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34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무릇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모두 비바람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비바람은 바로 꽃의 조맹(趙孟)이라 할 것이다. 필운동(弼雲洞)에서 살구꽃을 구경할 때는 어찌 이 골짜기의 복사꽃이 열흘을 넘지 않아서 필 줄을 알았겠는가. 필운동에 놀던 사람들이 모두 다 이 골짜기로 왔으니, 비하자면 위기후(魏其侯)의 빈객(賓客)들이 무안후(武安侯)를 섬기자고 떠난 것과 같다. 어찌 나면서부터 고귀한 대접을 받는 복사꽃에 한(恨)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몽득(劉夢得)의 현도관(玄都觀)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기쁨과 성냄과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나니, ‘화’란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고 자욱하며 성대하게 유행하여, 온 누리가 따뜻한 햇빛을 머금어 한 번의 숨도 끊어지지 않고 틈이 생길 만한 한 번의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골짜기로 와 보니 충만하고 성대하여 중화(中和)의 기운이 무성하다. 한 나무도 복사 아닌 것이 없고 한 가지도 꽃이 피지 않은 것이 없어, 온후하면서도 빼어나게 환해서 나도 모르는 새 마음이 가라앉고 기(氣)가 평온해지니, 평소의 편벽된 성품이 어찌 이에 이르러 누그러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경일(高景逸)의 우정(郵亭)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저 언덕 위에서 사람들이 무리 지어 노래하고 떼 지어 웃고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술 취한 사람이 통곡하며 말끝마다 제 어미를 불러 대고 있었다. 구경꾼이 담장을 두르듯 모여들었으나,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 하나 없고 거듭 흐느끼는 소리의 억양이 모두 다 절주(節奏)에 들어맞았다. 이는 그의 마음이 우는 데 전념하여 자연히 음률에 들어맞은 것이다. 만약 취한 사람이 복사꽃을 보고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런다 해도 아닐 것이요, 또 이는 계절과 사물에 감촉되어 저절로 슬픔이 일어났다 해도 아닐 것이요, 또 효자가 어머니를 생각하여 어디를 가도 그렇게 된다고 해도 역시 아닐 것이다. 이는 곧 구경하는 사람의 억측일 뿐이요, 취한 사람의 진정은 아니니, 모름지기 취한 사람에게 무슨 일로 통곡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아난(阿難)이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미소를 지은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날 경부(敬夫)가 특히 많이 취하여 사언(士彦)의 나귀를 거꾸로 타고 소나무 사이로 어지러이 달렸고, 일여(逸如)의 무리는 좌우에서 소리치고 둘러싸서 웃고 즐겼으며, 무관(懋官 이덕무)과 혜보(惠甫 유득공) 또한 크게 취하여 너털웃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가위 실컷 마시고 크게 취했다고 하겠으니 즐거움이 또한 극에 달했다. 그러나 해가 저물자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사람마다 돌아갈 길을 재촉하는데, 한 사람도 질탕하게 복사꽃 밑에서 머물러 자는 이가 없었으니, 아, 슬프도다! 어부가 나루터를 찾지 못한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관도도인(觀桃道人)이 마침내 게어(偈語)를 지었노라.

복숭아꽃 빛깔을 내 처음 보니 / 我見桃花色
발끈히 성낸 모습 생동하는 듯 / 勃然如有神
복숭아꽃도 역시 향기가 있어 / 亦有桃花香
바람이 불면 사람 향해 뿜어 대네 / 臨風噴射人
꽃망울은 팥알만 한 불상 같고 / 菩蕾如豆佛
뒤집힌 잎사귀는 느슨해진 활 같네 / 反葉學弨弓
향기와 빛깔 모두 형체에 덧붙은 것일 뿐 / 香色皆附質
생명력은 도로 공(空)을 따라 사라지네 / 生意還從空
- 원문 빠짐 - / □□□□□
- 원문 빠짐 - / □□□□□
투기 않고 앙탈도 부리잖으면 / 不妬亦不嗔
정(情)의 의미를 결코 모르고말고 / 定不識情字

 

大凡花之開落。皆緣風雨。則風雨乃花之趙孟弼雲。看杏之時。安知有此洞桃花。不過旬日。弼雲遊人。盡來此洞。譬如魏其賓客。去事武安。安得無懊恨於生貴之桃花乎。劉夢得玄都。當作如是觀。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和也者。充滿絪縕。盛大流行。四海涵日煦。無一息可斷。無一虧可隙。今來此洞。充滿盛大。藹然中和。無一樹非桃。無一枝不花。溫厚高明。不覺心降而氣平。平生偏性。安得不到此而融化乎。高景逸郵亭。當作如是觀。堤上歌吹爲群。懽笑成隊。忽有醉人慟哭。聲聲呼母。觀者如堵。容無愧怍。累欷掩抑。咸中節奏。心專於哭。自然合律。若謂醉人看桃花思母。非也。又謂是感時觸物自然興悲。非也。又謂孝子思母。隨處而然。亦非也。是乃觀者臆量耳。非醉人眞情。須問醉人所慟。醉人所慟。何事阿難。悟妙發笑。當作如是觀。是日敬夫尤醉。倒騎士彥驢。亂馳松樹間。逸如輩左右呵擁。以爲笑樂。懋官惠甫。亦大醉。哄笑不止。可謂劇飮大醉。樂亦極矣。然而日暮相携。人人催歸。未有一客肆宕留宿桃花者。嗚呼嘻噫。漁夫迷津。當作如是觀。於是觀桃道人。乃作偈語曰。
我見桃花色。勃然如有神。亦有桃花香。臨風噴射人。菩蕾如豆佛。反葉學弨弓。香色皆附質。生意還從空。十字缺。不妬亦不嗔。定不識情字。




 

[주C-001]도화동(桃花洞) : 한양의 북악(北岳) 아래에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많으므로 도화동이라 했다. 청헌(淸軒) 문성(文晟)이 이 동리에 살았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옛 집터도 있었다. 《漢京識略 卷2 名勝》
[주D-001]조맹(趙孟) : 조맹은 춘추(春秋) 시대 진(晉) 나라 권신(權臣)인 조돈(趙盾)과 그 직계 후손들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조맹이 귀하게 해 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趙孟之所貴 趙孟能賤之〕”에서 나온 말로, 비바람이 꽃을 피게 할 수도 있고 떨어지게 할 수도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2]위기후(魏其侯)의 …… 같다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에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의 권세가 약해지고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권세가 강해지자 권세를 좇는 사람들이 모두 무안후에게 가서 붙었다. 이 글에서 위기후는 살구꽃에 해당하고, 무안후는 복사꽃에 해당한다. 《史記 卷107 魏其武安侯列傳》
[주D-003]유몽득(劉夢得)의 현도관(玄都觀) : 몽득은 당(唐) 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자(字)이고, 현도관은 장안(長安)에 있던 도교사원〔道觀〕이다. 유우석의 ‘꽃구경하는 군자들에게 장난삼아 지어 주다〔戲贈看花諸君子〕’라는 시에서 “현도관 안의 복사나무 천 그루, 모두 내가 떠난 후에 심은 것이로세.〔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劉賓客文集 卷24》
[주D-004]기쁨과 …… 이르나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05]고경일(高景逸)의 우정(郵亭) : 경일은 명(明) 나라 때의 학자요 정치가이며 동림당(東林黨)의 영수였던 고반룡(高攀龍 : 1562~1626)의 호이다. 우정(郵亭)의 복사꽃을 노래한 그의 시가 있는 듯하다.
[주D-006]아난(阿難)이 …… 것 : 미상(未詳)이다. 석가의 염화시중(拈花示衆)에 가섭(迦葉)이 홀로 파안미소(破顔微笑)한 고사와 혼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D-007]일여(逸如) : 김사희(金思羲)의 자이다. 김사희는 호를 이아탕주인(爾雅宕主人)이라 하며, 진사 급제하였다. 이덕무와 친하여 그가 만든 윤회매(輪回梅)를 사 주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63 輪回梅十箋 附詩 炯菴》
[주D-008]실컷 …… 취했다 : 원문의 ‘劇飮’은 ‘極飮’과 같다. 구양수(歐陽脩)의 석비연시집서(釋秘演詩集序)에 비연(秘演)이 석만경(石曼卿)과 절친하여 “실컷 마시고 크게 취하게 되면 노래 부르고 시를 읊조리며 웃고 소리치는 것으로 제 마음에 맞는 천하의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이 얼마나 씩씩한가.〔當其極飮大醉 歌吟笑呼 以適天下之樂 何其壯也〕”라 하였다.
[주D-009]어부가 …… 것 :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진(晉) 나라 때 무릉(武陵) 출신의 한 어부가 복숭아나무 숲을 지나 수원(水源)이 다하는 곳에 있는 어느 산속의 동굴로 들어갔다가 진(秦) 나라 때 피난 왔다는 사람들의 후손이 모여 사는 별세상을 만났으나, 일단 그곳을 나온 뒤 다시는 그리로 들어가는 나루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