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김동석 교수의 열하일기 다시 읽기_04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8. 8. 5. 19:05



[김동석 교수의 열하일기 다시 읽기_04] 다시 태어나듯 울었다


명에서 청으로 거대 제국의 이름이 뒤바뀐 지 한 세기 반. 다양한 문화 이민족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분출하고, 커다란 명분 대신 구체적인 실리가 세상을 작동시키기 시작한 대륙 중국으로 조선 최고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이 찾아간다. 당시 중국은 거대한 문명의 용광로로서 동서의 사상이 활발히 교류하고, 기존하는 절대의 관습 대신 상대적인 지식들이 새롭게 모색되던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누군가에 의해 ‘세계 최고의 여행기’에도 비견되는 『열하일기』는 이런 배경 아래서 탄생한 것이었다. 뿐인가, 박지원 유일의 문학적 감수성과 박진감 넘치는 필치는 중국 여행의 한 ‘기록’을 독창적인 문학 ‘작품’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박지원이 ‘조선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기서 ‘열하일기 다시 읽기’를 기획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세계의 질서는 또 다시 재편 중이다. 이 와중에 중국은 과거처럼 천하의 주인공으로 나서고자 힘껏 기지개를 펴고 있다. 『열하일기』로 탐색되던 시절과는 분명 큰 시차가 존재하지만, 한 천재적 작가가 미리 공평한 눈으로 보았고 선견으로 구상해 놓았던, 대륙 중국의 당대 현실과 우리네 실학(북학)의 실체를 재독해 보는 건 남다른 시사점이 있을 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재밌는 이야기다!


소설처럼 재밌는 『열하일기』를 새롭게 재구성해 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연재해 나갈 이는 김동석 교수다. 18세기 외교 사절로 청나라에 파견 다녀온 조선 사신들의 중국 여행기(《연행록》)들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당대 동아시아 문명․문화 교류의 지형을 꾸준히 탐색해 온 연구자다. 근 5년에 걸친 중국 체재 기간 동안 관심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고, 미처 발굴되지 않은 관련 자료들도 다수 구해 왔다.

약 40회로 예정되어 있는 이 원고들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홈페이지, 성균웹진-스큐진성균관대학교 오거서 프로젝트 홈페이지에 동시에 게재되며, 연재를 마치면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편집자_ostrov 註).

 

 




[김동석 교수의 ‘열하일기 다시 읽기’_04]

 



다시 태어나듯 울었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 

 

1780년 음력 7월 8일, 박지원은 생애 처음으로 밟아 보는 타국 땅인 요동평야를 바라보며 벅찬 감회에 잠겼고, 이는 고스란히 『열하일기』의 일기 형태 속에 남아 있다. 이를 ‘호곡장(好哭場)’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풀어 보면, ‘한 번 울고 싶은 곳’이라 할까. 창작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명문장으로 회자되었다. 근래에는 박지원과 같은 반남(潘南) 박씨의 먼 후손이자 개성에도 산 적이 있는 작가 박완서의 글,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잃어버린 가방』, 실천문학사, 2005) 속에서 색다른 의미로 언급되기도 했다.


이 글에서 박완서는 중국 동북지역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함께 간 사람들이 독립군 유적지에 도착해 통곡하거나 압록강을 바라보며 흐느껴 우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작가는 그들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옌지[延吉]의 기차역으로 마중 나온 중국 동포의 격에 넘치는 환영을 받는다. 이때 작가는 “어릴 적 서울에서 고향집에 내려갔다가 올라올 적의 개성 역이 생각났다.”고 말하면서, 기차 창문을 사이에 두고 마중 나온 할머니를 보며 똑같이 여기에 얼굴을 붙이고 울먹거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옌지 기차역의 풍경이 개성과 오가던 옛 시절과 겹치면서 새삼 회상에 잠겨든 것이었다.


개성 역은 작가가 그렇게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엄연히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었고, 가는 길조차 막혀 버렸다. 그런데 바로 이 옌지 역에서 작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어린 시절의 그 공간으로 되돌아온 환상에 사로잡힌다. 옌지 역이 1940∼50년대 정취를 물씬 풍기는 요동 지역의 철도역이었기 때문에 기분은 더욱 그랬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현실을 초월할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그 기차가 움직이고, 여기가 바로 그 시절 그 공간인데, 작가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손에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그래 작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이것이 박완서의 호곡장이다. 작가와 여정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이처럼 저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장소가 달랐다. 압록강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우는 이, 독립군 유적지에서 우는 이도 있었다. 작가는 글의 말미에서 박지원의 호곡장 얘기를 꺼낸다.



나, 이제 다시 태어나니


박지원은 금강산 비로봉과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빛 모래사장 그리고 지금 와 있는 요동평야의 들판이 서서 한바탕 울고 싶은 곳이라고 말한다. 장연은 포구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가 출발하기도 했다. 요동평야는, 박지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해관(山海關)까지 천이백 리나 되는 곳에 산이 하나 없고, 하늘과 땅을 꿰매어 놓은 듯 지평선이 하늘과 하나처럼 붙어 있는 곳이다.

 



# 요동평야, 요동 벌판

 

 

냉정(冷井)이란 곳을 지나 갑자기 눈앞에 탁 트인 벌판이 나타자자 타국에 와 있는 자신이 새삼스러운 듯, 박지원은 격한 감정에 사로 잡혀 한바탕 울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말한다.
“울고 싶은 장소로구나.”
정 진사가 묻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시야가 크게 미치는 요동평야에 와서 갑자기 울고 싶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그렇긴 하지만 아니라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영웅은 잘 울었고, 미인은 눈물이 많았지. 하지만 몇 줄기 소리 없이 옷깃 앞에 굴러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기에 쇠나 돌에서 나는 소리 같이 천지에 가득 찬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1

 

영웅이 ‘잘 운다[善泣]’고 할 수 있는가? 맹자는 순(舜)임금이나 관중(管仲) 같은 인물이 되기까지 하늘은 그 마음속 의지를 고단하게 하고 애를 먹여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고, 능력을 키워서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2 이렇게 탄생한 영웅은 감성이 풍부할 것이다. 고생하며 겪은 마음의 상처들이 무시로 일상에 찾아들어 눈물을 흘리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영웅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거나 극적인 장소에서 감동의 눈물을 쏟는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수이 움직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박지원이 울고 싶은 것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 앞에서 울 줄 아는 영웅[英雄善泣]이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미인[美人多淚]의 그것과 달랐다.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七情) 중에서 슬프기 때문에 우는 것도 아니었다. 박지원과 함께 말을 타고 가던 진사 정각(鄭珏)도 박지원의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왜 울고 싶은지 물어 본다.

 

정 진사가 묻는다.

 

“지금 울고 싶은 요동평야가 저렇게 넓은데, 나도 그대를 따라 한바탕 울고 싶습니다만, 칠정 중에서 찾는다면 느끼는 감정은 어느 것에 닿아 있나요?”
내가 대답한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물어 봐야 하지요.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날 때 느끼는 감정이 칠정 중에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3

 

정 진사의 질문에 박지원은 자신이 울고 싶은 심정을 어린아이에게 비유해 설명하고, 이를 ‘진정한 소리[眞聲]’라 정의한다. 반면 영웅이나 미인이 내는 소리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소리[假做]’라 정의를 내린다. 남을 의식하거니와 그런 눈물에는 어떤 의도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답한다.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 태중에 머물러 캄캄한 혼돈 속에 막히고 감겨 쪼그리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힘차게 솟아나와 손을 펴고 다리를 뻗지만, 마음은 텅 빈 듯 넓어지니 어찌 마음을 다 드러내 진정한 소리 한 번 발설치 않겠는가?”4

박지원이 첫울음 우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요동평야에서 한 번 울고 싶다고 한 것은 스스로가 사회적 존재로서 재탄생함을 의미한다. 

한문으로 사유하고 한문으로 벼슬하던 시절, 북경은 문명의 메카요 세계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또한 지금껏 자신이 닦아왔던 학문의 길을 재확인해 볼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제야 여기에 왔다. 실로 가슴이 벅찼을 터. 산세가 주로 만드는 조선의 풍경과는 다른 요동평야를 대하고, 그는 북경 가는 길을 드디어 실감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박지원이 과거를 포기한 채 포의(布衣)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당시 실세였던 홍국영의 미움을 사 황해도 연암협(燕巖陜)으로 피신해야 했고, 생활은 궁핍해져만 갔다. 홍국영이 실각한 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북경에도 올 수 있었다. 마치 인생처럼 구불구불한 산길을 통과해 탁 트인 요동평야 앞에 섰을 때, 자신을 되돌아보는 감회 역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남다르지 않았을까?5

 

울고 웃고, 울리고 웃기고


이날 정 진사와 여행길을 함께했던 다른 이들이 지목한 호곡장도 있다. 요동평야에 진입하고 나서 박지원이 간 길은 사행단이 택한 길과 달랐다. 노이점과 조선 사신 일행은 신요양(新遼陽)을 거쳐 태자하(太子河)를 건너갔는데, 박지원은 신요양으로 가지 않고 구요양(舊遼陽)에 가서 백탑(白塔)과 광우사(廣祐寺)를 구경하고, 태자하를 건넜다. 구요양은 청나라 이전에 건설되었던 도시였고, 신요양은 누르하치가 구요양을 평정하고 나서 만주족들이 머물도록 건설한 도시이다. 노이점은 성(城)은 크지 않았지만 높고 견고했으며, 사람이 살지는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 백탑. 박지원은 멀리서 이 백탑이 보일 때, 요동평야에서 호곡을 떠올렸다.

 

 

박지원과 함께 구요양으로 간 사람은 조달동(趙達東)과 변래원(卞來源), 정각(鄭珏), 이학령(李鶴㱓), 장복(張福), 북경을 일곱 번이나 다녀온 태복(泰卜)을 포함해 모두 17명에 말 여섯 마리였다. 구요양을 구경하고 나니 오후가 되었고, 태자하를 건너야 사신 일행이 머물고 있는 숙소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박지원 일행이 태자하에 도착하였을 때, 노이점과 사신 일행은 모두 태자하를 건너간 뒤였다. 

박지원이 태자하에 도착해 장복이와 태복이를 시켜 뱃사공을 불러 보았으나, 그들은 애태워 뱃삯을 올려 받을 심사인지 들은 체도 않았다.

다시 태자하로 돌아왔다. 강은 장마로 불어나 배가 없으면 건널 수가 없다. (중략) 천 번 만 번 불러 보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는다. 물가 모래사장에 한참 서 있으니 뜨거운 기운이 찌고 타는 듯하며, 입술이 타고 머리에 땀이 나며 뱃속은 굶주려 허기가 지니, 평생 다니며 구경하기를 좋아하다가 오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정 진사와 동반(同伴)들이 서로 다투어 조롱하고 농담한다.
“해는 지고 길이 막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굶주렸으니, 우는 것밖에는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선생은 왜 참고 울지 않으십니까?”
함께 크게 웃었다.6




# 장마로 강물이 불어난 태자하,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 배로 타고 중국으로 떠나다. 정두언의 『조천록』(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 中에서

이곳 태자하가 바로 정 진사와 그 친구들이 지목하는 호곡장이다. 때는 늦어 박지원과 일행에게 굶주림과 갈증이 찾아오고, 이를 견딜 수 없게 되자 정 진사는 일행 앞에서 박지원을 놀려 댄다. 오전에 박지원이 요동평야를 보고 ‘울고 싶은 장소’라고 한 것에 대한 정 진사 식의 반격인 셈이다. 정 진사는 육체적인 고통이 따르는 울음이란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이거늘 박지원이 울지 않고 있으니, 아침에 들판만 쳐다보고도 울고 싶다고 한 그의 태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노이점의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 사신들과 청나라 관원들이 함께 다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박지원이 구요양으로 구경을 떠나 아직 태자하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노이점은 태자하에서 조선 사신이 강을 건너는 것을 도와주는 청나라 관원이 30여 명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책문(柵門)에서부터 예물을 건네고 함께 온 것이었는데, 어디에 있었는지 잘 알아보지 못하다가 오늘 기어이 태자하 나루터에 청나라 관원들이 다 모였고, 노이점은 그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이들 중에는 영송관(迎送官) 이상아(伊常阿), 통역을 담당한 통관(通官) 쌍림(雙林) 같은 관원과 청나라 갑군(甲軍) 30명이 있었다. 이들은 이동하는 사신의 행차를 외각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글_김동석


속리산을 지척에 둔 충북 보은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수사록 연구―열하일기와 비교의 관점에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열하일기』 비롯해, 18세기 외교 사절로 청나라에 파견 다녀온 조선 사신들의 중국 여행기(《연행록》)들에 주목하며, 당대 동아시아 문명․문화 교류의 지형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오랜 기간 베이징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학자로 있으면서, 아직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대국 중국의 실체를 보고 듣고 느꼈다. 주요 논문으로, 「열하일기의 인물 형상화 수법」, 「수사록과 기타 자료를 통해 읽어 보는 열하일기」,  「조선 후기 연행록의 미학적 특질」, 「일제강점기 때 소개된 연암 저술」 등이 있다. 지금도 한국과 중국 사이 하늘 길과 바닷길을 무시로 넘나든다.

 

 

 

 


 


  1. 이가원 옮김, 『열하일기』,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본, 7월 8일자, “立馬四顧,擧手加額曰: ‘好哭場’, 鄭曰: ‘遇此天地間大眼界, 忽復思哭, 何也?’ 對曰: ‘唯唯否否, 千古英雄善泣, 美人多淚, 然不過數行的無聲眼水, 轉落襟前, 未聞聲滿天地, 若出金石.’”
  2. 『孟子』「告子 下」,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3. 『열하일기』, 같은 책, 7월 8일자, “鄭曰: ‘今此哭場, 如彼其廣, 吾欲從君一慟, 而未知所哭求之七情, 所感何居’, 對曰: ‘問之赤子, 赤子初生, 所感何情.’”
  4. 같은 책, 7월 8일자, “兒胞居胎處, 蒙冥沌塞, 纏糾逼窄, 一朝寥廓, 展手伸脚, 心意空闊, 如何不發出眞聲, 盡情一洩哉, 故當法嬰兒, 聲無假做, 登毗盧絶頂, 望見東海, 可作一場, 行長淵金沙, 可作一場, 今臨遼野, 自此至山海關千二百里間, 四面都無一點山, 如黏膠線縫, 古雨今雲, 只是蒼蒼, 可作一場.”
  5.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0, 75쪽 참조.
  6. 『열하일기』, 같은 책, 7월 8일자, “還至太子河, 河方潦漲, 無船可渡 (중략) 千呼萬喚, 終不回頭, 久立汀沙, 暖氣薰煑, 唇焦頭汗, 膓虛氣餒, 生平喜遊賞, 今日眞得了其債矣. 鄭君輩爭相嘲謔曰: ‘日暮道窮, 上下飢困, 哭之外無他策矣, 先生何爲忍住不哭’, 相與大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