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규수(朴珪壽) 1807 - 1876 》
조선의 문신 개화파 실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字)는 환경(桓卿) 호는 환재(瓛齋)
부(父)는 박종채(朴宗采 1780 - 1834)
모(母)는 전주 유씨(全州 柳氏 1780 - 1834)
배(配)는 연안 이씨(延安 李氏 1808 - 1888)
연암(嚥巖) 지원(趾源)의 손자(孫子) 한양 출신으로 184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랑(正郞)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860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862년 진주민란(晋州民亂)이 일어나자 그 안핵사(按覈使)로 파견 사태수습에 힘썼다.
1864년 병조참판(兵曹參判) 대제학(大提學)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866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미국 상선 셔어먼호가 대동강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 이를 불살랐다.
1873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 오자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수교를 주장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다.
서양 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 개방을 주장했다.
서화에 능했다.
고종(高宗)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시호는 문익(文翼).
비석 : 어사 박규수 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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