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46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1)박수밀*


<차 례>
1. 문제 제기
2. 실제를 은폐하는 문자에 대한 회의
3. 존재의 평등에 입각한 주변의 중심화
4. 색(色)과 빛[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광명안
5. 결론

 

<국문초록>
본 논문은 연암 박지원의 새로운 사유를 탐구해 가기 위한 일환으로 기획된 것
이다. 연암의 창조적 사고와 글쓰기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살피고, 그의 새로운
사유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먼저, 연암은 기존의 지식과 문자가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문자가 실제를 은폐한다고 비판했다. 연암은 문학은 과거의 윤
리와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며 변화하는 자연 사물과 현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물과 현실은 본체의 그림자가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최고의
문장이었다. 연암의 새로운 인식 중에서 주변의 중심화에 대해 주목해 보았다. 연
암은 중심적인 자리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곳, 소외된 사이를 꼼꼼히 살폈다. 연
암은 표면적으로는 양쪽을 두루 보자고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곳,
사회가 옳다고 여기는 것의 반대쪽을 제대로 보자고 하였다. 연암은 주변을 중심
화 함으로써 중심에 소외되어 있던 가치와 존재의 편에 서고자 했다. 그리하여 궁
극적으로는 중심과 주변, 귀한 것과 천한 것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기를 소망했다.
두 번째로 연암의 색(色)과 빛[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소경 비유에 대해 살펴보
았다.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까마귀 날개 비유는 단순히 감각기관의 한
*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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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현대의 인상파 이론과도 통했다. 이 글은 연암의 창조
적 사유가 뻗어나간 높이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연암은 세상은 혼돈되고 뒤죽박
죽이므로 피상적인 눈으로는 진실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연암은 보는 자가 스
스로 속는 것이므로, 제대로 보는 눈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연암의 사유는 중세의
질서를 넘어 오늘날에도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져 준다는 점에서 현재성을 지닌다.
연암은 진실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던 경계인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주제어 박지원, 창조적 사고, 감각기관, 능양시집서, 경계인

 

1. 문제 제기
본 논문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창조적 사고와 글
쓰기가 어떤 고민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그의 새로운 사유와 관
련한 몇 가지 국면에 대해 이야기해 봄으로써 그의 사유가 갖는 현재적
의미를 탐구해 가려는 것이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
은 말하길, “조선 오백 년 역사에 퇴계, 율곡의 도학(道學)과 충무공의 용
병(用兵)과 연암의 문장, 이 세 가지가 나란히 특기할 만하다.”라고 하여,
율곡과 퇴계의 성리학, 이 충무공의 거북선과 함께 연암의 문장을 조선의
3대 자랑거리로 꼽고 있다.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우
리나라 문장가들은 입만 열면 성명(性命)을 말하는 병폐를 보였는데, 오
직 연암만이 이 병폐에서 벗어났다고 하여1) 그를 성리학의 자장에서 벗
어난 유일한 문장가로 평가했다. 지금에도 연암을 세계적 수준의 문호와

 

1) 김윤식, 운양속집(雲養續集)』, <답인론청구문장원류서(答人論靑丘文章源流書)>
: “自麗末郡賢, 宗性理之學, 爲文而無學問根據者, 人病其無實而不取也. 是以操
觚之士, 未嘗有涵養硏素之工, 而開口傳談性命, 掇拾宋賢書牘, 以自潤其文, 此
文之一病也. 能脫此病者, 其惟燕岩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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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룰 만한 문장가로 바라보기도 한다.2)
이와 같은 평가를 반영하듯, 지금까지 연암의 문학 사상과 문학 이론,
이용후생의 정신, 실학자의 면모 등에 대해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
로 다양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고전 문학사에서 단일 인물로는
가장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
암이라는 숲은 그 전모를 다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연암은 한국
문학이 자랑할 수 있는 문호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고 판단되기에, 그의
진면목을 더 깊고 넓게 파헤쳐가야 하리라 본다.
연암 문학의 정수는 그가 인식론적이고 철학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곳
에서 잘 드러난다는 생각이다. 인식론이나 비유로써 작가 의식을 드러내
는 글에서는 단락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으며,
비유의 궁극 의도를 포착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부분에서
연암의 새로운 생각을 엿볼 수 있기에, 글의 의미를 헤아리기 위한 탐색
은 지속되어야 한다.3)
무엇보다도 연암은 눈앞에 마주한 세계와 사물에 대해 다르게 보고 다
르게 생각하려고 한 사람이다. 그 속에 연암의 창의적인 글쓰기, 탁월한
문학적 성취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본 논문에서는 필자가 탐색한
연암의 창의적 사유 몇 가지를 들려줌으로써 그의 사유가 중세의 인식을
뛰어넘어 현재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4)

 

2) 박희병 교수는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
다.”라고 주장한다.(박종채 지음/박희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 3쪽.
3) 이와 관련하여 임형택 교수는 연암의 인식론과 미의식에 관한 수준 높은 성과를 제
출한 바 있다. 임형택, 「박연암의 인식론과 미의식」, 한국한문학연구11집, 한국한
문학회, 1988, 17∼39쪽. 본고는 이 글에서 많은 감발(感發)을 받았다. 이 외에도 박
희병, 「박지원 사상에 있어서 언어와 명심」, 한국의 생태사상, 돌베개, 1999, 297∼
345쪽과 김혈조, 「연암 산문에서 문자 운용의 몇 가지 특징」, 대동한문학제21집,
대동한문학회, 2004, 239∼276쪽에서도 좋은 시사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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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제를 은폐하는 문자에 대한 회의
먼저는 연암이 새로운 사유로 나아가게 된 동인(動因)에 대해 살펴보
기로 한다.
시대마다 그 시대가 모범으로 삼는 지식이 존재한다. 우리 고전에서 지
식의 입문서 역할을 했던 글이 천자문이다. 천자문은 한자문화권에서
아동이 학문에 들어설 때 처음에 꼭 배워야 하는 일종의 필수 교과서였다.
천자문은 고려 시대에 유입되었는데 이후 모든 서당에서 가장 기초적
인 교재로 사용되었다. 천자문에 실린 내용은 도덕 윤리를 비롯해 역사,
정치, 지리, 자연에 이르기까지 인간사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서 조선
시대 아동들의 사고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천자문은 본래 아동용 교재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또 그 내용
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이라서 우리에게 적합한 교재라고 하기
도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자문을 지식의 기준, 필수 기초 지식으
로 받아들이고 그 내용을 암송하며 외웠다.
그런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천자문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흥사의 천자문을 얻어 어린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천자문은 자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천지(天地)란 두 글자를 배워
놓고 일월(日月), 성신(星辰), 산천(山川), 구릉(丘陵) 같은 연결되는 글자
를 다 배우지 않았는데 갑자기 내버려두고 “잠시 네가 배우던 것을 그만두
고 오색을 배워라.”고 한다. 그래서 현황(玄黃)이란 글자를 배운다. 그러면
청적(靑赤), 흑백(黑白), 홍자(紅紫), 치록(緇綠)의 차이를 구별하기도 전에
느닷없이 그치게 하고 “잠시 네가 배우던 것을 놓아두고 우주(宇宙)를 배워

 

4) 본고에서 사용하는 ‘창조성’은 기존의 관습과 경험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는 생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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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고 한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방법이란 말인가?5)
천자문은 한자를 처음 배우는 아동들을 위한 자학용 교재이기도 했
다. 그러나 다산은 천자문은 자학용 교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천자문
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한다. 다산은 말하길 처음 천지(天地)를
배우면 그와 관련되는 자연과 관련 있는 글자들, 예컨대 일월(日月), 산천
(山川) 등을 배워야 하는데 느닷없이 현황(玄黃)이라고 하는 색깔을 가
르친다고 비판한다. 또 현황(玄黃)이라는 글자를 배웠다면 그와 관련되는
청적(靑赤), 흑백(黑白) 등을 가르쳐야 하는데 갑자기 우주(宇宙)로 넘어
간다고 따진다. 요컨대 천자문은 일정한 논리와 체계가 없을 뿐만 아니
라 어린이가 배우기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정약용 외에도 중종 연간의 최세진(崔世珍)도 천자문이 어린이 교재
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 훈몽자회(訓蒙字會)를 편찬하였고, 이덕무
(李德懋) 역시 천자문이 아동에게는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몇몇 학자들은 천자문의 구성 방식에 의문을 품고 아동에게 맞는 새로
운 교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연암은 천자문의 구성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자문이
담고 있는 지식의 내용을 부정한다.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다가 읽기 싫어하기에 꾸짖었더니, 그
애가 말합디다.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굶어 죽이겠소.6)

 

5) 丁若鏞, 다산시문집22권, <千文評> : “我邦之人, 得所謂周興嗣千文, 以授童幼.
而千文非小學家流也. 學天地字, 乃日月星辰山川丘陵, 未竭其族, 而遽舍之曰姑
舍汝所學, 而學五色. 學玄黃字, 乃靑赤黑白紅紫緇綠未別其異, 而遽舍之曰姑舍
汝所學, 而學宇宙. 斯何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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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푸른데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 않다고 외치는 꼬마의 항변은
연암의 생각이기도 하다. 중세기에 기초 지식의 표준이었던 천자문을
부정한 이는 오직 연암이 유일하다고 본다. 비록 정약용을 비롯한 몇 학
자들도 천자문이 갖는 문제점을 간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내
용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천자문의 구성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연암은 아예 천자문이 담고 있는 지식, 지식을 담고
있는 문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중세기에 문자가 실제를 은폐한다고 비판하는 발언은 연암 외에 달리
찾아볼 길이 없다. 연암은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통념, 지식을 담고 있는
기호 문자가 진실을 온전히 담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존의
지식이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심어주어 진실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고 생
각한다. 그리하여 지식을 갖춘 최고의 도덕적 인간이라 할 독서 군자를
비판하기도 한다. 「호질(虎叱)」의 북곽 선생이 그러한 예이다. 북곽 선생
은 손수 교정한 책이 만권이고 사서오경의 뜻을 풀어서 다시 지은 책이
일만 오천권이나 되는, 이상적인 선비의 전형이다. 그러나 북곽 선생은 딴
짓을 하는 위선적인 군자였으며 그가 외운 경전의 구절들은 자신의 위선
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옥갑야화(玉匣夜話)」에서 허생은 무인
도에 들어가 자신의 이상(理想)을 실험한 뒤, 글을 아는 사람들을 모두
배에 싣고 나오며, “이 섬에 재앙을 없애려 한다.”라고 말한다.7) 글을 아
는 사람들을 화(禍)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연암은 기존의 지식이 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문자가 실상을

 

6) 朴趾源, <答蒼厓>之三 : “里中孺子, 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視天蒼蒼, 天字不
碧, 是以厭耳. 此兒聰明, 餒煞蒼頡.”
7) 朴趾源, 熱河日記, 「玉匣夜話」 : “有知書者, 載與俱出曰, 爲絶禍於此島. 於是
遍行國中, 賑施與貧無告者.”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83

 

은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암은 「종북소선자서(鐘北小選自序)」에서
문자를 처음 만든 포희 씨가 죽은 뒤로 문장이 다 흩어져 버렸다고 탄식
한다.8) ‘문장이 흩어졌다’는 말은 문자가 사물과 현실의 실상을 제대로 담
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연암에게,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일이
란 마른 먹과 썩은 종이 사이에서 좀의 오줌과 쥐똥을 주워 모으는 행위
에 불과하다.9) 지식과 문자에 대해 회의(懷疑)하는 태도는 장자의 지식
의 상대성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하지만 연암은 특정한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효과적으로 말하기 위한 도구로 활
용하므로, 그 연관성에 대해서는 섬세한 대비가 필요하다.
문자가 세계의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객관적 진실에 더 가
까이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이에 대해 연암이 생각한 대안이
‘즉사진취(卽事眞趣)’이다.10) 즉사진취(卽事眞趣)란 내 눈앞의 사물과
현실에 참된 진실이 있다는 뜻이다. 곧 진부한 기호 문자를 읽는 행위에
서 벗어나 내가 눈앞에서 마주한 사물과 현실을 읽으라는 것이다. 이른바
독서패러다임의 전환이라 이를 만하다. 기존의 독서란 기호화된 문자를
읽는 행위였다. 선비들은 글은 성인이나 현자의 정신이 담긴 것이라 생각
하고 글을 통해 선현의 지혜를 배우고 그 정신과 표현을 본받고자 했다.
예컨대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은 「구관정인지도필자맹
자시(求觀聖人之道必自孟子始)」에서 “성인의 도를 어찌 쉽게 볼 수 있

 

8) 朴趾源, <鍾北小選自序> : “嗟乎! 庖犧氏歿, 其文章散久矣.”
9) 朴趾源, <答京之>二 : “後世號勤讀書者, 以麁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
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豈不哀哉?”
10) 朴趾源, <贈左蘇山人> : “我見世人之, 譽人文章者. 文必擬兩漢, 詩則盛唐也. 曰
似已非眞, 漢唐豈有且.……卽事有眞趣, 何必遠古抯. 漢唐非今世, 風謠異諸夏.
班馬若再起, 決不學班馬.” 즉사진취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자들의 언급이 있
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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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는가?……도란 하늘에 근원을 두고 사람의 마음에 붙은 것이다. 사람이
이 마음을 함께 하고 마음이 이 도를 함께 하면, 성인의 마음이 나의 마음
이요 성인의 도가 곧 나의 도이다. 그렇다면 성인의 마음을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반드시 성현의 글에서 볼 것이니 글이란 성인의 도를 싣는 도
구이다”11)라고 하였다. 글은 성인의 도를 실어주는 도구이므로 독서는 성
인의 정신을 읽는 행위이다. 그러나 연암에게 참된 독서는 방안에 박혀
기호 문자를 읽는 행위가 아니라 천지 만물과 현실을 읽는 행위다. 자연
사물은 그 자체가 좋은 글이자 문장이다. 연암에게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책으로써, 다만 문자로 쓰이지 않고 글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不字不書
之文]이다.12) 따라서 참된 독서란 사물과 현실을 아주 꼼꼼하게 살피고
그 안에 담긴 비의(秘義)를 발견하는 것이다.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에 관심이 없는 자는 도무지 문장의 정신[文心]이
없는 것이고, 사물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한 글자도 모른다고 말해
도 상관없을 것이다.13)
그대는 신령스런 지각과 예민한 깨달음이 있다고 남에게 잘난 척하거나
사물을 업신여기지 말게. 저들이 만약 약간이라도 신령스런 깨달음이 있다
면 어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겠으며, 저들이 만약 신령스런 지각이 없다

 

11) 具鳳齡, 栢潭集9권, <求觀聖人之道必自孟子始> : “聖人之道, 豈易觀之哉?…
蓋道原於天, 寓於人心. 人同此心, 心同此道, 則聖人之心, 卽吾之心也, 聖人之
道, 卽吾之道也. 然則聖人之心, 將何以觀之乎? 其必觀之於聖賢之書, 而書者所
以載聖人之道者也.”
12) 朴趾源, <答京之>二 :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13) 朴趾源, <鍾北小選自序> : “不屑於蟲鬚花蘂者, 都無文心矣, 不味乎器用之象者,
雖謂之不識一字可也.”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85

 

면 잘난 척하고 업신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냄새나는 가죽
부대 속에 문자를 갖고 있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데 불과하다네. 저기
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땅속에서 지렁이가 소리 내는 것이 시를 읊
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14)
옛사람 중에 글을 잘 읽은 사람이 있었으니 공명선이 바로 그요, 옛사람
가운데 문장을 잘 쓰는 자가 있었으니 회음후 한신이 바로 그다. 왜일까?
공명선이 증자에게 배울 때 3년 동안 책을 읽지 않았다. 증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공명선이 대답했다. “제가 스승님께서 집에 계시는 모습을 보았고,
손님을 접대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조정에 계시는 모습을 보면서 배웠으
나 아직 잘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도 않으면서 스승님의 문하
에 있는 것이겠습니까?”15)
첫 번째 인용문은 낡은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진리를 담아내
기 위한 연암의 생각을 보여주는 글이다. 문심(文心)은 유협(劉勰)의 문
심조룡(文心雕龍)에 연원을 두는데 글을 지을 때 마음을 기울이는 태도
이다.16) 문심은 문장가가 글을 쓸 때의 마음 작용으로써 글을 짓는 원리
이기도 하다.17) 연암은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을 관찰하지 못하면 문장을
정신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벌레는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내쫓아야 할 버러지이다. 그런데 연암은

 


14) 朴趾源, <與楚幘> : “足下無以靈覺機悟, 驕人而蔑物. 彼若亦有一部靈悟, 豈不
自羞, 若無靈覺, 驕蔑何益? 吾輩臭皮帒中, 裹得幾箇字, 不過稍多於人耳. 彼蟬
噪於樹, 蚓嗚於竅, 亦安知非誦詩讀書之聲耶?”
15) 朴趾源, <楚亭集序> : “古之人, 有善讀書者, 公明宣是已, 古之人, 有善爲文者, 淮
陰侯是已. 何者? 公明宣學於曾子三年, 不讀書. 曾子問之, 對曰, 宣見夫子之居庭,
見夫子應賓客, 見夫子之居朝廷也. 學而未能, 宣安敢不學, 而處夫子之門乎?”
16) 유협, 文心雕龍, <序志> : “夫文心者, 言爲文之用心也.”
17) 유협 지음/최동호 역편, 문심조룡, 민음사, 199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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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심을 얻으려면 벌레의 더듬이에 관심을 지니라고 말한다. 벌레는 하나
의 상징으로써 가장 쓸모없는 존재, 미미한 생명체를 의미한다. 연암은 인
간이 하찮다고 무시하는 존재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벌레를 이야기하는 연암의 의도는 가장 미천한 존재를 새로운 시
선으로 바라보자는데 있다. 진실은 거창하고 높은 것에 있지 않고 버리는
사물에 있다고 말한다.
꽃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미적인 측면에서 얼핏
벌레와는 반대에 놓인 사물로 보인다. 하지만 연암은 꽃이 아닌 꽃술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이 꽃을 감상한다
는 것은 대체로 윤리적인 차원이었다. 성리학은 사물에 탐닉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를 경계했다. 꽃은 미적인 사물이기
에 완물상지의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조 유학자들은 꽃의 향기나
자태를 인간의 덕목과 연결했다. 꽃을 감상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즐기는
행위가 아니라 심성을 확장하고 덕을 기르는 행위였다. 꽃의 이치를 발견
하고 여기에 윤리나 교훈을 담아 인간의 품성과 일치시켰다. 꽃마다 상징
을 마련하고 그 상징을 관습적으로 향유했다. 이렇게 꽃의 감상이 유학의
내면 수양 차원에서 이루어짐으로써 가장 미적인 사물은 윤리적으로 이
해되었다.18)
그런데 꽃의 자태가 아닌 꽃술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은 꽃을 윤리적으
로 보지 말고 꽃의 생태 자체에 관심을 가지라는 요청으로 들린다. 꽃술
은 꽃의 생식기로써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에 해당한다. 나비나 벌 등이
꽃술의 꽃가루를 옮겨 열매를 맺게 한다. 꽃술은 꽃의 핵심이 되는 곳이
자 꽃을 가장 미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기관이다. 곧 연암은 우리가 거

 

18) 이에 대해서는 박수밀, 「조선후기 산문에 나타난 꽃에 대한 인식과 심미의식, 동방
한문학56, 동방한문학회, 2013, 97∼129쪽 참조.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87

 

들떠보지 않던 사물의 생태를 심미적으로 관찰하고 의미를 발견할 때 문
장의 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암은 두 번째 인용문에서 보듯 매미의 울음은 시를 읊은 소
리이고 지렁이 소리는 책 읽는 소리라고 한다. 연암에게 문학의 근원은
평범한 사물에 담겨 있다. 가장 일상적이고 하찮은 사물에 관심을 두지
못하면 문심(文心)이 없는 자가 된다. 제대로 글을 잘 읽은 사람은 수백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몸소 옆에서 지켜보며 그 삶
을 몸으로 배운 공명선이다.19)
이와 같이 연암에게 참된 지식이란 사물 읽기이고 현실 읽기이다. 이러
한 생각은 새로운 문학인의 태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문학은 단순히 과거
의 윤리나 지식을 전달해주는데 그쳐서는 안 되며 지금 내 눈앞에서 생생
하게 살아가는 자연 사물과 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
부하고 상투적인 문자를 그대로 베껴서는 안 되고 사물과 현실에서 발견
한 깨달음을 나의 생각으로 진실하게 쏟아내야 한다. 더 이상 사물과 현
실은 본체의 그림자가 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진실함을 담고 있는 최고
의 글이다.
요컨대 연암이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룬 바탕에는 문자와 지식을 기
존과는 다르게 보는 그만의 생각이 있다. 그는 지금의 기호 문자는 진리
를 전달해 주고 있지 않다고 본다. 글을 아는 자들이 재앙의 근원이 될 수
도 있다고 본다. 진짜 책은 지금 내 눈앞의 자연 사물, 여기의 현실이다.
그 원본을 읽는 것이 제대로 된 읽기 행위이다. 자연에서 원리를 찾고 눈
앞의 현실에서 배움을 찾는 것이 제대로 된 독서이다. 그의 글이 읽을 때

 

19) <초정집서>에서 연암은 옛 사람 중에 글을 잘 읽은 사람이 공명선이라고 했다. 공명
선이 증자에게 배울 때 3년간 글을 전혀 읽지 않았으나 스승의 곁에서 스승의 일상과
삶을 관찰하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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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 새롭게 읽히는 것은 그의 글이 자연 사물을 닮았기 때문이다. 생생
불식(生生不息)하는 자연과 같이 그를 담아낸 연암의 글 또한 다채로운
빛깔로 빛나며 늘 새롭게 읽히는 것이다. 연암의 창조적 사유의 출발점은
과거의 지식을 담은 낡은 기호 문자를 거부하고 지금 눈앞의 현실과 사물
을 읽는데 있었다.

 


3. 존재의 평등에 입각한 주변의 중심화
중세의 질서에서 진실은 어느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거나 특정한 기준
이 정해져 있다. 세계를 음(陰)과 양(陽)으로 나누는 세계관은 귀한 것과
천한 것에 대한 분명한 구별을 만들었다. 하지만 연암은 다르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황희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집에 오자, 딸이 맞으며 물었다. “아버
지, 이 알죠? 이는 어디서 생겨요? 옷에서 생기죠?” “아무렴.” 딸이 웃으며
외쳤다. “내가 이겼다.” 이번엔 며느리가 물었다. “이는 살갗에서 생기죠?”
“그렇단다.” 며느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은 제 말이 맞다시네요.” 부인
이 화를 내며 말했다. “누가 대감을 지혜롭다 하우? 옳고 그름을 다투는데
둘 다 옳다니요?” 황희 정승이 빙그레 웃었다. “딸아, 며느리야, 이리 오너라.
대체로 이는 살갗이 없으면 부화하지 못하고 옷이 없다면 붙지를 못한단다.
그래서 둘 다 옳은 것이지. 비록 그렇긴 하나 옷을 장롱 속에 두어도 이는
있고, 설령 네가 벌거벗었어도 여전히 가려울 게야. 땀 기운이 무럭무럭 오
르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후덥지근한 곳, 떨어지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갗의 사이에서 이는 생긴단다.” 백호 임제가 막 말을 타려 할 때였다.
하인이 나서며 말렸다. “나리! 취하셨는뎁쇼. 짚신과 가죽신을 한 짝씩 신으
셨습니다요.” 백호가 꾸짖으며 말했다. “길 오른편에서 보는 자는 내가 짚신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89

 

을 신었다고 할 테고, 길 왼편에서 보는 자는 내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텐데, 뭐가 잘못이란 말이냐?” 이로 미루어 말하자면 세상에서 보기 쉬운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으나, 보는 방향이 같지 않으면 짚신인지 가죽신인지
도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미묘해
서 살펴보기 어렵다. 옷과 살갗의 사이에는 본래 빈틈이 있는데 떨어진 것도
아니고 붙어 있는 것도 아니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니 누가 그 가
운데[中]를 얻겠는가? 말똥구리는 자신의 경단을 아껴 여룡의 구슬을 부러
워하지 않는다. 여룡 역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해서 저 말똥구리의 경단을
비웃지 않는다.20)
기왕에 여러 차례 논의가 된 작품이지만 새롭게 확장된 생각을 바탕으
로 연암의 창조적 사유에 초점을 두어 논의를 펼쳐보겠다.21) 윗글에는 두
개의 삽화가 있다. 두 삽화는 궁극적으로는 글의 다양성을 주장하기 위한
전거(典據)이지만, 삽화 속에 담긴 미학적이고 인식론적 의미는 작가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두 삽화가 갖는 의미에 주목하여 연암의

 

20) 朴趾源, <蜋丸集序> : “昔黃政丞自公而歸, 其女迎謂曰, 大人知蝨乎? 蝨奚生,
生於衣歟. 曰然. 女笑曰ㅡ 我固勝矣. 婦請曰, 蝨生於肌歟? 曰是也. 婦笑曰, 舅氏
是我. 夫人怒曰, 孰謂大監智? 訟而兩是. 政丞莞爾而笑曰, 女與婦來. 夫蝨非肌
不化, 非衣不傳, 故兩言皆是也. 雖然衣在籠中, 亦有蝨焉. 使汝裸裎, 猶將癢焉.
汗氣蒸蒸, 糊氣蟲蟲, 不離不襯, 衣膚之間. 林白湖將乘馬, 僕夫進曰, 夫子醉矣,
隻履鞾鞋. 白湖叱曰, 由道而右者, 謂我履鞾, 由道而左者, 謂我履鞋, 我何病哉.
由是論之, 天下之易見者, 莫如足而所見者, 不同則鞾鞋難辨矣. 故眞正之見, 固
在於是非之中. 如汗之化蝨, 至微而難審. 衣膚之間, 自有其空, 不離不襯, 不右不
左, 孰得其中. 蜣蜋自愛滾丸, 不羡驪龍之珠, 驪龍亦不以其珠, 笑彼蜋丸.”
21) <낭환집서>에 대해서는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2006, 400∼420쪽과 박수
밀,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돌베개, 2013, 53∼60쪽 외에 여러 연구자들도 단편
적으로라도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는 기존의 성과를 참조하되, 그동안 더 확장‧심화
된 생각을 바탕으로 논의를 펼쳐본 것이다.
390 한국고전연구 33집

 

인식 세계를 탐색해 보려 한다. 첫 번째 삽화는 이가 어디에서 생기는가
에 대한 딸과 며느리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가 옷에서 생긴다고 주장
하는 딸과 이가 살갗에서 생긴다고 주장하는 며느리의 주장에 황희 정승
은 ‘둘 다 옳다’고 대답한다. ‘둘 다 옳다’는 황희 정승의 판결은 양시론(兩
是論)처럼 들린다. 화를 내는 황희 부인의 말은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내용의 흐름을 보자면 황희 정승은 지혜로운 판결자로 보인다. 그러므
로 황희 정승이 왜 둘 다 옳다고 했는지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깊이 헤아
려볼 필요가 있다. 황희 정승은 왜 둘 다 옳다고 했을까? 이는 살갗이 없
으면 부화하지를 못한다. 따라서 딸의 말은 옳다. 또 이는 옷이 없다면 붙
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며느리의 생각도 틀리지 않다. 그러므로 황희 정승
은 둘 다 옳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황희 정승은 말하길, 장롱 속에 옷을
두어도 이는 있고, 벌거벗었어도 여전히 가렵다고 하면서 떨어지지도 않
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갗의 사이에서 이는 생긴다고 들려준다. 그
렇게 보자면 딸과 며느리의 생각은 온전한 정답이 아니다. 이에 대해 박
희병 교수는 일면적 진실과 실체적 진실의 문제로 파악했고,22) 필자는 원
효의 개시개비(皆是皆非)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23)
개시개비(皆是皆非)는 둘 다 맞고 둘 다 틀리다는 뜻이다. 원효는 열
반종요(涅槃宗要)에서 소경의 코끼리 만지기 비유를 들어 주장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소경은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서 뱀 같다고
하고 어떤 소경은 배를 만지고서 벽 같다고 말한다. 소경은 각기 자신이
만져 확인한 부분으로 ‘이것은 코끼리이다’라고 말한다. 소경의 말은 코끼
리의 일부분을 설명한 것이므로 각자는 모두 옳다(皆是). 그러나 코끼리

 

22) 박희병(2006), 위의 책, 407∼408쪽.
23) 박수밀, 「도강록에 나타난 경계의 인식론」, 한국한문학연구56집, 한국한문학회,
2014, 413쪽.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91

 

전모를 말하고 있지 못하므로 모두 틀렸다(皆非). 그러니까 부분적 진실
의 측면에서 보자면 둘 다 옳지만, 총체적 진실의 측면에서 보자면 둘 다
옳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한편에서만 보아서는 안 되고 대립되는 쪽
을 아우르는 전체적 진실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삽화는 앞의 삽화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듯 보인다. 양쪽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한쪽만을 보고서 반대편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었다 해도 사람들은 자신이 본 쪽의 신발로써 나머지
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사고는 이른바 당파적 입장이다. 인간의
눈은 전체를 보기가 어렵고 일부분만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갈등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고 진실은 파악되기 어렵다. 따라서 실상을 파악하려
면 둘을 다 볼 수 있는 가운데, 즉 사이에 서야 한다. 그 ‘사이’란 한 편의
진실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진실을 볼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런데 새롭게 생긴 문제의식은, 과연 연암의 궁극적 의도가 양극단을
넘어서는 실체적 진실 혹은 전체적 진실을 지니라는 점에 있느냐는 것이
다. 필자 역시 그와 같은 해석을 시도한 바 있지만 대립되는 두 대상 사이
에 놓인 조건을 간과하고 양극단을 지양할 때, 궁극적으로는 중심의 편에
서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양자 간에 균형 정신을 강조한다거나 양극단
의 가운데에 서는 태도는 인식 차원에서는 균형 감각을 갖춘 것으로 보이
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권력의 편, 중심의 편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될 수
있다. 조건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중(中)’의 정신은 현실의 장에서는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권력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 획일
적인 균형은 중심의 허위성을 은폐하는 논리로 귀결될 소지가 많다. 연암
의 글 전편(全篇)을 검토해 보았을 때 연암이 이 점을 놓친 것 같지는 않
다. 연암은 분명 어느 한 편, 특히 소외된 편에 서고 있는 것이다.
연암은 대립자 사이에는 빈 틈이 있는데, 그 틈은 떨어진 것도 아니고
392 한국고전연구 33집

 

붙어 있는 것도 아니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고 했다. 원문은
불리불친(不離不襯), 불우불좌(不右不左)이다. 이른바 不a不b는 불가에
서 진리를 드러내는 어법이다. a인지 b인지를 나누는 것은 방편일 뿐, 실
상은 저것으로 인해 이것이 존재하고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존재한다. 예
컨대 열매와 씨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씨가 자라 열매가 되고 열
매는 그 유전자인 씨를 내므로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이다. 그러니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존재는 다른 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며 서로를 비
춰줌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대립항이 동시에 부정되고, 동시에 긍정됨으
로써 가치의 위계화가 사라진다.24)
연암이 불교의 이 논법을 그대로 수용했다면, 윗글의 의미는 구분과 변
별을 통해 가치의 위계화를 만드는 기존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각자의 가
치를 인정하자는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존재는 이항 대립이 아닌, 서
로를 비춰줌으로 의미를 드러내므로 모든 존재가 제각기 가치를 갖는다
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다. 필자 역시 이와 같은 입장을 지지해 왔다.
용과 말똥구리 비유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여의주가 중심 가
치, 귀한 것, 쓸모 있는 것을 상징한다면 말똥은 주변 가치, 천한 것, 쓸모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말똥구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여의주가 쓸
모없다. 말똥구리에겐 오직 말똥경단만이 필요하다. 용도 말똥구리에겐
말똥이 필요한 걸 알기에 자신의 여의주를 가지고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
는다. 이것이 더 낫다, 저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각자 상황에
적합한 쓸모가 있을 뿐이다.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서면 중심과 주변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무엇이 더 귀하다거나 천하다는 생각은 이분법적
사고가 만들어낸 차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연암은 불교와 장자의 논법을 적극적으로

 

24) 이도흠,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한양대학교 출판부, 1999, 129∼134쪽.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93

 

수용하되, 이를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는다. 연암은 불교와 장자 심지어는
서학의 도(道)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자기 고유의 사유로 다시 용해
(溶解)한다. 연암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존재의 평등성을 지향하
되 궁극적으로는 쓸모없는 것, 주변적인 존재의 편에 서려고 했다고 본다.
중심적인 가치가 이미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에서는 주변적인 것
은 아예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자신
이 본 것만을 세계의 전부라고 착각하기에, 그 반대편은 언제나 소외되고
가리어 있다. 그러나 연암은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 숨어 있는 것, 낮고
보잘 것 없는 것, 쓸모없는 것에 관심을 둔다. 연암이 관심을 둔 것은 말
똥구리였고 보이지 않는 틈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양쪽의 대립자를 두루
보자고 하는 것 같지만, 진정 하고 싶었던 주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지금 사회가 옳다고 여기는 것의 반대쪽, 말똥구리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
었다. 말똥구리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하찮은 것, 중심에서 밀려 있던 가치
와 존재의 편에 서고자 했다고 본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중심과 주변,
귀한 것과 천한 것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기를 소망한 것이다.
연암은 사물의 가치를 우열로 매겨서는 안 되며 함께 존중하며 살아가
야 한다고 말한다. 「호질(虎叱)」에서는 “호랑이와 메뚜기, 누에와 벌, 개
미와 사람이 함께 길러져 살아가야지 서로 등지고 지내서는 안 된다.”라
고 한다. 모든 존재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힘입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연암은 유학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모든 존재는 서로를 비추어주며
각자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구분과 변별을 통해 가치의 위계화를 만든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치부하고 중심과 주변, 천함과 귀함을 구분 짓는 이분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사물은 아름다움과 추함, 좋고 나쁨을 생래적으로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사물은 각자 쓰임새를 갖고 있다. 쓸모없는 것, 버림받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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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조건에 따라 모두 소중한 쓸모를 발휘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다. 따라서 평소에 가리어 있는 것, 천해 보이는 것
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들여다볼 때 공존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연암은 인간, 사물, 세계를 바라볼 때 총체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결코
중심적인 자리를 고수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 소외된 자리를 꼼꼼히
살핀다. 그의 인간관을 살펴보자. 당시 선비들은 이른바 군자형 인간을 우
러르고 닮고자 했지만 연암은 거지, 똥 푸는 사람 등 신분이 낮고 천한 사
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이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
이며, 쓸모없는 사람이 반드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25) 연암은
그 자신이 양반 사대부 계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공동체를 무조건
옹호하지 않고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반대편의 자리에 애정을 기울인다.
그는 사물도 귀한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것
은 각자 쓸모를 갖고 있으며 어떻게 활용되느냐에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
이라 생각한다. 다음은 그가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를 증언한 아들 박종채
의 말이다.
아버지는 늘 도간(陶侃)이 대나무 조각과 톱밥을 모아 두었다가 긴요하게
쓴 일을 말씀하시면서 “천하에는 본래 버릴 물건이 하나도 없다.”라고 하셨
다. 그 당시 사용된 대나무 조각은 모두 예전에 발을 짤 때 대나무 밑동을
잘라서 버린 것을 모아두신 것이었다.26)
“천하에는 본래 버릴 물건이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 연암이 사물을 바
라보는 기본 관점이다. 오히려 연암은 사람들이 버리는 물건이 가장 가치

 

25) 朴趾源, <答仲玉>四 : “世所謂可用之人, 是必無用之人, 世所謂無用之人, 是必
有用之人.”
26) 박종채 지음/박희병 옮김, 앞의 책, 89쪽. 박종채 저/김윤조 역주, 앞의 책, 113쪽.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95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똥’의 가치에 대해 자주 말하는데, 열하일기
(熱河日記), 「일신수필(馹汛隨筆)」에서 장관론(壯觀論)을 설파하는 장
면에서는 거대한 성곽이나 누각이 아닌 더러운 똥거름과 깨진 기와조각
이 진짜 장관이라고 주장한다. 똥은 사람들이 가장 더럽고 지저분하게 여
기는 사물이다. 미학적으로 보자면 가치가 전혀 없다. 그러나 연암은 똥이
야말로 농작물을 풍성하게 살지게 하는 진짜 가치 있는 사물이라고 말한
다. 연암에게 똥의 의미는 농작물을 풍성하게 살찌운다는 실용적 가치를
넘어서서, 가장 쓸모없는 것도 조건이 바뀌면 쓸모를 갖게 된다는 미적
태도의 발현물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평등 정신을 통해 주변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끌어올
리려는 연암의 태도는 이분법적 태도와 수직적 위계를 강조하는 기존 질
서에 대한 거부 정신으로 읽힌다. 기존의 질서는 중심과 주변을 가르고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며,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구분한다. 그러나 연암
은 이편과 저편을 두루 보자고 주장하되 기계적 균형이 아닌 보이지 않는
쪽을 은연중 편듦으로써, 당대의 규범이 규정한 낮고 천한 것, 가치 없고
쓸모없는 것을 중심에 두려 한다. 본래부터 쓸모없는 존재는 없으며 어디
에 배치하느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존재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연암의 전복적인 사유는 여전히 존재를 차별하고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공생(共生)의 길을 제시하는 지혜
가 될 수 있다고 본다.

 

4. 색(色)과 빛[光]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광명안
18세기 후반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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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ethe, 1749-1832)는 “속임은 당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속임에 넘어
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감각 기관의 진실성을 문제 삼는 이 발언을 연
암 역시 공유하고 있다. 연암의 글에는 본다는 것을 문제 제기하는 내용
이 자주 나타나는데, 조선 유학 사회에서 감각 기관에 대한 근본적인 회
의를 내비치는 발언은 흔하지 않다.
연암은 인간의 감각기관이 과연 세계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인지(認知)
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특히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까마귀 날개 비유는 단순히 감각기관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넘어 현
대의 인상파(印象派) 이론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어서 흥미롭다.
달사(達士)는 이상할 것이 없으나 속인(俗人)은 의심스러운 것투성이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달사라
고 해서 어찌 사물을 쫓아다니며 눈으로 보았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으로
열 가지를 떠올리고 열 가지를 보면 마음에 백 가지를 펼치고 보니 수많은
이상야릇한 것들은 도리어 사물에 붙은 것이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한가롭고 여유가 있어 무궁무진하게 맞대응할 수 있다. 본
것이 적은 사람은 백로를 기준 삼아 까마귀를 비웃고 물오리를 기준 삼아
학의 긴 다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사물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는데 저
혼자 의심해 화를 내며 한 가지라도 생각과 다르면 만물을 모조리 비방한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
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치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도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
해 버린다. 슬프다!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가둔 것도 충분한데 다시금 까마귀
를 갖고 세상의 온갖 색을 고정하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다.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97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색이 검은색 안에 깃들어 있는 빛깔인
줄 알겠는가?27)
연암은 달사(達士)와 속인(俗人)의 차이를 말하면서, 자기가 본 것만
을 기준삼아 타자(他者)를 배척하는 속인(俗人)이 되지 말고 미루어 남
을 헤아리는 달사(達士)가 되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특히 까마귀 날개 비
유는 새롭다. 까마귀는 색이 까맣기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 그래서 사람들
은 응당 까마귀는 검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연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다. 햇빛이 비치면 까마귀는 얼핏 자주색도 되고 비취색으로도 빛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푸른 까마귀라고 해도 좋고 붉은 까마귀라고 해도 상관
없다고 한다.
연암의 말은 타당한 것일까? 까마귀 날개가 빛에 따라 다른 색으로 달
리 보인다고 해서 까마귀를 붉은 까마귀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여기서
인상파 화가인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루앙성당을 떠올려 보
자. 모네는 똑같은 장소에서 날짜를 달리해서 같은 루앙 성당의 모습을
수십 점 그렸다. 비오는 날, 흐린 날, 갠 날, 오전, 오후 등 시간과 날씨에
따라 루앙 성당은 각기 다른 색을 갖고 있다. 빛과 날씨의 조건에 따라 똑
같은 대상도 다른 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
을 때 특정한 날의 루앙 성당만이 중심이 될 수는 없으며 각기 다른 색을
갖고 있는 루앙 성당 하나하나가 모두 루앙 성당을 반영하는 것이다. 모

 

27) 朴趾源, <菱洋詩集序> :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 多所恠也. 夫豈
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恠萬奇, 還寄於物
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恠
己. 廼生嗔一事不同, 都誣萬物.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暉乳金, 復耀石綠, 日
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可也, 復謂之赤烏可也. 彼旣本無
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不覩, 而先定於其心. 噫, 錮烏於黑足矣, 廼
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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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는 ‘빛은 곧 색깔이다.’라고 하여, 그때그때 빛의 조건에 따라 다른 색을
갖는 사물을 표현하려고 했다. 오늘날 현대 회화의 기본 이론 가운데 하나
도 ‘사물의 색은 정해져 있지 않다. 빛의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빛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색이 달리 나타난다는 인상주의 관점
에서 보면, 연암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니까 연암은 현대 회화 이론과
서로 통하는 지점에서, 색과 빛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까마귀는 예전 사람들에게 단순히 검은색만으로 인식되지 않았
다. 까마귀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피면 검은색 안에 언뜻 푸른색과 검붉
은 색이 섞여 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까마귀를 푸른 까마귀라는 뜻의
창오(蒼烏)라고도 불렀으며, 붉은 까마귀라는 뜻의 적오(赤烏)라고도 불
렀다. 고대엔 태양을 삼족오(三足烏)라고 해서 다리 셋 달린 까마귀가 태
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대의 벽화를 보면, 붉은 태양 안에 까마귀
를 그려 넣곤 했다. 연암이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라고 한 발언에는 이와 같은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연암은 말하길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
저 정해 버린다’고 비판한다. 다양한 현상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관습적인
눈으로 고정해버리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나아가 연암은 보지도 않
으면서 미리 판정해버리는 선입견을 비판한다.
연암은 다양한 색으로 반짝이는 세계를 보지 못하고 하나의 색으로만
가두는 획일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를 비판하려 한다. 나아가 선입견과 편
견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본래 이 글은 하나의 기준만을 강요
하는 문학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의 문학론은 인식론, 미의식
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윗글에는 연암의 창조적 사유가 어디까지 뻗어갔는지가 잘 나타나 있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399

 

다. 중세기 우리나라에서 색(色)과 빛[光]에 대해 이와 같은 새로운 인식
을 보여준 예는 찾지 못했다. 연암은 검은 것을 어둡다고 하는 자는 까마
귀를 알지 못할뿐더러, 검은색도 모르는 것이라 말한다. 물은 현묘하기 때
문에 비출 수 있고, 옷 칠은 검기 때문에 비춰 볼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
므로 색이 있는 것엔 반드시 빛이 있고 형체가 있는 것엔 반드시 자태가
있다고 말한다.28) 깊은 물은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두운 현묘함으로 인해
물체를 비춘다. 옷 칠을 하면 처음엔 갈색이지만 계속하면 점차 진한 검
은색으로 바뀐다. 칠흑(漆黑, 옻칠한 것과 같은 깜깜한)같은 밤이 되는 것
이다. 그러나 그 검은색으로 인해 사물의 형상을 비출 수 있다. 그러므로
검다고 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검기에
비출 수가 있는 것이다.
색과 빛에 대한 연암의 생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아직까진 찾
아내지 못했지만, 인상파에 이르러 발견한 빛과 색에 대한 관계를 연암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새롭다. 색과 빛에 대한 연암의 인식이 인
상파의 논리와 같은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는지는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
하겠지만, ‘색이 있는 것에 반드시 빛이 있다[有色者, 莫不有光]’는 발언
은 분명 현대의 색채 이론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색마다 빛이 있다는 연암의 발언은 모든 사물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사물마다 다양한 색을 지니고 있음에도
한 가지 색만 고집하고 한 가지 색으로 가두려는 현실을 비판하려는 것이
다. 따라서 다양한 색을 갖는 사물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하며, 선입견으
로 현실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객관적인 현실을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

 

28) 朴趾源, <菱洋詩集序> :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並黑而不知也. 何則? 水玄
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 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400 한국고전연구 33집

 

을 담은 글이 ‘집을 잃어버린 소경’ 비유이다. 많이 다루어진 글이지만 다
시 검토해보겠다.

 

“우리나라에 서화담 선생이란 분이 외출 나갔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다오. ‘너는 왜 우느냐?’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오.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 마흔 살입니다. 예전에 길을 갈 때는 발에 보는 것을 맡기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 보는 것을 맡기고, 소리를 듣고서 누구인지를 분간할
때는 귀에다 보는 것을 맡기고, 냄새를 맡고서 무슨 물건인가를 살필 때는
코에다 보는 것을 맡겼습니다. 사람들은 두 눈만 가졌지만 저에게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눈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또 어찌 손과 발, 코와 귀 뿐이겠
습니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낮에는 피곤함으로 보고, 물건의 모습과 빛깔
은 밤에 꿈으로 보았습니다. 아무런 장애도 없고 의심과 혼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길을 가는 도중에 두 눈이 별안간 맑아지고 눈동자가 저절로
열렸습니다. 천지는 드넓고 산천은 뒤섞여 온갖 사물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마음을 막았습니다. 손과 발, 코와 귀는 뒤죽박죽 착각을 일으켜 온
통 예전의 일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집이 어디인지 까마득하게 잃어버려 홀
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에 울고 있습니다.’ 그러자 화담 선생이 말했다오. ‘네
가 네 지팡이에게 물어본다면 지팡이가 응당 저절로 알 것이다.’ 그러자 소
경이 말했다오. ‘제 눈이 이미 밝아졌으니 지팡이를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화담 선생이 말했다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바로 거기에 네 집이 있을 것이
다.’ 이로써 말해본다면 눈은 그 밝음을 믿을 수 없다오. 오늘 요술을 보니,
요술쟁이가 속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경하는 사람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
이라오.”29)

 

29) 朴趾源, <幻戱記後識> : “弊邦有徐花潭先生. 出遇泣于道者曰, 爾奚泣? 對曰,
我三歲而盲, 今四十年矣. 前日行則寄視於足, 執則寄視於手, 聽聲音而辨誰某,
則寄視於耳, 嗅臭香而察何物, 則寄視於鼻. 人有兩目, 而吾手足鼻耳無非目也.
亦奚特手足鼻耳? 日之早晏, 晝以倦視, 物之形色, 夜以夢視, 無所障碍, 未曾疑
亂. 今行道中, 兩目忽淸, 瞖瞙自開, 天地廖廓, 山川紛鬱, 萬物礙目. 群疑塞胸, 手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401

 

길 잃은 소경 비유는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니다. 눈
이 오히려 진리를 찾아가는데 방해가 되므로 눈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우언이다. 인간의 눈은 한계가 있다. 너무 큰
것은 볼 수가 없고 너무 작아도 볼 수가 없다. 앞을 보면 뒤를 못보고, 뒤
를 보면 앞을 볼 수가 없다. 눈으로 보는 세상도 혼돈스럽고 착종되어 있
기 때문에 아무리 잘 보려고 해도 객관적인 실상을 보기 어렵다. 오히려
잘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속고 만다. 연암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로보지
못하고 편견과 선입견으로 보고 있다고 인식한 듯하다. 그러면서 말하길,
요술쟁이가 속인 것이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이라
고 한다. 여기에서 앞서 말한 괴테의 발언과 만난다.
눈을 감아야 제대로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발언은 매우 역설적이다.
인간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통로가 ‘눈’인데 눈을 신뢰하지 않고서 어떻게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단 말인가? 연암은 세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불가능하다고 인식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연암은 이 글 뒤에서
세상에는 밝은 안목[光明眼]과 참된 견해[眞定見]가 사라진지 오래되었
다고 말한다.30) 달리 말하자면, 광명안(光明眼)과 진정견(眞定見)을 갖
는다면 사물의 실상을 온전히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곧 연암은 눈
이 갖는 한계를 자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나아
간 것은 아니다. 그는 눈은 한계를 갖고 있으므로 눈을 전적으로 신뢰하
지 말고 제대로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31)

 

足鼻耳, 顚倒錯謬, 皆失故常, 渺然忘家, 無以自還, 是以泣爾. 先生曰, 爾問爾相,
相應自知. 曰我眼旣明, 用相何地? 先生曰, 還閉爾眼, 立地汝家. 由是論之, 目之
不可恃其明也如此. 今日觀幻, 非幻者能眩之. 實觀者自眩耳.”
30) 朴趾源, <幻戱記後識> : “趙卿曰, 然世言飛燕太瘦, 玉環太肥, 凡言太者, 已甚之
辭也. 旣論其肥瘦, 而輕加以已甚之辭, 則已非絶世之佳人, 彼二帝之目, 獨眩于
肥瘦之間. 世之無光明眼眞定見久矣.”
402 한국고전연구 33집

 

명심(冥心)은 ‘도로 눈을 감으라’고 한 말에 대한 구체적 해답이다. 「일
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나는 지금에야 도(道)를 알았다’고 하
면서 ‘명심(冥心)하는 사람은 귀와 눈이 폐가 되지 않으나, 귀와 눈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병통이 된다.’고 하였
다.32) 명심은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는 의미로 선가(仙家)의 용어다. 외물
(外物)과 내아(內我)의 구분이 사라지고 주객(主客)이 하나가 된 마음 상
태를 말한다. 연암에게 명심은 관념의 차원이 아닌 실천적 개념으로써, 관
습과 선입견에 영향 받는 지각(知覺)을 의지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평
한 마음가짐으로 보는 것이다. 명심은 눈을 감고 집을 찾아가는 소경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그것은 모순된 외부 현실에 종속되지 않고 세계의
실상을 올바로 보는 것이다.33)
연암은 사람들의 눈은 관습과 고정관념에 길들여져 있다고 말한다. 세
상은 혼돈되고 뒤죽박죽이므로 피상적인 눈으로 보면 진실을 볼 수 없다
고 본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잘못은 보지도 않고 단정 짓는 선입견이며,
세상을 한 가지 색으로만 가두는 태도라 말한다. 연암은 실체의 왜곡을
세상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보는 자가 스스로 속는 것이므로, 제대로 보
는 눈을 터득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심(冥心)이 필요하다.

 

31) 감각기관의 한계와 극복에 대해서는 이미 임형택(1988)에서 잘 이야기되고 있는데,
“연암은 감성인식이 갖고 있는 한계와 그 현실적인 문제점을 절실하게 느끼고 이성
인식으로 극복, 지양할 것을 요망했다.”고 하여 연암이 이성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
다고 주장하였다.
32) 朴趾源, <一夜九渡河記> : “吾乃今知夫道矣. 冥心者, 耳目不爲之累, 信耳目者,
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33) 명심(冥心)과 관련해서는 박희병, 「박지원 사상에 있어서 언어와 명심」, 한국의 생
태사상, 돌베개, 1999, 297∼345쪽에서 깊은 탐구가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명심에
대해 감각적 인식을 뛰어넘은, 물아의 구분이 무화(無化)된 마음 생태로 파악하면서,
명심이 회의의 정신과 비판 정신을 낳으며 공명정대한 눈으로 현실의 본질을 읽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403

 

명심(冥心)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면(裏面)의 실체를 보는
것이다. 특정한 편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자리, 공평한 자리에
서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소경이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발언은 매우 아
이러니하다. 이 또한 관습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거꾸로 보고, 뒤집어 생각
하고, 상투적 사고에서 탈피하려는 그만의 창조적인 사고방식의 발현(發
現)이다.
이와 같이 연암의 창조적인 사유는 기존의 관습적인 상식을 무너뜨리
고 우주관, 역사관, 인간관, 자연관을 비롯해, 공간과 시간, 글의 본질, 소
중화주의 등에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의 창조적 사고는 중세
의 사유를 넘어 오늘날에도 전혀 낡지 않은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는 점에서 현재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5. 결론
연암의 사물 읽기라든가 감각 기관의 한계 자각, 명심(冥心)의 새로운
의미부여,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비판 의식 등은 기존에 논의된 연암 문
학의 특성들이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유지해가면서 새로이 발견한
연암의 창의적인 측면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연암은 유학자의 신분으로 성리학의 질서 속에서 살다간 사람이기에
그의 많은 부분은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살펴보았듯
이 유학의 사유를 넘어선 지점들도 많이 보인다. 그가 진리를 말하는 부
분에는 유학의 원리가 아닌, 불교佛敎), 장자(莊子)의 핵심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서학(西學)까지 끌어들인다.34) 그는 특정한 생
404 한국고전연구 33집
각이나 사상에 고정되지 않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객관적 진실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연암은 상투적인 표현을 거부
하고 새로운 글을 쓰고자 했던 창조적인 문장가이자 정해진 관습,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탐구해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연암을 유학자의 틀에 가두기보다는 세계를 자유롭게 유희
(遊戱)하면서도 진실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던 경계인으로 자리매
김해야 한다고 본다. 그의 생각은 지금에 접근해도 새롭고 신선하다. 지식
의 규범서인 천자문을 거부하며, 까마귀 날개가 검지 않다는 인식은 중
세기에 그 외엔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이른바 ‘사이’ 혹은 ‘경계’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쓸모없는 것, 주변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려는 노력은 중
심의 질서를 강조하는 당대의 태도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도 있다. 감각
기관을 회의하되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나아가지 않고 진실의 눈을 회
복하자는 주장 역시 하나의 사상으로만 설명될 수가 없다. 상대주의적 사
고, 작은 존재에 대한 관심, 사물에 대한 새로운 접근 등은 연암만이 아니
라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공유한 생각이긴 하나, 미시적으로 접근해보면
연암 고유의 사유라고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지식과 문자에 대한 태
도, 빛과 색에 대한 인식 등은 연암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보아도 좋을 것
이다.
이와 같은 생각들을 담아낸 그의 글은 더욱 이채롭다. 연암의 글은 한

 

34) 근래 김명호 교수는 조선후기의 실학이 서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유학을 혁
신하고자 했던 학술운동이라는 입장 아래 연암의 실학사상에 끼친 서학의 영향을,
꼼꼼한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다.(김명호, 「연암의 실학사상에 미친 서학의 영향」,
연암 문학의 심층 탐구, 돌베개, 2013, 113∼180쪽 참조.) 김명호 교수는 연암이 서
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자기 사상의 일부로 용해시켜 나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연암은 유학의 입장에서 서학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상의 편에 서지 않고 진리의 편에서 주체적으로 사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405

 

가지 빛깔만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힌다. 글 속에 담
긴 사유, 글을 전개해가는 능력, 글의 구성 방식은 구태의연하지 않다. 무
엇보다 사물에서 발견한 깨달음을 삶과 현실에 적용시키는 방식은 고전
산문이 성취한 수준을 잘 보여준다. 연암은 가장 하찮고 평범한 사물에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해내고 이를 인식론, 철학, 미의식과 연결시켜 궁극적
으로는 현실의 병폐를 진단하는 데로 확장시킨다. 그가 소재로 삼은 사물
은 똥, 기와조각, 이, 신발, 말똥구리, 까마귀, 코골이와 귀 울음, 속 빈 강
정 등,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재를 가지
고 이야기하려는 진실은 지극히 심각하고 깊다. 앞으로 계속해서 그의 새
로운 사유를 탐구해 감으로써, 연암을 우리의 소중한 문학 자산으로 자리
매김해 가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406 한국고전연구 3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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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 한국고전연구 33집

 

ABSTRACT
The Creative Thinking and Its Meaning in Jiwon Park’s Literature.
Park, Su-mil
This study intends to trace the new thinking of Yeon Am, Park Jiwon.
It proves the sources of his creative thinking and writing and tells the
several aspects connected with his new thinking. Firstly, Yeon Am
thought that existing knowledge and letters did not contain the truth and
criticized that the letters hided the reality. He insisted that literature is
not just a tool to deliver past ethics and existing knowledge, but it should
reveal the changeable things and reality. Things and reality are not just
shadow of main body, but the best writings to show the truth. In his
creative thinking, the centralization of surroundings is distinguished.
Yeon Am left the center place and investigated into the invisible spaces
and isolated conners. Superficially he seemed to insist looking into the
both sides, in reality he urged to watch the invisible spaces, the place
opposite to the common place agreed in a society. He provided
surroundings toward the centeral place, sided for the value and existence
isolated from the center. Finally, he wished that center and surrounding,
valuable and humble things, all would have lived in a harmony. Secondly,
this study explores his new understanding of light and color with his
comparison of the blind. In his “NeungYangShiJeapSeo” the comparison of
raven wings is not just problematic suggestion for the limitation of
human sensory organ, but closely related with the theory of modern
impressionist. This writing proves the high level of his creative thinking.
He thought that the world is full of disorders and confusion, so nobody
can see the world with superficial eyes. In his thinking, viewer deludes
himself, so he should keep correct eyes to see the truth. His creative
thinking overcame the paradigm and order of Middle Age and still today
offers the present aspects and meaning with new critical mind. Yeon Am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409
is to be considered as the marginal man who tried to create the true
world.
Key Words Park Jiwon, creative thinking, sensory organ, reading things,
NeungYangShiJeapSeo , marginal man.
논문투고일 : 2016.04.15
심사완료일 : 2016.04.30
게재확정일 : 2016.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