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41

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남부(南部)에 사는 아무 직책을 맡은 아무개 등은 남양 이씨(南陽李氏)의 절사(節死)한 사실을 삼가 정장(呈狀)합니다. 이씨는 곧 문장과 덕행을 지닌 선비인 박경유(朴景兪)의 아내입니다. 경유가 불행히도 여러 해 동안 앓아 오던 병으로 지난해 12월에 요절했는데, 그때에 경유의 조모(祖母)는 나이 82세로서 오래된 병고로 오늘내일하여 집안에 어떠한 상사(喪事)가 일어난 줄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으며, 경유의 부친도 평소 기이한 병을 앓아 역시 위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씨는 좌우로 병 수발하느라 남편의 죽음에 울음 울 겨를도 없이, 한편으로는 죽은 남편의 시신을 염하고 입관(入棺)할 채비를 몸소 마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노인의 탕약을 손수 달여 올리면서 울음소리를 죽이고 눈물을 삼키며 금방 밝은 낯빛을 짓곤 하였습니다. 친척으로 조문하는 자들이 모두 그 효성에 감격하였으며, 이웃에서도 듣고 그 정경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삼우제(三虞祭)와 졸곡(卒哭)을 마치자 보살피던 두 병자가 차례로 조리되어 마침내 완쾌를 보게 되니, 모두들 이씨의 지성에 신이 감동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5월 17일이 되어 집안사람들에게 두루 이별하는 듯한 말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 이튿날이 바로 이씨의 생일이라 집안사람들은 그가 살아서 이날을 당하고 보니 비통함이 마땅히 갑절이나 더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였을 뿐, 죽기로 맹세한 뜻을 품고 남몰래 시기를 정해 두었을 줄은 실로 알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자 그는 시조모를 모시고 곁에 앉았는데 그 처량한 말과 비통한 안색을 스스로 숨길 수 없어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으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며 어물어물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니, 온 집안이 잠이 들어 변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이르러 갑자기 이씨가 잠자는 방에서 숨이 끊어질 듯 급하게 몰아쉬는 소리가 나기에 옆방 사람들이 급히 가 보니 조금 전에 이미 혼절했으나 따스한 기운은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베개맡의 사발에 간수가 흥건해 있었으므로, 그가 이것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집안사람들이 허둥지둥 이웃을 찾아다니며 해독할 경험방을 여기저기 묻고 다니자, 위아래 마을 여남은 집이 놀라고 가엾이 생각하여 일제히 살피러 쫓아가서 쌀을 씻어 뜨물을 내어 수없이 입에 부어 넣었으나 이미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이 통곡하여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죽은 이날이 바로 그의 생일날이라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찬탄하면서, 모두 하는 말이 “열부로다!” 하였습니다.
이어 그 자리 밑에서 언문 유서 두 통을 발견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정월에 쓴 것으로서 기일을 정하여 죽기로 맹세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남편이 죽었는데도 바로 죽지 못한 것은 실로 시조모와 시아버님 병환이 모두 위독한 상태였기 때문으로, 10년 동안 병자를 모시면서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지 못하고 갑자기 내 뜻대로 한다면 지은 죄가 더욱 클 것이요, 또 죽은 남편의 초종(初終)거듭되는 초상으로 인해 미진한 바가 있을까 두려워서 시일을 끌면서 참아 왔는데 5월 18일은 나의 생일이니 이날이 바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이달 17일에 쓴 것으로서 시아버님께 이별을 고하는 편지였습니다. 우선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사죄하고, 다음으로 자신의 초상을 치르는 범절은 반드시 남편의 상보다 줄여 줄 것을 부탁했으며, 염할 준비는 다 갖추어 놓았는데 이는 모두 밤을 틈타 손수 만든 것이라 운운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씨가 남편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한 것은 남편이 죽던 그날에 이미 결정되었을 터인데, 다섯 달이나 시일을 끌면서 몰래 염할 옷을 꿰매었는데도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으니, 일 처리의 치밀함과 죽음을 결단하는 차분함으로 보자면 비록 옛날 전기(傳紀)에 열거된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무엇이 더하오리까?
대개 이씨는 어린 나이 때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천성에서 우러나왔으며, 성장해서는 여자로서의 행실이 예의 법도에 절로 들어맞았으며, 구태여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바느질과 길쌈을 다 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경유에게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경유는 뜻이 독실하고 행실이 옛사람 같았으며 평소에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다스렸으므로 아내를 벗으로 삼고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하였습니다. 경유의 조모는 여러 해를 앓아 온 고질로 노상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이씨가 조모를 간호하고 봉양하던 범절은 한결같이 경유의 뜻을 따른 것으로서 10년 동안 조금도 게을리 한 바 없었으니, 경유가 옷의 띠를 풀지 않으면 이씨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경유가 몸소 변기(便器)를 가져 나르면 이씨는 친히 변기를 씻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마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절통한 마음을 머금고 때를 기다리다 한 번의 결단으로 목숨을 버린 것을 가지고는 이씨의 고절(高節)을 말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효순하다는 소문이 이미 저와 같이 자자하고, 오늘 절개를 지켜 죽은 결백한 모습이 또한 이와 같이 우뚝하니, 한마을에 사는 도의로 보아 어찌 관청에 소지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마을 안의 제일 어른 집에 일제히 모였는데, 어떤 이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기이하도다! 우리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요, 10년 사이에 이런 일이 모두 한집안에서 나왔는데 우리가 전번에 이미 소지를 올려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찌 뒤의 일인들 혹시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대개 경유의 누이인 김씨의 아내도 예전에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절개를 지켜 죽은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앞뒤로 잇닿아 빛났으므로, 저희들이 일제히 예조에 부르짖고 다시 임금님께도 들리게 하여 이미 정려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씨의 아름다운 행실과 곧은 절개도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 전인(前人)의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빛이 나는 일입니다.
아아! 남녀간에 권고하고 충고하는 말은 여항에서 부르는 풍요의 가사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이 성정(性情)에서 나와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시를 채집하는 관원이 이를 왕국에 바치고 악(樂)을 맡은 관원이 음악으로 전파하여 사방을 교화하고 민심을 감발시켰는데, 지금 이씨의 성취한 바가 어찌 풍요로서 채집되거나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저희들이 다행히도 열녀와 한마을에 살고 있어 눈으로 익히 보고 귀에 젖었으면서도 연명(聯名)으로 소지를 만들고 일제히 한목소리로 집사(執事)에게 달려가 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저희들의 죄입니다. 나아가, 숨겨진 일을 드러냄으로써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풍속을 바로 세우고 도탑게 하는 정사(政事)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각하(閣下)의 직분입니다. 저희들이 어찌 그것까지 관여하겠습니까?

 

李烈婦事狀 爲呈春官來謁。故爲之代草。

 

南部居某職某等。謹呈爲南陽李氏節死事。李氏卽有文行人朴景兪妻也。景兪不幸積疾。殀歿於去年十二月。方其時。景兪祖母年八十二歲。宿疾奄奄。不省家中有何許喪慽。景兪之父。素嬰奇病。亦在危境。李氏左護右將。未暇杞哭。一以躬辦亡夫殮殯之具。一以手調兩老藥餌之節。呑聲飮泣。旋作怡愉。親戚吊者。咸爲感悅其誠孝。隣里聞之。莫不悲憐其情境。喪旣就窆。虞哭已畢。而所護兩疾。取次調將。竟獲蘇完。則皆以爲李氏至誠所感也。及五月十七日。遍與家人有訣別之語。葢其翌朝。乃李氏生日也。意其生臨是日。當倍悲痛而有是言也。實未覺其矢死之志。潛有其期也。至夜侍其王姑母之側。其悽惋之辭。悲切之色。不能自諱。欲起復坐。不忍離捨。徊徨掩抑。夜深而退。闔家就睡。不慮有變矣。夜方向晨。忽李氏所寢之室。有急喘將絶之聲。傍室諸人。急往視之。則纔已昏窒。煖氣猶存。枕邊有椀。鹽液滴瀝。乃知飮此而自盡也。其家人倉卒歷叩比隣。雜問解毒經驗。則上下十數家。且驚且憐。一齊赴看。淅米出泔。無數灌注。而已無及矣。擧家號慟。慘不忍見。果此死日。卽其生朝。相顧嗟異。咸曰。烈哉。乃其席底。得諺書二通。其一乃正月所書。而指期誓死之語也。其言以爲夫歿而不敢卽死者。誠以王姑尊舅病俱濱危。十年侍疾。未卒淺誠。而遽行己志。則爲罪尤大。且恐亡夫初終。因荐喪而有所未盡。隱忍時月。若乃五月十八日。惟吾生朝。卽吾死期。一乃本月十七日所書。而辭訣其舅之札也。先謝其未能終養之罪。次囑其治喪凡節。必减前喪。殮具俱在。皆乘夜手製云云。葢李氏從死之志。已决於當日。而挨過五朔。潛縫殮衣。未甞爲傍人之所覺。則其處事之周詳。决義之從容。雖古傳紀所列。何以加之。葢李氏。自在幼齡。愛敬根性。及其旣壯。女範閨則。動合儀度。不煩斅誨。紅績成備。其歸景兪。以夫爲師。景兪志篤行古。平居以小學律身。則以妻爲友。相敬如賓。景兪之祖母。積年沉疾。長在牀褥。李氏之所以扶護調養之節。一遵景兪之志。十載之間。無敢少懈。景兪衣不解帶。則李氏不歸私室。景兪躬執廁牏。則李氏親自洗澣。及居姑喪。哀禮備至。至爲閭里之所感歎。今此含痛待時。一决忘生。不足爲李氏高節。然其平居孝順之著聞。旣如彼藉藉。今日節死之明白。又如是卓卓。則其在同閈之義。豈無呈官之擧乎。卑職等齊會于洞中耆老之家。或有感激而垂涕者曰。異哉。吾儕之爲此擧。今其再矣。十年之閒。咸萃一門。吾旣得之於前。而豈或少緩於後哉。葢景兪之妹金氏婦。亦嘗早寡。就義一欵。照耀後先。卑職等齊籲春官。轉達天聽。已蒙㫌淑之典矣。今李氏懿行貞節。超出尋常。無媿前美。其於國家化民成俗之治。實有光焉。嗚呼。古者男女告誡之辭。不過閭巷風謠之語。出於性情。有裨風敎。則採詩之官。獻諸王國。典樂之職。播之絃歌。風動四方。感發民彛。今李氏之所成就。豈特風謠之所採而絃歌之可被也哉。顧卑職等幸同烈女之閭閈。目塗耳擩。而不能合辭齊聲。走告執事。則卑職等罪也。至於闡發幽隱。仰裨聖朝樹風敦俗之政。乃閣下職也。卑職等。何與焉。




 

[주D-001]박경유(朴景兪) : 《연암집》 권10 열부 이씨 정려음기(烈婦李氏旌閭陰記)에 소개되어 있다. 연암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던 선비로 정조 5년(1781)에 요절했다. 박윤원(朴胤源)이나 이덕무의 문집에 박경유에게 준 답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는 《사소절(士小節)》에서 박경유를 덕행을 갖춘 인물로 칭찬했다.
[주D-002]초종(初終) : 초상이 난 이후 졸곡(卒哭)까지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말한다.
[주D-003]거듭되는 초상 : 병 수발을 소홀히 하여 시조모와 시아버지가 잇달아 죽게 될 경우를 가정해서 한 말이다.
[주D-004]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자로(子路)가 전한 공자(孔子)의 말로 “상례(喪禮)에 슬픔은 부족한데 예절이 남음이 있는 것은, 예절은 부족하되 슬픔이 남음이 있는 것만 못하다.〔喪禮 與其哀不足而禮有餘 不若禮不足而哀有餘〕”고 하였다.
[주D-005]각하(閣下) : 이본들에는 ‘합하(閤下)’로 되어 있다. 집사(執事)와 각하, 합하는 모두 판서(判書)에 대한 경칭으로 통용되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