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남부(南部)에 사는 아무 직책을 맡은 아무개 등은 남양 이씨(南陽李氏)의 절사(節死)한 사실을 삼가 정장(呈狀)합니다. 이씨는 곧 문장과 덕행을 지닌 선비인 박경유(朴景兪)의 아내입니다. 경유가 불행히도 여러 해 동안 앓아 오던 병으로 지난해 12월에 요절했는데, 그때에 경유의 조모(祖母)는 나이 82세로서 오래된 병고로 오늘내일하여 집안에 어떠한 상사(喪事)가 일어난 줄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으며, 경유의 부친도 평소 기이한 병을 앓아 역시 위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씨는 좌우로 병 수발하느라 남편의 죽음에 울음 울 겨를도 없이, 한편으로는 죽은 남편의 시신을 염하고 입관(入棺)할 채비를 몸소 마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노인의 탕약을 손수 달여 올리면서 울음소리를 죽이고 눈물을 삼키며 금방 밝은 낯빛을 짓곤 하였습니다. 친척으로 조문하는 자들이 모두 그 효성에 감격하였으며, 이웃에서도 듣고 그 정경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삼우제(三虞祭)와 졸곡(卒哭)을 마치자 보살피던 두 병자가 차례로 조리되어 마침내 완쾌를 보게 되니, 모두들 이씨의 지성에 신이 감동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5월 17일이 되어 집안사람들에게 두루 이별하는 듯한 말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 이튿날이 바로 이씨의 생일이라 집안사람들은 그가 살아서 이날을 당하고 보니 비통함이 마땅히 갑절이나 더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였을 뿐, 죽기로 맹세한 뜻을 품고 남몰래 시기를 정해 두었을 줄은 실로 알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자 그는 시조모를 모시고 곁에 앉았는데 그 처량한 말과 비통한 안색을 스스로 숨길 수 없어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으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며 어물어물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니, 온 집안이 잠이 들어 변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이르러 갑자기 이씨가 잠자는 방에서 숨이 끊어질 듯 급하게 몰아쉬는 소리가 나기에 옆방 사람들이 급히 가 보니 조금 전에 이미 혼절했으나 따스한 기운은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베개맡의 사발에 간수가 흥건해 있었으므로, 그가 이것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집안사람들이 허둥지둥 이웃을 찾아다니며 해독할 경험방을 여기저기 묻고 다니자, 위아래 마을 여남은 집이 놀라고 가엾이 생각하여 일제히 살피러 쫓아가서 쌀을 씻어 뜨물을 내어 수없이 입에 부어 넣었으나 이미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이 통곡하여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죽은 이날이 바로 그의 생일날이라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찬탄하면서, 모두 하는 말이 “열부로다!” 하였습니다.
이어 그 자리 밑에서 언문 유서 두 통을 발견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정월에 쓴 것으로서 기일을 정하여 죽기로 맹세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남편이 죽었는데도 바로 죽지 못한 것은 실로 시조모와 시아버님 병환이 모두 위독한 상태였기 때문으로, 10년 동안 병자를 모시면서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지 못하고 갑자기 내 뜻대로 한다면 지은 죄가 더욱 클 것이요, 또 죽은 남편의 초종(初終)도 거듭되는 초상으로 인해 미진한 바가 있을까 두려워서 시일을 끌면서 참아 왔는데 5월 18일은 나의 생일이니 이날이 바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이달 17일에 쓴 것으로서 시아버님께 이별을 고하는 편지였습니다. 우선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사죄하고, 다음으로 자신의 초상을 치르는 범절은 반드시 남편의 상보다 줄여 줄 것을 부탁했으며, 염할 준비는 다 갖추어 놓았는데 이는 모두 밤을 틈타 손수 만든 것이라 운운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씨가 남편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한 것은 남편이 죽던 그날에 이미 결정되었을 터인데, 다섯 달이나 시일을 끌면서 몰래 염할 옷을 꿰매었는데도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으니, 일 처리의 치밀함과 죽음을 결단하는 차분함으로 보자면 비록 옛날 전기(傳紀)에 열거된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무엇이 더하오리까?
대개 이씨는 어린 나이 때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천성에서 우러나왔으며, 성장해서는 여자로서의 행실이 예의 법도에 절로 들어맞았으며, 구태여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바느질과 길쌈을 다 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경유에게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경유는 뜻이 독실하고 행실이 옛사람 같았으며 평소에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다스렸으므로 아내를 벗으로 삼고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하였습니다. 경유의 조모는 여러 해를 앓아 온 고질로 노상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이씨가 조모를 간호하고 봉양하던 범절은 한결같이 경유의 뜻을 따른 것으로서 10년 동안 조금도 게을리 한 바 없었으니, 경유가 옷의 띠를 풀지 않으면 이씨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경유가 몸소 변기(便器)를 가져 나르면 이씨는 친히 변기를 씻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마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절통한 마음을 머금고 때를 기다리다 한 번의 결단으로 목숨을 버린 것을 가지고는 이씨의 고절(高節)을 말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효순하다는 소문이 이미 저와 같이 자자하고, 오늘 절개를 지켜 죽은 결백한 모습이 또한 이와 같이 우뚝하니, 한마을에 사는 도의로 보아 어찌 관청에 소지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마을 안의 제일 어른 집에 일제히 모였는데, 어떤 이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하였습니다.
대개 경유의 누이인 김씨의 아내도 예전에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절개를 지켜 죽은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앞뒤로 잇닿아 빛났으므로, 저희들이 일제히 예조에 부르짖고 다시 임금님께도 들리게 하여 이미 정려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씨의 아름다운 행실과 곧은 절개도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 전인(前人)의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빛이 나는 일입니다.
아아! 남녀간에 권고하고 충고하는 말은 여항에서 부르는 풍요의 가사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이 성정(性情)에서 나와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시를 채집하는 관원이 이를 왕국에 바치고 악(樂)을 맡은 관원이 음악으로 전파하여 사방을 교화하고 민심을 감발시켰는데, 지금 이씨의 성취한 바가 어찌 풍요로서 채집되거나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저희들이 다행히도 열녀와 한마을에 살고 있어 눈으로 익히 보고 귀에 젖었으면서도 연명(聯名)으로 소지를 만들고 일제히 한목소리로 집사(執事)에게 달려가 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저희들의 죄입니다. 나아가, 숨겨진 일을 드러냄으로써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풍속을 바로 세우고 도탑게 하는 정사(政事)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각하(閣下)의 직분입니다. 저희들이 어찌 그것까지 관여하겠습니까?
李烈婦事狀 爲呈春官來謁。故爲之代草。
[주D-002]초종(初終) : 초상이 난 이후 졸곡(卒哭)까지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말한다.
[주D-003]거듭되는 초상 : 병 수발을 소홀히 하여 시조모와 시아버지가 잇달아 죽게 될 경우를 가정해서 한 말이다.
[주D-004]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자로(子路)가 전한 공자(孔子)의 말로 “상례(喪禮)에 슬픔은 부족한데 예절이 남음이 있는 것은, 예절은 부족하되 슬픔이 남음이 있는 것만 못하다.〔喪禮 與其哀不足而禮有餘 不若禮不足而哀有餘〕”고 하였다.
[주D-005]각하(閣下) : 이본들에는 ‘합하(閤下)’로 되어 있다. 집사(執事)와 각하, 합하는 모두 판서(判書)에 대한 경칭으로 통용되는 것들이다.
'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지원(朴趾源) 문학에 나타난 창조적 사유와 그 의미 (0) | 2017.10.31 |
---|---|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원사(原士) -연암집 끝 (0) | 2017.10.31 |
박 열부(朴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바치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朴烈婦事狀 爲呈春官來謁。 (0) | 2017.10.31 |
청허대사(淸虛大師) 영규비(靈圭碑) (0) | 2017.10.31 |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0) | 2017.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