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로 북학파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이다. 가세가 빈한하여 어려서부터 주로 아버지 박종채에게 수학하였는데, 할아버지인 박지원의『연암집 燕巖集』을 통해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고,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김영작(金永爵) 등 당대 일류학자와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실학적 학문경향을 한층 심화
시켰다.
1856년의 애로우호사건(Arrow號事件)에 관련, 중국황제의 문안사절로 중국을 방문하여 국제정세의 흐름을 목격하였고, 심병성(沈秉成) 등 80여명의 중국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1862년 2월에는 진주민란의 사태수습을 위한 안핵사에 임명되어 민란의 진상을 조사, 보고하였다. 이는 그가 국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 관찰사로 전임되었는데, 그가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당시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이 발생하였다.
그뒤대제학에재임중1872년진하사(進賀使중국황실에경사가있을때에축하의 뜻으로 보내던 사절)의 정사(正使)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수역(首譯) 오경석(吳慶錫)을대동하고두번째중국에다녀왔다. 이제2차중국 사행을 통해 그는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면서 개국(開國)·개화(開化)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귀국후 그는 흥선 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였으나 뜻대로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에 사직하고, 국정의 제일선에서 물러나제자양성에힘썼다. 이시기그가사랑방에출입하는젊은양반 자제들에게『연암집』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에 내왕한 사신이나 역관들이전하는새로운사상을전수함으로써, 개화운동의선구적인물들이
그속에서나타나게되었다.
손해를 볼지라도 한 점 부끄러움 없게 처신하다.
박규수는 관직에 재임하는 동안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몹시 빈한했다. 계동(桂洞)에 있던 그의 옛집은 마치 가난하고 권력 없는 선비가 살았던 집과 같고, 다만 뜰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박규수의 맑은 풍모를 생각나게 했다고 한다.
그가 평안감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박규수가 평안 감사로 가있는 동안 그의 부인이 봉록 남은 것을 모아 토지 3백석 어치를 사둔 것이 있었는데, 박규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박규수에게 호소하였다.
“공의 부인께서 사신 땅은 제가 먼저 샀던 것입니다. 원래 땅 주인이 악한 마음을 먹고 제게 땅을 팔고 나서, 저도 모르게 그 땅을 또 공의 부인에게 돈을 받고 판 것입니다.”
박규수는 깜짝 놀라 부인에게 물었다.
“아니, 도대체 저 이의 말이 무슨 소리인가?”
부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공의 봉록 남은 것을 모아 토지를 사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요. 다른 사람이 이미 사둔 땅이라니요.”
부인의 말을 듣고 박규수는 그의 집을 찾아온 이에게 말했다.
“그랬는가. 이것은 그대의 땅인 것을 우리 집에서 잘못 샀도다.”
그리고는 땅 문서를 내다가 불살라 버렸다. 부인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당신이게무슨짓입니까? 이땅문서가얼마짜리인데요. 안되겠습니다. 이땅을판자를찾아내땅값을다시내놓으라고해야겠습니다.”
흥분한 부인을 보고 박규수가 조용히 말했다.
“부인, 그러지 마시오. 내가 관찰사직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부인이 토지를 샀으니 비록 남은 봉록으로 땅을 샀다고 하나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여기겠소. 또 어찌 정승이 되어 백성과 송사로 이익을 다툴 수 있단 말이오.”
박규수는 빈한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백성과 다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부인은 남은 봉록을 모아 토지를 샀으니 한 점 부끄럼이 없으나 그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의혹조차 피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높은 관직에 있는 박규수로서는 거짓 사기로 토지를 판 사람을 찾아내 처벌하고 돈을 돌려받는 일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승으로서 백성의 땅을 사들이고 그것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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