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암집서(遯庵集序) 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옛날 나의 선친이 일찍이 암행어사로서 호우(湖右 전라우도(全羅右道)) 지방의 민심을 채방(採訪)할 때에, 영광(靈光)에 사는 양군(梁君) 아무개가 성품이 순근(醇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마치 한(漢) 나라의 삼로(三老)가 농사에 힘쓰면서 효도와 우애를 다진 것과 같았으므로 술과 쇠고기로 위로하고 비단을 주어 장려할 만하다고 하였다.
얼마 후 조정에서 배척을 당해 호남 고을에 보직이 되자 양군이 예전에 은혜를 입었다 하여 따라와 문객(門客)이 되었고, 또 이로 인하여 왕래가 계속되어 한양에 와서도 문객이 되었다. 이때에 선친이 자주 전부(銓部 이조(吏曹))를 맡았으나 매위(靺韋 무부(武夫))와 제상(鞮象 역관(譯官))의 알현은 문전에서 거절하였으며, 심지어 먼 지방의 방기(方技)와 이술(異術)에 밝은 선비나 비록 평소 문장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에 이르러서도 모두 사절하고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었다. 반면에 유독 양군만은 문객이 된 지 수십 년 동안 명성(名聲)이나 세리(勢利) 따위는 서로 잊어버리고 지냈다. 집 남쪽에 무성한 나무 그늘이 뜨락에 반쯤 내려와 덮게 되면 바둑을 여러 판 둘 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손에 책 한 권을 쥐고 저녁 내내 흥얼대면서 거의 기갈(飢渴)도 잊어버리고 형해(形骸)도 내버린 듯이 지냈다. 아마도 우리 집의 청백(淸白)하고 화락한 가풍에 깊이 탄복한 바 있어서 우리와 감고(甘苦)를 같이하여 문객이 된 것을 즐겁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집안의 젊은이들부터 그가 근후(謹厚)한 장자(長者)임을 흠모하여 따랐으며, 아래로는 하인들까지도 그를 공경하여 따를 줄을 알고 그가 문객으로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지낼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그 당시 겨우 더벅머리 어린아이였으므로 그는 유모처럼 나를 안고서 입으로 동서남북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어 주기도 하였다.
아, 양군(梁君)은 생각해 보면 우리 양대(兩代)와 함께 지내며 백발이 된 사람이다. 그는 평소에 공손하여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다가도,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면 마치 강둑이 터져 물이 퀄퀄 내려가듯이 하였으며, 그 밖에 의술, 점술, 천문 역법, 풍수(風水)로 대상을 넓혀 이야기를 하여도 어느 것 하나 모르는 것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적으로 터득하여 심오한 경지로 곧바로 나아갔으며 여러 학자들의 훈고(訓詁)에 구애되지 않은 점은 족히 칭찬할 만하였다. 또한 그의 문장은 속으로는 큰 기상이 들어 있고 겉으로는 호방하여, 글을 매끄럽게 다듬지 않았어도 예스러우면서 순박하고 노숙하면서 힘이 있어 볼 만한 것이 매우 많았다.
지금 그의 아들 아무개가 그 글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하고자 하여, 그 평생의 저술을 수집하여 몇 편(編)으로 정리하였는데 시(詩)와 문(文)이 몇 권(卷)이 된다. 그리고 재주 없는 내가 양대에 걸쳐 세의(世誼)가 있는 집안이라 하여 나의 거친 글을 청하기에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예전에 보고 기억나는 것을 낱낱이 서술하여 돌려보낸다.
[주D-001]한(漢) 나라의 삼로(三老) : 한 나라 때 지방에서 덕행이 있는 장로(長老)를 삼로로 천거하여 향(鄕)에는 향삼로(鄕三老), 현(縣)에는 현삼로(縣三老), 군(郡)에는 군삼로(郡三老)를 두고, 지방관들을 도와 교화(敎化)에 힘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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