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金昌業과 朴趾源의 기록을 중심으로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54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 金昌業과 朴趾源의 기록을 중심으로 -

 


2)정 혜 중**

 


目 次
1. 머리말
2. 조선지식인의 연행록과 청대 여성
3. 18세기 연행록의 漢女와 胡女
3.1. 關外의 胡女
3.2. 北京의 漢女
4. 맺음말
參考文獻
中文摘要

 

1. 머리말
이 글은 청대 중국 여인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청대(1644-1911)는 현대 중국의 영토와
민족 구성의 면에서 그 단초가 갖추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에 중국에서도 중국인 스스로의
역사적 위상을 근현대라는 시간적 연속에서 규명하기 보다는 주변 제 민족을 포함해 가는 청대에
서 찾고 있다. 중국의 청사편찬사업, 일명 ‘淸史工程’은 그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기반
으로 청에 대한 역사 연구는 자료와 연구에서 어느 때보다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여성사 영역
또한 이러한 연구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여성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동향 소개1)뿐 아
니라 명청대 여성교육과 법률 구조에 대한 다양한 사례연구2)도 진행되고 있다.

 

* 이 논문은 2007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
음(NRF-2010-413-B00029).
** 이화여자대학교 사학전공 부교수
1) 裔昭印, 「婦女史硏究的興起與當代史學」, ?學術月刊? 2002-3.: 郭海東, 「近十餘年來明代婦女史硏究綜
述」, ?中北大學學報? 2006-1.
2) 趙忠仲, 「明淸安徽婦女的二元化性格-以社會生活爲中心的考察」, ?樂山師範學院學報? 2010-2 : 胡海, 「明淸時期徽商婦的家庭角色及地位」, ?安徽文學? 2007-11; 趙崔莉, 「明代婦女的法律地位」, ?安徽師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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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시기에 관한 여성 연구 경향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 시기 상층사회에서 교육이 중시되
어 특히 여성 문인들의 활동이 많아지게 되고3), 그들의 활동을 분석한 결과 여성 지식층들의 삶과
교육, 사상, 지향점 등이 이전 시기와 다른 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여성에게 식자율
과 교육이 확대되었고 문장과 시를 짓고 출판하는 여성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교류하여 갔으며 결혼과 관련해서도 부인이 남편에서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관계에서 벗
어나고자 하는 싹이 보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상층사회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회 하
층 여성들에 대한 관심도 시작되었다. 국내에도 경제적으로 곤궁하였던 사회하층 여성들의 삶에
주목한 연구가 진행되었다.4) 이 연구에서는 관습 규범이 아니라 실제 법률문서 등을 분석하여 남
성 중심의 사회질서 속에서도 여성들만의 활동 범위와 행위 선택의 폭이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명청시기 여성 여가활동을 분석해 보아도 明淸 사회에서 女性은 사원 등에서 향을 사르고
참배를 한다거나 여행을 하는 활동 등이 많아지자 순무를 비롯한 여러 관료들은 각종 규범을 제정
하여 婦女들의 그러한 활동을 금지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것은 한편으로는 明淸시기 부녀들의 여
가 소비에 대한 주동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5)
이러한 연구 성과는 전근대 시기의 중국 여성이 정절을 지키고 사회에서 유리되어 내외를 하는
순종적인 모습과는 차별적인 부분을 지적하며 여성들의 활동은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연구라고 평
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에 주목한 기록들은 조선 지식인의 연행록에도 많이 나타나 있
다. 18세기 연행록을 연구 논문에 따르면 사대부의 한족 여성들의 이미지와는 달리 만주족이나 신
분이 낮은 여자들은 한족들과 달랐으며 특히 남녀간의 內外를 신경 쓰지 않아 조선 사신들이 중국
여성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6) 한족 왕조인 명조에서는 여성을 漢女와 胡女
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지만 만주족 왕조 청조에 들어서자 조선지식인들은 이전의 漢女와 다른 모
습을 하는 胡女들의 차이에 주목하여 그 모습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편, 2000년대에 들어 중국사 연구에서 북방민족, 소수민족 역사가 중요하게 강조되면서 청조

 

大學學報?, 2004-1 및 「明代女性的休閑生活」,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9-1, 「明淸女性的職業選擇」, ?安徽師範大學學報? 2011-7, 「明淸女性職業的多元拓展及休價値提升」,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11-2;
巫仁恕, 「消費與性別-明淸士商的休閑購物與男性特質」, ?明淸史硏究? 36, 2011; 阿風, 「明淸時期徽州
婦女在土地賣買中的權利與地位」, ?歷史硏究? 2000-1; 楊曉輝, 「規範與失范-淸代平民家庭夫妻衝突問
題硏究」, ?河北大學學報? 2011-10 등
3) 이러한 인식은 진동원(진동원지음, 송정화⋅최수경 옮김,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 도서출판 박이정, 2005)의
연구이후 20세기 후반 여성사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근 연구성과도 명청시대 여성문인들의 사례연구
가 계속되고 있다.
4) 한승현, 「淸中期 법률문서에 나타난 하층 여성들의 생활」, ?역사문화연구? 45, 2013, 193-238쪽; 윤혜영 ,「명
청시대 여성 삶의 실상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한성사학? 28. 2013, 37-74쪽.
5) 巫仁恕, 「費與性別 : 明淸士商的休閑購物與男性特質」, ?明淸史硏究? 36, 2011. 1-36쪽.
6) 김현미, 위의 논문, 186쪽 ; 김민호, 「燕行錄에 보이는 中國 女性 形象」, ?중국어문논총? 54, 2012, 327-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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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국지배가 명대와는 다른 점 등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만주족 청조의 한족 지배 형태
와 그로 인한 변화는 분석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또 그러한 지배체제 속에서 조공국 관계를 맺은
조선은 청대를 통해 가장 빈번하게 관계하는 외국이었다. 따라서 외국 기록을 통해 청국을 이해하
고자 한다면 조선 사료는 매우 유용한 측면이 많다. 여성사의 영역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그
런데 청대 여성 연구에서 조선 연행록의 기록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
탕으로 조선의 연행록에 보이는 漢女와 胡女에 대한 기록을 분석하여 그것이 가지는 여성사적 의
미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18세기를 대표하는 金昌業과 朴趾源의 연행록을 분석하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18세기는 만주족 청나라가 중국 본토에 들어와 漢族들과 공동생활을 영위하게
되면서 그들의 지위를 공고히 해나가는 시기다. 특히 1712년 北京을 使行하는 김창업의 경우 중
국에 대한 묘사가 비교적 사실적으로 이후 홍대용, 박지원 등에게 미치는 영향이 자못 크다는 점은
이미 많은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다.7)
이에 먼저 Ⅱ장에서는 분석을 위해 주로 이용하는 金昌業이 ?稼齋燕行錄?과 朴趾源의 ?熱河
日記?가 가지는 의미를 간단히 분석할 것이다. 또 Ⅲ장에서는 두 저작에 나타나는 각 여성에 대하
여 지리적인 구분을 중시하여 關內外로 나누고, 각 공간에서 자주 접하는 胡女(關外)와 漢女(關
內, 北京)를 중심에 두고 서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18세기 중국여성들의 생활상을 복원하여 그
들의 위치를 명확하게 하고 19세기로 이어지는 여성사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2. 조선 지식인의 연행록과 청대 여성
한중관계사 연구에서 조선과 청국과는 明代에 일정한 패턴으로 그 관계가 정착한다고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17세기 중반에 이민족 왕조인 淸朝가 입관하여 국가를 수립하였다는 변수 때문에
조선의 對중국인식에 큰 변화를 야기하였다. 강한 충격을 받은 조선의 對중국관계의 틀은 18세기
중반 이후 서서히 회복되어 전형적인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다.
18세기가 갖는 특징은 청조의 안정과 번영을 기반으로 관계가 안정적이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
는 청조의 통치자들이 명⋅청 교체의 혼란으로 인해 중단된 경제적 성장과 사회변화의 파고를 진
정시키려고 했던 시기로 중국사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번영을 구가하였던 시기였고, 중앙아시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효율적인 행

 

7) 정혜중, 「19세기 초 조선 사행 김경선의 북경체험과 외국정보 이해」, ?中國史硏究?, 2005, 141-170쪽 : 김현
미, ?18세기 연행록의 전개와 특성?, 혜안, 2007 : 崔韶子, 「18세기 金昌業, 洪大容, 朴趾源의 중국인식」, ?명청사연구? 32, 2009,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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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계를 마련하였고, 정부관직이나 사회전반에 걸친 滿漢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한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상업에 발달하였고 세법이 개정되고 문화생활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중
국인구가 18세기 말엽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에 따른 토지에 가해는 압박 때문에 사회불안이
야기되면서 왕조의 전체적인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조선의 대외관계에 미치
는 영향 또한 가히 심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8) 이러한 18세기 중국에 대한 기록도 조선에는 연행
록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본 연구에서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연행록의 여성에 대한 기록도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청
국여인에 대한 생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현대 중국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중국혁명과 사회주의화에 그 연원을 찾으며 근대 혁명운동가들의 움직임에 주목하
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20세기 많은 여성들이 反滿, 혹은 排滿을 주장하면서 혁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18-19세기의 중국의 토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의식
을 풀어가는 실험적 연구로 먼저 18세기의 중국 청대 여성을 서술한 대표적 조선인의 자료에 주목
한 것이다.9) 청대 여성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현대 중국형성과 깊은 관계를 갖은 하나의 고리
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중국에 관한 기록 중 대표적인 것은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東方見聞錄?(1274-1290년
중국견문)을 시작으로, 이슬람 탐험가 이븐 바투타 (1325-1354년)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마테
오 리치의 ?利瑪竇中國札記?(1582-1610년 중국 견문), 마카트니는 ?中國訪問使節記?(1793년 중
국견문) 등 각 시대별로 다양한 자료가 남겨져 있지만 여성에 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다.10) 또
矢澤利彦의 ?西洋人の見た16世紀~18世紀の中国女性?11)과 吳孟雪의 ?明淸時期西歐人眼
中的中國?12)은 서양인 선교사의 시각에서 관찰한 기술을 바탕으로 하였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중
국에 오래 체류하였다는 장점은 있지만 중국사회가 서양사회와 다른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두 연구서는 명과 청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시기로 묶고 유교사회에서 여성의 폐쇄성과 소
극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 三從之德의 비주체적인 여성을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
리고 있기 때문에 최근의 연구경향과 다소 차이가 있다.
18세기에 조선에서 파견된 사행은 단기간이지만 청국에 관한 정보를 가진 조선 지식인들이 같

 

8) 최소자, 위의 글, 2-5쪽 : 최소자 등, ?18세기 연행록과 중국사회?, 혜안, 2007, 서문.
9) 이러한 기본적인 틀은 이미 2006년 12월 6일 한국여성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하여 의견 수렴을 거친 바
있다.
10) 마르코폴로의 ?東方見聞錄?에 소개된 여성의 모습은 조신하고 암전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김민호의 위 논문, 302-303쪽. 김민호의 연구 또한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중국여성에 대한 인식을 정리
하고 있다.
11) 矢澤利彦, ?西洋人の見た16世紀~18世紀の中国女性?, 東京; 東方書店,1990.
12) 吳孟雪의 ?明淸時期西歐人眼中的中國?, 北京; 中華書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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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길을 반복적으로 왕래하면서 사회의 변화를 읽고 있다는 점에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 게다가 18
세기에 파견된 사행과 그 수행원들은 19세기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이며 견문할 수 있었다.
특히 고관의 자제들이나 문인학사들은 공무의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체류하는 시간의 대
부분을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 견문확대 및 민간정보의 획득하는데 활용하였다.13)
이들이 남긴 기록 중에는 중국 측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는 중국사회에 대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
을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 전형적인 중국과 한국의 교류관계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이
시기 연행 사신과 수행원들의 연행록이었다. 연행록은 조선에서 청나라 동북쪽 육로인 만주지역을
통해 북경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거쳤는데 비록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예정된 루트를 왕래하였
지만 이 지역에 대해 끊임없는 정보를 남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중국여인들에 대한 정보
가 전달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연행록에 남겨진 중국여인들의 모습이 그대로 외부여인들의 모습
으로 조선에 전달되었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이 보고 느낀 중국여인에 관한 자료
는 청국여인에 관한 생생한 생활상을 고찰하고 조선인의 인식을 살펴보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
다.14)
주지하듯이 청대 사행사절의 여행의 목적지는 北京이며 이들은 청대 만주지역과 북경일대가 주
요 노정으로 柵門→鳳凰城→遼陽→瀋陽→柳條溝→撫順→山海關(秦皇島)→北京(대체로의
여정은 朝陽門, 東岳廟, 玉河館, 觀象臺, 東天主堂, 琉璃廠, 景山 등) 의 일정을 반복적으로 움
직이고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중국의 다양한 여인과 접하여 곳곳의 여인들 생활에 대해 언급해 두
고 있다.
18세기 연행록 중 김창업의 일기에는 청대 여성들의 언급이 풍부하다. 박지원의 경우는 北京과

 

13) 기록을 남긴 조선의 사행 및 수행원들은 고위 관료와 저명한 文人⋅학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서방 연행록
저자와는 달리 학문적 수준이 상당하여 문화적, 사상적, 지리적으로 중국에 익숙한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서
방측의 이해보다 심도 깊은 연행록을 남길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인식은 서양의 여행가들 보다 중국 사회
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었고, 또한 對淸關係에서도 초기 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 앞의 중
국에 대한 많은 연행록보다 오히려 중국의 실상을 더욱 정확하게 보았다고 생각된다. 이들 기록은 대체로 서
울(당시 漢城府)의 출발에서부터 국왕에 대한 의례, 노정의 기록, 북경에서의 외교 및 무역, 느낌, 귀로 후의
보고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은 가히 조선시대 외교에 대한 전반적인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최소자 등, ?18세기 연행록과 중국사회?, 혜안, 2007, 서문.
14) 19세기 대표적인 연행록의 저자인 김경선은 그의 ?燕轅直指? 서문에서 “연행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기행문을
남겼는데 그 중 3가가 저명하니 그는 곧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이다”라고 하여 연행 3가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18세기 전기 대표적인 연행록인 김창업의 ?老稼齋燕行日記?와 18세기 후기의 대표 연행록인 ?을병연
행록?의 시간적 간격은 53년, ?을병연행록?과 ?열하일기?의 간격은 15년이 된다. 작자 관계에서도 담헌의 스
승 金元行은 김창집의 형 김창협의 손자가 되며, 연암의 장인 이천보도 김창협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로 이들
이 모두 노론 가문의 영향 하에 있어 연행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음도 특기할 사실이다. 김창업(18세기 전기 대
표)-홍대용과 박지원(18세기 후반대표) 이렇게 연결해 놓고 보면 연행록의 전통과 문화의식의 변모가 확인된
다. 18세기 연행록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은데 이에 대한 연구는 김현미, ?18세기 연행록의 전개와 특성?,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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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를 오가며 생생한 청국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면, 18세기를 대표하는 홍대용의 경우 일
반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식인과의 교류와 서학에 대한 관심이 중심이다. 따라서 滿漢의 구별
이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는 18세기 초기 김창업의 일기는 여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
된다. 金昌業15)은 1712년(康熙51, 肅宗51) 11월 초 3일 謝恩兼冬至使 金昌集을 수행하여 서울
을 떠나 26일 압록강을 건너, 같은 해 12월 27일 北京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北京에서 46일간 머
무르다가 1713년 2월 14일에 北京을 떠나 3월 13일 압록강을 넘고, 그 달 30일 한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총 146일간 여정을 마쳤다. 이때 김창업의 나이는 이미 56세였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
원은 1795년 43세 청국을 방문한다. 56세 김창업은 평소부터 중국 사정에 관하여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형님의 수발을 든다는 명목을 빌어 구차한 군관 행색으로 북경을 방문하는
기회를 얻었다.16)
김창업이 ?稼齋燕行錄?17)에서 중국에 대해 기록한 내용은 박지원18)에게 중국 안내지침서의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창업은 ?稼齋燕行錄?의 「山川風俗總錄에 청국여인에 대한
인상을 집약적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박지원이 인식한 여성도 이러한 인식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다. 이를 분석하여 두 지식인의 여성관을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인들이) 만나 인사하는 법은 揖을 하며 절은 하지 않는다. 경의를 나타낼 때는 허리를
굽히고 사례할 때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할 때 반드시 손짓을 한다. 만약 친한 사람을 만나면 다
가가서 두 손을 잡고 흔들어서 반가운 뜻을 표하는데 여인은 그렇지가 않다. 한족 여인은 분을
바르지만, 만주족의 胡女는 바르지 않는다. 전에 듣기로는 한족 여인은 남편이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모두 화장을 하고 꽃을 꽂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다 그렇지는 않았다. 關外의 여

 

15) 1712년 冬至使兼謝恩使 金昌集은 아우인 金昌業(1658-1721)을 打角(自辟軍官)의 신분으로 동행하였다. 그
의 집안은 창집-창협-창업-창흡-창즙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六昌의 집안으로 이들의 학문과 철학적 세계관의
특징은 퇴계와 율곡의 도학에서 벗어나 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인성론을 제시하며 다양하고 개방적인 학문관
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되어질 수 있다. 정혜중, 「조선 선비의 청국 수도 北京見聞 : 김창업의 ?稼齋燕行
錄?을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23, 2005, 33-65쪽.
16) 金昌業, ?稼齋燕行錄?, 제1권, 往來總錄.
17) ?稼齋燕行錄?은 유람길에 적어놓았던 메모와 필담지, 그리고 북경에 도착하고 얼마 지난 1월 6일 역관 吳志
恒으로부터 전해 받은 ?大興縣志?와 기타 서적 중 청나라에 관한 기록, 이전 선비들의 北京 방문 자료에 기
초하여 매일 매일 정리된 형태가 일기로 정리된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 그는 모든 자료를 토대로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재정리한 것이다. 金昌業, ?稼齋燕行錄? 제4권, 1월 9일.
18) 1780년 (乾隆45, 正祖4) 6월에 압록강을 건너 8월 1일 北京 숙소에 들어갔지만, 8월 5일 熱河로 갔다가 8월
20일에 北京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박지원의 아들 朴宗采는 아버지에 대해 쓴 전기 ?過庭錄?에서 ‘熱
河日記는 「皇圖紀略」, 「謁聖退述」, 「盎葉記」 등 서 너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가 열하에 머물 때의
일을 적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열하에서 北京으로 돌아온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집필하지 못하셨
기 때문에 책이름을 단지 ?熱河日記?라 총칭한 것이니, 기실 미완의 책이다’고 전하고 있다: 정혜중, 「조선
선비의 청국 수도 北京見聞」, 2005, 33-37쪽.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383

 

인 중에는 미인이 많았다. 남녀의 복장은 사치한 이나 검소한 이를 막론하고 모두 검은 빛을 숭
상하는데, 한족 여인은 그렇지 않아 푸르고 붉은 바지를 입은 자가 많았다. 또 부자로 사치한 자
외에는 다 굵은 베를 쓰며, 북경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의 옷은 매우 가난한 자 외에는 모두 비단
을 입으며, 시골도 마찬가지였다. 남녀 귀천을 막론하고 鞋(가죽신)나 靴(목이 긴 신)를 신는다.
비록 말몰이꾼이라도 다 鞋를 신는데, 베나 비단으로 만들어졌고 가죽으로 된 것이다. 봉성과
심양 사이에선 간혹 가죽신[皮革襪]을 신는다. 호녀는 纏脚하지 않으나 간혹 靴를 신기도 한다.
한족 여인은 사람을 피하고 청족 여인은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여자는 비단옷을 입고 분을 바
르고 꽃을 머리에 꽂는데, 그 남편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얼굴마저 누추하여 얼른 보면 종으로
보인다. 모든 힘든 일은 다 남자가 담당한다. 수레를 몰고 밭을 갈고 나무를 지는 일 외에도 물
의 운반, 쌀찧기, 씨뿌리기에서부터 심지어 베를 짜고 바느질하는 일까지 모두 남자가 한다. 여
자는 드물게 문밖에 나오며 하는 일은 신바닥을 꿰매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시골 여자는 간혹
곡식을 까불거나 밥 짓는 일 등을 직접 하기도 하는데, 시장이나 가게에 오가는 여자들은 결코
볼 수가 없다”19)
김창업의 여성에 묘사는 여성 외모와 복장, 그리고 가정 내에서의 활동 등 다양한 측면에서 포
괄적이지만 함축적으로 청국여인에 대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김창업은 청국 여인들을 남
성과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읍을 하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 여성을 언급하면서 한족여인(漢
女) 과 만주족 여인(胡女)으로 구분하고 특색을 각각 그들의 생김새(미모), 의복(색구분, 만주족은
검정색) 및 생활습관을 나누어 보고 있다.20) 이러한 차이는 청왕조가 만주족 왕조이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청국 여인에 대한 연구도 이에 근거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기본적 인식을 바탕으
로 보다 구체적으로 지역과 대상을 구분하여 양자의 인식을 고찰하여 보자.

 

3. 燕行錄의 漢女와 胡女
3.1. 關外의 胡女

 

압록강을 건너 청국 땅으로 들어와 북경으로 들어가기 까지 약 한 달 동안 사행들은 다양한 경
험을 한다. 특히 이 시기에 만나는 여인은 한족, 만주족, 몽고족, 그리고 조선족의 여인으로 이 절

 

19) 金昌業, ?稼齋燕行錄?, 「山川風俗總錄」.
20) 18세기 연행록을 연구한 김현미에 따르면 중국을 방문한 조선 지식인들이 거의 강박적이라고 할 정도로 한족
여성과 호인여성을 구분하고 설명하면서 종족의 다름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품성의 선후진성
을 재려는 정신적인 구분, 선입견의 관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분석한다. 김현미, 「18세기 연행록 속에 나타난
중국의 여성」,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11, 2005, 184-187쪽.
384 中國學報 第七十三輯

 

에서는 關外의 胡女, 즉 滿洲族 여인을 중심으로 漢族, 蒙古 그리고 朝鮮 여인들에 대해 고찰하
며 각각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단, 몽고와 조선 여인의 경우 사례가 많지 않으므로 北京의 사
례를 포함하여 함께 다루고자 한다.
1712년 義州와 鳳凰城을 지나 12월 초 김창업은 자못 번성한 狼子山이란 곳에 도착하여 문 앞
에 나와서 구경하는 여인들이 많이 보게 되는데 이곳에서 漢女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21) 사행들의
행렬은 곳곳에서 많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이동이었는데 다음의 기사를 보면 그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新遼東에서 출발하여 35리를 가서 爛泥堡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고, 또 25리를 가서 十里堡
에 이르러 잤다. 새벽에 출발하였다. 길을 걷고 있는 胡女 8, 9명을 만났다. 元建이 묻기를,
“어디로 갑니까?” 하니, 그중 한 여인이 답하기를, “고려인을 보기 위해 갑니다.” 하며, 농담을
한다. 원건이, “매우 불안한데!” 하니, 그녀들이 모두 웃었다.
얼마쯤 앞으로 가니, 수십 인이 밭 두둑에 모여 있기에 다가서서 보니,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
다. 금박지와 은박지를 관 위에 깔아 놓고 그 옆에 祭物을 차려 놓았다. 아까 만났던 여인들도
역시 여기에 오는 길이었다.22)
김창업은 12월 5일 十里堡를 출발하여 가는 도중에서 胡女들과 처음 대면한다. 12월 3일 처음
만난 漢女와 胡女의 구별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元建과 胡女들과의 농담 같은 대화에서
胡女들이 내외하거나 남녀의 구별을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는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처음
만남으로 서로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박지원의 경우에 보다 선명히 나타난다. 그는 ?열하일기?에
서 마을이 가까워질 때마다 군뢰를 시켜서 나팔을 불고, 넷이 모두 합창으로 勸馬聲을 부르면 집
집마다 여인들이 문이 메도록 뛰어나와서 구경들을 하는데 노인이나 젊은이나 차림은 거의 같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여인들의 머리에는 꽃을 꽂고 귀고리를 드리웠으며, 화장은 살짝 하였고 입에
는 모두 담뱃대를 물었고, 손에는 신바닥에 까는 베와 바늘ㆍ실 등을 들고 어깨를 비비고 서서 손
가락질하며 깔깔거리고 웃는다고 여인들이 사행을 만나는 것이 하나의 구경거리임을 알려주고 있
다. 그렇게 서로 상대방을 구경하는 가운데 조선사행은 청국여인을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상례였
다. 박지원은 漢女를 여기서 처음 보는데, 모두 발을 감고 弓鞋를 신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그들의
생김새와 풍모가 胡女만 못하다고 평가하고 胡女는 얼굴이 예쁘고 자태가 고운 이가 많았고 덧붙
인다.23)

 

21) 金昌業, ?稼齋燕行錄? 2권, 12월 3일.
22) 金昌業, ?稼齋燕行錄? 2권, 12월 5일.
23) 朴趾源, ?熱河日記?.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385

 

김창업 일행도 여인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12월 15일 저녁
에 사행들은 모두 찰원에 들었는데 찰원 內城 서문 안 북쪽에 있는데 허름한 舊屋에 머물면서 어
린이들과 젊은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서문 안에서 10여 세의 여아가 문에 서 있는 모습이 단정하며 수려하여 이번 오는 길에서 처
음 보았고 또 20여 세 나는 어여쁜 두 여인이 있는데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유봉산에게 말하기
를, “그대도 저러한 여인을 보았는가?” 하니 유봉산이 대답하기를, “내가 왜 못 볼 리가 있습니
까? 尙建을 시켜 나오게 하였지요.”
하였다. 상건은 軍牢의 이름이다. 군뢰는 나팔을 쥐고 앞서 가며 그 뒤를 前陪軍官이 따르는
것이 상례다. 촌락과 점방을 지날 적마다 유봉산은 상건을 독촉하여 나팔을 불게 한다. 나팔 소
리가 나면 구경하는 여인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봉산은 앞에서 먼저 지나가기 때문에 뒤
늦게 나온 사람은 간혹 보지 못하는 수가 있으므로, 그것을 늘 아쉬워하던 터였다.24)
김창업은 사행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비교적 짧게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길
에서 만나는 여인들과 사행들이 농담 섞인 어조로 대화하는 모습도 별 다른 주관 없이 쓰고 있으
므로 자신의 느낌이 사실적으로 드러내어 서술하는 박지원의 묘사와 사뭇 다르다. 15일의 기록도
유봉산이 尙建을 독촉하여 여인들을 나오게 하는 등의 적극적인 구경을 조장하는 모습이 보이지
만 실제 김창업 자신의 여인에 대한 인상은 거의 없거나 혹은 간략하다는 점도 특징이다. 다만 북
경이 가까워지면서 胡女들과 직접 대화도 하게 되었다.
김창집 일행의 사행은 12월 15일 북경과 8리가 떨어진 곳에서 먼지가 날려 눈을 뜰 수 없을 정
도로 바람이 매우 심해 지나는 곳마다 人家가 모두 문을 닫았는데 한 집을 정하여 들었다. 이 집은
胡人의 집으로 어떤 貴家의 무덤지기를 하는 주인으로 습성이 매우 불량하고 특히 권세를 믿고
교만하였다. 그와 그 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의복을 보니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지만 실내에 있는 상, 탁자들은 모두 사치스러웠다. 온돌방
을 마주하여 3, 4여인이 있었다. 그중에 한 여자는 18세라고 하였는데, 아직 미혼으로 얼굴이 매
우 아름다웠다. 군관과 역졸배가 번갈아 와서 엿보니, 주인이 기색을 알아차리고 성내는 빛을
띠었다. 그렇지만 역졸배는 불씨를 빌린다는 핑계로 안채에 드나들기를 그치지 않았다. 백씨가
앉은 온돌방이 매우 작아 내가 앉을 수 없으므로 동상으로 나갔더니, 제법 깨끗한 온돌방이 하
나가 있어 막 앉으려 하는데, 부사와 서장관이 들어와서 피해 나와 버렸다. 서쪽 채에 있는 온돌
방은 너무 작았다. 호인 하나와 그의 아내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용만 비장이 이야기해서 그
반쪽을 비워서 함께 앉았다. 호인은 온돌방 밑으로 내려가 의자에 앉았으나 그 아내는 그대로
온돌방 위에 앉아 있고 꼼짝을 않아 나와 좌석이 거의 서로 닿으려고 하므로 괴로웠다25)

 

24) 金昌業, ?稼齋燕行錄? 제2권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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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는 다르지만 박지원의 다음과 같은 서술도 관외 胡女의 특성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벽을 사이에 두고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하도 가냘픈 목청과 아리따운 하소연이어
서 마치 제비와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인 듯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는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
지. 반드시 절세의 가인이리라.” 하고, 일부러 담뱃불 댕기기를 핑계하여 부엌에 들어가 보니, 나
이 쉰도 넘어 보이는 부인이 문쪽에 평상을 의지하고 앉았는데, 그 생김생김이 매우 사납고 누
추하다. 나를 보고, “아저씨, 평안하세요.” 한다. 나는, “주인께서도 많은 복을 받으십시오.”
하며 답하고는, 짐짓 재를 파헤치는 체하면서 그 부인을 곁눈질해 보았다. 머리 쪽지에는 온
통 꽃을 꽂고, 금비녀 옥 귀고리에 분연지를 살짝 바르고, 몸에는 검은 빛 긴 통바지에 촘촘히
은단추를 달았으며, 발엔 풀ㆍ꽃ㆍ벌ㆍ나비를 수놓은 한 쌍의 신을 신었다. 대개 胡女인 듯싶
다. 다리에는 붕대를 감지 않고 발에는 弓鞋를 신지 않았음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다.
주렴 속에서 한 처녀가 나온다. 나이나 얼굴이나가 20여 세쯤 되어 보인다. 그가 처녀임은 머
리를 양쪽으로 갈라서 위로 틀어 올린 것으로 보아서 분별할 수 있다. 생김새는 역시 억세고 사
나우나, 다만 살결이 희고 깨끗하다. 쇠양푼을 갖고 와서 퍼런 질그릇을 기울여 수수밥 한 사발
을 수북하게 퍼 담고, 양푼의 물을 부어서 서쪽 벽 아래 놓여 있는 교의에 걸터앉아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또 두어 자 길이나 되는 파뿌리를 잎사귀째 장에 찍어서 밥과 같이 먹는다. 목에는
달걀만 한 혹이 달려 있다. 그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얼굴엔 조금도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
다. 이는 아마 해마다 조선 사람을 보아 와서 아주 예사로 낯익었기 때문이리라.26)
박지원은 처음 보는 여인에 대한 기대감에서 일부러 보기를 청하지만 그녀가 상당히 나이를 많
이 먹은 주인댁인 것을 알고 실망함을 감추기 못한다. 또 한 처녀를 보고 그가 주변의 시선에서 아
랑곳 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모습에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박
지원은 그가 많은 조선 사람을 해마다 만나 아주 낯익은 탓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러한 스스럼
없는 胡女에 대한 기록은 위의 김창업의 기록에서도 적나라하게 기록되었다. 자리가 좁아 외국인
남성(김창업 자신)과 함께 앉아서 거의 서로 닿으려고 해도 괴로워하는 것은 오히려 남성 측이었고
胡女는 전혀 스스럼없던 것 같은 상황이라 ‘男女七世不同席’ 같은 유교의 남녀유별이 전혀 적용
되지 않는 사회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관외에서의 만남이 胡女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關外에서 만나는 청국의 여인에 대한 기록 중에는 漢女 혹은 胡女의 구분
을 명확하게 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기록에서 강조하는 특징 중의 하나는 짙은 화장인데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그것이다.

 

a) 8리 정도 가자 ‘新平莊’이 있는데, 관광하러 온 시골 여자들이 매우 많았고 간혹 脂粉를
25) 金昌業, ?稼齋燕行錄? 3권, 12월 24일.
26) 朴趾源, ?熱河日記?「渡江錄」, 6월 24일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387
발라 화장한 사람도 있었다.27)

 

b) 平車 한 채에 두 여인이 탔는데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간다. 나귀가 물통을 보자 수레를 끈
채 통으로 달려 든다. 그 여인 둘 중 하나는 늙고 하나는 젊었다. 앞을 가렸던 발을 걷고 바람을
쏘이고 있다. 둘 다 꾀꼬리 무늬 놓은 파란 웃옷에 주황 빛깔 치마를 입고, 옥잠화ㆍ패랭이꽃ㆍ
석류화로 머리를 야단스럽게 꾸몄다. 아마 漢女인 듯하다.28)
c) 언젠가 古家舖를 지나다가 보니, 길에 수레가 끊이지 않고 수레마다 여인들 일곱 여덟 명
씩 탔는데 모두 진한 화장에 고운 나들이 차림새였다. 그런 차들이 몇 백 대로 셀 수 있는데, 이
는 모두 小黑山에 가서 광대놀이를 구경하고 해가 저물어서 돌아가는 시골 부인네들이었다.29)
d) 마을 거리를 지날 때마다 남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나이 조금 지긋한 여인치고 혹이 목
에 달리지 않은 자 없는데, 큰 것은 거의 뒤웅박처럼 되었고, 더러는 서넛이 주렁주렁 달린 이가
없지 않아서 대개 열에 7~8은 모두 그러하였고, 젊은 계집애들과 얼굴 고운 여인은 흰 분을 발
랐으나 목에 달린 뒤웅박처럼 생긴 혹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 중에도 늙은이는 가끔
커다란 혹이 달렸다. 옛 말에, “晉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가 누렇고, 험한 곳에 살고 있는 사람
은 목에 혹이 달린다.” 하였고, 또, “安邑은 진晉의 땅으로, 대추가 잘 되므로 그들은 단 것을 많
이 먹어서 이가 모두 누렇다.” 하였으나, 이제 이곳에는 대추나무 밭이 이룩되었으나 여인들의
하얀 이가 마치 박씨를 쪼개 세운 듯하니 이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30)
앞에서 김창업의 山川風俗總錄에서 ‘한족 여인은 분을 바르지만, 胡女는 바르지 않는다. 전에
듣기로는 한족 여인은 남편이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모두 화장을 하고 꽃을 꽂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다 그렇지는 않았다’31)고 지적한 바 있다. 결국 화장의 有無로 漢女 혹은 胡女를 구분
하기는 매우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 대체로 화려하게 꾸민 경우 漢女라는 인식은 박지원의 여인에
대한 기술인 자료 b)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젊거나 나이를 먹은 여인이거나 화장은 많이 하였고
진하고 화려한 화장은 대체로 漢女라고 하는 인식이 조선 지식인 사이의 중국여성관의 하나였음
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으로는 청조의 간접 통치권에 있는 이민족 여인들에 대한 모습을 살펴보자. 使行者들은 북
경으로 가는 도중이나, 북경에서 청국 여인 이외의 여인들을 보기도 하지만 간단한 묘사 정도에 그

 

27) 金昌業, ?稼齋燕行錄? 7권, 2월 20일.
28) 朴趾源, ?熱河日記?, 「盛京雜志」, 7월 10일.
29) 朴趾源, ?熱河日記?, 「馹迅隨筆」.
30) 朴趾源, ?熱河日記?, 「漠北行程錄」, 8월 7일.
31) 金昌業, ?稼齋燕行錄?, 「山川風俗總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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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관심도 외모적 차이만을 언
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자주 만나는 것은 몽고 여인들이었는데 왜 몽고 사람들이 많은
가에 대한 의문은 표시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있지 않았다. 關外인 柳河屯에
서 장막을 드리운 수레에 탄 몽고왕의 아내를 만났으나 자세한 상황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단지
그들의 수례의 특이점에 주로 관심이 집중되는 면이 보인다. 아래 내용이 그것이다.
아침을 먹고 柳河屯을 지나다가, 또 낙타를 몰고 가는 몽고인을 만났다. 낙타 세 필이 앞에
가고 장막을 드리운 교자 수레가 뒤따라 지나가고 세 여자가 말을 타고 뒤따랐다. 누가 말하기
를, 수레 안에 있는 자는 몽고왕의 아내이고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은 그 여종이라고 한다. 수레의
바퀴나 바퀴살은 우리나라의 것과 식이 같으면서 좀 경박했으며, 교자 수레도 우리나라의 屋轎
와 같은데, 장막을 검은 무명베로 만들었다.32)
또한 북경 체류기간동안 몽고왕의 부인을 직접 만나 이야기 하는 기회도 갖게 된다.
外門 안 월랑의 계단 위에 蒙古 여자 셋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얼굴의 광대뼈가 넓었다. 하
나는 몽고왕의 처고, 둘은 시녀였다. 세 여자는 모두 貂衣를 입고 貂帽를 쓰고 장화를 신고, 編
髮을 두 갈래로 만들어 앞으로 늘어뜨렸는데, 그 주인은 검은 비단으로 묶었다. 시녀는 서기도
하고 앉기도 했는데, 주인은 붉은 담요를 깔고 앉아 시종 움직이지를 않았다. 내가 그들이 온 까
닭을 물으니 몽고왕이 죽고 그 아들이 어려 조공을 올 수 없으므로 그의 처가 스스로 왔다고 한
다.33)
김창업은 자신의 숙소에서 몽고에서 남편의 죽자 대신 조공을 왔다고 하는 몽고여인과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기록만 보아서는 필담 혹은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누구와 이야기를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몽고왕 혹은 시녀들이 외국 남성과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시도하는 문화
적 단면을 읽을 수 있다. 朝鮮의 여인 혹은 漢女의 경우, 외국 남성과의 대화를 시도한 다는 것은
시대적인 상황에서 용납되지 않는 측면이 있었는데 몽고 여인의 경우 그러한 규범에서 일정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임이 쉽게 들어나는 대목이다. 박지원의 경우 북경에서 회자관을
방문하고 회의여인을 만나는 특이한 경험을 한다.34) 그들과 구체적인 대화의 시도 등은 하지 않지

 

32) 金昌業, ?稼齋燕行錄? 3권, 12월 26일.
33) 金昌業, ?稼齋燕行錄? 5권, 2월 5일.
34) 朴趾源, ?熱河日記?, 「황도기략」 회자관 : 회자관의 바깥 문은 벽돌로 쌓았는데, 제도가 기이하기 짝이 없어
天主堂에서 보던 것과도 달랐다. …회회 여자 10여 명이 나와 보는데, 모두 남자처럼 건장했다. 볼은 붉고 광
대뼈가 넓고 눈썹이 푸르고 눈은 붉었다. 그 중 한 젊은 여인이 두어 살 난 어린이를 안고 섰는데, 꽤 얼굴이
고왔다. 모두 흰옷에 숱이 좋은 머리털을 여남은 가닥으로 땋아 등 뒤에 드리웠다. 머리 위에는 흰 모자를 얹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389

 

만 18세기의 북경 사회 내에 다양한 문화의 여성들의 경험이 축적되고 있는 양상이 보여진다. 관외
에서는 만주와 몽고 여인들의 적극적이고 內外하지 않는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잡게 되었고 북경
내에서도 적지 않은 胡女들의 활동은 유가적 전통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
였음이 짐작된다.
마지막으로 조선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당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 여인들은 대부분
병자호란으로 청국에 강제적으로 살게 된 포로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에 대한 기록은 김창업의 기
록에 자세하다. 그는 북경에 들어가기 전 관외에서 한 차례(자료 a), 그리고 북경에서 통사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의 가족을 만나면서 한 차례(자료 c), 그리고 한양으로의 귀국길에 관외에서 다시 한
차례(자료 b) 등 모두 3회에 걸친 만남을 통해 그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a) 찰원 안에 한 노파가 와서 말하기를, 자기의 부모는 우리나라 사람이며 정축년에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뒤에 자기를 낳았는데, 지금 나이 69세라 하였다. 자기의 어머니는 본시 서울 藏
義洞에 살았고 아버지는 廣州山城 사람이며, 남편은 永安道 태생인데 오래전에 죽고, 지금은
손녀 하나를 의지하여 사는데, 우리나라 식으로 침채와 장을 만들어 그것을 팔아서 살아가노라
고 하였다.
우리나라 말을 하는 것만 해도 귀한데 ‘장의동’이란 세 글자는 더욱 신기해서 약과와 종이,
부채를 주었다. 이 여인은 전의 사행 때도 번번이 나타났었다. 고종형 雩沙李相公 李世白과 松
判書의 ?일기?에 다 언급되어 있다.35)
b) 밤에 나이 젊은 여자가 찾아왔기에 물어보니, 지난날의 늙은 노파의 손녀라 하였다. 머리
를 들게 하고 보니 좌우로 땋은 編髮은 우리나라에서 하는 모양과 같이 이마 위에 서려 올리고
비녀와 머리침들을 가로 세로 꽂아 흐트러지지 않게 하였다. 또, 篩輪같은 白布小套를 머리에
얹고 있었다.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姑娘의 喪을 입었다고 한다. ‘고랑’이란 바로 어머니인 것이
다. 소녀의 머리는 호인의 방식을 하였고 발은 전족을 하였는데, 그것은 滿, 漢의 풍습을 혼합한
모습이었다.36)
c) 다섯 부인이 들어와 온돌 밑에 섰는데 늙은이는 화의 어머니요, 젊은이는 모두 그의 첩이
었다. 노인은 나의 옷을 들어 온돌 아래의 부인들에게 보게 하였다. 또 어떤 부인들은 창 바깥에
서서 원건과 문답하였는데, 원건이 쓴 전립을 벗기고 그 상투를 구경하였다. 조화의 처와 누이
도 그중에 있다고 했다. 북쪽의 큰 客堂 계단 위에는 뭇 여인들이 서 있는데 …37)
었는데, 광대들이 쓰는 뾰죽 자와 같고 옷은 우리나라 天翼과 비슷하되 소매는 좁았다.

 

35) 金昌業, ?稼齋燕行錄? 제2권, 12월 15일.
36) 金昌業, ?稼齋燕行錄? 8권, 2월 26일.
37) 金昌業, ?稼齋燕行錄? 6권,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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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자료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료 a)와 b)의 여인은 할머니와 손녀로 할머니는 조선에 대한 선
조들의 기억을 고향과 음식이라는 형태로 공유하면서 조선 사람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손녀는 머리는 만주식 그리고 전족이라는 한족 여인의 문화유산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복합적 문화는 자료 b)에서도 나타난다. 김창업을 朝鮮通事의 집을 방문하여 북경
에서 생활하는 조선인 후예의 문화적 양식을 살피고 있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청나라 풍습에 근거
한 것이라 집을 방문한 손님인 金昌業 일행의 조선인의 상투와 옷에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자세하
게 보고 있다. 청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1712년의 시점에서 이미 한 세기에 가까운 타향생활이
므로 어쩌면 조선의 풍속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으나 여전히 언어38)와 생활 풍속이라는
형태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당시의 金昌業에게도 특기할 만한 내용으로 일기에 남아 있게 되었
다.

 

3.2. 北京의 漢女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사행들이 중국 여인들과 만나는 것은 자유롭지 않았을 것임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많은 연행록의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행들이 여인들을 만난다기 보다는 지나
가는 과정에서 여인들을 보면서 관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나 여성들에 관해 전해들은 내용들이
많다. 북경에 온 사행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30-40일 정도 북경에 머무르면서 회동관 무역 등
을 주도하게 된다. 한 달 여의 시간동안 북경을 구석구석 다니며 많은 사람들은 보게 되는데 여기
에 묘사되는 여성들의 모습은 연행록 서술자에 따라 다른 모습도 있다.
1712년 강희말년의 북경 여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김창업의 연행록에 주목해 보자. 12월 27
일에 북경에 도착하여 1월 8일 10일에 각각 외출을 하고 다음과 기록을 남겼다.
a) 지나가는 수레 가운데 모두 여인 3, 4인이 함께 탔는데, 다 휘장을 걷고 얼굴을 내밀었으
며, 더러 걷는 자도 있다. 의복이 선명하니, 정초를 축하하러 다니는 사람들이다.39)
b) 식후에 또 물을 길러 나갔다. 원건ㆍ선흥ㆍ귀동이 모두 따랐고, 갑군은 앞서 부채를 선사
한 자가 따랐다. 이날 만상 車俊傑이 역시 함께 나왔는데, 말을 타고 앞서서 옛길을 따라갔다.
노상에 여인들의 왕래가 앞서보다 더욱 많았다. 유봉산이 앞서 여인들을 보기 위하여 나온 일이

 

38) 당시 조선통사는 자신이 조선말을 학습하게 된 것은 부모의 조선말을 가르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음을 강조
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조선통사직이 세습의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金昌業, ?稼齋燕行錄? 6
권, 2월 13일.
39) 金昌業, ?稼齋燕行錄? 4권, 1월 8일.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391

 

있는데, 만약 오늘 본 바를 이야기한다면, 같이 오지 못했음을 한스러워할 것이다. 매번 미녀를
볼 때마다 문득 유봉산 생각이 나서 돌아와 이 일을 이야기하고 한바탕 웃었다.40)
김창업은 식수를 구하러 간다는 이유를 들어 공식적으로 금지된 외출을 번번이 시도하게 되는
데 그러는 과정에서 자료 a)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여인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수레에 타
거나 걷거나 하는 여성들을 보았다. 의복을 선명하고 깨끗하게 단장하고 정초를 축하하러 다니는
漢女의 모습이지만 더러 걷는 자도 있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지체있는 집안의 여인들이 수레를 이
용하여 이동하는 상황을 알 수 있다. 이틀 뒤의 자료 b)에서 언급한 것처럼 길거리에 여자들이 정
초를 축하하는 이유이기는 하지만 여인들이 많이 왕래하고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765
년 35세의 나이에 서장관으로 북경 사행에 참여한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군관, 즉 子弟軍官이라
는 이름으로 참여 북경을 방문하여 60여 일을 체류한 홍대용은 자신이 체험한 중국 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녀의 관계는 지극히 엄격하여, 모든 사대부의 집에서는 집이나 방을 안팎으로 나누고, 비록
하녀들까지라도 일 없이는 문밖에 나가지 않아, 들 점심밥이나 시장 보는 일, 밥하고 물 긷는 일
에 바느질하고 베 짜는 일까지도 모두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길에 걸어 다니는 부녀
자를 볼 수 없고, 극장에 구경 가는 일도 또한 하지 않는다.
귀한 집 부인의 수레나 가마에는 장막을 드리우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가 발을 치고 얼굴
을 내놓고 다닌다. 다만 젊은 여자는 뒤에 앉고 늙은 여자나 혹 하녀들이 앞에 타며, 수레 모는
사람이 또 그 앞에 탄다. 지나다니는 남자들이 있어도 모두가 감히 둘러보지를 못한다. 다만 우
리나라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는 그 수레 속의 성장을 한 젊은 부인들이 반드시 놀라고 이상히
여겨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몰래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수레 모는 사람이 당
장 한없이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41)
홍대용의 지적은 김창업의 기록과 대비되는데 초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北京에는 漢女
든 胡女든 여성을 자주 볼 수 없었는데 이는 하녀들조차도 밖에 나가지 않아 돌아다니는 여성이
매우 적기 때문인 것이다. 둘째, 길에 다니는 귀한 집의 여인들은 폐쇄적인 수레 혹은 가마를 이용
하여 외부와 차단된 채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격한 내외 구별과 남녀유별은 유교적인
동아시아 전근대 사회의 여성의 모습과 매우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김창업이 보게
된 길거리의 오가는 여성들은 정초를 축하하기 위해 왕래하는 매우 일시적이면서 특수한 모습이라
고 판달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초가 지나고 2월이 되어도 여성의 모습은 분주하게 기록된다.

 

40) 金昌業, ?稼齋燕行錄? 4권, 1월 10일.
41) 洪大容, ?湛軒書? 外輯 8卷, 「京城記略」.
392 中國學報 第七十三輯

 

崇文門을 나서니 거마가 연이었고, 걸어 다니는 여인이 그전보다 더욱 많았다. 약왕묘에 이
르니 남녀가 뒤섞여 복잡하였다. 안팎 門庭에 온갖 꽃을 늘어놓았는데 여인들이 꽂는 종이꽃이
가장 많았다. … 남녀노소가 향을 들고서 어깨를 비비며 들어가 향로 가운데에 꽂고 물러나와
叩頭한다. 그 가운데 4, 5세 되는 아이들도 역시 고두한다. 분향은 새벽부터 이와 같은데, 귀한
집들은 이미 먼저 다녀가고, 이들은 모두 여염집 부녀들로 의복과 자색이 그리 화려하지 못하고
거의 모두 얼굴에는 병색을 띠고 있다.42)
정초도 지났지만 여성들은 걸어서 혹은 거마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특히 악왕묘에서는 남녀가
너무 많아 복잡한 상황임을 전하고 있다. 그 염원을 비는 남녀의 규모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홍
대용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여성들이 없다고 묘사한 상황과는 사뭇 다른 상황임은 알 수 있다.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胡女들에 대해서는
수레 안에는 모두 여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앞의 두 수레는 모두 비단 휘장을 쳤다. 수레에 탄
여자들의 면목을 볼 수가 있었으나, 내가 선 곳은 조금 멀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역
관들의 말이 모두 절색이라 한다. 뒤의 네 대의 수레에는 모두 검은 휘장을 하였는데 시녀들이
타고 있다고 하였다. 호인에게 물으니 황자들의 부인과 황제의 후궁들인데, 황제가 霸州로 갈
것이므로 창춘원으로 간다고 하였다.43)
이라고 서술하는 것처럼 매우 엄격하게 격리되어 외부와 차단된 상황이었다. 그 신분이 皇家의 여
인들이기 때문에 경비가 매우 엄격하여 외부와 차단된 형태는 홍대용이 지적한 것과 상이하지 않
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사회 상층부 여성들의 생활은 명대나 다름없이 전통사회의 내외의 구분과
남녀유별 유교적 명분이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의 유지는 전족이라는 기이한 풍습에서 더 잘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만주족의 여성들
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1662년 황제에 오른 康熙帝(1662-1722)는 여성들의 전족을 금지하였고 이
를 위반하면 부모에게 벌을 내렸다. 당시 강희제의 명령은 상당히 효과가 있어 전족은 일종의 범죄
행위로 여겨졌다. 하지만 漢女의 전족 풍속을 단번에 바꾸기는 힘들었고 또 사람들이 전족을 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막지 못해 전족금지를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1668년(康熙 7)에 王熙라
는 사람이 전족을 풀어달라고 상소하여 민간에서는 다시 공공연하게 전족을 하게 되었는데 호녀들
도 점점 이러한 풍습을 모방하게 되었다. 乾隆帝(1736-1795)는 여러 차례 교지를 내려 胡女들의
전족을 금지하였으나 일부에서 ‘전족숭배’의 풍기도 생겨났다.44)

 

42) 金昌業, ?稼齋燕行錄? 5권, 2월 1일.
43) 金昌業, ?稼齋燕行錄? 5권, 2월 3일
44) 진동원지음, 송정화⋅최수경 옮김,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 도서출판 박이정, 2005. 338-339쪽.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393

 

따라서 전족은 여성에 대해 만한의 구별을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구별이었다. 김창업의 경우
는 전족에 대해 여인들을 만한으로 구별하는 정도로 언급45)하고 있는 반면 서는 만한의 구별을 18
세기 말 중국을 방문한 박지원도 전족에 대한 기록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山東都司 郝城) 또, “귀국(조선) 부인도 역시 발을 묶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박지
원), “아뇨, 중국 여자들의 활굽정이처럼 생긴 신은 차마 볼 수 없더군요. 휘뚱거리며 땅을 디디
고 가는 꼴이, 마치 보리씨를 뿌리는 것처럼 외로 흔들고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려, 바람도 없는
데 저절로 쓰러지곤 하니 이게 무슨 꼴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이로 인하여 도륙을 당하였
음은 가히 世運을 짐작할 수 있으리다. 前朝 明代엔 그 죄가 부모에게 미쳤고, 本朝에 와서도
이에 대한 禁令이 몹시 엄격하였으나 끝끝내 이를 막을 수 없음은 대개 남자는 따르지만 여자
는 따르지 말라는 때문이어요.” 한다. 나는 “모양이 흉하고 걸음이 불편한데, 왜 하필이면 그걸
합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만주 계집들과 한가지로 보일까봐 그런 게죠.”46)
박지원은 山東都司 郝城과의 필담으로 漢女의 전족에 대해 언급하면서 “보리씨를 뿌리는 것처
럼 외로 흔들고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려,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쓰러지곤 하니” 라는 표현으로 매
우 우스운 전족한 여인들을 묘사하였다. 漢女의 관점에서는 정부가 여러 차례 금지를 함에도 불구
하고 胡女와 ‘스스로를 구별하기 위해’ 전족을 계속하였지만 실은 漢女들 스스로 이러한 구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남자에 대해서는 정부의 통제가 엄해도 여자들에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여자는 따르지 말라는 때문이오”라고 설명하는 것처럼 느슨하게 금령까지 풀어주는 등 청조의 여
성 지배에 대한 의지가 약화된 측면이 있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족 여성들은 비
교적 자유롭게 스스로의 전통을 유지하거나 혹은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 나가기에 남자들에 비해
자유로운 측면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여인들의 생활변화를 볼 수 있는 다음의 필담에 주목해
보자.
지정은, “여자가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니, 온 나라가 모두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온 나라의 미천한 농사백성이나 하인들까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명색이
士族이라 하면, 비록 아무리 가난하고 또 三從의 길이 이미 끊어졌다 하더라도, 평생 과부의 절
개를 지켜 변하지 아니하며, 이러한 기품이 비복ㆍ하천에게까지도 미쳐서, 저절로 풍속을 이룬
지 4백 년이 되었습니다.” 하였더니,
지정은, “禁令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하기에,
나는, “별로 드러난 금령은 없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중국에서도 이 풍속이 막심한 폐단을 이루어서, 어떤 이는 納采만 하고 醮禮를 이

 


45) 金昌業, ?稼齋燕行錄? 山川風俗總錄.
46) 朴趾源, ?熱河日記?, 「태학유관록」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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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지 않았다거나, 성례만 하고 아직 첫날밤을 치르지 아니하였는데도, 불행히 사고가 있으면 평
생토록 과부의 절개를 지켜야 하는데, 이런 건 오히려 나은 편이고, 심지어는 世誼가 두터운 집
사이면 아이가 뱃속에 들었을 때 이미 언약한다거나, 또는 더벅머리 때 부모끼리 말이 있었다가
불행하면,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어서 같이 따라 합장되기를 구하니, 이는 禮에 크게 어긋나
는 일이므로, 君子들은 그런 것을 尸奔이라 기롱하기까지도 하고, 또는 節淫이라 불렀던 것입
니다. 國法으로 이를 엄격히 단속하여 그 부모에게 죄를 주기로 하였으나, 마침내 습속을 이루
었으며, 동남 지방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로, 유식한 집안에서는 여자가 成年이 된 뒤에 비로
소 혼인을 말하니, 이는 요즈음 일입니다.”47)
박지원은 조선의 정절 등을 언급하면서 중국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또 의복 등으로 중국과의 차
이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48) 조선과 중국은 오랫동안 유교라는 공동이념에서 여인들에 관한 생
활규범이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위의 대화에서 혹정이 언급하는 早婚을 둘러싼 폐단이 점
차 개선되어 가는 모습을 언급처럼 청중기 이후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개선도 진행되고 있었던 것
으로 판단된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18세기 중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벌이는 외국 선교사들
눈에 비친 중국여성들은 대부분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음에 크게 주목하였다. 이들은 중국 여
인의 가장 큰 특징은 하얀분과 전족이라는 신체적 문제에서 접근하여 중국의 결혼과 일부다체제
그리고 어머니의 위치에 관심이 많았다.49) 또한 기독교 신자들의 여인들에 관한 구체적 접촉을 통
하여 漢女의 생활상을 비교적 가깝게 접촉하였다. 한 이러한 점은 2달 정도의 짧은 여정을 통해
느끼는 조선의 사행과는 사뭇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창업과 홍대용과 인식에 차이에
서 보듯이 시기별로 여성이 활동하는 모습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정확한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
는 지는 보다 많은 중국자료를 중심으로 재론하여야 할 필요가 있지만 북경의 漢女의 생활은 기존
의 인식처럼 지독히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유교사회와는 조금 거리 두고 진행되어 가는 사실은 확
인되었다고 하겠다.

 

47) 朴趾源, ?熱河日記?, 「太學留館錄」, 9월 10일.
48) 朴趾源, ?熱河日記?, 「馹迅隨筆」, 7월 21일 . 그가 우리나라 여자의 비녀를 지르는 법과 의복 제도를 묻기
에, 나는, “모두 중국 상고 시대의 것을 본받았습니다.” 하니, 축은, “좋아요, 좋소이다.” 한다. 나는 그에게, “그
럼, 貴鄕의 여복은 어떠하오니까.” 한즉, 축은, “대략 같습니다. 풍습이, 여자가 시집갈 때면 쪽지만 하고 비녀
는 꽂지 않으며, 빈부를 가릴 것 없이 平民의 부녀는 冠을 쓰지 않고, 다만 命婦만이 관을 쓰는데, 제각기 남
편의 職品에 따라서 잠이나 머리꽂이 역시 모자의 제도와 같이 층하가 있으며, 雙鳳釵가 제일 고귀하되, 그
중에도 飛鳳ㆍ立鳳ㆍ坐鳳ㆍ戢鳳 등의 구별이 있고, 翡翠簪에도 모두 품직의 차이가 있으며, 처녀는 긴 바
지저고리를 입다가 시집가면 적삼에다 큰 소매 달린 긴 치마를 입고 띠를 두릅니다.”
49) 矢澤利彦, ?西洋人の見た16世紀~18世紀の中国女性?, 東方書店, 1990. 34-91쪽.
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395

 

4. 맺음말
본문에서는 각각 1712년과 1780년에 중국을 방문한 金昌業과 朴趾源의 일기 속에서 여성들의
모습을 정리하였다. 정리의 기준은 關內外라는 지역적인 구분을 두고 그 속에 주로 만나는 여인들
의 민족적 정체성에 근거하여 설명하였다. 북경에서 漢女를 만나거나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
았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편견과는 달리 실제 金昌業의 기록에는 많은 漢女들이 路上 혹은 사찰
등에서 목격되었고 이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보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關外에서는 많은 짧
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모습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다. 본문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
다.
먼저 18세기 조선지식인들은 청국의 여성을 한족여인(漢女)과 만주족 여인(胡女)으로 나누어
각각 생김새(미모), 의복(색구분, 만주족은 검정색) 및 생활습관을 구분하고 있었다. 또 金昌業의
?稼齋燕行錄?과 朴趾源의 ?熱河日記?에 나타나는 여성을 關內와 關外로 나누어 여인들의 민
족적 정체성을 분석한 결과 북경에서 漢女를 만나거나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는 종래 외
국인의 기록과는 달리 실제 金昌業은 많은 漢女들이 路上 혹은 寺刹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창업과 박지원은 關外에서 많은 胡女들은 만났다. 만난
胡女들은 대부분 하층민이었고, 매우 적극적으로 남자들과 대화하면서 생활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유교문화의 漢女들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전근대시대 여성들의 생활은 대부분의 官撰기록에서 소외되어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의 청대 여성 관련 연구논문과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연행록 등을 종합해 보면 일반여성 혹은
하층민 여성들이 경제생활에서 매우 적극적인 모습이 보였다. 특히 胡女들은 남녀관계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이 많은 漢女와는 매우 달랐다. 이러한 胡女들의 문화는 청대 중기 이후 漢女들에게
널리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러 민족이 함께 생활하는 關外지역의 여성 생활은 이후 청국의 변
화와 더불어 여성의 변화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18세기의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19
세기 중국여성에 대한 체계적이며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396 中國學報 第七十三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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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지식인의 청국 여성관 397
中文摘要
十八世紀朝鮮知識分子的淸國女性觀
- 以金昌業与朴趾源的记录为中心 -
郑惠仲 (梨花女子大学)
这篇论文的目的是对清代中国女性的考察。最近的中国史研究当中十分强调满洲族的活动。与此
同时,硏究者对此的认识是中国的支配不同于明代的统治。并且通过外国人的记录来理解清代的研究日
益增加,朝鲜对此的研究资料变得十分重要。但是对清代女性的研究当中,朝鲜燕行录的记录并没有受
到任何重视。此论文以这种问题的基础为中心重点分析在朝鲜燕行录中可以看到的汉族女人汉女与满洲
族女人胡女的记录来解释女性史上的意义并进行报告。分析对象的资料是燕行录中的金昌業的 ?稼齋燕
行錄?与 朴趾源的 ?熱河日記?。分析结果如下所述。
第一, 分析18世纪朝鲜的代表作燕行录的著者金昌業与朴趾源的 ?稼齋燕行錄?与?熱河日記?的结
果,朝鲜的知识分子把清代的女性分为汉女与胡女来分别研究她们的长相(美貌),衣服(色彩区分,
满洲族为黑色),以及生活习惯。
第二, 把金昌業的 ?稼齋燕行錄?与 朴趾源的 ?熱河日記? 中出现的女性分为關內与關外分析女人
们的民族的正体性。与历来外国人所留下的在北京很难看见汉女的记录不同,实际金昌業的记录当中提
到,在路上或寺刹可以见到很多自由走荡的汉女。
第三, 金昌業与朴趾源在關外见到了很多汉女。 遇见的汉女很多都是下层平民,她们也主动的与
男人们进行交流并且从事自己的生活。这样的场景并不同于儒教文化中提到的汉女的生活场景。
目前为止,前近代史女性们的生活在很多方面被遗弃。最近有关清代女性的研究与18世纪朝鲜知
识分子的燕行录中显然可以看出一般女性或是下层女性在经济生活中的积极态度。 尤其,胡女在男女
关系方面也非常不同于儒家思想熏陶下的汉女的文化思想。胡女的这种文化到了清代中期被汉女广泛接
受。很多民族共同生活的關外地区的女性生活与之后清国的变化一同对女性的变化起到了积极的作用。
对此更加体系的,实证的研究今后还会继续进行下去。
주 제 어 : 연행록, 김창업, 박지원, 중국여성, 18세기
关 键 词: 燕行錄, 金昌業, 朴趾源, 中國女性, 十八世紀
Key words : Yeonhangrok, Gim, Chang-eop, Park, Ji-won, Chinese women, 18th century
(투고: 2015년 7월 24일, 심사완료: 2015년 8월 4일, 게재확정: 2015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