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지식인의 對淸 인식*
윤 승 준
. 머리말
. 湛軒 洪大容의 對淸 인식
1. 對明義理
2. 朝鮮中華主義
3. 北學
. 燕巖 朴趾源의 對淸 인식
1. 對明義理
2. 朝鮮中華主義
3. 北學
. 맺음말
본고에서는 湛軒과 燕巖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지식인의 對淸 인식을 검
토하였다. 淸에 대한 인식은 明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고, 朝鮮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것은 곧 오랜 세월 동양의 국제질서를 규
정하여 온 華夷論에 대한 인식을 재론하는 것이기도 하다.
담헌과 연암은 中華인 明이 오랑캐인 淸에게 망한 지 백여 년이 지난 현
실에서 中華와 夷狄, 중심과 주변, 선진과 후진이 전도된 상황을 對明義理,
* 이 논문은 2009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KRF-2009-322-A00081).
**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조교수/ yoonsj@dankook.ac.kr
그리고 朝鮮中華主義, 北學이라는 논리를 통해 헤쳐 나간 조선후기의 지
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헤쳐 나가야 했던 현실의 장벽, 또는 이념의 장
벽은 유사했을지라도 실제 그들이 도달한 지점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담헌이 ‘人’과 ‘物’, ‘안’과 ‘밖’, ‘華’와 ‘夷’의 분별 자체를 부정하는 ‘華夷無
分’의 脫화이론을 통해서 이를 극복했다면, 연암은 淸이 明을 대신하여 上
國이 될 수 없고 中華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역사 발전의 동
력이 되어 온 ‘才智力量’과 ‘功利’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청 문물의
수용을 통해서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담헌이나
연암 모두 北學에 도달한 것은 같았지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차이를 보
였던 것이다.
Ⅰ. 머리말
湛軒과 燕巖은 ‘初期’ 北學思想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어떤 경로 혹은 어떤 계기를 통하여 기존의 전통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으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상으로 나아갔는지를 꼼꼼하게 검토하는 작업은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될 뿐 아니라, 담헌과 연암의 사상을 총
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1)
본고에서는 담헌과 연암이 청 문물의 수용을 주장하게 된 과정, 즉 북학
의 논리가 형성된 과정을 燕記 와 熱河日記 등 그들이 남긴 글을 중심
1) 특정 인물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떤 계기와 과정을 통하여 발전 변모해
갔는가를 ‘동태적’으로 읽어내야 한다고 한 朴熙秉의 지적은, 담헌이나 연암의 대청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를 추적하는 데에도 유효하다. 朴熙秉(1995), 206면 참조.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 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랑캐 ‘淸’을
어떻게 인식하였느냐 하는 문제이다. ‘對淸 인식’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
한 용어이다. ‘淸’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明’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
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곧 華夷論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한 것이었기 때
문이다. 또한 담헌이나 연암 등 ‘조선인’의 대청 인식이기 때문에 조선에 대
한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인식의 문제와도 연결되
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對淸 인식’이라는 용어가 지닌 다양한 함의를 복합
적으로 고려하면서 논의를 초점화하기 위하여 ‘對明義理’, ‘朝鮮中華主義’,
‘北學’이라고 하는 세 측면을 중심으로 검토하기로 한다.2)
Ⅱ. 湛軒 洪大容의 對淸 인식
湛軒 洪大容(1731 1783)은 영조 41년(1765) 冬至使行의 書狀官이었던
숙부 洪檍(1722 1809)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다. 1765년 11월 2일 서울을
떠나 동년 12월 27일 북경에 도착한 使行은 禮部에 咨文을 바치고 朝參에
참석하는 등 공식적인 일정을 소화하면서 두 달을 北京에서 머물다가 1766
년 3월 1일 북경을 떠나 4월 27일 서울로 돌아왔다. 담헌은 자신의 일생에
서 가장 커다란 경험이었던 중국 체험과 淸朝文人과의 交遊를 한문으로
된 燕記 와 한글연행록 을병연행록 에 남겼다. 여기에서는 燕記 를 중
심으로 그의 對淸 인식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담헌과 연암에 대해서는 역사와 문학, 사상사는 물론 경제사와 사회사, 과학사 등 여
러 방면에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연구사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독자적인 연
구를 진행해야 할 만큼 다대한 연구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지만, 제한된 시간과 지면
에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특정 분야만을 전공한 필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는 논의 과정에서 논제와 관련한 몇
몇 주요 연구 업적을 거론하는 데 그치기로 한다.
1. 對明義理
우리나라가 나라를 明 섬겨온 지 2백 년이 넘었다. 임진년 再造의 은공을 입은
후로는 君臣의 義에다 父子의 은혜를 겸하였으니,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대우함과
우리나라가 명나라에 의뢰함은 內藩과 다름이 없어 다른 外夷와 비교할 바가 아
니다. 대저 청 태종金汗 이 군사를 일으켜 중국을 침범하였으니 이는 명나라의 도
적賊 이거늘, 정묘년에 우리나라는 저들과 형제와 같이 지내자고 맹서하였으니 이
미 명나라에 죄를 얻었고 萬世의 수치거리가 되었다. (중략)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는 법이다. 人倫과 綱常이 한번 실추되면 천하에 욕을
받게 되니, 살아 있어도 죽은 것만 못하고 나라를 보존해도 망한 것만 못하다. 이
의리는 오랑캐나 華夏, 貴賤을 가릴 것 없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 당시
斥和의 논의는 명나라中國 를 높이고 신하의 절의를 지키며, 큰 은혜에 보답하고
커다란 의리를 펴는 것이었다. (중략) 당시 조정으로 하여금 모두 삶을 버리고
義를 소중히 여겨 三學士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면, 비록 청나라北庭 를
깨끗이 청소하여 천자를 진정시키지는 못했을지라도, 관문을 닫아걸고 약속을 끊
고는 성을 굳게 지키며 스스로 방어하기에는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그대의 의론은 도리어 이를 害만 있고 이익이 없었다 하여 欠缺로 돌리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國事를 도모함에 올바르게 하지 못하고 오랑캐에게 아부하여
구차하게 삶을 도모했으니, 당시 집정자들의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다. 그러하거늘
그대의 의론은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斥和한 것이 원망을 사
고 禍를 부른 단초가 되었다고 하니, 아아! 생각을 너무도 잘못한 것이로다. 잘
못은 和議에 있는 것이지 斥和에 있는 것이 아니다.3)
3) “我國之服事大明二百有餘年及壬辰再造之後則以君臣之義兼父子之恩大明之所
見待我國之所依仰無異內藩而非他外夷之可比也夫金汗之稱兵猾夏乃大明之賊
也 丁卯兄弟之盟 已得罪中國而爲萬世羞 (중략) 人無有不死 國無有不亡 倫綱
一墜 爲天下僇 生不如死 存不如亡 斯義也 通夷夏貫貴賤亘百世而不可易者也 當
時斥和之議 乃尊中國也 守臣節也 酬大恩而伸大義也 (중략) 苟令當日朝廷皆能
舍生仗義以三學士之心爲心則縱不必掃蕩北庭以殿天子其閉關絶約堅壁自强則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는 손해만 있고 斥和 이익이 없었으며, 원망을 사고 禍를 부른 빌미가 되
었다고 한 韓仲由에게, 잘못은 和議에 있었지 斥和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
고 한 담헌의 답서이다. 이 편지에 따르면, 담헌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人倫과 綱常을 지키는
길이라고 보았다. 담헌의 이와 같은 생각은 ‘대명의리론’에 기초한 것으로,
朱子主義的 義理之學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君父의 원수인 오랑캐에 대
한 복수는 私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天理와 民彝의 구현이므로, 청에
대한 복수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인륜의 문제였던 것이다.4) 현
실론의 입장에서 淸에 대한 臣服을 합리화하여 時勢에 순응하려 했던 자
들을 비판한 尤庵 宋時烈의 논리를 잇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5) 그러나
당시의 집정자들은 對明義理를 저버리고 구차한 삶을 도모했으니,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잘못을
통렬히 지적함이 마땅한데, 韓仲由는 도리어 斥和 때문에 害를 입고 禍를
당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答韓仲由書 를 근거
로 할 때, 중국에 대한 담헌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대명의리에 기초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대명의리에 대한 담헌의 이와 같은 인식은 乾淨衕筆談 이나 燕記 에
恢恢乎有餘地矣今盛論乃以爲有害無益而歸之於欠缺也不亦誤乎謀國不臧媚虜
偸生當時執政之罪死有餘責盛論不此之非而乃以斥和爲挑怨速禍之端嗚呼不
思甚矣 失在和 不在斥和” 湛軒書 內集 권3, 答韓仲由書 .
4) 조선후기 華夷論에 근거한 尊周論과 대명의리론의 역사적 맥락과 전개 과정에 대해
서는 유봉학(1988), 정옥자(1998), 권오영(2004), 禹景燮(2006), 韓明基(2007), 김문식(2009)
등의 선행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5) 宋時烈은 夷狄인 金의 침략으로 나라가 거의 망하는 지경에 이른 시기에 태어나 오
랑캐로부터 받은 치욕을 씻고 전란 후유증의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自任하였던
朱子를 통해 조선이 지향해야 할 바를 찾았던 바, 주자의 華夷分別論을 통해서 對
淸復讎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尤庵은 華夷分別과 對淸復讎의
당위성을 ‘存天理 去人欲’의 修養論的 命題에서 찾아 ‘尊中華 攘夷狄’의 필연성을
입증하고, 청에 대한 복수의 필연성을 天理와 人倫의 차원에서 해명하였다. 禹景燮
(2006), 269 275면. 참조.
서도 확인할 수 있다.
平仲이 “우리 副大人이 蘭公의 硃卷 중에 ‘망망한 우주에 周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는 말이 있음을 보고 歛袵함을 깨닫지 못하셨답니다.”고 말하자, 난공
은 오랫동안 낯빛이 변하였다. 나는 평중에게 교분이 옅은데 말이 너무 깊었다고
나무랐다.6)
宋氏 가문은 명나라 世臣으로서, 명나라가 멸망함에 홀로 성을 지키고 항복하
지 않았다. 청나라 군사는 여러 번 敗戰을 당하다가, 康熙 때에 비로소 그 성을 깨
뜨려 항복받았다. 청나라는 그들이 성의 견고함을 믿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
킨 것을 분하게 여겨, 그 성벽을 모조리 쳐부수도록 명하였으나, 그 성벽이 어찌나
견고하였던지 끝내 헐어 없애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歲貢으로 銀 1만 냥
을 바치도록 하여 곤욕을 주었다. 그 후손들이 이로 말미암아 못살게 되었지만, 그
래도 대대로 그 성을 지키며 지금까지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7)
‘망망한 우주에 周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茫茫宇宙 捨周何適 ’라는
구절을 보고 떠올린 것은 尊周大義와 對明義理였다. 이는 副使 金善行만
이 아니라 平仲도 그러했고, 湛軒도 그러했을 것이다. 潘庭筠은 자신이 쓴
글이 그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을 것이다. 文字
獄이 엄혹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반정균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
고, 그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의 속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交分을 쌓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각 밖의 화가 미칠지도 모른
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담헌이 時諱에 저촉되는 말을 함부로 해버렸
6) “平仲曰 我副大人見蘭公硃卷中有茫茫宇宙捨周何適之語 不覺斂袵 蘭公色變良久
余咎平仲以交淺言深” 湛軒書 外集 권2,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
7) “宋家皇明世臣 明亡獨城守不下 淸兵累見敗 康煕時始破降之 憤其負固守義 令剗破
其壁堅不可毁而止命歲貢銀萬兩以困辱之其後孫雖因以殘敗猶世守其城不復仕
進” 湛軒書 外集 권7, 燕記 宋家城 .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다며 을 허물한 것은 平仲 그러한 정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중에 대한 담
헌의 나무람 속에서 우리는 대명의리에 대한 그의 확고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호란 이후 淸의 압제가 본격화되면서 親淸勢力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그 활동 또한 적극화되고 있던 조선의 현실을 고려할 때, 갖은 핍박과 곤욕
에도 불구하고 出仕하지 아니하고 대명의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宋家
城 사람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부끄러운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담헌과 함께 薊州의 宋家城을 찾았던 副使 金善行의 말이었
지만, 燕記 에 위와 같은 기록을 남긴 것을 보더라도 대명의리에 대한 흔
들림 없는 그의 신념은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8)
2. 朝鮮中華主義
연행록에는 조선과 청나라의 禮俗 내지 風俗에 대한 기술이 자주 보인
다. 혼례나 상례와 같은 禮俗의 실제, 朱子家禮의 遵行 여부, 朝服의 制度
나 辮髮 혹은 纏足과 같은 衣冠制度 등이 거듭 기록됨을 볼 수 있는데, 담
헌의 燕記 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喪家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어느 禮法에서 나온 것이냐는 담헌의 질문이나,9) 辮髮을 한 저들의 모습에
대하여 身體髮膚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聖人의 가르침 아니냐는 힐난10)
속에는 명나라의 옛 제도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조선에 대한 자부심, 문
8) 담헌이 潘庭筠과 嚴誠에게 淸陰 金尙憲의 節義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대목이나 을
병연행록 에서 담헌이 朝參 不參 사유에 대하여 “일시 귀경을 위야 스로 몸을
욕되이 미 내 본심이 아니오”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湛軒
書 外集 권2,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 ; 소재영 조규익 장경남 최인황(1997), 주
해 을병연행록 , 태학사, 194면 참조.
9) “余曰 喪家動樂 此出何禮 彭曰 此直隷愚民無知者 士人皆不用” 湛軒書 外集 권
7, 燕記 吳彭問答 .
10) “余曰此中剃頭之法亦好否鄧生曰自幼習以爲常頗覺其便余曰髮膚不敢毁非
聖訓乎” 湛軒書 外集 권7, 燕記 鄧汶軒 .
화적 우월의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古雅한 조선의 衣服은 ‘明朝의 遺
制’라는 자부심,11) 해외의 작은 나라에 살면서도 頭髮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긍지,12) 조선은 中華의 옛 제도를 간직한 유일한 나라라고 하
는 데 대한 자긍심13)이 청나라를 대하는 담헌의 기본 태도였던 것이다.
중국 衣冠이 변한 지 이미 백여 년이다. 지금 천하에서 오직 우리 東方이 대략
舊制를 보존하고 있다. 중국에 들어오면 무식한 무리들이 웃지 않음이 없으니 슬
프다. 그 근본을 잊음이여! 帽帶를 보면 場戱와 같다고 하고 두발을 보면 부인과
같다고 하며 큰 소매 옷을 보면 和尙과 같다고 하니, 어찌 痛惜하지 않겠는가?14)
청나라가 천하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함에 따라 야기된 傳統的華夷秩
序의 瓦解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과 함께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
었지만, 청나라의 지배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보다는 기
존 질서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 조선의 상황이었다. 대명의리에
기초한 北伐論이나 朝鮮中華主義, 正統論은 당시 조선의 현실인식과 대응
방식을 대변한다. 그런데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청이 18세기 들
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北伐의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조선에서는 中華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조선의 문화적 자부심을
강조하는 朝鮮中華主義, 儒敎文化를 기준으로 한 文化的 華夷觀이 北伐
11) “余時以方冠着廣袖常衣蘭公曰此卽秀才常服耶余曰然蘭公曰制度古雅余曰
我們衣服 皆是明朝遺制 兩生皆頷之” 湛軒書 外集 권2,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
12) “吾輩居在海外小邦 坐井觀天 其生靡樂 其事可哀 惟保存頭髮 爲大快樂事” 湛軒
書 外集 권2,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
13) “余曰弊邦慕尙中國衣冠文物彷彿華制自古中國或見稱以小中華惟言語尙不免夷
風爲可愧 蓉洲曰 久仰貴邦人物俊雅 風俗醇厚 不减中華 至于土音 又何害焉” 湛
軒書 外集 권7, 燕記 孫蓉洲 .
14) “余曰中國衣冠之變已百餘年矣今天下惟吾東方略存舊制而其入中國也無識之
輩 莫不笑之 嗚呼 其忘本也 見帽帶則謂之類塲戱 見頭髮則謂之類婦人 見大袖衣
則謂之類和尙 豈不痛惜乎” 湛軒書 外集 권2,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論의 빈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15) 연행록에 등장하는 조선과 청나라의
禮俗이나 風俗에 대한 이러저러한 기록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받아들
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실을 문화적 우월의식에 기초하여 위안을 얻고
자 했던 보상 심리의 반영이었던 것이다.16) 위의 인용문은 그와 같은 논리
와 기제에 근거한 對淸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17)
물론 머리를 깎으면 상투 짜는 번거로움이나 머리 빗는 수고가 없으니
좋다고 하고, 網巾은 말의 꼬리를 머리 위에 이도록 한 것이니 좋지 않은
제도라고 한 기록도 있으나,18) 이는 어디까지나 희롱삼아 한 말일 뿐 중화
문화의 정수를 조선이 계승하고 있다는 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漢人
의 衣冠制度를 따르지 않는 이유를 천명한 淸 太宗의 諭示19)를 담헌이 그
대로 옮겨 실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그것은 청 문화의 장점과 독자
적 의의를 긍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담헌의 對淸 인식이 대명
15) 허태용(2009) 참조.
16) 조선중화주의는 전통적 화이관의 해체와 문화적 민족주의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는 점에서 그 긍정적 측면을 인정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중세에서 근대로 향하
던 역사의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으려고 하였던 퇴행적이고 전근대적 성격의 것이었
다는 점에서, 문화적 우월의식에 기초한 심리적 보상 기제, 고식적인 현실인식의 한
방편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 관점이다.
17) 古禮가 폐한 지 오래된 현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청나라의 漢人들이나 明朝의 遺制
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朝鮮에 대하여 尊崇의 마음을 표하는 漢人들에 대한 기록
( 湛軒書 外集 권2,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2월 4일자)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 “蘭公笑曰 剃頭則甚有妙處 無梳䯻之煩 爬癢之苦 科頭者想不識此味 故爲此語也
余曰不敢毁傷之語以今觀之曾子乃不解事人也兩生皆大笑蘭公曰眞箇不解事
又笑不止力闇曰浙江有可笑語剃頭店有牌號書曰盛世樂事余曰江南人乃有此口
氣北方恐不敢爲此余曰網巾雖是前明之制實在不好力闇曰何故余曰以馬尾戴
頭上 豈非冠屨倒置乎 力闇曰 然則 何不去之 余曰 安於故常 且不忍忘明制耳” 湛
軒書 外集 권2,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
19) “太宗文皇帝時有儒臣巴克什達海庫爾纏奏請衣服從漢人之制太宗諭曰非朕不納
諫試爲比喩如效漢習寬衣大袖將待人割肉而後食乎如遇勇士將何以禦之乎人
稱滿洲人云立着不動搖上陣不回頭爲天下無敵若效漢習諸事便怠惰忘騎射少
淳朴 失禮度 子孫當謹凜之 是以我朝聖聖相傳 不效漢人衣制也” 湛軒書 外集 권
3,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續 .
의리나 조선중화주의에 머물지 않고 北學으로 연결될 길을 열어놓고 있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20)
3. 北學
尊周論과 대명의리론에 근거한 傳統的 華夷論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후
기 지식인들이 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가장 근본적인 요인으로는 淸 자체가 역대 왕조 가
운데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야 할 것이다.
청나라가 중국을 주관하게 되자 명나라 왕조의 옛 땅을 전부 차지하였으니, 서
북쪽으로 甘肅에 이르고, 서남쪽으로는 미얀마 緬甸 에 이르렀다. 동쪽에 있는 오
라兀喇 길림 船廠 은 청나라 왕조가 發祥한 땅으로, 이곳은 명나라 왕조 적에도
一統 밖이었으니, 그 疆土의 넓이가 역대의 왕조 중 으뜸이다.21)
1662년 南明이 완전히 멸망하면서 明의 회복에 대한 기대는 사그라지기
시작하였다.22) 1681년 吳三桂 등의 반란이 종식되고, 1683년 臺灣까지 정
복했던 鄭芝龍 鄭成功 등 鄭氏 세력이 투항하면서 反淸勢力은 일소되었
20) 유봉학은 담헌과 연암의 북학사상 형성과정을 설명하면서 老論系 학풍, 특히 洛論
系와의 밀접한 관련에 주목하여, 이들은 人物性同의 洛論을 논리적 기초로 하여 ‘人
物均’의 논리와 ‘人物莫辨’의 논리를 이끌어내었으며, 心性論과 禮論 위주의 기존
학풍을 비판하고 事物의 객관적 인식을 토대로 한 ‘經濟之學’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利用厚生之具’로서 淸 文物의 수용이 필요하다는 자각 위
에 기존의 華夷論을 극복하고 北學論으로 나아갔다고 하였다. 유봉학(1982), 183
246면 참조.
21) “淸主中國盡有明朝舊地西北至甘肅西南至緬甸東有兀喇船廠又其發跡之地而
在明朝一統之外 則幅員之廣 甲於歷朝” 湛軒書 外集 권7, 燕記 蕃夷殊俗 .
22) 許太榕은 南明의 멸망 소식을 듣고는 천하의 일이 가망이 없다고 탄식한 尤庵 宋時
烈과, 明의 멸망을 인정하였던 명나라 망명인 康世爵의 이야기를 기록한 西溪 朴世
堂을 들어 그같은 조선 사회의 분위기를 지적한 바 있다. 許太榕(2007), 63면.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고 이로써 은 마침내 , 淸 중원 지배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23) 이
후 淸은 역대 왕조 최대의 疆域을 개척하면서 康熙帝와 擁正帝 乾隆帝
를 거치며 120여 년 동안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담헌이 북경을 방문
했던 1765년 당시 청나라는 동북으로는 길림, 서북으로는 감숙, 서남으로는
미얀마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의 번영은 광대한 영토의 개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거리를 활
보하는 사람들의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복색, 궁궐과 패루의 휘황찬란한
단청과 영롱한 채색, 붉은 칠을 한 웅장한 宮墻 등을 대하면서 담헌은 청
문물의 거대한 규모와 정교한 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24) ‘大規模細
心法’으로 대변되는 청 문물의 실용성과 편리성, 정교한 기술은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이었다.
요동 太子河 연변에 몇 里에 걸쳐 재목이 쌓여 있었는데, 크기가 모두 아름드리
나 되는 나무들이었으며, 몇 만 그루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작은 무더기는 몇 십
그루, 큰 무더기는 혹 백 그루가 되는 데도 있는데, 모두가 한 치 한 푼의 차이도
없이 그 길이가 같으므로, 무더기 양쪽이 깎은 듯이 반듯하였으며, 標號의 烙印도
정연하게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규모도 크고 心法도 세밀하다 하겠다.25)
태자하 연변에 쌓여 있는 재목들을 본 담헌은 가히 청나라 문물제도의
선진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십 수백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몇
리에 걸쳐서 높이 쌓여 있는 규모도 규모려니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
하게 재단된 나무들, 가지런히 쌓아 놓은 사람들의 손길에서 담헌은 청 문
물의 선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힘으로는 그들을 당하지
23) 韓明基(2007), 209 211면 참조.
24) 윤승준(2010b), 261 262면 참조.
25) “遼東太子河邊積材木亘數里大皆連抱不知其幾巨萬株每堆小者數十株多或百株
皆長短無分寸參差 堆垜齊整 兩面如削 標號印烙 秩然不可亂 可謂大規模細心法也”
湛軒書 外集 권8, 燕記 沿路記略 .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문화에서만큼은 앞서 있다고 자부해 왔던 담헌으
로서는 눈앞에 펼쳐진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목격하면서 적지 않은 충격
을 받았다. 담헌은 豊潤縣 文昌宮의 女墻이나 永平府 서쪽 들판에 심어놓
은 닥나무와 뽕나무를 보았을 때,26) 中後所의 길가에서 말똥 무더기를 보
았을 때에도27) 동질적인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더욱이 협소한 땅에서 악
착같이 영리를 도모하고 득실을 다투는 조선의 현실을 생각할 때,28) 수레
와 가마, 선박, 교량, 水閘, 水車, 풍구風櫃子 , 디딜방아, 연자매, 풀무 등
청의 각종 기구와 제도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나라腥穢讎域 ’ 것을 선진 문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대
명의리에 저촉되는 일이었고, 조선중화주의를 부정해야만 가능한 것이었
다. 그렇다고 대명의리나 조선중화주의를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華
와 夷의 분별은 우열과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에 華와 夷가 대등하게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는 없었다. 華夷論을 버리지 않는 한, 이 딜레마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었던 것이다.
26) “至豐潤 豐潤小縣也 禁不甚嚴 東南角有樓二簷曰文昌宮 登之見內外女墻 其廣可馳
十馬 舖甎平濶如砥 倚女墻睨望西北 折方中矩 弦直中繩 如磋如削 無半點歪斜 華
人作事每如此小縣如此知京城之雄麗無可言矣永平府以西野田半是楮桑聞葉
飼蠶皮爲紙種之可以代耕云其列植整直無纖毫委曲此中華素性不由安排其大
規模細心法 豈易言哉” 湛軒書 外集 권8, 燕記 沿路記略 .
27) “路上拾馬糞者相望 荷蕢持四枝小鐵鎗 微曲如掌指 見馬糞則叉納之如用手 其務農
勤嗇可見 其糞堆皆有㨾子 圓中規方中矩 三角中句股 穹者如傘 平者如案 滑潤如
塗壁 終未見狼藉傾斜者 華人之用心 自來如此” 湛軒書 外集 권8, 燕記 沿路記
略 .
28) 담헌은 편소한 국가에서 영리를 도모하고 득실을 다투느라 악착같이 지내야 하는
조선의 현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바 있다. “동국이 녜악문물이 비록 쟈근 듕
화로 일라나 히 니 열닌 들이 업고 물이 쳔니 흐르 강이 업니 봉강의
편쇼과 산쳔의 미 죡히 듕국 고을을 당티 못 거시어 사이 그 가온
대 이셔 눈을 브릅 구구 영니 도모고 을 내야 쇼쇼 득실을 토아 그
죡 긔상과 악착 언논이 다시 셰상의 큰 일이 이시며 텬하의 큰 히 잇 줄
을 모니 엇디 가련티 아니리오” 소재영 조규익 장경남 최인황(1997), 17면.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담헌은 ‘人物之無分’, ‘華夷無分’, ‘華夷一也’라는 생각을 통해서 우열과
차별에 기초한 華夷論을 지양하고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 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물이 똑같다. 무
릇 大道를 해치는 것으론 뽐내는 마음矜心 보다 더 심한 게 없다. 사람이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물을 천하게 여기는 까닭은 뽐내는 마음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왜 하늘의 입장에서 물을 보지 않고 사람의 입장에서 물을 보느냐?29)
담헌은 五倫과 五事가 사람의 禮義라면, 무리지어 다니면서 함께 먹이
를 먹는 것은 禽獸의 예의이며, 群落을 이루어 가지를 뻗는 것은 草木의
예의라고 하였다.30) 사람의 禮義 五倫, 五事 만이 禮義이고 금수나 초목의
禮義는 禮義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 때문이다. 마찬가
지로 금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금수의 예의만을 예의라고 하고 사람의 예의
는 예의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人間中心主義’31)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과 금수, 초목의 차별은
불가피하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大道에 이를 수 있는 길
이 열린다. 그런데 사람은 ‘뽐내는 마음’, ‘矜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大道
에 이르지 못한다. 實翁이 ‘왜 하늘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사람의 입장에서
29) “以人視物人貴而物賤以物視人物貴而人賤自天而視之人與物均也夫大道之
害莫甚於矜心人之所以貴人而賤物矜心之本也今爾曷不以天視物而猶以人
視物也” 湛軒書 內集 권4, 補遺 毉山問答 .
30)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羣行呴哺 禽獸之禮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義也” 湛軒書
內集 권4, 補遺 毉山問答 .
31) ‘人間中心主義’란 용어는 朴熙秉이 사용한 것이다. 논자는 이 용어의 외연을 ‘인식의
자기중심성’으로까지 확대 적용하여 물아의 인식은 상대적이라는 것, 그러므로 물아
는 궁극적으로 동일하다는 홍대용의 사유는 동아시아의 중세적 국제질서를 지탱하
던 강고한 이념인 화이론마저 일시에 부정해 버리게 했다고 하였다. 박희병(2002),
389 394면 참조.
보느냐고 질책하는 이유이다 ’ . 다시 말하면 ‘뽐내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
문에 사람인 나는 사람이 금수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고, ‘矜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인인 나는 오랑캐夷 인 淸이 華가 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뽐내는 마음, 矜心을 버려야만 조선은 조선이고 청은 청일 수 있으
며, ‘冔冠’과 ‘周冕’, ‘紅帽’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漢人의 衣冠制度나
淸의 衣冠制度는 제각기 그들의 생활과 풍속에 따른 가치가 있고 의의가
있는 것이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거나 멸시당해야
하는 절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안’과 ‘밖’
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자기 나라 사람을 친하게 대하고 자기 임금을 높
이며 자기 나라를 지키고 자기 풍속을 편안히 여기는 것은 華나 夷가 하나
인 것이다.32) 따라서 內外나 華夷의 구별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孔子가
바다에 떠서 九夷에 들어가 살았더라면 ‘用夏變夷’하여 域外에서 周道를
일으켰을 것이고, 그랬다면 ‘域外春秋’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域外春秋
論’은 그래서 가능해 진다.
대명의리에 기초했던 담헌의 對淸 인식은 조선중화주의를 거쳐 북학으
로 나아갔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은 明과 淸에 대한 차별적 분별을 전제
로 했던 華夷論을 넘어서 人과 物, 안과 밖, 華와 夷의 분별 자체를 부정하
고 모든 존재의 객관적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는 脫화이론을 정립할 수 있
었기에 가능했다.33)
Ⅲ. 燕巖 朴趾源의 對淸 인식
燕巖 朴趾源(1737 1805)은 정조 4년(1780) 淸나라 乾隆帝의 萬壽節을
32) “自天視之 豈有內外之分哉 是以各親其人 各尊其君 各守其國 各安其俗 華夷一也”
湛軒書 內集 권4, 補遺 毉山問答 .
33) 임형택(2000), 172 174면; 박희병(2002), 389 405면; 김문용(2003), 86 90면 참조.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축하하기 위한 進賀使의 일원으로 燕行에 올랐다. 때마침 건륭제는 더위를
피하여 熱河에 머물고 있었고, 만수절 행사에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하라
는 命에 따라 연암은 조선 使行으로는 처음으로 熱河까지 다녀오는 행운
을 누릴 수 있었다. 熱河日記 는 그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淸나라의
사정과 형세, 풍속과 문물, 제도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나라
의 治亂과 利用厚生의 道를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34) 열하일기 에는
연암이 파악한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와 청 제국의 사정 및 조선의 현
실 개혁 방안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는 바,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기록의
기저에 깔려 있는 연암의 對淸 인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對明義理
연암집 권 3에 실려 있는 貂裘記 는 尤庵 宋時烈이 孝宗으로부터 하
사받은 貂裘에 대한 記文으로, 연암이 28세 때 지은 것이다. 北伐의 의지
를 굳게 맹세했던 孝宗과 尤庵을 회상하면서 지은 것으로, 젊은 시절 明과
淸에 대한 연암의 인식을 보여주는 글로서 일찍이 주목받은 바 있다.35)
宣文王이 大統을 이어받은 뒤 맨 먼저 尤庵 宋先生을 초빙하여 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위대한 大明의 원수를 갚고 先王의 치욕을 씻을 방법을 도모했으니, 이
는 먼저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대하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誠意正
心의 학문을 아뢰었는데, 왕이 그 말을 즐겨 들음으로써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
이 모두 나와서 왕의 조정에 줄을 잇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대궐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무릎을 꿇고서 왕이 손수
34) “風謠習尙有關治忽城郭宮室耕牧陶冶一切利用厚生之道皆左其中始不悖於立
言設敎之旨矣” 熱河日記序 . 김명호는 열하일기 가 청조 중국의 실상에 비추어
당시 조선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여행기의 형식
을 빈 일종의 經世之書’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金明昊(1990), 119 120면.
35) 金明昊(1990), 125 126면 참조.
쓴 편지를 직접 건네주므로 , 선생은 달려나아가 조정에 入侍하였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貂裘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燕薊에는 추위가 일찍 오니 이것으로 바람과 눈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왕에게 있는 힘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대개
앞으로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한 뒤에 大義를 천하에 떨쳐, 비록
임금과 신하가 함께 軍中에서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36)
연암은 기문 마지막에 붙인 詩에서 ‘천자님께 충성하길 제 임금께 충성
하듯 했네. 忠于天子 如忠其主 ’라고 하였으며, ‘선왕에게 원수 있었나니,
저 건주 오랑캐라. 어찌 단지 私感 때문이리. 대국의 원수로세. 先王有仇
維彼建州 豈獨我私 大邦之讎 ’라고 하였다. 하사한 貂裘를 미처 입어보지
도 못한 채 좌절되고 만 先王의 명령을 안타까워한 연암은 스스로를 ‘망한
명나라의 백성明之遺民 ’이라고까지 칭하였다.
대명의리에 대한 연암의 이와 같은 태도는, 明은 ‘上國’이지만 淸은 ‘大
國’일 뿐 ‘上國’일 수 없다고 한 行在雜錄 의 言明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
다. 上國은 ‘中華’, 우리 선왕과 역대 조정이 命을 받은 나라를 가리키는 말
이다. 明은 바로 그러한 上國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 천하의 군사를 보
내주고 內帑庫의 銀을 털어서까지 원조하여 우리 祖宗으로 하여금 나라를
되찾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오랑캐 풍속을 면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淸은 그러한
上國이 아니다. 淸을 上國이라고 하지 않는 까닭은 中華가 아니기 때문이
다. 힘이 부족해서 저들에게 항복하였으니 ‘大國’이기는 할지언정, 우리가
애당초 命을 받은 上國은 아니라는 것이다.37)
36) 燕巖集 권3, 孔雀館文稿 貂裘記 . 번역문은 신호열 김명호 선생의 것을 따른다.
신호열 김명호(2007), (중) 43 44면.
37) “嗚呼皇明吾上國也何爲上國曰中華也吾先王列朝之所受命也然而不謂之
上國者何也非中華也我力屈而服彼則大國也大國能以力而屈之非吾所初受命
之天子也” 燕巖集 권13, 熱河日記 行在雜錄 .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明이 ‘上國’이라는 인식은 渡江錄 序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암은 왜
“後三庚子”라는 간지를 쓰는가를 설명하면서, ‘崇禎’이란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압록강을 건너려 하기 때문에 忌諱한 것이고, ‘숭정’이란 연호를
忌諱하는 것은 압록강 건너편은 청나라 사람들이고, 또 천하가 모두 청의
正朔을 받들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
정’ 연호를 몰래 일컫는 것은 明이야말로 ‘中華’이고, 우리 조선이 命을 받
은 ‘上國’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힘이 부족해서 비록 저 오랑
캐를 물리쳐 중원의 땅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선왕의 옛 문화와 제도를 빛
내고 회복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숭정이라는 연호라도 능히 존숭하여 중
국을 보존하려고 한다.”고 하였다.38) 이와 같은 언술을 통해 볼 때, 연암의
인식 속에 자리잡은 淸은 어디까지나 ‘힘센 오랑캐’일 뿐이고, 明은 어디까
지나 ‘中華’요 ‘上國’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암은 武英殿을 구경하던 우리의 역졸과 마부들이 청나라 관원들의 紅
帽와 馬蹄袖를 업신여기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음을 보고, “어찌
우리나라의 尊攘之義가 미천한 비복들에게까지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니
겠는가? 인간이면 누구나 변함이 없는 常道를 가지고 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 아니겠는가?”39)라고 하였다. 역졸이나 마부들만이 아니라 연암 자
신도 尊攘之義를 철저히 신봉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말이라 하겠
다.40)
38) 연암은 열하일기 에 대한 ‘虜號之藁’ 논란과 관련하여 “그네들이 떠들어 대는 ‘오랑
캐의 칭호를 쓴 원고虜號之藁’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소. 年號를 말한
것이오, 地名을 말한 것이오? 이 책은 잡다한 여행 기록에 불과한 것이라, 있건 없건
잘 되었건 못 되었건 간에 본래 世道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거늘, 애초부터 어찌 春
秋大義에 견주어 논한 적이 있었으리오?”라고 하면서도 “반드시 ‘되놈 오랑캐 황제’
라 배척해야만 비로소 춘추대의를 엄수하는 것이 된단 말이오?”라고 변론한 바 있다.
燕巖集 권2, 煙湘閣選本 答李仲存書 .
39) “豈非吾東尊攘之義 亦根於皂隸之賤 而秉彛之所同 得有不可誣也耶” 燕巖集 권
15, 熱河日記 黃圖紀畧 武英殿.
40) “네가 죽어서 중국에 다시 태어나게 해 준다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張福이 “중국
오호라 청나라 사람들이 ! 처음 그 國號를 세우면서, 우리나라 사신을 겁박하여
잡아다가 기필코 한번 그 뜰에 꿇리고서 큰 절을 받고자 했다. 이는 틀림없이 온
천하에 소리쳐 떠들기를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서 여러 나라들에 솔선하여 우리를
황제로 섬긴다.” 하려는 것이었으니, 아! 사신된 자는 이보다 더 사정이 급박할 수
없었다. 그 머리가 잘릴망정 조아려서는 안 되고, 그 무릎이 끊길망정 꿇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진실로 故 統制使 李公이 사신 노릇 하듯이 하지 아니했다면, 東海
주변 수천 리의 우리나라가 장차 무엇으로써 천하에 대해 스스로 떳떳할 수 있었
겠는가?41)
연암이 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李廓의 神道碑銘 서두이다. 청나라
에 무릎 꿇지 않았던 그의 節義와 勇力을 높이 평가한 연암은 “천하로 하
여금 만세토록 우리 조선만이 홀로 당시에 만주족을 황제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더욱 의롭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42)라고 평하였다. 이렇게
볼 때, 명이 망하고 청이 중원을 차지한 지 백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
고, 對明義理와 尊攘之義는 연암의 세계 인식을 지배하는 근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은 오랑캐胡라 싫사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나( 渡江錄 6월 27일자), 西番의 聖僧
을 만나보라는 황제의 명에 대하여 裨將들이 발끈 성을 내며 “황제가 시키는 일은
참으로 고약하네. 반드시 망하지. 아무렴 망하고 말고. 오랑캐들兀良哈 하는 일이
란. 명나라 때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 太學留館錄 8월 10일자)
등에서도 淸은 오랑캐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며 그 대척점에 항상 明이 자리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41) “嗚呼 當淸人建號之初 刦執我使 必欲一得其庭拜 是固將聲噪於天下曰 朝鮮禮義之
邦 率先諸國而帝我也 爲使者 噫其急矣 其頭可斫而不可叩 其膝可斷而不可跪者
苟非如故統制使李公之爲 使環東海數千里之國 將何以自明於天下乎” 燕巖集 권
2, 煙湘閣選本嘉義大夫行三道統制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
摠府都摠管 謚忠烈李公神道碑銘 幷序 .
42) “使天下萬世 益義我朝鮮獨不帝滿洲於當時也” 燕巖集 권2, 煙湘閣選本 嘉義大
夫行三道統制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謚忠烈李
公神道碑銘 幷序 .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그러나 연암은 당대 대명의리론이 지니고 있었던 비현실성과 허구성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었다. 仁祖 때 李适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
던 韓明璉의 두 아들이 여진족의 본거지인 建州로 들어가 그곳에서 장수
가 되어 정축년(1637)에 청 태종을 따라 조선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에서는 그 진위는커녕 이름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
러한데도 부질없이 큰 소리로만 적을 꺾으려 하고 大義를 부지하려 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43) 대명의리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은 백이숙제 중심의 의리론과 명분론이 조선 사회의 병리적 요인이 되
고 있음을 풍자하는 것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關內程史 7월 27일자에
기록된 夷齊廟에서의 소동 및 시골 글방선생과 동자들의 이야기는 春秋義
理論에 얽매여 淸에 대한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조선 사대부들의 병통을
비판한 것이다.44)
2. 朝鮮中華主義
對明義理와 尊攘之義가 연암의 세계 인식을 지배한 근간이기는 하였으
나 연암 스스로 그것이 지닌 허구성과 비현실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현
실적으로도 청은 조선이 대적할 수 없는 힘을 지닌 대국이었다. 청은 강대
국이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앞선 나라였다. 柵門을 넘어서 처음으로
접한 청의 문물은 연암에게 참을 수 없는 부러움과 시기심,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다.
43) 燕巖集 권14, 熱河日記 口外異聞 明璉子封王.
44) 이종주(2001), 245 248면; 윤승준(2010a), 241 244면. 연암은 大明義理와 尊攘之義를
인식의 근간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萬世不易의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지는 않았다.
節義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요, 상황에 따라서는 절의보다 傳道가 더 이상적일 수
도 있다는 주장을 담은 文丞相祠堂記 는 尊周論과 大明義理에 대한 연암의 열린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華와 夷의 분별을 전제로 하는 華夷論에서 출발하여 다시
금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었다. 이현식(2002), 97 106면 참조.
책문 밖에서 다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여염집들이 모두 대들보 다섯 개가 높이
솟았고 띠 이엉으로 지붕을 덮었다 . 집의 등마루가 하늘까지 높고 대문과 창문들
이 정제되었으며, 길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연도가 마치 먹줄을 튕긴 듯하
다. 담장은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타는 수레와 짐 싣는 마차가 길 가운데로 종횡무
진 누비며, 진열된 살림살이 그릇은 모두 그림을 그린 도자기이다. 그 제도가 결코
촌티가 나지 않음을 볼 수 있었다. 친구 德保 洪大容이 언젠가 “그 규모는 크고
기술은 세밀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책문은 중국 동쪽의 가장 끝인데도 오
히려 이와 같다. 길을 나아가며 유람하려니 홀연히 기가 꺾여, 문득 여기서 바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깊이
반성하며 ‘이게 질투하는 마음이로다. 내 평소 심성이 담박하여 부러워하거나 시샘
하고 질투하는 것을 마음에서 끊어 버렸거늘, 지금 남의 국경에 한번 발을 들여놓
고 본 것이라곤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않은 터에 이제 다시 망령된 생각이 솟는 것
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나의 견문이 좁은 탓이리라. ’라고 생각하였다.45)
이제 갓 국경을 넘어 청나라 동쪽 구석의 柵門 안을 잠깐 엿보았을 뿐임
에도 끓어오르는 부러움과 질투심을 어쩔 줄 몰라 그만 되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柵門 안 술
집에서 본 술잔들과 점포의 규모, 鳳城의 康永太 집과 그 주변 거리, 瀋陽
의 번화한 거리 풍경은 물론 집 짓는 제도와 벽돌 쌓는 법, 기와 이는 법,
가마 만드는 제도, 물통偏擔 과 비석, 캉炕 , 교량, 수레, 목축 등등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국이 이처럼 번성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46)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45) “復至柵外 望見柵內 閭閻皆高起五樑 苫艸覆盖 而屋脊穹崇 門戶整齊 街術平直 兩
沿若引繩然 墻垣皆甎築 乘車及載車 縱橫道中 擺列器皿 皆畵瓷已 見其制度 絶無
邨野氣往者洪友德保嘗言大規模細心法柵門天下之東盡頭而猶尙如此前道遊覽
忽然意沮 直欲自此徑還 不覺腹背沸烘 余猛省曰 此 心也 余素性淡泊 慕羨猜 妒 妒
” 本絶于中今一涉他境所見不過萬分之一乃復浮妄若是何也此直所見者小故耳
燕巖集 권11, 熱河日記 渡江錄 .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그러나 당시는 ‘오랑캐胡 ’라는 한 글자로 천하의 모든 것을 말살하던
시대였고,47) 저들은 분명 오랑캐였다. 때문에 연암은 물론 청의 문물을 직
접 목도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충격과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中華
와 夷狄, 중심과 주변, 선진과 후진의 개념이 전도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만이
유교문화의 정수를 이어받았다는 朝鮮中華主義는 이 충격과 혼란의 와중
에서 일시적인 자기 위안의 기제로 작동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 구석에 치우쳐 있으나, 네 가지 아름다운 점이 있답니
다. 유교를 숭상하는 풍속이 그 첫 번째 아름다운 점이고, 지리적으로 물난리가 날
염려가 없는 것이 두 번째 아름다운 점입니다. 소금과 생선을 남의 나라에서 빌리
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것이 세 번째 아름다운 점이고, 여자가 두 남자를 섬
기지 않는 것이 네 번째 아름다운 점입니다.48)
연암은 太學館 後堂에서 鵠汀 王民皥와 만나 우리나라의 과거제도와
문자, 혼인제도 등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용문은 곡정이 우리나라
의 아름다운 점 몇 가지를 알려 달라고 하자, 그에 대하여 답한 말이다. 연
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선이 자랑할 수 있는 점은 儒敎를 숭상하는 풍
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朝鮮中華主義에 대한 자부심을 전제로 한
대답이었다. 中華와 夷狄을 구분하는 華夷論은 본래 ‘지역’의 측면에서 中
原을, ‘종족’의 측면에서 漢族을, ‘문화’의 측면에서 중원의 문화 즉 禮敎를
‘중심’으로 상정하였다. 中原 漢族 禮敎 중심적 사고는 본래 하나로 통
일되어 있었으나, 이민족이 중원에 교체해 들어오고 중국의 강역이 확장되
46) “不意中國之若是其盛也” 燕巖集 권11, 熱河日記 渡江錄 6월 28일자.
47) 안대회(2003), 194면.
48) “弊邦雖僻居海陬 亦有四佳 俗尙儒敎 一佳也 地無河患 二佳也 魚鹽不藉他國 三佳
也 女子不更二夫 四佳也” 燕巖集 권 12, 熱河日記 太學留館錄 8월 10일자.
면서 중국이 중국인 ‘ 까닭은 禮義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강화되었다. 지역
이나 종족보다 생활 풍속이나 습관, 특히 禮로 집약되는 儒敎政治理念의
시행 여부가 中華와 夷狄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이다.49) 그
런 점에서 연암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점으로 儒敎를 숭상하는 풍속, 여
자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 점을 든 것은 朝鮮中華主義에 대한 강한 자부
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50) 실제로 연암은 우리나라는 오로지 儒敎
를 숭상하고 禮樂文物이 모두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기에 예로부터 ‘小中
華’라는 칭호가 있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51)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연암이었기에 明倫堂에서 벌어진 다음과 같
은 광경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명륜당으로 나가 보니, 제독과 통관들이 탁자 두 개를 마주 붙이고 그 위에서
잠을 잔다. 저들이 아무리 되놈이긴 하지만, 무식해도 너무 무식하다. 그들이 누워
서 자는 탁자는 바로 공자 같은 성인을 제사지낼 때 음식을 올려놓는 탁자가 아니
던가? 그런 탁자이거늘 어찌 감히 침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떻게 차마 누워
잘 수 있단 말인가?52)
오랑캐의 무식함을 깔보는 연암의 눈길에는 유교문화의 정수를 이어 온
문화적 자부심과 차별의식이 깃들어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추락한 중원
문화에 대한 안타까운 탄식이 들어 있다. 避暑山莊 문 밖에서 퇴청하는 청
나라 관원들의 의관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53)
49) 김문용(2003), 86면; 禹景燮(2006), 260 266면. 참조.
50) 김명호는 연암의 화이관은 ‘소중화주의에 내재한 문화중심적 화이관의 계기를 극대
화한 것’이었다고 한 바 있다. 金明昊(1990), 124 125면.
51) “至於敝邦 專尙儒敎 禮樂文物 皆效中華 古有小中華之號” 燕巖集 권12, 熱河日
記 太學留館錄 8월 9일자.
52) “遂出明倫堂提督通官輩各聯兩卓寢臥其上彼雖胡人無識甚矣其所寢臥乃先聖
先賢釋奠釋菜所供之卓 豈敢爲榻也 豈忍寢臥哉” 燕巖集 권12, 熱河日記 太學留
館錄 8월 9일자.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한편 연암은 청나라의 剃髮에 대하여 중국 백성들은 이런 머리 모양에
익숙하고 풍속을 이룬 지도 이미 백여 년이나 되었으니, 머리를 다시 길러
서 묶게 하고 모자를 쓰게 한다면, 도리어 번거롭고 가렵다고 불편하게 여
길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54) 또한 청은 조선을 禮俗에 속박시켜
文弱하게 만드는 것이 머리를 깎게 하고 소매를 짧게 하여 말 타고 활 쏘
는 데 편리하게 만드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을 했다는 傳言도 소개하였
다.55)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겨 온 衣冠制度, 禮義
가 실상은 저들의 對朝鮮政策의 일환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중국과 겨루어 맞설 만한 것은 하나도 가진 게 없으면서 ‘한 줌의
상투’만을 가지고 세상에서 제일 잘난 척 하는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
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하였다.56) 對明義理와 尊攘之義의 이면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놓치지 않았던 것처럼, 연암은 朝鮮中華主義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었던 허점도 날카롭게 파악하였던 것이다.57) “지금 명나라를
위해 복수를 하려고 하면서 오히려 그 상투 하나를 아까워한단 말이냐? 장
차 말을 달려 칼로 치고 창으로 찌르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하거늘,
그 넓은 소매를 바꾸지 않고서, 그걸 자기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58)
53) “朝日 山莊門外 見千官退朝 茜帽蹄袖 使人大慚 而我使衣冠 可謂燁如仙人 然街兒
驚怪 反謂場戱的一樣 悲夫” 燕巖集 권15, 熱河日記 避暑錄 .
54) “愚民之習熟成俗者 已百餘年之久 則亦或有以束髮加帽 反爲煩癢而不更者” 燕巖
集 권15, 熱河日記 銅蘭涉筆 .
55) “世傳淸人多勸汗(淸太宗)令剃我國 汗黙然不應 密謂諸貝勒曰 朝鮮素號禮義 愛其髮
甚於其頭今若强拂其情則軍還之後必相反覆不如因其俗以禮義拘之彼若反習
吾俗 便於騎射 非吾之利也 遂止 自我論之 幸莫大矣 由彼之計 則特狃我以文弱矣”
燕巖集 권15, 熱河日記 銅蘭涉筆 .
56) “然其禮俗文物 四夷莫當 顧無寸長 可與詰伉中土 而獨以一撮之髻 自賢於天下 此
二妄也” 燕巖集 권14, 熱河日記 審勢編 .
57)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 싫다’고 하는 張福의 말이나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자
는 것만 못하다’는 鄭進士의 잠꼬대 같은 대꾸는 실상 대명의리나 조선중화주의라
는 이념의 덫에 눌려 은폐된, 中華와 夷狄이라는 분별적 대립적 배타적 사고의
문제점, 자기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혀 진실을 바로보지 못하는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
이다.
라고 하는 의 호통은 許生 곧 연암의 호통이었던 것이며, 이와 같은 맥락 위
에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연암은 朝鮮中華主義에 안주할 수 없었고, 北學
으로 나아간 것이었다.
3. 北學
연암이 파악한 淸은 어디까지나 ‘힘센 오랑캐’, 大國이었다. 역대 최대의
疆域을 개척한 大國이기는 하였지만, 항상 주변 국가의 발호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래서 언제든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면 동쪽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서 만주의 묵은 풍속을 고집하는 것이 淸이라고
하였다. 청나라 황제들이 江蘇 浙江 지방을 순회하는 것은 동남 지방의
호걸들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고, 熱河에 궁궐을 짓고 머무는 것은 북쪽 오
랑캐를 막기 위한 것이며, 黃敎를 숭상하고 西番의 聖僧을 위하여 거창하
게 궁궐을 지어준 것은 억세고 사나운 西番 세력을 꺾기 위한 것이고, 朱
子를 떠받들고 그 학문을 숭상하는 것은 中原의 선비들을 文弱하게 하고
누구도 감히 자기를 오랑캐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렇게 파악된 청이었기에 中華로서의 上國으로 간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한 군사력으로 주변 국가를 굴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혹여 있을지 모르
는 저항이나 반란에 노심초사하며 국가 경영에 골몰하는 大國일 뿐이었던
것이다.59)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漢 唐 시대에도 이루지 못한 태평
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북경에 들어선 연암은 天下의 統治術에 대한 일대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문자가 생긴 이래 이십일 대 삼천여 년 동안은 물
론이고 문자가 생기기 이전에도 수많은 聖人과 聖君들이 자신의 마음을
58) “今欲爲大明復讎 而猶惜其一髮 乃今將馳馬 擊釼刺鎗 弓平弓飛石 而不變其廣袖 自
以爲禮法乎” 燕巖集 권14, 熱河日記 玉匣夜話 .
59) 燕巖集 권14, 熱河日記 審勢編 참조.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다하고 보고 들은 것을 다하여 천하를 다스렸으니, 그것은 이른바 惟精惟
一의 心法이었다. 이들은 私利私慾을 추구하기보다는 모든 사람들과 복을
함께 누리고자 하였으니, 후대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 가운데 마음 씀씀이
이나 사업이 조금이라도 거기에서 어그러지는 바가 있으면 세상에서는 그
를 지목하여 국가에 해악을 끼친 ‘愚民’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음 씀을
지나치게 하고 보고들은 바의 공교로움이 때로 聖人보다 나은 愚民이 있
으면 후세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여 겉으로는 배척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
로는 그들이 이룩한 功과 利를 본받았다. 이것이 세상의 기술과 재주가 나
날이 발전하게 된 까닭이다. 桀紂나 蒙恬, 秦始皇, 商鞅 등은 그들이 가진
역량과 재주, 지략, 정신, 기백을 쏟아 부었으니, 이들이 비록 堯舜이나 禹
王, 周公, 孔子, 管仲처럼 聖君이나 聖人으로 숭앙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이들로 말미암아 宮闕과 樓臺, 城과 道路, 法과 制度 등이 갖추어지게 되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愚民으로 지척받았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
가? 의식이 풍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하였다. 후세에 그 나라를 부유하게 하
고 군대를 강하게 하려는 임금들은 각박하고 베푼 은혜가 작다는 이름을
뒤집어썼을지언정, 어찌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겠
는가? 그 마음 씀씀이와 사업에 있어서는 惟精惟一하였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 이룩한 功과 利를 함께 누림에 있어서는 그것이 비록 夷狄에
게서 나왔다 해도 惟精惟一한 心法을 본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桀紂나 蒙恬, 秦始皇, 商鞅 등과 같이 그 재주와 지략, 역량이 천지
를 진동시킨 자들이야말로 중국의 위대함을 이룩하게 한 원동력이었고, 이
십일 대 삼천여 년 동안의 법과 제도 역시 이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60)
‘聖君’이나 ‘聖人’과 대비되는 ‘愚民’, ‘惟精惟一의 心法’과 대비되는 ‘才
智力量’, ‘心術事業’과 대비되는 ‘功利’, 이들의 대비에서 연암은 전자의 가
60) 燕巖集 권12, 熱河日記 關內程史 8월 1일자.
치를 인정하면서도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서 후자가 지닌 의의를 적극 긍정
하였다 . ‘才智力量’과 ‘功利’의 긍정은 대명의리나 조선중화주의의 이념에
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富國强兵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北學과의 연
결고리가 된다.61) 뿐만 아니라 淸을 中華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천하를 온전하고 평안하게 만들며 굳건히 세우는 뜻을 살펴보건대, 또한
하늘이 둔 命吏가 아닌가 싶다.”62)라고까지 말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
다. 연암이 청조 문물의 수용을 적극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역
사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63)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를 두텁게 할 수 있는 것
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 하물며
삼대 이래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들의 법도와 역대 국가들이 가졌던 옛것이고 떳떳
한 것임에랴! 옛날 성인이 춘추 를 지은 뜻은 尊華攘夷를 위함이었지만, 그렇다
고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혔음을 분하게 여겨 중국의 존숭할 만한 사실조차 모조
리 내치라고 했단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이 참으로 오랑캐를 물
리치고자 한다면, 중국의 남겨진 법제를 모조리 배워서 우리의 어리석고 고루하고
거친 습속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64)
61) 그런 점에서 연암의 대청 인식은 회고적이거나 관념적이기보다는 현실주의적 성격
을 지닌다고 하겠다. 임형택(2000a), 149면.
62) “觀其全安扶植之意 殆亦上天所置之命吏也” 燕巖集 권12, 熱河日記 關內程史
虎叱.
63) 열하일기 를 ‘여행기 형식을 빈 일종의 經世之書’라고 하였던 김명호는 연암이 제
시한 경세책으로서의 북학론은 ‘청조 문물의 적극 수용을 근간으로 한 富國强兵의
방법론’이었다고 한 바 있다. 金明昊(1990), 121 123면.
64) “爲天下者苟利於民而厚於國雖其法之或出於夷狄固將取而則之而況三代以降聖
帝明王漢唐宋明固有之故常哉聖人之作春秋固爲尊華而攘夷然未聞憤夷狄之猾夏
並與中華可尊之實而攘之也 故今之人誠欲攘夷也 莫如盡學中華之遺法 先變我俗之
椎魯” 燕巖集 권11, 熱河日記 馹迅隨筆 7월 15일자.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연암은 저들이 이룩한 功과 利를 적극 수용하여 조선의 모든 사람들과
복을 함께 누리고자 하였다. 더욱이 그것이 백성을 이롭게 하고 국가를 두
텁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이를 본받
아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
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고 하고, “만일 장차 배우고 묻
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두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하였던 것도 이 때문
이다.65)
연암이 북학론은 조선의 고루하고 거친 습속, 낙후된 현실에 대한 냉철
한 성찰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66) 조선에서는 심부름꾼 하나 부릴 수 없을
만큼 궁핍하더라고 자신이 직접 시장판에 나가는 선비가 없었다. 장터에
나가서 장사치들과 값을 흥정하는 것을 비루하고 좀스런 일로 여겼기 때문
이다. 그러나 內閣學士 嵩貴는 장날 시장에 나가 직접 옷깃을 헤쳐보고 몸
에 대보고 길이를 재보기도 하고는 제 손으로 은자를 꺼내어 값을 계산하
였다. 고루하고 꽉 막힌 조선의 선비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암은 잘 알지도 못하는 얍삽한 사람을 시켜서 일을 구차하고 어
렵게 만들기보다 차라리 자신이 직접 판단하고 처리하는 것이 더 낫고, 덕
분에 중국 사람들은 물건 감정에 정통하고 취향 또한 고상하다고 하였
다.67)
또한 太學館 앞에서 수백 마리의 말떼를 몰고 가는 牧童을 본 연암은 조
선의 목축 현실에 대하여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심하기 짝이 없
는 조선 목축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말을 다루는 방법이 옳지 못하고,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하며, 좋은 종자를 받을 줄 모르고, 목축을 맡은 관
원이 牧馬에 무식한 데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조선이
65) “學問之道無他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可也 如將學問 舍中國而何” 燕巖集
권7, 鍾北小選 北學議 序 .
66) 김명호는 “조선사회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결론”을 끌어내고 있는 점에
열하일기 의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金明昊(1990), 96면.
67) 燕巖集 권15, 熱河日記 盎葉記 隆福寺.
가난한 까닭이라고 한다.68) 그런가 하면 사방 수천 리밖에 되지 않는 좁은
강토에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것은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않
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원인은 ‘利用厚生之具’는 외
면한 채 ‘徒讀’에만 매달리는 사대부들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69) 이밖
에도 연암은 ‘벽돌甎 ’과 ‘돌石 ’,70) ‘캉炕 ’과 ‘구들’71)을 비교하면서 청나
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후진성을 극복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
다.
연암의 세계 인식은 對明義理와 尊攘之義를 근간으로 하였다. 때문에
淸은 강력한 힘을 지닌 大國일지언정 中華일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中華
는 明이었고, 明은 조선의 上國이었다. 물론 연암은 對明義理와 尊攘之義
가 교조화되는 과정에서 드러낸 비현실성이나 허구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淸이 현실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강대국임도 인식하고 있었으며, 생각 밖
으로 오랜 기간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압
록강을 넘어 마주한 청의 문물은 시기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놀라
운 것이었다. 中華와 夷狄, 중심과 주변, 선진과 후진의 개념이 전도된 상
황 속에서, 연암을 지탱해 준 것은 조선만이 중화 유교문화의 정수를 이어
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하는 朝鮮中華主義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
의 심리적 위안은 줄 수 있었을지 몰라도 엄연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
해 주지는 못했다. 연암은 역대의 천하 통치술을 재론하는 과정에서 ‘才智
力量’과 ‘功利’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대명의리나 조선중화주의의 이념에
서 벗어나 청조 문물의 수용을 적극 주장하는 ‘北學’을 주창할 수 있게 되
었다.
68) 燕巖集 권12, 熱河日記 太學留館錄 8월 14일자.
69) 燕巖集 권11, 熱河日記 馹迅隨筆 7월 15일자.
70) 燕巖集 권11, 熱河日記 渡江錄 6월 28일자.
71) 燕巖集 권11, 熱河日記 渡江錄 7월 5일자.
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Ⅳ. 맺음말
본고에서는 담헌과 연암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지식인의 對淸 인식을 검
토하였다. 淸에 대한 인식은 明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朝鮮에
대한 인식 또한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오랜 세월 동양의 국제질서
를 규정하여 온 華夷論에 대한 인식을 재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담헌과 연암은 中華인 明이 오랑캐인 淸에게 망한 지 백여 년이 지난 현
실에서 中華와 夷狄, 중심과 주변, 선진과 후진이 전도된 상황을 對明義理,
朝鮮中華主義, 그리고 北學이라는 논리를 통해 헤쳐 나간 조선후기의 지
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헤쳐 나가야 했던 현실의 장벽, 또는 이념의 장
벽은 유사했을지라도 실제 그들이 도달한 지점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담헌이 ‘人’과 ‘物’, ‘안’과 ‘밖’, ‘華’와 ‘夷’의 분별 자체를 부정하는 ‘華夷無
分’의 脫화이론을 통해서 이를 극복했다면, 연암은 淸이 明을 대신하여 上
國이 될 수 없고 中華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역사 발전의 동
력이 되어 온 ‘才智力量’과 ‘功利’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청 문물의
수용을 통해서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담헌이나
연암 모두 北學에 도달한 것은 같았지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차이를 보
였던 것이다.
<투고일 2011.4.28 / 심사일 2011.5.11 / 심사완료일 20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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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지식인의 인식 윤승준
Abstract
A Research for the Recognition of Q ng( ) in ĩ the late Chosun Dynasty
Yoon, Seung-joon
I examined the recognition of Qing(淸) in the late Chosun Dynasty, specially
focused on Hong Daeyong(洪大容) and Park Jiwon(朴趾源) in this paper. Their
recognition of Qing was premised recognition of Ming(明) and reflection of Chosun.
Sino-centrism had taken deep root in Chosun Dynasty as a fundamental thought
over the world, but it was shock after collapse of Ming.
In the late 18th centuries, Qing had governed China, and been thriven more
than hundred years. But Chosun had kept loyalty to Ming, especially she had
enhanced her faithfulness after Japanese invasion(1592 1598). Ming was conquered
by Qing, uncivilized aborigines in 1644. It was a surprising strike to Chosun. Hong
Daeyong and Park Jiwon were scholars of progressive idea at that time. Against the
Sino-centrism, they insisted the acception of Qing's things and institutions. I tried
to get a rational explanation that show them how to overcome the confusion of this
situation.
Hong Daeyong had denied and passed over the distinction between human
beings and animals, the inside and the outside, civilization and savage. So, he could
insist the acception of Qing's things and institutions. Park Jiwon's thought over the
world was clear. Qing could not replace Ming as a center and master of the world.
Qing was no more or less than a powerful nation. But he recognized the worth of
Qing's thing and institutions and insisted to accept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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