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瓛齋 朴珪壽 연구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8. 8. 5. 18:56


瓛齋 朴珪壽 연구


“냉철한 눈으로 시무 살피며, 마음 비우고 고서 읽노라 (冷眼看時務 虛心讀古書)”


저자는 박규수를 통해 19세기의 총체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므로 다양한 분야의 學制間 연구를 시도하였다. 문학연구를 바탕으로 사회사와 사상사 연구의 영역까지 살펴보았고, 한국 근대문학과 근대사상의 原流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로 한문학을 중심으로 한 19세기 문학사뿐 아니라, 燕行을 통한 韓中 문화교류, 양반사대부의 복식제도와 禮論, 천문 수학 등 과학사, 농민항쟁과 三政 개혁책까지 아우르는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서술 면에서도 박규수의 생애와 그 시대상을 충실히 복원하는 傳記的 수법을 구사하였고, 그의 문학작품과 사상적 저술 및 정치활동을 집중 분석하는 경우에는 엄밀한 논문식 문체를 취하였다. 이는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포괄하여 논했던 동아시아의 인문학적 전통과 아울러  敍事와 議論의 交織을 추구한 고전 산문의 작법을 현대적으로 살려보고자 노력한 셈이다.


 案說:본문을 보완하는 주를 달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居家雜服攷』: 사대부가 집에서 입는 각종 평복을 중심으로 고례와 부합하는 이상적인 衣冠제도에 관해 논한 저작물.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도 일컬어질 만큼 농민항쟁이 빈번하게 일어난 시대이다. 1811년 ‘홍경래란’에서 시작하여 1894년 ‘동학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란’이 터져 조선 왕조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농민항쟁의 발전과정에서 전주를 비롯한 삼남 일대를 중심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임술 민란’ 즉 1862년 壬戌年의 농민항쟁은 19세기 초부터 개항 후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한 국지적 농민봉기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서 이 시기를 근대의 기점으로 보는 설이 제기될 정도로 중시되고 있다.


박규수가  경상좌도 암행어사로서 올린 『繡啓』에서 영남이 전국에서 三政의 폐단이 가장 심하다고 보고하면서, 還穀 이무와 가작의 금지, 還總 감소 등의 시급한 개선책을 건의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그 후 박규수가  按覈使로서 진주농민항쟁을 수습한 뒤 올린 「講究方略」에서는 삼정 문제에 대한 원대하고도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정부의 삼정 개혁이 졸속으로 추진되고 보수 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실패로 끝나는 현실을 지켜보아야 했다.
 

주희에 의해 체계화된 송대 성리학은 원대 이후의 중국과 조선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변적인 학풍으로 일정하게 굴절되었고, 근현대의 성리학 연구 또한 그러한 측면을 부각하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국과학사 연구에 의하면, 송대 성리학자들의 천문학설은 서양 천문학에 가장 근접한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명대 이후 서양 천문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秦/漢 이후의 금석 문자 357종을 수집 정리한 『金石文字記』의 서문에서 雇炎武1)(1613~1681)는 금석을 통해 역사서에서 은폐된 사실을 밝히고 애매모호한 점을 드러내며, 빠진 사실을 보충하고, 잘못된 점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고염무의 『金石文字記』는 금석학이 청대에  찬연한 학문으로써 번성하게 하였고  동시에 이 방면의 濫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덕무는 연암의 글씨에 대해 “행서와 小楷로 쓴 그의 得意作은 淸秀 한 자태가 흘러 넘치고 몹시도 기묘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다”고 극찬하였다. 아들 박종채에 의하면 연암의 글씨는 顔眞卿의 筋骨과 趙孟頫의 濃厚, 米芾의 奇崛을 겸했으며 소해와 行草에 모두 뛰어 났다고 한다. 


당대의 뛰어난 서화가이기도 했던 박규수는 서화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고염무의 『日知錄』중 畵論에 공감하여 관념적이고 비사실적인 화풍을 비판하고, 엄밀한 고증과 박학에 입각해서 사실적이고 실용적인 그림을 그릴 것을 주장했다. 南宗 문인화풍이 풍미하던 청조 화단에서 당나라 이전의 사실적 화풍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고염무의 화론은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박규수는 고염무의 화론에 남달리 주목하고, 이에 근거하여 당시 조선의 水墨 山水畵 유행을 비판했던 것이다.


박규수는 북학파의 후예로서 영/정조시대 실학의 성과를 누구보다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세기의 새로운 시대적 여건 속에서 ‘동도서기론의 맹아’로 평가할 수 있는 사상적 발전을 보여준 그 시대의 선각자였다. 수학기에 박규수는 부친 朴宗采(1780~1835)와 外從祖 柳訸(1779~1821), 그리고 戚叔 李正履/李正觀 형제등을 통해 연암의 실학을 전수받을 수 있었으며, 湛軒 洪大容의 손자인 洪良厚와 결교하고 그와 함께 북학파의 燕行전통을 이어가고자 했다. 은둔기에는 영/정조시대의 실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楓石 徐有榘(1764~1845)를 종유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연암의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연암의 선비론, 지원지동설, ‘법고창신’의 문학관과 독특한 문체 등은 수학기의 박규수의 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은둔기의 저작인 『거가잡복고』는 연암의 지론인 ‘의관 제도 개혁론’을 학문적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은둔기와 철종시대에 지은 한시에서도 연암의 문학관이나 연암 시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수학기부터  철종시대에 이르기까지 박규수의 사상과 문학에 지속적으로 연암의 영향이 나타나게 된 것은 , 그가 북학파의 후예임을 자각하고 조부의 실학을 계승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1840년대 말 1850년대 초에 박규수가 쓴 「闢衛新編 評語」1)와 「地勢儀銘」2)에서 그는 동양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 위에서 서양과의 교섭에 진취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의 발상은 고염무의 경세적 학풍, 梅文鼎(1633~1721)3)의 ‘서학중원설’과 魏源(1784~1856)4)의 『해국도지』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기존 학계의 논의에서는 박규수가 제1차 연행을 계기로 실학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발전에서 확인되는 것은 ‘동도서기론의 맹아’로서, 이를 곧바로 개화사상으로 간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점은 박규수의 사상에서 성리학과 尊明의식이 시종 강고한 기반을 이루고 있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의 초기 한시 「鳳韶餘響」과 『尙古圖』는 그가 얼마나 성리학을 신봉하고 강렬한 존명 의식을 품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은둔기 저술인 『거가잡복고』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거가잡복고』에서 제기한 의관 제도 개혁은 연암의 지론과 송시열 등 성리학자들의 주장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철종시대 박규수는 「地勢儀銘」에서 송대 성리학자들의 천문학설을 地圓說의 원류로 간주하고 자신의 地勢儀가 주희의 구상을 계승하여 만든 것으로 자부했다. 이처럼 성리학과 존명의식이 동도서기론적 발상의 한 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박규수의 사상적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환재 박규수 연구"(김명호 지음, 창작과 비평사 간, 2008)를 읽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첨삭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