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전라 감사에게 답함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25. 10:13

전라 감사에게 답함

 

 


눈보라 치는 추위에 순사또의 건강이 두루 좋으시다니, 구구한 제 마음도 삼가 위안이 됩니다.
전번 서한에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 버리고, 남아 있는 자는 새벽별처럼 드물다.”고 하신 말씀에는 너무도 깊은 슬픔이 뒤얽혀 있었으니,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인지요?
옛날의 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도 물정 모르는 유학자요 서투른 선비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어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능력이 있다고 자처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평일에 진실한 마음으로 옛사람의 글을 읽었고, 급기야 벼슬에 나가 당세에 할 일을 담당하게 되어서는 평탄함과 험난함을 막론하고 다만 옛사람의 글 가운데서 처방을 찾았을 뿐이니, 스스로 힘을 들인 것은 한낱 정성 ‘성(誠)’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서한에서 하신 말씀에, 마치 이 두 분을 보기를 하늘 높이 솟고 땅을 뒤흔드는 특별난 사람으로 여긴 듯하였으니, 이는 어리석은 제가 감사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감사께서는 글 읽은 것이 범중엄과 부필보다 못하지 않을 뿐더러 범중엄과 부필보다 몇 백 년 늦게 태어났으니, 그 좋은 처방이 범중엄과 부필보다 반드시 많을 터입니다. 다만 감히 알지 못할 것은, ‘성’ 자 한 자에 힘을 들이는 것을 옛사람과 같이 할 수 있는지 하는 점입니다.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은 지금의 이른바 수령인데, 옛날의 이른바 ‘재물을 긁어모은다〔聚歛〕’는 책망 역시 귀속시킬 데가 어찌 없겠습니까.맹자는 말하기를,
했는데, 한 고을의 아전들은 곧 한 고을의 거실이요, 각 읍의 수령들은 바로 한 도의 거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법을 지키는 것이요 이와 같이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됨은 오직 저 관리들이 알고 있을 뿐이니, 저들이 비록 눈앞의 위협적인 형구(刑具)를 무서워할지라도 어찌 마음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저 옛 현인들은 거실에 원망을 사지 않았을 터입니다.
지난가을에 태풍 피해가 심한 데도 있고 심하지 않은 데도 있었으니, 이른바 ‘천리까지 같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다만 대령(大嶺) 이남은 노령(蘆嶺) 이북과는 같지 않아서, 나무가 꺾이고 기왓장이 날아가는 일은 있었지만, 수만 그루의 나무들이 울부짖고 사방팔방이 뒤흔들린 건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한창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 영천(永川)에서 경주로 향해 가고 있었는데, 멀리 백리 밖을 바라보니 바다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먹이 번진 것 같았고, 또 무수한 버섯이나 수천수만 개의 수레바퀴와도 같았습니다. 길가는 사람이 멀리 하늘로 오르는 흰 용을 가리키는데, 그 형상은 또한 산언덕 사이에 나무꾼이 다니는 길이 여러 갈래 난 것 같고, 그 색깔은 희지도 검지도 않으며 맑고 밝은 것이 엷은 얼음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비록 이것이 용인지 구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풍력이 거세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내신 편지에 재해를 입지 않은 것을 축하하신 것은 축하가 아닙니다. 바람은 어찌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읍(下邑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서 1000여 리 밖의 대궐로 달려가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뵈었으니, 지극한 영광이었습니다. 본현이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먼저 물으시고, 다음으로 연로의 농작물 형편 및 도내의 백성들 사정이 어떠한지, 지난번에 태풍 피해가 있었는지를 물으셨는데 말씀을 간곡하게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백성들 사정에 대해서는 임자년(1792)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듣고 본 대로 대답하라는 뜻을 간곡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전상(殿上)에는 촛불이 휘황하고 좌우에는 다만 승지와 사관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임금께서 천신(賤臣)을 대우하시는 것이 측근의 신하와 다름이 없었으니, 천신의 직분상 의견을 피력할 자리를 잠시 얻은 이상 오직 숨김없이 다 아뢰어야 마땅할 터인데, 가슴속에 글로 쓰지 않은 만언(萬言)의 상소가 등 위에서 한 섬의 땀으로 모조리 변하고 말았습니다. 소원하고 천한 몸이라 속에 있는 생각을 다 못 아뢴 것은 진실로 그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중엄이나 부필과 같은 분들에 비교하면 또 어떻다 하겠습니까. - 이하 원문 빠짐 -

 

雪寒。巡宣軆履萬勝。伏慰區區。前書所諭逝者九原。存者晨星。纏綿悲惻。何使我淚下也。昔之范富。未甞非迂儒拙士也。其平居何甞以經濟自詡哉。但其平日實心讀古人書。及乎出而當世務。則毋論夷險。只是252_081a尋方於古人書中。自己所費不過一個誠字而已。頃書所敎。有若視此兩公。爲軒天動地底別般人。非愚之所期於使家也。使家讀書。不下范富。而又後范富幾百年。則其良方又多於范富也。但所未敢知者。費得一個字。能如古人否也。古之所謂盜臣。今之所謂守宰也。古之所謂聚斂之責。亦豈無所歸耶。孟子曰。毋得罪於巨室。一邑之吏屬。卽一邑之巨室也。列邑之守宰。卽亦一道之巨室也。如此是守法。如此是非法。惟彼官吏知之。彼雖畏目下之桁威。亦豈無皮裡之陽秋耶。想彼前修。當不得罪於巨室也。頃秋風災。有甚有不甚。所謂千里不同風者是也。但大嶺以南。不似蘆嶺以北。折木飛瓦則有之。而其萬木怒號。八表掀動。何處不然乎。方其風雨時。自永川行向慶州。遙看百里外。海天黑雲如潑墨。更似無數菌芝。千萬車輪。行人遙指。白龍矯矯。其狀更如山隴間樵徑歧出。其色非白非玄。澄瑩如薄氷。雖未識是龍是雲。而伊日風力252_081b之猛可知矣。來書不災之賀非賀也。風者。無乃風耶。自以下邑小吏。千餘里赴闕。獲襯耿光至榮也。俯詢本縣之豐歉。次咨沿路之農形及道內民情如何。向來風災與否。天語諄複。至於道內民情較之壬子。以從所聞見仰對之意。丁寧勤摯。于時殿上玉燭。輝煌左右。惟承史而已。上之所以待賤臣。無異近密。則在賤臣義分。旣借方寸之地。惟當畢陳無隱。而胸中不字萬言疏。背上都化一斛汗。踈賤之蹤。言不盡懷。固其勢也。然其視范富諸公。又何如也


 



 

[주C-001]전라 감사에게 답함 : 이서구(李書九)에게 보낸 답서이다. 이서구는 1793년(정조 17) 8월 전라 감사에 제수되었다.
[주D-001]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 : 송 나라 인종(仁宗 : 1062~1063 재위) 때의 명재상들이다.
[주D-002]옛날의 …… 없겠습니까 : 도신(盜臣)은 관청 창고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대학》에서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백승지가(百乘之家 : 경대부가〈卿大夫家〉)는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聚斂之臣〕’를 기르지 않는다.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신(盜臣)을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중 ‘聚斂之責’이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聚斂之臣’으로 되어 있다.
[주D-003]거실(巨室)에 …… 말라 : 거실은 명문 대가를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임금이 “정치를 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거실(巨室)에 원망을 사지 말아야 한다. 거실이 사모하는 바를 온 나라가 사모하고, 온 나라가 사모하는 바를 천하가 사모한다. 그러므로 덕으로써 교화하는 정치가 성대하게 사해(四海)에 넘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4]천리까지 …… 않는다 :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뇌허편(雷虛篇)에 “천리까지 같은 바람이 불지 않고, 백리까지 같은 우레가 치지 않는다.〔千里不同風 百里不共雷〕”고 하였다.
[주D-005]하읍(下邑)의 수령 : 원문은 ‘下邑小吏’인데 ‘小吏’는 대개 아전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적절치 않다.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고을 수령〔邑宰〕’이란 뜻의 ‘小宰’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6]저는 …… 영광이었습니다 : 연암은 1794년(정조 18) 가을에 차원(差員)으로 상경했을 때 임금의 특명으로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임금은 연암에게도 안의현과 연로의 농사 형편과 도내 백성들의 사정을 간곡하게 물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