嘉石,何石 朴浚珉(贊九) 글방

우리나라 시문학의 전개양상에 대해 논하라 전체공개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1. 3. 28. 17:45

 

 

우리나라의 시문학을 말하면 흔히 갑오경장 이후부터를 말하지만

그건 현대시의 단면만을 본 것이다.

우리는 5세기 이전에 이미 훌륭한 시가를 갖고 있었다.

그 전개양상을 살펴보면

향가-고려가요-단가-시조(사설시조)-가사로 이어짐을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향가는 20여수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왔으며 10세기 이후부터

고려시대에는 보옥에 비유될 수 있는 가요가 있었다. 그러한 시가의 기교와 정감의 표현은 현대시와 비교해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신라시대 향가인 처용가를 보면 8구체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2구를 추가한 낙구형식에 마지막 구인 감탄사 '아아날 엇디하릿고'의 형식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9연에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감탄사가 들어가 있는 낙구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우리가 누구나 좋아하는 친근한 시로 와 닿는 것이다.

13~14세기에 이르러 한국의 전통시가는 하나의 정형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정형시를 시조로 부르며 이 시조는 엄격히 제한된 3장으로 되어 있어 이미 완성된 형식미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에 우탁의 탄로가와 본격적인 시가문학시기를 연 조선시대의 시조를 보면 오늘날 정형시의 형식을 갖춘 평시조가 많이 등장하였고

도산십이곡과 어부사시사 같은 연시조(사슬시조)가 나왔다.




1592의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의 양란을 거치며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우리의 문학은 큰 변화를 갖게 되었다.

사대부들만의 시조가 사회의 혼란속에

 신분증을 매매하는 공명첩을 인정하여 양반숫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기득권층들의 다소 어려웠던 시조가 대중화 되면서 사설시조가 나오게 되었다.

이 사설시조는 서민가사와 개화기가사로 이어지며

오늘날 자유시와 근대시를 태동시키는 큰 단초가 되었다.

19세기 말엽 일제의 압제에 대한 반항을 표현하기 위하여 개화가사와 창가의 형식을 선택하였다.

시 자체라기보다는 정치적,사회적 의도가 더 선명이 선행되었던 시기였고 교훈시로서 육당 최남선이 독보적인 존재였다.20년대 시들은 이런 교훈시에 반발하는 순수한 서정시를 지향하였다.이러한 그들의 지향으로 1919년 3,1절을 시로써 궐기한 시인은 없었다.그만큼 이 시기의 시들은 신시의 이상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서정성과 예술성만을 찾아나섰던 것이다.물론 일제 식민지 무단통치하에서 저항시가 쉽게 나타날 수 없는 실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1910년대 시적 기반이 튼튼하였다면 독립선언서에 비견할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이 분명이 나타났을 것이다.


1919년 문예동인지 창조의 간행과 더불어 폐허(1920),장미촌,백조,금영,영대가

1 년 단위로 간행되고, 많은 작가들이 나오며 우리의 시문학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1950년 6,25전란은 우리 문학의 최악의 상황을 맞아 침체기를 맞았으며

 60년대에 들어서 많은 시집과 신인들이 나오며 본격화 되었다.

비로소 현대시는 이 시기에 이르러 차츰 이론적 실체를 갖기 시작하였다.


 시대의 정점엔 훌륭한 작품과 작가들이 자리하고 있어야 됨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들의 당면과제라면 이제 겨우 첫걸음마를 뗀 '통일문학'이 아닐까 싶다.

작가와 작품은 한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시대와 같이해야만 하는 운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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