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은 조선 후기에 혜성같이 나타나 농업, 민생, 상공업, 과학, 지리,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대부분 기득권층과 거리가 멀었고, 그들이 펼친 주장에 귀기울여 주는 왕이나 대신은 한 명도 없었다. 그 탓에 실학사상은 조선 사회에 실제로 적용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세도 정치가 종결되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정세가 격동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인해 중국과 일본이 연달아 나라의 문을 연 것이었다. 특히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열강들에게 참패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일부 지식인들은 조선 또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개화開化다.
오늘 알아볼 인물은 실학 사상과 개화 사상을 연결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환재 박규수1807~1876. 그는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함께 손꼽히는 세도가였던 반남 박씨 출신이었다. 다만 세도의 중심에 서 있던 가계와는 다소 떨어져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다름아닌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이었다. 그 덕에 박규수는 어린 시절부터 실학 사상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대의 학자들과는 달리 세계의 흐름에 대해 비교적 열린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16살에 지동설과 관련된 시를 짓기도 했고 남병철, 윤종의, 김영작 등 이름난 실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나누었다. 특히 박지원과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 김정희와는 수차례 편지를 교환하며 친분을 쌓았다.
또한 그는 15살 무렵부터 이미 학문이 성숙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자신보다 두 살 어린 나이의 효명세자와 친분이 깊기도 했다. 대리청정을 맡고 있던 효명세자는 젊은 인재인 박규수를 신임했고, 아직 과거에 합격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음에도 경연에 참석해 자신의 견해를 펼치라고 명했다. 하지만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한 후 벼슬길에 등을 돌리고 학문을 닦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렇게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박규수는 1848년(헌종 17)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 병조 정랑에 오르는 등 다시 벼슬길에 나섰다. 헌종이 그를 만나 보고 아버지 효명세자가 왜 신임했는지 알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얼마 안 가 헌종도 요절하고 철종이 즉위했지만 이번에는 부안 현감, 사헌부 장령, 동부승지, 곡산 부사를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계속했다. 1861년에는 연경으로 가는 사신단에 참여해 바뀌어가는 청나라의 현실을 목격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임술 농민 봉기가 벌어졌다. 박규수는 이때 진주 안핵사에 임명되어 백성들을 위무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선 농민들이 겪는 고통을 생생히 체험한 그는 삼정의 문란을 개혁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들은 조정에서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제대로 시행된 개혁 정책은 하나도 없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강력한 척화 주장을 펼쳤다. 순조 시대의 신유박해, 헌종 시대의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에 이어 병인박해를 주도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병인박해는 조선 내의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이 처형되고 프랑스 신부 9명이 순교하면서 역대 최대의 규모로 끝이 났다.
그해 7월 한 척의 이양선조선 앞바다에 나타났던 서양의 근대식 배들을 통칭하는 말이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올라왔다. 이 배의 이름은 제너럴 셔먼호. 미국 국적의 상선으로, 총 24명의 선원을 태운 배였다. 이들은 자신들과 교역을 하자는 요구를 했고 거부하더라도 서울로 올라가서 무역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이양선이 출몰했을 때 조선 조정의 대응 방책은 '통상 수교를 하자는 요구는 거부하지만 식량과 물자를 제공해 주고, 만약 군사적으로 접근해 온다면 똑같이 군사적인 대응을 한다'였다. 이 방침에 따라 조선 측에서는 식량은 제공해 주겠지만 교역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펼쳤다. 그럼에도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계속해서 강을 따라 올라갔고, 대화를 하러 온 조선 군관들을 배에 억류했다. 또 포격을 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퇴역 군인 박춘권을 필두로 한 평양 백성들이 돌을 던지고 활을 쏘며 격하게 대응했다.
제너럴 셔먼호에선 백성들의 대응에 겁을 먹었는지 억류했던 중군 이현익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이내 태도를 바꿔 조선인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백성 7명이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평양 감사 박규수를 시켜 상황을 진정시키도록 했다.
전권을 이양받은 박규수는 화포나 총 모두가 적선보다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직접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작은 배들을 연결한 뒤 불을 붙여 제너럴 셔먼호로 흘러가게 했고, 작전은 성공해 셔먼호가 불타고 선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강변으로 끌려 왔던 셔먼호의 선원들은 모두 분노한 평양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박규수의 대응으로 진압되자 흥선대원군의 척화 주장은 더욱 공고해졌다. 병인박해에 대해 항의하며 프랑스가 일으킨 병인양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벌인 남연군묘 도굴 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언급하며 미국이 일으킨 신미양요가 잇달아 일어나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해 있는 동안 박규수는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예조 판서, 대사간을 거치며 순탄한 벼슬 생활을 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진압한 후 대원군의 신임은 더욱 깊어져 형조 판서와 우의정에까지 임명받았다.
그러나, 박규수는 개화와 관련된 문제에서 흥선대원군과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척화 정책을 접고 서양 세력에게 문호를 개방하자는 주장을 펼친 것이었다. 아마 실학의 영향을 받은 현실적인 사상과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한참 앞서간 서양의 기술을 접했던 것이 그의 개화 주장에 영향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사랑방에 젊은 학자들을 초대해 실학사상과 국제 정세에 대한 여러 지식을 가르쳤다. 그 결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그의 밑에서 배운 개화파 인사들이 형성될 수 있었다.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수교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을 때 개항에 적극 찬성하기도 했던 박규수는 1876년 세상을 떠났다. 실학 사상과 개화 사상을 연결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만, 한편으로는 서양과 일본의 속셈에 대해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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