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무섬마을의 역사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5. 4. 02:37



 

 


무섬마을전경〉

 

영주시 휴천동 선사시대 지석(支石) 및 입석(立石)과 가흥동 암각화(巖刻畵)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시대(기원전 ? - 668) 내이군(柰已郡)이다.

신라시대(기원전 ? - 935) 파사왕(婆娑王 80-111)이 점령하였다.

소지왕(炤知王) 11년(489) 9월 고구려가 과현(戈峴)에 이르고 10월 고산성(孤山城)을 함락하였다.

소지왕(炤知王) 22년(500) 9월 내이군(柰已郡) 순행시 파로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딸(벽화)을 데리고 갔다.

경덕왕(景德王 742 - 764)이 내이군(柰已郡)을 내령군(柰靈郡)으로 고쳤다.

선곡(善谷)을 내령군(柰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옥마(玉馬)를 내령군(柰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918 - 1392)시대 내령군(柰靈郡)강주(岡州)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구성(龜城)이다.

【순화(淳化 990 - 994)때에 정한 것이다.】

현종(顯宗) 무오년(1018)에 길주(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인종(仁宗) 계해년(1143)에 강주(岡州)순안현(順安縣)으로 고쳐서 현령(縣令)을 두었다.

주(興州)를 순안현(順安縣)에 붙였다.

고종(高宗) 무오년(1258)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순안현(順安縣)을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계사년(1413) 예(例)에 의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를 영천군(榮川郡)으로 승격 하였다.

영천군(榮川郡) 영주동에 구성(龜城)산성이 있다.

영천군(榮川郡) 이산면에 용상산성이 있다.

영천군(榮川郡) 장수면에 갈산산성이 있다.

영천군(榮川郡) 안정면에 용산산성이 있다.

영천군(榮川郡) 가흥 1동에 한절마산성이 있다.

영천군(榮川郡) 가흥 2동에 고현산성과 배고개산성이 있다.

세조 3년(1457) 11월 29일 부석(浮石)면 수식(水息)면 곶천(串川)면 파문단(破文丹)면을 풍기군(豊基郡)에서 영천군(榮川郡)에 속하게 하였다.

박수(朴 1641-1709)할아버지가 만죽재(晩竹齊)를 강희 5년(1666)에 지었다.

숙종(肅宗) 임술년(1682) 1월 13일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를 복설(復設)하고 부석(浮石)면 수식(水息)면 곶천(串川)면 파문단(破文丹)면을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에 돌려주었다.

고종(高宗) 31년(1894) 8월 8도제 시행당시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榮川郡)이 되었다.

무섬마을은 영천군(榮川郡) 진혈리(辰穴里) 천상리(川上里) 지역으로 진혈리(辰穴里)에는 금강(錦江) 놋점 검암 묵암 송평(소드리) 수도(무섬) 탄산(머럼) 조제 청령 멱곡등 동네가 있었고 천상리(川上里)에는 말천 오천 성내 동막 염곡 금계 병산 말근내 대우 평은등 동네가 있었다.

조선(朝鮮) 후기에는 진혈면 천상면이었는데 진혈면(辰穴面)은 수도(水島) 송평(소드리) 금강(錦江) 용혈(龍穴)등 동네였고 천상면(川上面)은 강동 평은 천본 오은 지곡 오천등 동네였다.

고종(高宗) 32(1895)년 5월 26일(칙령 제 28호 1895. 5. 26)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영천군(榮川郡)이 되었다.

고종(高宗) 33(1896)년 8월 4일(칙령 제 36호 1896. 8. 4)로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천군(榮川郡)이 되었다.

1914년 3월 1일(부령 제 111호 1913. 12. 29일)로 순흥군(順興郡)과 풍기군(豊基郡)을 폐지하여 영천군(榮川郡)에 붙이고 영주군(榮州郡)이라 하고 진혈면과 천상면을 합하여 평은면으로 하면서 오천리는 안동군(安東郡) 녹전면(綠轉面)에 붙였다.

1934갑술년 수해로 강물이 범람하여 많은 집들이 침수되고 파괴되었다.

이때에는 마을 앞 제방이 없어서 물이 집 마당까지 들락날락 거렸다.

1940년 11월 1일(부령 제 221호 1940. 10. 23)로 영주군(榮州郡) 영주면(榮州面)이 영주군(榮州郡) 영주읍(榮州邑)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에 집들이 재건되고 마을이 발전하다가 1960년경부터 전국적인 도시화 현상으로 인구와 주택수가 점점 감소하였다.

1972년도 새마을사업으로 마을 앞 제방을 축조하였다.

전기는 1978년 1월에 들어와 호롱불에서 전기불로 바뀌었다.

1980년 4월 1일 법률 제 3188호로 영주읍(榮州邑)이 영주시(榮州市)로 승격되었다.

무섬마을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풍군(榮豊郡) 평은면(平恩面) 수도리(水島里)가 되었다.

1981년에는 강위로는 견실한 다리가 놓여 머럼마을 과 무섬마을을 연결하고 있다.

1983년 2월 15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영풍군(榮豊郡) 문수면(文珠面) 수도리(水島里)가 되었다.

1988년 7월 큰 홍수로 마을 앞 제방이 무너져 또 다시 침수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 4774호(1994년 8월 10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시(榮州市) 문수면(文珠面) 수도리(水島里)가 되었다.

무섬마을은 옛 부터 유교를 숭상하여 학문을 중히 여겨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또한 경제력이 뛰어나 영주에서 이름 있는 부자 마을로 불리어 왔다.

집수가 가장 많을 때는 120호가 되는 큰 마을이었다.

무섬마을 안에는 특이하게도 농토(農土)가 없고 지금 공터는 전부 집터입니다.

그 후로부터 마을 주민들의 젊은 세대들은 전부 떠나고 흩어지고 무섬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령층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강을 감싸 안은 자연의 정겨움이 가득한 무섬마을의 고가들은 우리선조들의 숨결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색으로 흠뻑 젖은 마을을 거니노라면 역사를 거슬러 선조들의 체취와 삶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무섬마을은 이름 그대로 봉화의 내성천과 영주의 서천이 무섬마을 뒤에서 합수(合水)를 하여서 낙동강상류가 되어서 마을 3면을 감싸 안고 흐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섬(島)처럼 떠있는 마을이다.

안동 화회마을을 연상시키는 무섬마을은 휘감아 도는 강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지며 맞은편에는 소나무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나지막한 산 들이 강을 감싸 안고 이어졌다.

무섬마을은 고택(古宅)과 정자(亭子)로 이루어진 마을로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만죽재(晩竹齊)와 해우당(海愚堂)은 옛 선비들의 단아한 격식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과 정겨운 자연 고풍스러운 옛집이 즐비한 무섬마을은 고향을 찾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기에 좋은 곳이다.

영주 안동 예천의 삼각분기점에 위치한 학가산(鶴駕山 882m)은 옛날부터 학이 앉았다. 날아가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이렇게 불리어 졌다고 한다.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일월산(日月山) 남쪽으로는 팔공산(八空山) 북쪽으로는 소백산이보이고 산기슭마다 명문취락(名門聚落)을 형성하고 있는 영남의 북부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마루에는 군데군데 허물어진 석성(石城)의 흔적이 남아있고 당시 멀리 남쪽으로부터의 소식을 중앙으로 전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는 봉수대(烽燧臺)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봄이 되면 산중턱에 빨간 매화가 온통 골짜기를 붉게 물들여 장관을 이루는데 특히 사람의 눈을 끌게 하는 것은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산 목련이 대 군락을 이룬다.

 

 

 

 


만죽재(晩竹齋)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

지정일자 : 1990년 8월 7일.

현판 : 만죽재(晩竹齋).

크기 : 90cm×40cm.

글씨쓴이 : 박기양(朴箕陽 1856 - 1932).

탁본자 : 박세우(朴世雨 1954 - ).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229-2.

박기양(朴箕陽) 조선의 문신 서화가.

본관은 반남(潘南) 자(字)는 범오(範五) 호는 석운(石雲).

부(父)는 박제억(朴齊億 1825 - 1907).

모(母)는 청송 심씨(靑松 沈氏 1824 - 1906).

배(配)는 풍양 조씨(豊 趙氏 1855 - 1941).

1888년 진사(進士) 별시문과(別時文科)에 병과로 급제 부사정(副司正)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 검열 문학 대사성 승지 이조참의 형조참판을 거쳐 경기도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궁내부특진관 중추원의관 시강원첨사 태의원경 승예원경 등을 역임 의정부찬정이 되었다.

1899년 궁내부대신서리 1910년 규장각제학을 지내다가 한일합방으로 일본정부에 경학원부제학 1925년에 중추원참의가 되었다.

금(琴) 기(棋) 서(書) 화(畵)에 모두 능했으며 글은 행서(行書) 그림은 묵죽(墨竹)에 뛰어났고 여러번 조선미술전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작품은 석죽도(石竹圖)가 있다.

이 집은 무섬마을의 입향조인 박 수(朴 1641-1709)선비가 무섬마을에 입향 하셔서 다래덤불을 걷어내고 건립하셨다.

보수시 부와와 여와에 강희 5년 병오 8월 19일(康熙 五年 丙午 八月 十九日) 평인(平人) 김종일(金宗一) 조작(造作)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강희는 중국 연호(年號)이고 5년은 1666년이다.

처음에 섬계초당(剡溪草堂) 현판〔수()의 7세손 제익(齊翼 1806-1841) 호(號)섬계(剡溪)〕을 걸었으나 나중에 만죽재 현판〔제익(齊翼)의 손자 승훈(勝薰 1865-1924) 號만죽재(晩竹齋)〕을 걸면서 섬계초당 현판을 내리었다.

당호는 만죽재(晩竹齋)이다.

배치구성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는 정면 5칸 측면 4칸 반 규모이다.

안채 평면구성은 대청 3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고방 1칸 상방 1칸 문간 반 칸이 연달아 놓여 있다.

문간은 안마당 쪽으로 벽체 없이 개방시키고 바깥쪽에 널문을 달아 옆 마당으로 통하게 했다.

대청 우측은 안방 2통 칸 정지 1칸 반이 연이어 있고 정지 상부에는 안방에서 이용하는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안방 정지는 안마당 쪽으로 벽체 없이 개방시키고 바깥쪽에 널문을 달아 옆 마당으로 통하게 했다.

중문 좌측은 사랑채부분으로 사랑방 2통 칸 마루방 1칸에 이어 마루방 뒤쪽에 못 방 1칸을 두었다.

사랑채 전면은 얕은 기단에 통주의 두리기둥을 세우고 툇마루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중문은 안마당 쪽으로 벽체 없이 개방시키고 바깥쪽에 널문을 달아서 사랑방 정지로 사용하고 있다.

중문 우측은 안방 정지에서 사다리를 놓고 사용하는 상부 다락을 설치한 마구 1칸이 있다.

기단은 강돌에 시멘트 모르타르로 상면을 마감하였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안대청 상부가구는 간결한 3량 가이고 사랑채는 전퇴 5량 가로 사랑채의 격식을 높였다.

지붕은 사랑채부분만 독립된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안방 남쪽에 방 1칸 마루방 1칸을 이어서 꾸미고 섬계초당(剡溪草堂) 현판을 걸었습니다.(2009. 8.15)

 



 

 


오헌(吾軒) 고택

현판 : 오헌(吾軒)

크기 : 95cm×45cm

글쓴이 : 박규수(朴珪壽 1807 - 1876)

탁본자 : 박세우(朴世雨 1954 - )

소재지 :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233

衆鳥欣有托 吾亦愛吾廬 此爲陶令襟期 物吾同樂 渾然天眞語也 夫知吾者 鮮矣 而全吾者 爲尤鮮 吾有所受 然後乃能從吾所好 可語此者 吾宗有其人也 瓛卿書于白松堂 乙亥年 仲秋 族從 瓛齋 珪壽識

새들도 모두 깃들 곳 있음을 기뻐하니 나도 또한 내 오두막을 사랑하노라.

이 시는 도연명의 흉금으로 외몰과 내가 함께 즐거워함을 나타낸 것이니 혼연하고 천진 무근한 말이다.

대체로 자신을 아는 자는 적은 법인데 자신을 온전히 하는 자는 더욱 적은 법이다.

내가 타고난 바가 있은 뒤에야 이에 내가 좋아하는 바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우리 종친에 있으니 바로 오헌(吾軒)공이다.

을해(乙亥 1875)년 8월 가을 족종 환재(瓛齋) 규수(珪壽) 짓다.

《 박규수(朴珪壽) 1807 - 1876 》

조선의 문신 개화파 실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字)는 환경(桓卿) 호는 환재(瓛齋)

부(父)는 박종채(朴宗采 1780 - 1834)

모(母)는 전주 유씨(全州 柳氏 1780 - 1834)

배(配)는 연안 이씨(延安 李氏 1808 - 1888)

연암(嚥巖) 지원(趾源)의 손자(孫子) 한양 출신으로 184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랑(正郞)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860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862년 진주민란(晋州民亂)이 일어나자 그 안핵사(按覈使)로 파견 사태수습에 힘썼다.

1864년 병조참판(兵曹參判) 대제학(大提學)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866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셔어먼호가 대동강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 이를 불살랐다.

1873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 오자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수교를 주장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다.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했다.

서화에 능했다.

고종(高宗)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시호는 문익(文翼).

저서는 환재집(瓛齋集) 환재수계(瓛齋繡啓) 익유문집(翼有文集) 14권 등이 있다.

비석 : 어사 박규수 영세불망비

크기 : 40cm×65cm

년도 : 병진(1856)년

탁본자 : 박세우(朴世雨 1954 - )

소재지 : 영주 구성 공원

          《 오헌 기(吾軒 記) 》

 현판 : 오헌기(吾軒記)

크기 : 55cm×30cm

글쓴이 : 허전(許傳 1797 - 1886)

탁본자 : 박세우(朴世雨 1954 - )

소재지 :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233


傳素善朴聖源 晩又作僚於夏官 遂益密 爲余言所居之扁 願爲吾軒記 余訊之曰 吾之意

 何 夫吾己稱也 與物二之也 與人亦二之也 大分別也 然則名吾以吾 文吾以吾 無乃與人

物太分別歟 旁有解之者曰 否否 名者實之賓也 文者道之器也 賓未嘗離乎實 器未嘗離乎

道 人物亦何嘗不備乎吾歟 子何以自其萬殊之變者觀之 不本其一理之合者而反之 聖源

然而前 誦其自銘曰 以吾觀吾 吾不知吾 耕吾讀吾 安分是吾 剛吾柔吾 律身是吾 忠吾信

吾 接物是吾 進吾退吾 處世是吾 內吾外吾 吾不愧吾 余從而誦訂頑之銘曰 天地之塞 吾

其軆 天地之變 吾其性 民吾同胞 物吾與也歲 庚午元朝 七十四歲翁 性齋 許傳書

 



나에게 살고 있는 집의 이름을 말하고 오헌(吾軒)에 대한 글을 부탁하였다.

내가 나(吾:오)라고 한 의미는 무엇인가.

대체로 나 란 자신을 일컫는 말로 사물(物:물)과도 다르고 사람(人:인)과도

 

달라서 크게 분별이 된다.

그렇다면 나로써 나를 이름하고 나로써 나에 대해 글 지음은 이에 사람과 사물과 크

게 분별을 하지 않을 것인가. 라고 물었다.

 

곁에서 이를 해명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아닐세 그게 아닐세 이름(名:명)이

란 실(實)의 손(賓:빈)이요 글이란 도(道)를 담는 그릇(器:기)이다.

 

손은 실(實)을 떠난 적이 없으며 그릇은 도를 떠난 적이 없으니 사람과 사물도 또한

 어찌 나에게 구비되지 않았겠는가!

그대는 어찌해서 만 가지로 갈라지는 변화로부터 이를 통해 하나의 이치로 통합해서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성원이 웃으며 다가와서 그 자명(自銘)을 읊조리니 나로써 나를 보면 나는 나

를 알지 못한다.

나의 밭을 갈고 나의 책을 읽으니 나는 이를 편안하게 분수로 여긴다.

나를 굳세게도 하고 나를 부드럽게도 하여 나의 몸을 바로 잡으며 나를 충실

케 하고 나를 미덥게 하니 사물을 대하는 건 나로다 나를 나아가게도 하고 나

를 물러나게도하니 처세함은 내 스스로다.

나를 안으로 하고 나를 바깥으로 하니 나는 나에게 부끄럽지 않다.

고 했다.

내가 이어서 정완명(訂頑銘)을 읊조리니 하늘과 땅에 충만한 기운을 내가 몸

으로 하고 천지의 법칙에 따름을 나는 본성으로 한다.

백성은 나와 같은 몸이요 사물은 나와 더불어 산다.

고 했다.

경오(庚午 1870)년 새해 아침에 74세 노인 성재(性齋) 허전(許傳) 쓰다.

 

《 허전(許傳 1797-1886)) 자(字)는 이로(以老) 호(號)는 성재(性齋) 본

관은 양천(陽川) 조선 후기의 문신 이조판서 성의 후손 정언 형(珩)의 아들

하려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이다.

향년은 90세 생원(1828) 문과(1835) 한성판윤 형조 이조판서 시호는 문

헌(文憲)이다. 》

 

 

 


《 청퇴암 기(淸退菴 記) 》

 거룩하시다 사환(仕宦)에서 청정(淸淨)을 보전(保全)하는 자가 얼마나 되며 능(能)히 용퇴(勇退)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한대(漢代)의 소(疏)와 진대(晋代)의 한(翰)이 족히 이에 당(當)할 것이고 송대(宋代)에 와서는 오직 유응(劉凝)이 그 인물이다.

그러므로 황산곡(黃山谷)은 노래로서 찬탄(贊嘆)하였다.

그런데 환재(瓛齋)는 공(公)을 깊이 알기 때문에 이 시(詩)를 써서 주었으니 그것이 어찌 구구(苟具)히 한 것일까?

대개 공(公)은 통재(通才)로서 근학(勤學)하여 조년(早年)에 등과(登科)하사 대원(臺院) 출입(出入)할 때 명망(名望)이 위연(尉然) 하였으니 세상에서 공(公)의 의범(儀範)을 뵙고 여광(餘光)을 받은자는 모두가 공(公)을 공보(公輔)하는 대신(大臣)이 될줄로 기대(期待)하였던 것이다.

그의 소성(素性)은 광중(廣中)하고 또 념개(恬介)하여 삼조(三朝)를 역사(歷事)하는데 언제라도 생활이 한산(寒散)해도 고민(苦憫)하지 아니하고 승진(陞進)할 첩경(捷經)에도 추종(追從)하지 않았으나 삼품관(三品官)으로 승진하였다.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이 국권(國權)을 장악(掌握)하였을때 만약에 한번만 교제(交際)해도 그의 전조(前兆)를 가기(可期)할 수가 있었으나 그때 시세(時勢)를 보고 기미(機微) 옛적에 황정견(黃庭堅)(호:山谷)이 유응(劉凝)에게 기증한 기우시(騎牛時)에『기관청영미(棄官淸穎尾) 매전낙성만(買田落星灣) 신재고포중(身在菰蒲中) 명만천지간(名滿天地間) 수능사십년(誰能四十年) 보차청정퇴(保此淸淨退) 왕래간곡중(往來澗谷中) 신광재우배(神光在牛背) 』라고 하였는데 나도 일찍이 이 시를 읽고 그 의미가 청상(淸爽)함을 즐겨서 유공(劉公)의 고원(高遠)한 풍운(風韻)이 족(足)히 사람의 진심을 쇄연(灑然)하게 씻어줌을 감탄하였노라.

고종 경오(庚午 1870)년에 병조참의(兵曹參議) 오헌(吾軒) 박공(朴公)이 기관(棄官)하고 귀향(歸鄕)하는데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상공(相公)이 그 시(詩)를 선면(扇面)에다가 써서 증여(贈與)하였으니 그의 뜻은 대개 공(公)을 유응(劉凝)에게 비(比)한 것이다.

공(公)의 몰후(歿後)에 무섬(剡溪 섬계) 아래 송평(松坪)의 구비에다 정자(亭子)를 지었으니 본택(本宅)에서는 겨우 강수(江水)를 월(越)했고 묘소(墓所)에서는 일강(一岡)을 격(隔)했는데 그의 유향(遺香)은 의연(依然)히 영상(靈爽)이 있는 듯하니 그것은 박씨가 사정(思亭)한 것이다.

그 정자가 준공되니 그 선면(扇面)에 쓰인 시(詩) 중에 문구(文句)를 취해서 청퇴(淸退)라고 제명(題名) 하고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해 오니 나는 옷깃을 여미고서 경탄(敬嘆)해 말하노니.

아아……를 알고서는 호연(浩然)하게 퇴귀(退歸)하사 서사(書史)에만 락(樂)을 부치고 운수(雲水)에만 정(情)을 가지고 우유(優遊)하게 자적(自適)하였으니 섬강(剡江)에서 구로(鷗鷺)와 숙맹(宿盟)을 하고 여산(廬山)에서 우배(牛背)에 신광(神光)이 있는 그의 우열(優劣)을 나는 모르지마는 그의 청정(淸淨)하게 용퇴(勇退)하신 것만은 참으로 좋은 지조(志操)였던 것이다.

공(公)은 일찍이 오헌명(吾軒銘)을 지어서 말하되 내가 진(進)하고 퇴(退)함은 처세(處世)하는이 나이다. 고한 것은 그의 뜻이 참으로 원대(遠大)한 것이다.

그것을 어찌 누구에게 다할 것일까?

그후 십육년(十六年)을 지나고 조정(朝庭)에서는 특전(特典)으로 공(公)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승진(陞進) 시켜서 병문(兵門)에서 삼일(三日)을 시무(視務)하게 한 것은 은중(恩重)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천작(天爵)을 닦으면 인작(人爵)이 따른다. 는 것이 아닌가!

공(公)의 증손(曾孫)인 흥서는 순실(淳實)한 장자(長子)로서 세속(世俗)에는 따르지 아니하고 근검(勤儉)으로 치가(治家)해서 문호(門戶)를 유지(維持)하는데 그의 선적(先蹟)이 날로 없어 질 까바 겁을 내서 성심을 다하여 청퇴암(淸退菴)을 지었으니 유응(劉凝)의 사간고정(四磵古亭)과 더불어서 천년 길이 그 미적(美蹟)을 같이 할 것이다.

그것이 인명(仁明)한 효도(孝道)가 아닌가.

아아…… 어찌 해야만 다시 주선생(朱先生)과 같은 대서특필(大書特筆)을 얻을까?

고풍(高風)이 멀어가니 일구(一句)로는 후려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경인(庚寅 1940)년 접하절 영가 권상규 근서

 

 



영주 수도리 박덕우 가옥.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3호.

지정일자 : 1999년 8월 9일.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229-2.

 

이 집은 만죽재 고택 옆길로 올라가면 담장없이 남서향해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까치구멍집인데 이 마을 까치구멍집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평면구성은 먼저 전열은 전면 가운데의 대문을 들어서면 흙바닥의 봉당이 나오고 봉당 우측에 정지 1칸 좌측에 마구 1칸이 연결되어 있다.

마구는 근년에 좌측으로 1칸 달아내었고 기존 마구간은 봉당과 연계해 사용하고 있다.

후열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사랑방 우측에 안방을 두었다.

이러한 평면구성은 기본 6칸 까치구멍집에서 필요공간을 생활편의에 따라 횡축으로 확장한 모습이다.

밤에 정지에서 마루로 올라가려면 어두워서 정지와 마루 사이에 코끄리불을 설치하였으나 집을 수리하면서 몰지각한 사람들이 필요 없다고 코끄리불을 내다 버리고 지금은 업습니다.

정지는 전면 벽체를 2尺 가량 달아내고 그 자리에 찬장을 설치하였고 부뚜막위에는 안방에서 사용하는 반침이 설치되어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얕게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상부가구는 간략한 3량가이다

지붕은 초가지붕을 1976년 지붕개량사업 때 일식 시멘트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는 초가지붕으로 원대 복귀를 하였다.



 



 

 

영주 수도리 박천입 가옥.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제364호.

지정일자 : 1999년 8월 9일.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229-2.

이 집은 6칸 까치구멍집의 초기변형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까치구멍집으로 전열에 봉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사랑방을 두고 우측에 정지를 두었으며 후열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웃방을 두고 우측에는 안방을 두었다.

일반적으로 마굿간이 있어야할 자리에 사랑방이 설치된 것과 사랑방의 전면과 측면 상방의 측면에 외부로 통하는 문을 설치하여 폐쇄적인 까치구멍집에 개방성을 도입한 평면상 특징이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6칸 까치구멍집의 초기변형의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겹집의 변형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지붕은 초가지붕을 1976년 지붕개량사업 때 일식 시멘트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는 초가지붕으로 원대 복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