 논하는 자들은 그가 위앙을 등용했다 해서 현명하다 하고, 양 혜왕(梁惠王)을 논하는 자들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해서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설령 맹자가 진 나라에 갔다 해도 효공(孝公)은 반드시 그를 등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럴 줄을 아느냐 하면, 위앙이 먼저 제왕(帝王)의 도로써 말하자 효공이 이따금 졸았으니, 맹자라면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펴는 따위는 반드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약에 혜왕이 위앙을 직접 보았다면 반드시 허둥지둥 빗자루를 끼고 맞았을 것이니, 공숙좌의 천거가 없었더라도 나라를 들어 그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느냐 하면, 처음 맹자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 할지를 물은 것으로 보아, 공실(公室)을 강화하고 사문(私門)을 막아야 한다는 위앙의 주장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술책이 아닌 것이 없으며 모두 혜왕이 듣기 좋아하는 말들이었으니, 혜왕이 부국강병의 공렬을 이루는 것이 어찌 진 효공보다 뒤졌겠습니까.

 

公孫鞅入秦

 

御製條問曰。聞人議己。驚懼避禍。常情也。鞅乃晏然。非策之明。其能諸。是固有過人者。公叔誠知之矣。然知衛鞅之可用。不知惠王之不能用。何也。人臣告君。未有不以誠而能得請者。觀其必殺之語。槪欲實其奇才之稱先君之義耳。然旣請其擧國以聽。又勸其殺之。烏得免悖哉之疑也。蕭何之薦韓信。不過曰無所事信。而漢高遽從之者。不但漢高之所以爲漢高。何亦老實無 。然叔座早能至誠尉薦。單心敷奏。俾盡其訽事考言。歷試漸用之方。則惠王果能擧國以聽。而亦可成秦孝富强之烈歟。
臣某對曰。自古人臣之進諫於其君者。何莫非出於至誠。而規以諷言者。近於俳諧。對以詭辭者。未免回譎。然後世之尙論者。亦未甞譏其不誠。至有死後陳尸。而君子猶許其直者。臣愚竊謂公叔之薦衛鞅。直同史魚。譎似蕭何。何則。衛鞅之治國。韓信之將兵。直可以大用而不可以小試也。夫立法於棄灰。信賞於徙木。乃富國强兵之術。而試之小官一縣。則違衆駭俗。立見其敗矣。雖一朝加之卿相之位。時君世主。若不能擧國而聽之。則鞅不足與有爲也亦明矣。是故。平常無故之日。非無尉薦敷奏之時。而言之者常患其未爲力焉。聽之者每苦未能深信。則訽事考言。不過用人之常法。歷試漸用。只是弱國之大夫耳。顧何補於國哉。故姑忍於朝夕左右之日。而始薦於東首拖紳之際者。所以冀夫感動君心於垂死深悲之言。然猶不足以必信其言。則末乃請殺。非但激君以堅其托。縱之出境。誠有魏國後日之慮。則可以見忠臣憂國之苦心。而無媿於陳尸之直矣。至若蕭何之薦信。亦猶是也。何旣屢一言。而高帝不用焉則詭言追信。以感怒帝。夫韓信敵國之一亡卒。一朝設壇塲。猝然授之以上將之印。非激烏能是乎。惜乎。以公叔之智。而不遇高帝之明也。雖然。公叔特一惠王之具臣。而衛鞅之下流歟。孟子亦甞至魏。而未聞公叔之薦於其君也。則是不識仁義之說。足王於天下也。且世之論秦孝者。以其用衛鞅而爲賢。梁惠以其不聽公叔而爲愚。然假使孟子適秦。而孝公必不能用矣。何以知其然也。先言帝王之道。而孝公時睡。則枉尺直尋。孟子之所不爲也。若使惠王。見衛鞅。則必顚倒擁篲。不待公叔之薦。而擧國以聽矣。何以知其然也。初見孟子。先問以利國。則强公杜私之說。無非利國之術。而惠王之所樂聞也。其致國富强之烈。豈在秦孝之下哉。




 

[주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을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주D-001]남이 …… 있겠는가 : 위(魏) 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가 병이 위중하자 혜왕(惠王)이 병문안을 가서 그가 죽은 후의 대책을 물었더니 공숙좌가 대답하기를, “공손앙(公孫鞅)이 나이 비록 젊으나 기재(奇才)가 있으니 왕께서 온 나라를 들어다 맡기소서.” 하니,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려 하였다. 이에 다시 “왕께서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시겠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서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런 다음 공손앙을 불러다 “신하보다 임금을 우선시하는 마음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빨리 도망치거라.” 하니, 공손앙이 “왕이 나를 등용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니 나를 죽이라는 말 또한 어찌 듣겠습니까?” 하고는 끝내 도망가지 않았다. 한편 혜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공숙이 병이 심하니 슬픈 일이오만, 나더러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게 하려 하니, 어찌 앞뒤 안 맞는 소리가 아니오.〔豈不悖哉〕”라고 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02]한신을 …… 없다 : 승상 소하(蕭何)가 도망친 한신(韓信)을 데려와 한 고조에게 천거하면서, “왕께서 한중(漢中)에서 영원히 왕으로 지내고 싶으시면 한신을 쓸 일이 없겠으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와도 일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03]성실하고 …… 때문이다 : 원문은 ‘老實無 ’로 되어 있으나,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老實無妄耳’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4]회휼(回遹)함 : 간사하고 편벽되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정책이 회휼하니 언제 멈출 건가.〔謀猶回遹 何日斯沮〕”라고 하였다.
[주D-005]심지어는 …… 인정하였습니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곤서(困誓)에 위(衛) 나라 영공(靈公)이 어진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지 않고 어질지 못한 미자하(彌子瑕)를 등용하자 대부(大夫) 사어(史魚)가 달려가 이를 간하였으나 영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어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하자 아들을 불러다 놓고, “내가 위 나라 조정에 거백옥을 등용하지도 못하고 미자하를 물리치지도 못하였다. 이는 내가 임금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니 죽어도 장례를 치를 수가 없구나.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창문 아래에다 그냥 두거라.”라고 하였다. 영공이 조문을 왔다가 이상하게 여겨 아들에게 물어서 그 연유를 알고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곧바로 거백옥을 등용하였다. 이에 대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孔子)는 “곧도다,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구나.”라는 말로 그를 칭송하였다.
[주D-006]길가에 …… 세우고 : 공손앙이 변법(變法)을 만들면서 길가에 재를 버리는 사소한 잘못을 중형에 처함으로써 큰 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였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주D-007]목재 …… 것 : 공손앙이 변법을 제정한 다음 이를 시행하기에 앞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도성의 남문에 세 길〔丈〕이 되는 목재를 세워 놓고 이를 북문까지 옮겨다 놓는 사람에게는 50금(金)을 상으로 주겠다고 선포한 후 목재를 옮기는 사람이 나오게 되자 곧바로 50금을 주어 백성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08]병문안을 …… 때 : 원문은 ‘東首拖紳之除際’이다.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는 “병이 들어, 임금이 와서 살펴보시거든, 동으로 머리를 두시고, 조복(朝服)을 몸에 덮고 그 위에 큰 띠를 얹으셨다.〔疾 君視 東首 加朝服拖紳〕”고 하였다.
[주D-009]구신(具臣) : 단지 수효만 채우고 있는 쓸모 없는 신하를 말한다.
[주D-010]위앙이 …… 졸았으니 : 위앙이 진(秦)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霸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11]한 자를 …… 따위 : 원문은 ‘枉尺直尋’인데,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자존심을 조금 굽힘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짓을 말한다.
[주D-012]빗자루를 …… 것이니 : 고대 중국에서는 귀빈을 맞을 때 길을 먼저 청소하고, 주인이 빗자루를 끼고 대문에서 손님을 맞음으로써 경의를 표하는 풍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