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廣城堡)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광성보(廣城堡)는 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곳은 자연 地形이 천연의 要塞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고려때부터 중요한 요새(要塞)구실을하였다.
광해군 시절 1618년에 강화 外城을 수축하였고,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강화 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는데,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 화도(花島), 광성(廣城) 등의 세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 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 (영조 21)에 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는데, 신미양요 때 戰禍를 입어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이 곳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공방전이 있었고, 1871년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 함대를 광성, 초지(草芝), 덕진(德鎭), 덕포(德浦) 포대에서 물리쳤으나, 4월23일 450명의 미국 해병대가 草芝鎭을 점령하였고, 다음날 미국은 덕진진을 함락하고 이어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광성보를 지키던 어재연(魚在淵)장군은 휘하 전 장병을 이끌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창,칼,조총 등의 구식 무기로는 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미국과의 이틀간의 전투로 어재연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을 비롯한 200여명의 군사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조선과 미국은 1855년 (철종 6), 1865 (고종 2) 그리고 1866년에 미국의 선박이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영일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제너럴 셔먼號 사건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의 大同江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商船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한다. 1866년 6월18일 미국 商人 프레스텐이 조선과의 교역을위하여 제너러셔먼호를 타고 중국의 천진(天津)을 출발하였다. 그 배에는 大砲 2문이 장착되어 있었으며, 완전무장한 승무원 19명과 통역자인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가 타고 있었다. 7월7일 대동강 하류에 도착하여 서서히 강을 거술러 올라가 황해도 황주목 송산리 앞에 정박하였다.
제너럴셔먼號
당시 조선은 대원군 정권 하에 철저한 쇄국정책을 견지하고 있었으므로 외국과의 交易 및 기독교의 포교는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에 황주목사 정대식(丁大植), 譯官 이용숙(李容肅) 등이 프레스턴일행에게 돌아 가라고 요구하였으나, 제머럴셔먼호는 7월13일 평양부 신창포까지 올라 갔다. 이에 평안도관찰사 박규수(朴珪壽)는 제너럴셔먼호로 中軍 이현익(李玄益)과 서윤(西尹) 신태정(申泰鼎)을 파견하여 즉시 퇴거할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프레스턴일당은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야간에 상륙하여 약탈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폭우로 水位가 높아진 대동강 상류까지 나아가 16일 만경대 부근에 정박하였다. 이에 조선의 이현익(李玄益) 등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하여 배에 접근하였다가 붙잡혀 감금당하였다. 이에 신태정(辛泰鼎)이 제너럴셔먼號에 접근하여 이현익(李玄益) 등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金, 銀, 人參 등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강변에는 평양군민이 운집하여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이현익의 석방 교섭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군민들은 격분하여 활과 소총을 난사하고 돌을 던졌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프레스턴일행은 뱃머리를 돌려 하류로 내려 가는데, 이때 퇴역장교 박춘권(朴春權)이 배를 타고 제너럴셔먼호에 돌입하여 李玄益을 구출하였으나 나머지는 살해되었다.
평안도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 백낙연(白樂淵)을 평양중군에 임명하고 화포 공격을 명하였다. 마침 제너럴셔먼호는 여울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조선은 24일 썰물 때 작은 배에 연료를 싣고 불을 지른 다음, 그 배를 제너럴셔먼호를 향하여 내리띄우고 제너럴셔면호를 불태워 버렸다.
평양 대동강에 있는 제너럴셔먼號 격침 기념비 .. 북한
조선군은 대포 2문을 노획하였고, 제너럴셔먼호의 승무원은 전멸되었으며, 조선측에서는 1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박규수 등의 벼슬을 높여주는 한편 중국에 양이쇄멸(洋夷殺滅)의 사실을 알렸다.
한편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항해도 및 평안도 연안에 무장선을 파견하여 제너러셔먼호의 소식을 조사하였으나, 큰 성과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미국은 1871년 대한포함외교(對韓砲艦外交)정책을 수립하고 조선 침략을 단행하는데, 이것이 신미양요(申未洋擾)이다.
신미양요 申未洋擾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武力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나라 정부에 이 사건의 조사를 의뢰한다. 또한 5년 전 1866년에 병인양요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공동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전쟁 직전에 있었으므로 거절하였다. 이에 미국은 독자적으로 제너럴셔면호 사건을 조사하러 황해도 연안을 조사하였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교섭을 요구하며 지방 관리들과 협상하였으나 성과없이 물러갔다.
로저스사령관
이에 미국은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통상을교섭하기로 결심하고,청나라 주재 특명전권공사 F.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함대 사령관인 J.로저스에게 조선 원정을 지시하였다. 로저스는 상해를 떠나 일본 나가사끼(長琦)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號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앞줄 가운데 로저스사령관
미국함대는 그해 4월 경기도 남양주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정하면서 4월에는 물류도(勿流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에서는 이 급보를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각 영(營)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 화약, 군량미를 수송하였다.
미국함대는 수로를 측정하면서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과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미 결과 미국함대는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4월23일 미국의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개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진진에 상륙하였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서 광성보(廣城堡)로 육박하여 왔다.
草芝鎭의 함락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 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군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戰死하고 24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미군은 3명 전사, 10명이 부상 당하였다.
광성보의 함락 .. 성조기가 펄럭인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병인양요 당시의 프랑스함대 처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하고, 전국의 주요 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斥 和 碑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거승로 기대하였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 들여졌다. 미국은다시 교섭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응하지 않자 지금보다 대규모의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로저스는 이러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결국 조선으로부터 물러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5월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을 위하여 접견을 거부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의견을 제시하고, 장차 미국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 당하였을 경우 구조,보호해 달라고 요천한 후 다음날 전 함대를 거느리고 청나라로 돌아 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官民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하였고, 배외의식(排外意識)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인의 鎖國 및 排外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 졌다.
신미양요 관련 사진들
미군에 빼앗긴 조선군 사령관 기(旗)...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미 해병, 로저스제독의 작전회의 등등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해병대. 뒤에 이들은 광성보에서 조선군과 백병전을 벌인다.
덕진진(德津鎭)을 점령한 미 해병대 .. 1971년 6월 2일
초지진(草芝鎭) 포대를 점령한 미 해병 ..450명이었다.
1871년 6월2일..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하다가 전사한 조선군인
조선군 포로들
조선군 포로들과 이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된 조선의 문정관(問情官 ..갓을 쓴 사람)
미국 배에서 일한 조선인 .. 맥주병과 미국신문을 들고 있다.
어재연 장군 魚在淵 장군
어재연(魚在淵. 1823~1871) ..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이다. 아버지는 용인(用仁)이다. 1841년 무과에 급제하여, 1864년 장단부사를 거쳐 1866년에 공충도(公忠都)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해 로즈(Rose)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부임하였다가 1871년(고종8) 2월 도총관.금위영 중군에 임명되었고, 이 해 미국 해병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삼군부(三軍府)에서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추천되어 강화도로 급파되었다.
어재연 生家 .. 충북 진천
어재연의 묘 .. 충북 진천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진에서 배수진을 치고 수비하던 魚在淵은 6월11일 德津鎭을 함락한 美軍이 총공세에 맞서 고군분투하였다. 水,陸 양면작전을 전개하는 미군을 맞아 야포사격을 전개하다가 육박전에 돌입하여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황현(黃鉉)은 그의 저서 "梅泉野錄"에서 " 魚在淵은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적에게 던지며 싸웠으며, 적의 창에 난자되고 머리를 베어갔다"고 적고 있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韓末의 대학자인 이건창(李建昌)은 어재연을 평하여 " 淸白剛正해서 이르는 곳마다 이름난 공적을 남겼다. 체격이 장대하고 絶人의 힘이 있어서 세상사람들은 그를 壯士라 불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수자기 帥字旗
申未洋擾 때 美軍에게 빼앗긴 어재연장군이 장군기이다. 그동안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전시되었었는데, 최근 10년간 장기 임대형식으로 빌려 왔다. 가로,세로 각각 4.5m의 크기로 재질은 삼베 또는 광목으로 만들었다. 수자기(帥字旗)란 陣中이나 營門의 뜰에 세워 두었던 大將의 軍旗이다.
신미순의총 辛未殉義塚
순국한 어재연장군을 기리는 쌍충비(雙忠碑) 곁에 200여명의 영령들의 충혼을 기리는 순국무명용사비이다. 그리고 어재연장군의 휘하에 있던 군인들은 포로가 되느니 최후까지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결의로 격전, 전사한 51명을 7基의 분묘에 합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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