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판문점, 갈라진 역사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20. 3. 29. 18:20

2018년 7월 5일 by

판문점, 갈라진 역사

 

내 소원 중 하나는 묘소 한 곳을 찾는 것이다. 16년째 연구하고 번역 중인 <임원경제지>를 지은 사람, 바로 풍석 서유구 선생의 묘소다. 꼭 한 번 그의 묘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싶으나, 아직 이루지 못했다. 그는 173년 전인 1845년에 세상을 떠났다. 육조판서를 두루 거쳤고, 집안 대대로 판서까지 오르고 영의정도 배출한 집안이었다. 그의 묘소는 이런 명망 있는 가문의 선영과 함께 있기도 하기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묘소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묘소에 갔다 왔다는 이를 만난 적이 없다. 주소를 지번까지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파주시 진서면 금릉리 산204. 그곳은 DMZ에 위치해 있다. 아무도 갈 수가 없다는 데에 막막함과 절박함 그리고 간절함은 더욱 증폭됐다. 어쩌다 보니 정신적 실향민이 됐다. 지금까지 11년 동안 파주에서 살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조선은 북위 38도라는 무형의 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점령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군사 작전상의 업무분담을 위해 일시적으로 군사분계선으로 획정됐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이 선은 외세의 야욕으로 인해 실질적인 분단의 계기가 됐다.

38선이 획정된 1945년 이후, 또는 적어도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이후로 풍석의 묘소는 후손이나 참배객이 찾아가려 해도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65년이 지나도록 관리해주는 이도 없었을 테니, 묘소가 크게 훼손돼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묘비는 남아 있지 않겠나 하는 희망을 걸어본다.

작년 11월 8일, 민간인 통제구역인 도라산 전망대에서 판문점과 그 주변을 살펴보고 왔다. OBS 창사특집다큐멘터리 <인문학으로 조선을 맛보다, 조선 미남(味男)> 4부작 중 제3부 ‘조선 최대의 요리 백과사전, 서유구의 정조지’편 인터뷰 제작을 위해서였다. 판문점으로 상징되는 분단이 우리에게 주는 삼엄함과 온갖 비극 이외에, 나는 또 하나의 애절함을 거기에 묻고 왔다. 판문점 동쪽으로 1~2km쯤 떨어진 곳에 바로 풍석의 묘소가 있다. 최전방의 장병 몇몇 정도나 특수한 목적으로 들어갈까 말까 하는 구역이었다. 당연히 민간인은 접근 불가다. 먼발치에서 주변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전망대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독자 모두가 그렇듯이 하루라도 빨리 남북의 관계가 호전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산가족이 만나고, 폐쇄됐던 개성공단을 재가동하고, 민간교류를 활성화해야 한다. 그러면 남북공동 학술연구 및 교류 차원에서 DMZ를 역사문화연구와 생태연구를 위해 개방할 날이 반드시 오리라. 풍석의 묘역은 그때나 열릴 것이다.

최근 몇 달 새 한동안 잠잠했던 판문점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로부터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판문점의 행정구역은 남쪽이 파주고, 북쪽은 개성이다. 지금의 모습으로만 보면 행정체계가 정연하게 자리 잡혀 있지만, 이곳은 사실 분단을 땅 자체로 경험한 지역이다.

파주는 분단의 상징 지역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최북단이어서 쉽게 갈 수 없는 곳, 따라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파주 대부분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다. 임진강을 기준으로 그 북쪽만이 접근이 어려울 뿐이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임진강 너머를 거의 모른다. 분단이 70년 넘게 지속된 데다, 한국전쟁이 그친 지도 65년이나 됐기 때문에 지금 생존한 일부 실향민과 북에서 살다 온 새터민들을 제외하고는 북한 땅에서 살아본 이들이 없다. 그중 일부는 우리 영토이지만 그것도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허가를 받지 않은 이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비록 허가를 받고 이 민통선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왠지 모를 비장함이나 불안감으로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분단은 DMZ 너머의 지리상 궁금증이나 호기심조차도 자연스럽게 차단했다. 그러나 이 DMZ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지금처럼 무인지대가 된 지는 6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60년이라는 세월은 우리의 유구한 역사로 볼 때 극히 단시간에 불과하지만 60대 이전의 세대에게 이곳은 모두 공포와 긴장, 전쟁의 위협이 서린 곳으로,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그렇지만 언제고 가보고 싶은 그런 곳이 됐다.

파주와 개성으로 분단된 DMZ 안의 판문점. 그곳은 본래 한 행정구역이었다. 그렇다면 이 DMZ는 조선시대 어떤 곳이었을까. 장단(長湍) 도호부(都護府)였다. 도호부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 단위 중 하나라, 장단은 독립된 하나의 행정구역이다.

조선시대 장단 도호부에는 20여 개의 면으로 구성돼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10개 면으로 재편됐다. ①장단면(長湍面), ②군내면(郡內面), ③진동면(津東面), ④진서면(津西面), ⑤장남면(長南面), ⑥대강면(大江面), ⑦장도면(長道面), ⑧강상면(江上面), ⑨대남면(大南面), ⑩소남면(小南面)이 그것이다.

장단은 38선 구획 과정에서 남과 북 둘로 쪼개졌다. 분단 과정에서 ①~⑤는 남쪽으로, ⑥~⑩은 북으로 나뉜 것이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일부가 남한으로 수복되기도 하고, 북한으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이 상황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진서면의 상당 지역이 북쪽에 속하게 됐다.

이 모습을 김정호(金正浩)의 대작 <대동여지도>에서 확인해보니 그림과 같았다. 그림에서 연한 갈색 선은 조선 행정구역의 경계 표시선이고, 붉은 선은 지금의 군사분계선이다. 그림 왼쪽의 위쪽은 개성이고, 아래쪽은 개풍(조선시대에는 ‘풍덕’)이다. 이 두 지역은 38선 기준으로 남측 지역이었으나, 전쟁 과정에서 북으로 전체가 편입된 사례다. 장단은 이제 둘로 갈라졌다. 서남쪽 일부와 북쪽 대부분은 북한의 땅이 되고, 나머지는 남한의 땅이 됐다. 북한의 땅은 개성시․개풍군․장풍군으로 쪼개어 편입됐고, 남쪽의 땅은 파주시․연천군으로 나누어 소속됐다. 장단은 완전히 해체돼 인적이 거의 사라지면서, 역설적으로 천혜의 자연이 돼버렸다.

이로 인해 동일한 문화권의 이웃들이 졸지에 영영 만날 수 없는 적대국의 국민이 됐다. 분단의 처절한 고통과 아이러니를 어찌 이 짧은 지면에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만 사상과 지향이 같았던, 같은 장단 지역의 사대부가 분단으로 무덤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 마치려 한다.

풍석을 이 ‘임원경제 산책’ 코너에서 본격적으로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임원경제지>를 편찬할 때 수많은 선인의 영향을 받았다. 이용한 문헌만 해도 893종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동시대에 <임원경제지> 편찬 방향에 큰 영향을 준 이가 있는데, 바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다. 대표작 <열하일기>로 유명한 연암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흡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북학파(北學派)의 리더였다.

풍석은 아버지뻘 되는 연암(풍석보다 27세 연상)의 글과 사상을 배웠고, 이를 그의 저술에 반영했다. 풍석과 동시대 인물의 저술로서, <임원경제지>에 반영된 글은 연암의 것이 으뜸으로 많았다. <임원경제지>에 반영된 연암의 글들은 대부분 이 책의 지향성을 대표했다. 그만큼 풍석은 연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서도 연암이 추구했던 북학의 정신을 대폭 확장했다. 연암과 풍석은 생각과 지향이 거의 비슷한 조선후기의 대학자들이었던 것이다.

연암이라는 호는 자신이 거주했던 장단의 서쪽 연암이라는 지명에서 왔다. 지금의 장풍군 연암동이다. 그의 묘소는 장단 송서면의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지금의 개성시 은덕동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풍석은 장단이었던 DMZ에 잠들어 있다. 연암과 풍석은 장단에서 활동했고, 장단에 묻혔다. 서로의 거리는 불과 몇 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이 둘은 후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물리적으로는 해후할 길이 없어졌다.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 분은 남쪽, 한 분은 북쪽 땅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요즘 교통수단으로는 몇 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렇듯 판문점의 역사는 같은 지역에서 생활과 사상을 공유하면서 같은 지향을 추구했던 스승과 제자조차도 갈라놓았다. 그러나 결코 바뀌지 않을 법했던 그 지형이 급격히 요동치고 있다. 거대한 지각 변동, 이제 거스를 수 없다.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에서 솟구치는 용암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듯이. 남과 북의 시민들도 조선의 장단 도호부의 백성처럼 한 행정구역의 시민으로 살 날이 가까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