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암행어사 박규수의 일지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5. 4. 11:14


암행어사 박규수의 일지 1

 

 

철종이 즉위하자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는 민심을 수습할 목적에서 각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했다. 1850(철종 1) 봄에 각 도에 파견된 암행어사의 면면을 보면, 평안도 청남에 이삼현參鉉, 청북에 김경현敬鉉, 황해도에 신석호申錫禧, 경상우도에 조석여曺錫輿, 경상좌도에 김세호世鎬 등이었다.

 

이들은 임지에서 염찰활동을 한 후 돌아와 각각 서계를 올렸는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들의 서계 내용이 지방수령들에 대한 포상 건의는 한 건도 없고 잘못을 저지른 비리 수령에 대한 처벌만을 건의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러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그런데 이들 암행어사 중 평안도청북어사 김경현과 황해도어사 신석희, 경상우도어사 조석여는 각각 돌아와 서계와 함께 별단도 올렸으나 평안도청남어사 이삼현과 경상좌도어사 김세호는 별단 없이 서계만 올렸다. 종래 불법비리의 원인과 대책 등을 기재한 별단을 올리지 않은 암행어사는 처벌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철종조 이후로 암행어사의 활동이 지방세력들의 불법비리 적발과 처벌 기능으로 한정되어 갔기 때문이다.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1852(철종 3)에 철종은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 해 전국적으로 큰 기근이 들었다. 기근의 발생은 한편으로 지방의 탐관오리들을 날뛰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이 해 철종은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했는데 왕의 지시만 내려 왔을 뿐 실제 큰 효과는 없었다.

 

2년 후에도 가뭄이 극심하자 철종은 기근대책으로 전국에 진휼책을 베푸는 한편, 암행어사를 전국에 파견했다. 전라좌도에 조헌섭, 전라우도에 박인하, 강원도에 강난형, 경상우도에 이종순, 경상좌도 에 박규수 등이 암행어사로 발탁되어 파견되었다.

 

특히 이 당시 암행어사로 파견된 박규수의 활약상은 앞서 신귀조와 더불어 주목을 끈다. 박규수(1807~1877)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 조선 말기 개화사상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1848(헌종 14)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처음 관직에 나간 후 병조정랑, 부안현감, 사헌부장령,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발탁되었다.

 

 

185414일에 암행어사로 임명된 박규수는지난 해의 극심한 가뭄으로 굶주리고 있는 영남 백성의 진휼사업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오라는 왕의 명을 받고 경상좌도로 달려갔다.

 

 

암행어사 박규수는 먼저 영천군 팔공산에 있는 은혜사란 곳에 머물면서 정보를 입수하다가 5월 초 밀양에서 제일 먼저 출도했다. 그는 당시 밀양부사 서유여의 부정을 조사한 후 곧바로 봉고파직했다.

 

그런데 서유여는 박규수의 친구인 서승보의 부친이었다. 이 일로 서승보가 박규수에게 절교선언을 했는데 이 때문에 박규수는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당시 서유여는 24천여 석에 달하는 환곡을 포탈하고 13천냥도 포탈한 혐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박규수로서는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청도를 거쳐 6월 초 경주에 도착한 암행어사 박규수는 여기서도 재결(災結, 재해로 인해 면세혜택을 받게 된 농지)을 나누어 주지 않고 환곡이 문란하다는 여론을 접했다. 조사 결과 경주부윤 남성교가 6천여 냥을 착복하는 등 부정을 저질렀음이 밝혀졌다. 이에 박규수

 

는 남성교를 봉고파직했다. 경주를 떠나 월성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고을을 정탐한 박규수는 무려 4천 리를 달리며 민정에 귀를 기울이면서 암행어사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돌아왔다.

 

돌아온 박규수는 먼저 철종을 뵙고 전 경주부윤 남성교를 비롯한 수령들의 죄상을 낱낱이 보고했다. 이후 별단을 제출하여 당시 지방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외에도 박규수는 15가지에 걸쳐 암행지에서 벌어진 각종 폐단을 소상하게 보고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암행어사들의 별단에는 부패상황만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박규수의 보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창기에 실렸던 선정을 베푼 수령에 대한 내용은 점점 줄어만 간 것이다. 암행어사의 적발 건수에 비례하여 조선 말기에 부패가 더욱 만연되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다음은 박규수가 제출한 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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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결의 조사와 배분에서 온갖 농간이 발생하는 것은 전제田制가 문란한 때문이다. 가장 시급한 정책은 오로지 양전을 다시 하는 일이다. 양전이 어렵다면 수령이 직접 토지장부를 조사하고 점검해야 한다.

 

2. 이무移貿란 환곡이 많은 고을에서 환곡 일부를 돈으로 바꾸어 환곡이 부족한 고을로 이송하게 한 조치였다. 그러나 지역별 곡가 차이를 이용하여 환곡을 사고팔아 차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대소 관원이 온갖 구실로 부정을 행하니 큰 폐단이 되었다. 그 폐단의 근본 원인은 환곡을 상정가가 아니고 시가로 돈을 내게 하는 것에 있다.

 

3. 의성현에서는 환곡의 극심한 폐단을 바로잡고자 호환戶還을 폐하고 결환結還을 시행했다. 그런데 창리들은 전년에 걷지 못한 환곡을 구환舊還이란 명칭으로 새해에 추가로 분급했다. 반면, 뇌물을 받고 부자들은 분급대상에서 빼주었다. 그 결과 실제로 환곡을 분급받은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도 부자는 면제되고 빈민만 환곡을 바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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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기록

1854(철종 5) 경상좌도 암행어사 박규수의 서계(書啓)

 

 

박규수는 경상좌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1854(철종 5)에 경상좌도의 대구, 경주, 안동, 울산, 밀양, 동래 등지를 다녀와 서계를 바쳤으며, 각 추생지역의 전현직 수령들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올렸다. 그후 왕은 희정당으로 박규수를 불러 수령들의 다스림과 환곡의 폐해, 농사 형편 등에 관하여 자세히 물었다.

 

 

 

 

 

(임금께서) 경상좌도 암행어사인 박규수(朴珪壽)를 불러 희정당(熙政堂)에서 만났는데, 암행 결과를 듣기 위함이었다.

내가 말했다. “별탈없이 잘 다녀왔는가?”

규수가 말했다. “왕조의 위엄이 미치는 곳이니 아무 일 없이 갔다 왔습니다.”라 하였다.

내가 말했다. “감사, 수령들의 다스리는 것은 어떠했는가?”

규수가 말했다. “정치 득실의 큰 사항에 관계된 것은 제가 올린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에 이미 논하였고, 자잘한 실수는 적발하여 다스리니 아전무리들이 경계하고 조심스레 생각하였습니다. 대개 지방을 다스리는 신하들이 나랏일에 힘쓰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때는 일의 진행사항에 얽매여서 자주 임시 동안에 맞는 정치를 실행합니다. 법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것 때문에 습관이 어그러져서, 관가 일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이익대로 하여 구차하게 인습을 따르니, 곳곳이 모두 그렇습니다. 다만 수령, 감사만이 이러한 일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올린 별단에는 상세한 사정을 올렸는데, 환곡의 폐해 이 한 가지만은 가장 매우 심합니다.”

내가 말했다. “환곡의 폐단은 영남지역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이 그러하다.”

규수가 말했다. “제가 일찍이 옥당(玉堂)의 경연 자리에서 문장의 뜻을 상세하게 서술할 때에 백성들이 아프고 괴로운 것에 이르면 위에서부터 깊은 밤 촛불을 키셨으니, 환곡 폐단의 절박함은 백성들의 깊은 곳에 사무쳤으니, 저는 공경하여 우러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별단에 올린 여러 조목들은 (제가) 분수 넘는 일임을 생각지 못하여 힘써 실상을 정리하여 펼친 것이니, 자세히 보신다면 여러 가지 폐단의 원인을 통찰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의성(義城), 밀양(密陽)과 같은 곳은 환곡이 폐단이 극심한 곳입니다. 의성(義城) 환곡의 폐단은 애당초 곡식 한 톨도 나누어주지 않으면서 매년 가을 조세를 거둘 때에는 상관없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아침 저녁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애당초 나누어주지도 않았으면서 백성들에게 조세를 거둔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규수가 말했다. “이 때문에 제가 해당된 읍을 돌아다닐 때에 크고 작은 백성들이 뜰에 모여 호소하며 모두들 환곡의 폐해를 없애달라 했고, 일이 떠들썩하고 몹시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대개 백성들의 마음은 어사의 직분이 되는 것이니, 역시 그들의 편의에 따라서 처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이 어지러운 하소연이 있어서 그 실정은 정말로 불쌍하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양에 있었을 때 이미 이 고을에 이러한 폐단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상세히 탐구하고 살펴보니, 이 고을은 10년 전부터 호환(戶還 : 한 집에 부여하는 환곡)을 바꾸고 결환(結還 : 환곡을 다시 받는 것)을 실행하고, 곳간 아전들은 자신의 곡식을 대신 나누니 (아전들이 개인적으로 쌀로 고리대업 하는 것) 가장 큰 폐해입니다. 만약에 한 결을 열 섬으로 나누면 아전들이 방환(防還)한 돈을 먹고는 다섯 명을 뽑아버리며, 원래의 총액은 작년에 납부하지 않은 사람이 장부에서 빼내어서 폐단을 숨기고 있으니 이것은 공문서를 조작하는 것으로 바로 간특한 일을 하는 바탕입니다. 그리고 신ㆍ구 창고관리들이 빈 장부를 전하고 관리하니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날조된 문서들을 모두 모아 불살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였습니다.”

 

 

내가 말했다. “빈 장부를 불사른 것은 참으로 잘한 처사이다.”

〔〔규수가 말했다. “제가 앞에서 여러 백성들에게 알리기를 성스러운 임금께서 상할까 보살펴주는 은혜는 반드시 (너희에게) 혜택이 있을 것이니 은택이 끝까지 미치는 날에는 마땅히 이 고을의 민심을 돌아가서 올릴 것이다. 너희는 각자 안심하고 돌아가 기다리도록 하여라.’하니, 그제서야 여러 백성들이 물러났습니다. 조정의 품처(稟處 : 어떤 사건에 대한 일련의 조치)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해당 고을의 백성들이 구제해 주는 은택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쁜 쌀을 주고 나서 좋은 쌀로 세금을 받는 것도 백성을 괴롭히는 정치가 되는데 하물며 나누어준 적도 없는데 이유 없이 거두는 데 있어서랴!”

규수가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전무후무한 폐단입니다. (: 장계)에서는 밀양(密陽) 조유전(漕留錢 : 조창에서 모아진 돈)을 곡식으로 바꾼 폐단은 역시 별단에 조목(條目)으로 나열하였고, 모두 축날 것을 채운다는 구실의 곡식이며 관가에서는 한 읍의 환곡으로 거두어들여 조창(漕倉)에 섞어서 환곡이라 하고, 아전과 관노무리들은 의탁하거나 생계방편이 없고, 이 때문에 포흠(逋欠 : 환곡 쌀에서 썩거나 변질되어서 원래 환곡에서 비게 되는 부분)이 생겨서, 거의 고을 실상이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고을 부사인 정해상(鄭海尙)이 종합적으로 살피고 다스리지만, 실제로는 좋은 관리가 새로 부임한 다음입니다. 제가 권면하는 위치에 있어 성실한 마음으로 임금의 명을 대하여 펼치니, 폐단이 극도한 곳에 다다라서 손쓸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근심을 나누는 뜻으로 다시 권면하는 위치가 되어서(암행어사가 되어서) 해당 고을 일의 형편에 이런 좋은 관리를 만났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제가 도중에 이 관리가 바뀐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이 고을 백성들은 좋은 관리를 잃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두 고을의 폐단이 참으로 걱정되던가?”

규수가 말했다. “환곡 거둘 때 바꾸고 교역하는 것(환곡으로 관아에서 쌀값이 싼 고을에 가서 쌀을 사오고 비싼 가격으로 되파는 것)은 참으로 온갖 폐단의 빌미가 됩니다. 별단에 나열한 것을 밝게 살펴주시길 바라오며, 동래부(東萊府)의 대출이 허여된 돈과 동래의 관무미(官貿米 : 관가에서 무역하는 쌀)와 표미(標米)등은 더욱 놀라움이 큰 일입니다. 관무미(官貿米)와 표미(標米)의 일은 거의 변방의 시정에 관계된 것이어서 따로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더욱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각 고을의 창고의 저축된 쌀은 매번 아랫사람들에게 지워지고 감영의 돈을 빌어 쌀을 교역하고 쓰임을 나눕니다. 다음해에 지방관아에 바친 쌀 중에 돈으로 바꾸어 이익을 취하여 감영의 돈에 보태고, 그 나머지는 관가에 취하여 사용하니, 이것이 해당 고을 창고의 폐습입니다. 관찰사는 또 이 때문에 빌려서, 이 돈을 믿고 환곡을 행하고, 감영과 고을 사이에 서로 이익을 취하는 것이 심하여 이미 좋지도 않습니다. 또 돈을 왜놈에게 주어 줄 곡식을 사들이니 먼저 영수증을 받고 다음 봄에 지방에 바치는 곡식 중에서 곡식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이익을 취하니, 이것이 더욱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 큰 것을 신이 별단(別單)에 상세하게 조목으로 아뢰었으니, 자세히 보아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마땅히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규수가 말했다. “제가 암행을 갈 때 주신 편지 중에 봉화(奉化)의 흉서(凶書)와 죄인의 종적을 매우 유념하라고 명하셨는데 가고 오는 일년 동안 끝내 (왕명에)대하여 받드는 사람은 없었으니, 황송할 뿐입니다.”

내가 말했다. “왜인의 거처에서 돈을 내어 대신 바친다 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도다.”

 

 

규수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비록 작은 이익을 탐낸다고 하지만, 그들이 엿보고 중요한 것을 계략이 깊은 것은 마땅히 어찌해야 하는지요?”

내가 말했다. “본도(경상도) 농사 상황은 어떻던가?”

규수가 말했다. “큰 흉년 후에 금년에는 비와 햇살이 맞아 모든 곡식이 함께 여물었지만, 상도의 안동(安東), 예천(醴泉), 영천(榮川) 등은 제법 홍수와 무너지는 걱정이 많았으며, 하도의 강을 따라선 마을들도 역시 무너져 내린 곳이 있었지만, 이러한 재난은 입지 않았으니, 대체로 풍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상좌도 암행어사인 박규수가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올렸다. 서계는 다음과 같다.

 

서계(書啓)

감사 이학성(監司 李學性)입니다. 무리를 받아들이고 사건을 처리하면서 본시 아름다운 심량(심성)에서 나왔습니다.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고 급한 일을 다스리는 것은 나머지 일에 불과합니다. (사건의) 국면에 나가서 여론을 더욱 중요시하니 (백성들이) 믿고 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부임 후의 한두 가지 조처는 처음 시행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보통 사무와 같은 일에 대해 감사에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 감사(前監司) 조석우(曺錫雨)입니다. 계축년(1853) 획하재(劃下? : 계획된 재결)44,400결령인데 표준 배급 외에 해당 관찰사(조석우)4,081결령을 더하여 나누어주며, 재결(?: 재해를 입은 논밭의 결수)에서 더한 조세는 각 고을에서 나누어 징수하였습니다. 서원(書員 : 아전의 하나로 서리보다 격이 낮음)들의 행적은 은혜를 파는 것을 넘어 끝까지 떠넘겨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니, 신녕(新寧), 현풍(玄風), 진주(晋州)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징재(査徵? : 조사하여 걷은 재결)는 합하여 383결령입니다. 어떤 경우는 결수로써 구획하고, 어떤 때는 돈으로 조치를 하며, 어떤 경우는 다른 읍에서 조세 감면한 것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어떤 경우는 그 읍의 진휼한 것 중에서 부족한 것을 채웁니다. 어떤 경우는 지방관아에 바치는 쌀에서 가격을 깎은 것에서 보충합니다. 지방관아에 바치는 쌀 가격을 깎아 내는 것은 따로 사실이 있으니, 아래 글에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비안(比安 : 지명) 재결은 644결령인데 마련하여 실지로 면제한 것은 462결령이고 면제하지 않은 것이 682결입니다. 그 가운데에 174결령은 경산(慶山) 개장(?: 개략적으로 적은 상황)에 더하여 기록하였으며, 가격으로 바꾸면 1,830냥령이며 759부는 다시 신녕현(新寧縣)의 자수결(自首結) 중에서 가격을 정한 것이 7978푼이니, 두 고을의 돈을 합치면 1,911냥인데 이것으로 대신 납부했습니다. 손실된 결수는 옮길 수 없는 것이고, 조세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인데도, 임시로 변통하니, 모두 조목 밖의 일입니다. 금년 동래부(東萊府)에 바친 쌀은 모두 21,982석령이며,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9.961석령입니다. 하납미(下納米 : 정부에 바치지 않고 지방관아에 바치는 쌀) 형태로 받은 것이 12.020석령인데 작전조(作錢條 : 세금을 곡물대신에 돈으로 환산해서 내는 것에 대한 조목)에서는 매 섬당 92전으로 가격이 결정되었습니다. 본색조(本色條 : 쌀의 형태로 받는 조목)에서는 80석인데 해당 관찰사(조석우)와 훈도(訓導 :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 군현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정9품의 벼슬)에게 각 4.000석으로 나누어서 별도로 팔며, 동시에 각종 형태의 공적인 재물을 바꾸고 취하며 수송하여서 각 고을로 분배하여 돈으로 대신하여 세금을 거두고는 다시 원래 가격으로 보충합니다. 돈으로 내는 전세의 결정된 가격으로 볼 때 매 섬마다 14전이 적으며 어떤 때는 17전이나 됩니다.

 

 

이에 따라 지방 관아로 내는 쌀과 돈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가격을 깎고, 깎인 조세가6.776냥령이니, 각 읍 사징전(査徵錢 : 관리들이 물품을 조사하여 물려받는 돈)의 결정된 가격과 국가 소유의 무명으로 따로 교역하여 남긴 이윤 등의 돈으로 보충합니다. 국가 무명을 따로 교역하는 것은 한 해 계획된 양이 665동량 중에 40동인데, 해당 관찰사는 다시 따로 무역하여서 돈으로 바꾸어 세금을 거둔 것이 7.405냥령인데 이 중에 5.236냥령이 다시 본래의 가격을 채웁니다. 이윤 2.169냥은 지방 관아로 보내는 쌀에 채우서 보고하고, 거래한 쌀과 무명의 깎인 가격의 항목은 대신 납부할 때에는 여기저기에서 모자라고 남는 것의 차이는 자연히 많게 됩니다. 좌우에서 겨우 얻어서 끌어다가 메우고 미봉책으로 비용을 모아둡니다. 마음씀씀이가 이와 같아 절실한 정치는 사건의 논의를 옆에서만 듣는 것으로는 모두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봄 구휼 물자 중에 관찰사가 따로 비축한 곡식은 8.264석령이고 여러 가지 장부를 살펴보면 5.597석령이며 가격은 6.760냥령입니다. 동래부(東萊府)에서 대출이 허락된 쌀로 돈으로 바꾸어 이자를 챙긴 것은 1.602석령이고, 대구(大邱)에서는 이익으로 챙긴 벼에서 1.064석을 계획하고 산남 창고에 쌓아놓았습니다. 갚아야 할 쌀은 매년 계획을 했으니, 이른바 동래부(東萊府)의 빌려준 쌀과 세금으로 받은 돈은 고을을 운영하는 데 관련이 있고, 급급히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이 됩니다. 제가 별단(別單)에 논하여 펼쳐놓았습니다. 계축년에는 각종 곡식의 가분모(加分耗 : 환곡에서 창고 손실부분으로 1/10을 첨가해서 받는 곡식)와 작전(作錢 : 田稅를 받을 때 쌀[], [], [] 대신에 값을 쳐서 돈으로 내게 하는 일)27.390냥령이 되고, 갑인년에는 보리 환곡할 때는 가분모, 작전이 3.325냥령이니, 합쳐서 68.682냥령이며, 그 안에 6.760냥령이 구휼 물자로 쓰고, 별도의 경비가 동래부(東萊府)에서 대출되고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아랫사람들에게 쓰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사사로이 쓰일 수밖에 없고, 책을 간행하는 데 보태는 쌀은 돈으로 환산하면 1.308냥인데, 서주지(西州集)을 발행하는 일에 쓰였습니다. 서주(西州)는 바로 그 고조이며, 옛날 참의였던 하봉(夏峰)의 문집입니다. 여러 고을, 사원에 간행하여 펼쳤는데 그 책 가운데에 계유봉문(癸酉峰文)”이라는 한 편의 글은 문자가 모두 성과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수수께끼같이 숨기고 감추어 비유함이 심합니다. 임금의 교화를 받들고 덕화를 펴는 위치(관찰사의 직책)에 있으면서 이러한 글을 간행하고 펼치니, 한 길로 향하게 하려고 하여도 다시 더욱 그르치게 되니, 그 유독(流毒 : 독이 흐르는 것)이 끝이 없고, 끝내는 의리를 뒤집고 엎어뜨리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대체로 세상이 변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전 감사(前監司) 홍설모(洪說模)입니다. 정치와 교령(敎令)의 득실은 본래 평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임자년(1852) 가을에 각종 곡식을 시가에 따라 돈으로 세금을 받고 가분모(加分耗 : 환곡의 加分 부분에서 받아들인 耗穀)와 여자 종이 내는 곡식을 달마다 일정하게 받아서 이윤을 챙겼습니다. 동래부(東萊府)서 허여된 대출미와 각 진영에서 미리 계획한 쌀과 작전(作錢 : 돈으로 바꾼 것)으로 이익을 챙긴 것이 모두 60.085냥령인데, 공적인 용도로 따로 쓴 적은 없고, 모두 사사로운 계획으로 쓰였습니다. 진영을 운영하기 위한 돈을 곡식으로 바꾸어 이윤을 냈습니다. 달마다 일정하게 내어 항상 창고에 비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 관리가 돌아갈 때 구별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바뀔 때의 조화로움은 꼭 해주겠다는 허락에 어긋나며, 급히 개인의 씀씀이에 보태니 예의와 겸손에 어그러집니다.

 

 

 

통제사(統制使) 이규철(李圭徹)입니다. 분명한 것이 없고 돌아보거나 거리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이어져 뇌물의 길을 크게 열어놓아 장교나 병사나 제멋대로 해서 잘사는 사람들이 침범함을 당하고, 옛날 송사가 번복되며, 죄 없는 사람들에게 날조하여 죄를 덮고, 감옥이 점점 꽉 차고, 세금을 내라 독촉하는 일이 낭자합니다. 거제도 백성인 정대손(鄭大孫), 이학인(李學仁)과 창원(昌原) 사람 송성민(宋性民) 이들 모두가 억지로 걸어 강제로 징수당한 사람들 중에서도 두드러진 사람입니다. 입에는 원성이, 귀에는 지저분한 소리뿐입니다. 전 통제사(前統制使) 이응서(李應緖)가 바뀌어 돌아갈 때에 각종 군대창고의 돈, 무명, 비단이 비어 있었던 것들이 거의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해당 장수(이응서)가 진영에 도착하였을 때는 고갈되어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방리(吏房吏)와 회계리(會計吏 : 회계 담당 아전)의 처소에 돈을 준 것이 10.000여 냥 정도였고, 여러 의견이 한 진영에 떠들썩하게 끓어올랐습니다. 군대의 규율이 있는 것이니, 같이 엄한 법률로 처리하십시오.

 

좌병사(左兵使) 이남식(李南軾)입니다. 가을에 조세 걷는 일이 끝나지 않았으나 이룬 성과가 없고 감사가 일을 살피는 날에도 마땅히 청하여 뵙는 예절이 있는데도 예의에 어긋나게 끝내고자 병을 핑계했으니 고루하여 우습고, 조정의 근본에 손상됨이 있습니다.

전 병사(前兵使) 이근영(李根永)입니다. 처음 부임했을 때 칭찬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지만, 창고관리가 돈을 갖고 농간을 부리고 진휼하는 관리들이 벼를 도둑질했건만, 단속하지 못한 실수가 있고, 비장(裨將)들의 폐단을 일으킨 사항이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좌수사(左水使) 윤수봉(尹守鳳)입니다. 피폐했을 때에 처음 부임하여서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 수사(前水使) 양선수(梁宣洙)입니다. 은혜와 위의(威儀)가 같이 펼쳐져서 군민들이 원망함이 없습니다.

 

중군(中軍) 0(0)입니다. 세금을 걷을 때 혹독히 매를 쳐서 원망을 받습니다.

전 중군(前中軍) 조화진(曺華鎭)입니다. 굳이 거슬러서 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좌병우후(左兵虞候) 이응권(李應權)입니다. 일찍이 이웃 군의 칭찬이 있었고, 또 부하들에게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전 우후(前虞候) 조만혁(趙萬赫)입니다. 뇌물을 많이 받았고, 빚에 관련한 소송이 끊이지 않았으머, 마침내 진영에서 해결하고 그 백성에게 부치지 않았습니다. 비록 병사(兵使)가 금지하는 것이었지만, 끝내 허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좌수우후(左水虞候) 허곤(?)입니다. 큰 실수가 없으니 심한 논의는 하지 않겠습니다.

전 우후(前虞候) 장도상(張度相)입니다. 매달 군사들은 잘 먹었고, 기간에 다다라서 다른 물건으로 대신합니다.

 

대구 영장(大邱營將) 이종긍(李鍾兢)입니다. 백성들의 존경이 두텁고, 아전을 다스리는 데 뛰어납니다.

 

경주 영장(慶州營將) 구영순(具永淳)입니다. 장교 포졸들이 엄한 것을 꺼리고, 마을에서 경계함이 적어서 진영 안의 무리를 진휼하며, 술주정하는 사람을 적발하니, 진영이 고요하며 사방 경계가 편안한 듯합니다.

전 영장(前營將) 이희수(李熙洙)입니다. 돈을 받아 속죄시킨 것이 가장 많고 뇌물을 받은 것도 적지 않습니다. 남을 해치고 빼앗아서 쌓은 돈은 돌려 나누어주지 않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그치지 않고, 스스럼없이 뺏고 취하고 탐욕스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안동 영장(安東營將) 구항(具沆)입니다. 간교한 장교와 포악한 나졸들이 무고한 사람을 이유 없이 추궁하고 촉급히 해서 공갈을 행하며 돈이나 물건을 억지로 요구하니 원망과 헐뜯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순흥 출신 박종원(朴宗元)은 병영에서 관문을 잡고 있는데, (사람을) 진영에 구금하고는 복수하는 것을 막고, 800냥의 돈을 요구했으며, 문과 누각을 다시 짓는다 빙자해서 마을의 공공자산인 늪을 팔아서 굶주린 백성을 부리고 어린 묘를 손상된 상태로 받으니, 일이 심하여 매우 걱정입니다. 수확하는 백성들을 몰아 다니는 배를 얽매고, 시골집과 들에 있는 가게는 아래 무리들이 강제로 세금을 걷습니다. 이중세(李仲世) 등에게서 강제로 세금을 걷어 처리한 것은 일일이 들 수 없습니다. 탐욕스럽고 비루한 것이 끝이 없습니다. 모두 엄격히 살피십시오.

 

경주 부윤(慶州府尹) 박종휴(朴宗休)입니다. 반년간 정책을 펴면서 한결같이 (임금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전 부윤(前府尹) 남성교(南性敎)입니다. 경주지역의 표재(俵災 : 흉년에 조세를 감하는 일)2.695결령 안에서 백성들에게 166결령을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애당초 나누어주지도 않았습니다. 계축년(1853)에는 조세의 이익와 무역한 쌀을 나누어준 것 외에도 이윤과 이자에 붙은 쌀이 모두 3.357냥령입니다. 이러한 행적이 있어서 여러 사람의 입을 가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을 가려내고, 곡물이 해쳐지는지는 모두 (부윤이) 꼼꼼히 살펴야 되는 항목은 아니지만, 끝내 태만하고 흐릿하게 하며,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변고도 끝내버리고 모두 조사하려 하지 않고, 살인한 옥사를 숨기니, 이렇게 중요한 일에서의 온갖 병폐는 치료하기가 어렵고, 모든 폐단이 생겨납니다. 관아의 손님과 마을의 자식들이 재물을 얽매며, 통인(通引 : 지방관아의 官長 앞에서 딸리어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니 힘있는 장교들과 결탁하니 아전들이 바뀔 때도 거의 일정치 않습니다. 향임(鄕任)이 교체될 때도 서로 (자리만) 이어가니, 관가의 쌀이 모두 빈 쭉정이가 되었습니다. 창고 관리들은 모두 숲으로 도망가고 윗사람 아랫사람들이 서로 (백성에게) 세금을 걷어 크고 작은 일이 모두 병들었습니다. 공적인 일로 가격을 결정할 때에 해당 관리들의 처소에 거두는 돈, 각 읍 창고관리 처소들에서 세금 받은 것, 상납 등의 일의 가격을 결정할 때 해당 아전들의 처소에서 받은 세금, 이전 관리와 교체할 때에 받는 세금, 이전 향임이 교체할 때에 받는 세금, 각 방면의 임장(任掌 :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과 백성들의 송사와 뇌물의 수는 모두 다 거론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환곡으로 챙긴 이익은 (일정하게) 돌아가는 곳이 없기 때문에, 재결(災結)은 결정된 가격으로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관리들이 이익을 나눈 행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챙긴 것은 6.027냥이며 장부를 조사한 나머지는 이미 창고에 봉해놓았습니다. 그들의 죄상을 관리에게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안동 부사(安東府使) 김응균(金應均)입니다. 마음을 다해 구휼하는 정치를 했으니 가장 내실 있는 성과를 내었습니다.

 

대구 판관(大邱判官) 김기순(金夔淳)입니다. 수만 꾸러미의 공적 재화를 세금으로 거두었지만, 백성들의 떠들어대는 말이 없었고, 일천 움큼의 진휼미로 보태어 충당했고, 판별하여 갖춘 장부가 있어 공적을 이룰 것을 기대할 수 있고, 백성들의 위안이 됩니다.

 

 

전 판관(前判官) 심영택(沈英澤)입니다. 고을 행정에 있어서는 거의 과실이 없어 달리 의논할 것은 없습니다만, 민간에서 지내는 제사의 책임을 알지 못하며, 진휼하여 구원하는 정치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탐욕하지 않으면 인색하고 지나치지 않았다면 어리석은 것이니, 그 읍의 손실된 결수를 관찰사가 이미 알고 있어 밝혀서 결수를 파악하고 면제하는 절차를 맡기지 못합니다. 진영과 영읍의 교리(校吏)들에게 모여서 실행하고 환곡을 걷고 진휼의 정치도 또한 스스로 감영에서 구별하여 마련하고 수수방관하면서 모두 밝혀 단속하지 못하고 일임하여 내버려두고, 관가 노비와 사령의 복식이 자기 말을 잘 따르는 것을 제일의 정치 과제라 생각하고 세금을 거두는 것이 거의 없어 곤장과 회초리가 따릅니다. 넉넉한 상인에게 억지로 맡겨서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합니다. 흉년에는 백성들이 많은 송사가 있는데, 일의 상황은 애당초 구별하지도 않고, 다만 형방에게 의례적인 판결문을 쓰게 하고, 임의로 베껴 조정합니다. 원통한 백성들이 소장을 들고 방황하고, 어떤 사람은 옷을 바꿔 입고 관문에 홀로 서 있고, 어떤 사람은 급히 짐을 꾸려서 성에 올라 서성입니다. 호장(戶長)이 사는 곳을 보면, 동화사에서 복을 빌며 부처에게 절이나 하니, 아전들은 비웃고, 스님들도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비용을 쓸 때 절제하는 것이 없고, 관아의 재물은 모두 녹아들며, 나누어주는 것은 일정한 기한이 없고, 창고의 곡식은 모두 비게 됩니다. 이방이 까닭 없이 들어와서는 관아에서 쓰는 돈 5.000냥을 들고 가며, 또 하루아침에 세금을 다그쳐서 받아낸 것이 6.000냥입니다. 맹렬한 곤장으로 직책을 바꾸며, 뇌물을 받은 것이 3.000냥이고, 문선호(文善鎬)를 뽑으면서 다그쳐 받은 돈이 6,000냥이며, (발설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습니다. 관리를 임용할 때 받은 뇌물이 1.100냥이고 상정가(詳定價 : 조사해서 결정된 가격)에서 돈으로 바꾸어 이끌어서 쓴 돈이 500냥이며, 도시영전(都試營錢 : 도시를 볼 때에 쓰이는 돈, 都試는 시험의 일종)570여 냥이며, 둔세전(屯稅錢 : 군대가 머무르면서 농사지은 땅에서 나오는 돈, 또는 그 세금)을 남용한 것이 143냥이며, 다른 고을과 장사를 해서 남긴 돈이 3000냥인데, 모두 가져다 썼습니다. 자리에 있은 지 겨우 반년 반에 공사가 모두 어지러워졌습니다. 이미 창고를 봉하였습니다. 그 죄상이니, 관리를 시켜서 처리하게 하십시오.

전 판관(前判官) 이장오(李章五)입니다. 장부를 조사하고 난 후의 1만 금 이외로 아래에 더한 것이 나머지가 3.000냥인데, 환곡으로 뽑아서 나누어주었습니다. 단속하는 것이 한 번 허물어지니, 창고 관리 무리들의 간특함이 커졌고, 이방이 포흠(逋欠 : 환곡에서 변질되는 부분)에 관계되고, 이노(吏奴 : 아전과 그 노비들)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포흠하니, 이 아주 좋았던 상태가 갑자기 회복이 어려운 고질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김기순(金琦淳)입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칭찬이나 헐뜯는 소문이 없습니다.

전 부사(前府使) 이용재(李容在)입니다. 궁핍한 곳에 진휼하는 뜻을 품었고, 어리석은 습속을 타파하려는 총명함이 있어서, 빨리 벼슬길이 열려서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전 전 부사(前前府使) 정기락(鄭基洛)입니다. 조처함에 어떤 때는 경솔히 하여 실수하는 경우가 있고 총명하지만 편애하는 데에 가리는 때가 있습니다. 민도감(民都監)이 재결(災結)을 많이 책정해서 한산(韓山) 아전이 올 곳을 이미 조사했다고 하더라도 관가에서 헐뜯는 말은 면하지 못합니다.

 

영해 부사(寧海府使) 권대철(權大徹)입니다. 쇄마전(刷馬錢 : 지방에서 갖추었던 관용 말에 붙이는 세금)을 깎아주었고, 봉록을 덜어서 진휼미에 보태었으니 모두 처음 정치하는 마음과 연결되며 이미 여러 사람이 칭찬하는 것에 흡족합니다.

 

 

전 부사(前府使) 권영하(權泳夏)입니다.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상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 전 부사(前前府使) 조기형(趙基亨)입니다. 고을 관리들이 창고를 여는 것은 볼 수 없고, 다만 용맹한 사자만을 마을로 보낸다는 소문만 들립니다. 출납을 엄격히 해서 아이와 약한 사람들이 모두 매를 맞고 물건을 거두어 받아들이는 것은 끝내 창고로 가지 않습니다. 수석 아전들이 쉴새없이 바뀌고 빚에 관한 소송이 여기저기 그물처럼 펼쳐지며, 겸인(?: 시종드는 하인)이 뇌물을 받으니 직무의 우두머리들이 원망을 받습니다.

 

밀양 부사(密陽府使) 정노용(鄭老容)입니다.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전 부사(前府使) 정해상(鄭海尙)입니다. 이룬 공이 최고로 나타나며 오랫동안 부임하여 실제의 효과를 책무로 여겼습니다. 서로 바꾸어야 할 때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매우 개탄하고 아쉬워하였습니다.

전 전 부사(前前府使) 서유가(徐有?)입니다. 본 읍의 환곡은 보리과 벼가 쌀과 콩보다 많으면 색락(色落 : 세곡이나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 간색과 낙정으로 인하여 축날 것을 채운다는 구실로 덧붙여 받는 곡식)은 많은 부분이 아전과 백성들에게 돌아가고, 쌀과 콩이 보리와 벼보다 많으면 색락은 많은 부분이 관가의 쓰임으로 돌아갑니다. 조유전(漕留錢 : 조창에 머무르는 돈 또는 모인 돈)은 쌀로 바꾸어 그 해에 올리는데, 환곡 총량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색락 23승은 어떤 경우는 관아에서 모두 잘못된 전례로 사용되니 모두 색락(色落)으로 많이 걷기 때문입니다. 각 곡식은 날로 변해서 쌀 환곡이 되니, 원래의 환곡은 조유(漕留)에 혼돈되어서 붙게 되는 것이 반드시 이르는 형세입니다. 이 때문에 쌀을 받는 것이 무너지고 결손이 생기고 퍼져갑니다. 임자년(1852) 7월에 부임하여 그 해 환곡을 거둘 때에 본래의 환곡 중에서 6.720석령을 떼어내어 경술년(1850) 조창의 돈에서 돈으로 바꾼 것을 유래조(流來條 : 여러 해 동안 쌓인 것에 대한 조목)라고 하였고, 색락미(色落米)1.300석령을 돈으로 바꾼 것이 3.091냥인데 모두 가져다 썼습니다. 임자년(1852) 환곡을 걷지 않았을 때에 각 곡식을 모두 돈으로 환산하여 따로 책자를 만들고 돌을 환곡 장부에 섞어서 계축년(1853) 가을 세금을 거둘 때, 추작전(秋作錢)이라 하여서 곡식에서 손실된 부분을 돈으로 바꾸어서 모두를 챙겨서 썼습니다. 임자년(1852) 환곡에서 돈으로 받은 것 중에 4.257냥을 다른 용도로 빼돌려 쓰고는 관의 비용, 각 창고에서 여러 조목으로 거치지 않은 것을 옮겨다 채워놓고는 계축년 조전장부(漕錢帳簿 : 조창에서 쓰는 돈을 기록한 장부)에 섞어놓았습니다. 가을 세금을 걷을 때에는 조작전(漕作錢)이라 내세워 색락미(色落米) 332석을 돈으로 바꾸어서 챙겼습니다. 임자년 환곡 쌀 고정조(姑停條)의 색락미(色落米) 바꾼 돈1.443냥과 계축년 고정조(姑停條)의 색락미(色落米) 바꾼 돈 987냥을 모두 관가에서 챙겨 썼습니다. 계축년 봄에 조운 선박 8척을 새로 만들었고 2척을 보수했는데, 역량미(役糧米 : 배 만드는 인부들에게 주는 쌀)로 챙겨 이익을 본 돈이 1.444냥이고, 갑인년 봄 조운선을 새로 만들 때에는 1.248냥의 이익을 챙겼고, 금년 봄 각 배 주인에게서 각각 50냥씩 받고는 납부하려는 이방이 교체와 필사를 구실로 챙겼고 관가로부터 2.350냥을 챙겼습니다. 이방(吏房) 방우남(方友南)이 관원을 가려 쫓고, 교체할 때에 김주열(金柱說)에게서 받은 돈이 1,000냥이고 수교 신광흡(首校 申光洽)이 바뀔 때에 받은 돈이 150냥입니다. 좌수(座首)가 의례적으로 먹는 것과 수교(首校 : 우두머리 장교)들이 천거하면서 먹는 뇌물과 관가에서 챙긴 돈이 20냥입니다.

 

 

임자년 환곡에 태가전(?價錢)과 남창(南倉)의 속공전(屬公錢 : 관가에 속한 공적인 돈)을 새로 제조하는 배의 주인에게서 돈을 받고, 창고지기를 관리하는 김회린(金回麟)에게 속공전(屬公錢)과 영작조타가인조(營作組?價剩條)의 돈이 모두 4.547냥입니다. 굶주린 사람당 급식된 것이 () 1두와 보리 2분전이며, 이방이 스스로 자기 허벅다리를 찌르고 읍민들이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해치는 모두 놀랍고도 놀라운 말들입니다. 장부를 조사한 나머지는 일단 창고에 봉했습니다. 그 죄를 관리에게 처리하게 하십시오.

 

청송 부사(靑松府使) 조연천(趙然天)입니다. 재결(災結)을 몸소 살피고 손수 나누었고, 진휼 곡식을 잘 모아 충분히 나누었습니다. 화전민의 세금을 깎아주었고 분징재(分徵災 :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물리는 재결)를 관가에서 나누어 채우니, 백성들이 그 은혜를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정화(宋廷和)입니다. 진휼 물건에 가격을 보탠 것에서 자신이 봉록을 더한 것이 매우 많고, 관가에서 쌀을 교역하여 붙여서 만든 이익이 가장 적습니다. 아전들과 백성들이 서로 편안하였고 사건 처리도 공평하였다고 칭송합니다.

전 부사(前府使) 유석환(兪錫煥)입니다. 비장(裨將 : 부하장수)들이 검속하지 못하여서 장부를 살펴보면 구차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전 전 부사(前前府使) 이휘녕(李彙寧)입니다. 끝내 아전 무리들 때문에 비방이 형성되어서 (벼슬에서) 파직되었습니다만, 집을 싸는 날에 창고에 남아 있던 것을 기울여 나누어서 농사, 학문, 무예를 권면하는 재물이 되게 하여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고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인동 부사(仁同府使) 정운기(鄭雲?)입니다. 굶주린 백성명단을 뽑는 데에 넘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했고, 곡식 품질이 정밀하고 알찬 것을 기뻐했습니다. 옥사를 살피는 경우는 실정을 얻었으니, 더욱 송사가 조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칠곡 부사(漆谷府使) 장대급(張大汲)입니다. 소송 듣는 것을 공평하게 했으며, 아랫사람들을 도리로 이끌었습니다. 진휼미의 공급을 정밀하게 갖추었고 굶주린 사람의 명단을 많이 가리어 뽑았습니다.

 

순흥 부사(順興府使) 김증현(金曾鉉)입니다. 이웃 경계가 의지하여 편안했고, 궁핍한 사람에게 힘을 썼습니다.

 

청도 군수(淸道郡守) 조병목(趙秉穆)입니다. 제판(題判 : 재판할 때의 판결문을 쓰는 것)할 때에 때때로 객기가 드러났습니다.

전 군수(前郡守) 정해상(鄭海尙)입니다. 4년간의 기간 동안에 모든 일이 다 잘되었습니다.

 

 

 

예천 군수(醴泉郡守) 김징순(金徵淳)입니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소 간특한 일을 밝히는 총명함이 모자랍니다. 계축년(1853)에 재결(災結) 50결령을 면제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폐습을 뽑으면서 참으로 애통해했습니다. 받지 않은 곡식을 내라고 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해당 아전들은 한 터럭도 손실됨이 없고, 각 백성들은 고운 쌀, 거친 쌀을 세금으로 내었습니다. 마침내 이 600여 석으로 진휼하는 물자에 보태니, 진휼장부를 감영에서 조사할 때에 스스로 기록한 것을 갖추어 놓으니 일의 이치가 어그러집니다. 방역전(防役錢 : 역을 안 가는 대신에 내는 돈)을 결에 따라 거두고, 보군전(補軍錢 : 군에 안가는 대신에 내는 돈)을 관에서 받은 것을 더하여 나누고 경비를 쓴 것에 대해서는 헐뜯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전 군수(前郡守) 조연명(趙然命)입니다. 재임기간 3개월 동안 별다른 정치의 득실은 없습니다만, 장종렬(張宗烈)을 지독히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비록 공적인 일 때문에 매를 쳤다고는 하지만 형을 가볍게 해주는 시간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너무 매를 쳤다는 죄목은 면하기 어렵습니다. 종렬(宗烈) 친척들이 관가의 뜰에서 울면서 곡했다는 죄명으로 세 사람을 옥살이한 지 지금까지 5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풀어주지 않으니 해당 군수(조연명)의 죄는 이에 거론할 수 없으며, 사건의 정실이 공평하지도 않습니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휘박(李彙溥)입니다. 진휼하는 곡식을 봉록(월급)에서 떼어서 더하고, 이미 공급할 쌀이 많아지니, 가격을 깎은 것이 거의 반입니다. 이치상 공평한 것을 들었고 아전들을 엄격하게 단속했습니다. 이미 스스로 이룬 규범이 있어 끝내 백성들의 신망을 보탤 만합니다.

 

흥해 군수(興海郡守) 이종준(李鍾俊)입니다. 사람은 착하다고 칭찬하지만, 꼿꼿하고 밝은 기질은 조금 모자랍니다. 재결을 살피고 환곡을 거둘 때에 자못 차례가 있으며 포악한 장교와 교활한 아전 역시 모두 제거했습니다. 다른 고을에서 구걸하는 무리들이 흘러들었고, 이 고을은 거의 1,000명의 사람이 움막에 살게 하고 구제하고 구휼해 주니, 이것이 알짜 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기 군수(豊基郡守) 이호달(李浩達)입니다. 자신의 봉록을 덜어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준 은혜가 모두 1.000금이 넘습니다. 아전과 백성들의 품은 생각과 칭송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결혼과 장례를 돕고 학문과 농사를 권면하였습니다. 주도면밀하여 나머지 일도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양산 군수(梁山郡守) 박의한(朴儀漢)입니다. 정사에 처음 부임하여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전 군수(前郡守) 이병덕(李秉德)입니다. 부임기간 동안 정치를 함에 다만 사사로운 것을 운영할 줄 알았습니다. 나누어줄 재결과 진휼미는 모두 아전들 무리에게 맡기고, 벼슬아치를 임명하고 송사를 행할 때 오로지 뇌물만을 보고, 나누어주어야 할 때 나누지 않고 모두 아전들의 손으로 들어갑니다. 굶주린 사람의 명단을 뽑을 때에 원망이 많고 나누어야 할 곡식을 빼먹고, 일에 순서가 없습니다. 진휼 물자라고 하면서 향임(鄕任)을 팔아서 받은 돈은 모두 사사로운 쓰임으로 돌아갑니다. 향교의 교임(校任)을 임명하면서 받은 돈 때문에 혹시 사람들이 막을까 하여 몸소 이끌어서 향을 사르니 여러 유생들이 다투어 싸워서 매우 놀랐습니다. 모두 엄중히 살펴주십시오.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계창(李啓昌)입니다. 도착하여 귀를 기울였으나, 칭찬이나 헐뜯는 말이 들리지는 않습니다.

전 현령(前縣令) 이진재(李晋在)입니다. 잡비를 줄이고 여러 들어오는 조목을 엄격히 지적했습니다. 가득 찬 손님들을 내보내고, 거만히 희롱하는 관리들을 제거했습니다.

 

의성 현령(義城縣令) 정기삼(鄭基三)입니다. 처음 정치를 펼 때 다시 술잔이 넘친다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전 현령(前縣令) 조철림(趙徹林)입니다. 탐욕스럽고 더러운 소문이 전임한 현령과 같습니다. 비루하고 자잘한 일들에 다시 규칙을 정하였고, 아전, 노비의 일은 뇌물이 아니면 안 되고 소송의 결단은 재물이 아니면 안 됩니다. 바르지 못한 길이 널리 열려 있어, 관아의 노비는 방자하고 요구하고 청탁하는 일이 성행합니다. 촌 아낙들은 결탁했고, 푸줏간에서 올라오는 것도 깎았습니다. 지역 물산품을 징발하니, 원망 한탄하고 화내며 울부짖고, 비웃고 침 뱉으면서 욕질을 합니다.

 

청도 좌수(淸道座首) 성효각(成孝恪)입니다. 이방(吏房) 김도하(金道河) 김태규(金太圭) 등을 임명할 때에 거두어들인 것이 모두 1.200냥입니다. 경술년 봄 증광초시(增廣初試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는 시험) 때에 유생인 박시묵(朴時?) 등에게서 받은 것이 1.800냥입니다. 울산 좌수(蔚山座首) 유환규(柳煥圭) 등에게서 처리하고 교체할 때 받은 돈이 도합 3.090냥이고, 민고(民庫)200냥을 어려움 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환자(‘還上이라 쓰고 환자로 읽음-역자 주)할 때에 애당초 한 알의 곡식도 나누어준 것이 없었고, 다른 반만(半萬 : 5000) 포의 징세와 관리들이 이익을 나눈 작태는 밝아서, 받은 것은 가릴 수 없습니다. 눈감아준 돈이 1.000냥이고, 그 중에 본읍에서 빼내어 공식적으로 진휼을 실행하고, 총록과 잡록의 문서를 찢었습니다. 극도로 불성실하며 어떤 경우는 변한 곡식을 돈으로, 어떤 경우는 돈을 곡식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들어오고 나간 것이 서로 바뀌고 진휼미를 나누어준 것은 겨우 1/10이고 그외는 모두 순전히 돈으로 나누어주는 것을 대신했으니 (백성들의) 고통은 가릴 수 없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영문(營門 : 감영을 뜻함)에 추가로 보고한 것이 3.551명이며, 각 곡식을 함부로 깎은 것이 303석령입니다. 관동 북관(關東北關 : 관동 지역의 북쪽 관문)으로 각 곡식을 운송하는 일은 육지 수송이 어렵다 하여, 해변에서 매전(賣錢)과 내하은(內下銀) 등을 발매하여 돈으로 대신하고, 각 영읍(營邑 : 관가와 마을)이 따로 준비한 것은 각 항목에 첨가시켰는데 그 돈이 모두 9.277냥령이고 그 가운데에 진휼 물자와 잡다한 경비가 쓰인 나머지 1.302냥의 쓰임은 불분명합니다. 원래 면제되어야 할 재결(災結)은 나누어 면제하지 않고, 해당 아전이 훔치고 농간을 부려도 전혀 단속하고 살피는 것이 없습니다. 이방(吏房) 오상년(吳尙年)이 바뀔 때에 뇌물로 2.500냥을 받았고, 관아의 노비들이 읍안에까지 돈을 놓고(고리대금을 민간에 놓는 것) 시장을 출입하니, 원망하는 소리가 떠들썩하고 백성들이 흘깃 돌아봅니다. 아전들이 모두 짐승처럼 흩어져서 장물로 범한 것이 이와 같아서 이미 창고를 봉했습니다. 그 죄상을 관리에게 처리하게 하십시오.

 

경산 현령(慶山縣令) 이제상(李濟商)입니다. 봉급을 덜어서 나누어주고 없어진 환곡을 면제하는 것과 결수에 세금을 매겨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모두 상쇄시켰고, 더하고 보태는 것을 바르게 했습니다. 향임의 직책은 항상 공천한 사람을 따르고 수리하는 데 번거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모두 옳았으니, 실제 공적도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전 현령(前縣令) 강희영(姜羲永)입니다. 몸은 취해 있고, 정치는 뇌물에서 나옵니다. 좌수(座首)를 여섯 번, 이방(吏房)을 다섯 번 바꾸고, 호장(戶長)을 두 번 임명했고, 수교(首校 : 우두머리 장교)를 네 번 고쳤습니다. 유임(儒任)과 향임(鄕任)이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사람들을 바꾸고 교체한 일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무릇 온갖 관가의 곡식을 손이 가는 대로 끌어다 쓰고 취한 다음에 결재를 하니, 모두 아전의 손에서 나옵니다. 곤장을 때리고 나서 소금을 문지르니 이 또한 법에 없는 사항입니다. 고을 백성인 김세택(金世澤)이 곤장을 맞고 죽었습니다. 범한 죄는 교체되었다고 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천 현감(榮川縣監) 홍건후(洪建厚)입니다. 동서와 (부임지가) 응당 피해야 하는 혐의가 있습니다(동서와 부임지가 가까운 곳에 있었던 듯함-역자 주).

전 현감(前縣監) 서긍순(徐兢淳)입니다. 재결 나누기를 규칙대로 했고, 진휼미 나누기를 법대로 했습니다만, 창고의 폐해가 가장 심했고 세금 걷어들이는 기한을 넘겨서, 몸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양 현감(河陽縣監) 조성교(趙性敎)입니다. 비록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주휼한 은혜가 있습니다. 곡물을 자기 봉록을 덜어 갖추었고, 수급하는 쌀의 가격을 깎아주었습니다.

 

용궁 현감(龍宮縣監) 이준재(李駿在)입니다. 감면해 준 것이 이미 많고, 진휼하여 구제해 준 것도 있습니다. 일찍이 속이고 숨기는 아전의 우두머리를 살피고 다시 멋대로 방자히 하는 겸인(?)을 쫓아냈습니다.

 

청하 현감(淸河縣監) 박황진(朴璜進)입니다. 영대전(營貸錢 : 감영에서 빌려주는 돈)을 나누었고 백성들의 조세를 균등하게 하여 백성들이 모두 그 은혜를 칭송합니다만, 고기와 전복을 교역할 때 아전들이 속이고 숨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변홍규(邊弘圭)입니다. 요역(?: 노동으로 세금을 내는 것)을 감면해주고, 진휼하고 구제해 줌을 계획대로 했으며, 얇은 봉록을 자주 내놓았으니, 이 모두 알찬 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진보 현감(眞寶縣監) 김주교(金周敎)입니다. 개인적으로 진휼하기를 원했고, 몸소 굶주린 사람의 명단을 뽑았습니다. 한 경계가 활기가 온전하게 되었고, 사방에서 칭송하였습니다. 농정을 밝히고 배우기를 권면했으며 근본에 힘써 풍속을 돈독하게 했습니다.

 

현풍 현감(玄風縣監) 정환익(鄭煥翼)입니다.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전 현감(前縣監) 유의정(柳宜貞)입니다. 재결(災結)을 무모하게 많이 했고, 창고의 곡식도 잃고 도둑 맞았습니다. 백성들을 잘 아껴주었지만 일을 처리하는 것은 미숙했습니다. 군위(軍威) 이인정(李寅正)의 송사는 아전 이방에게 시켜서 논하고 올렸다고 합니다. 곡식을 출납할 때에 창고지기들의 훔치고 희롱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형장을 과도하게 집행했으며, 돈으로 속죄해 준 것도 지나치니, 모두가 원망을 받는 실마리입니다. 진휼 장부를 따로 비치했으며 이방이 계획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큰 포흠(逋欠 : 환곡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바로잡지 못하고, 나쁜 습속으로 상황이 자주 위험했습니다.

 

 

의흥 현감(義興縣監) 박진수(朴晋壽)입니다. 백성을 구휼하는 은혜가 먼저 관수미(官需米 : 관으로 수급하는 쌀)를 깎는 것으로부터 했고, 포흠(逋欠)하는 단서는 영작전(營作錢 : 영에서 쌀 등을 돈으로 바꾸는 것)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돈으로 바꾸면서 이익을 구했습니다. 옥사도 실정에 맞았고, 시험장에서도 시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신녕 현감(新寧縣監) 권중건(權鍾健)입니다. 한 사람의 실수도 사방으로 전해들은 것이 없습니다.

전 현감(前縣監) 최영석(崔永錫)입니다. 회초리 치는 것이 뜰에 가득하고, 비통하고 슬픈 소리가 길에 꽉 찼습니다. 고을 아전인 한응호(韓膺浩)의 아들이 공전이 있다고 말하자, 곤장과 회초리를 때리면서 고문하여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하니 그 잔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전들과 노비들이 환곡에서 빈 것이 10.000여 석이면 절반은 곡식을 비어내어 윗사람에게 바치고, 백성들에게 (부담을) 나누어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에 곡식을 채워넣습니다. 백성들에게 이유 없이 거두어들이니 백성들이 원망함이 많습니다. 소장에 맨 처음 이름을 적은 사람을 잡아서 200대를 엄히 치니, 거의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창고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뺏은 돈과 환곡에서 백성들이 내지 못한 곡식을 일일이 조사해서 민간에서 거두어들어 증식하고는 환곡으로 빈 곡식을 보태어 채웠습니다. 나머지 1.400여 섬은 따로 환곡 장부에 놓았습니다. 매번 감영에 와서 돈으로 세금을 걷을 때는 (백성을 대상으로) 사적으로 돈놀이를 해서 벌어들인 것이 3년간 거의 5.000냥에 이릅니다.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마치 난리를 겪은 것 같고, 기생들이 정치에 관여하여 벼슬을 임명할 때 뇌물이 행해졌습니다 .이미 바뀌었다고 해서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연일 현감(延日縣監) 최희석(崔憙錫)입니다. 몸소 밭에 들에 나가 재결의 넘치거나 새는 것을 살피고, 몸소 계산했습니다. 환곡 장부의 허실을 감독하고 세금을 감면하고 도와주는 은혜는 이미 많습니다. 애당초 거짓으로 빌려주어서 나누는 일은 없었습니다.

 

장기 현감(縣監) 한홍일(韓弘一)입니다. 봉록을 내어 백성들을 돕고 교역하는 쌀을 시장에 풀었습니다. 실질적인 은혜가 아래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고, 황폐한 정치를 법으로 다스렸습니다.

 

운산 현감(雲山縣監) 이노익(李魯翼)입니다. 일처리가 바르고 은혜를 베푼 것이 적지 않습니다. 편안하고 간략하게 관아에 거처하면서 절약하고 검소하며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창녕 현감(昌寧縣監) 황종석(黃鍾奭)입니다. 문묘를 고칠 때 거두어들이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시읍(試邑 : 시험이 열리는 고을) 경비의 반을 관아에서 충당하게 했습니다.

 

기장 현감(機張縣監) 장유풍(張有豊)입니다. 묵은 포흠(逋欠)을 빗질하듯이 조사했고, 진휼 곡식이 정밀하고 알찼습니다. 다스림을 절실히 구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 현감(前縣監) 최동진(崔東鎭)입니다. 취한 아전과 장교들이 하는 것을 이름도 없는 술로 성토하고 도적들에게 법 조항에도 없는 형벌로 심하게 처리하고, 아전들이 맹세하는 것을 꾸짖고, 여러 사람을 협박하기를 거칠게 했습니다. 송사를 들을 때는 뇌물을 끌어들었고, 자리를 바꿀 때는 돈을 받았습니다. 주리 등의 형벌 도구를 가는 곳마다 사용했고, 교활한 아전과 간특한 향임(鄕任)들을 밀실까지 불러들였습니다. 경영하기를 잘못하여서 백성을 병들게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의롭지 않은 일들이 한 경계에 독처럼 흐릅니다. 가난한 사람 부자 할 것 없이 병들어서 지나는 곳마다 포악함이 일어나서 마치 난리와 같습니다. 송사와 직책을 돈으로 사고 강제로 거둔 재화가 모두 돈으로 5.267냥입니다. 각 창고 관리에게서 강제로 걷어도 눈감아주고 간특하게 범하는 포흠이 일어나는 것을 나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민고(民庫)와 관아의 재산을 남용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관가에 속해 있는 것을 대가 없이 나누니 푸줏간에서 바치는 것과 모두 공짜로 먹었습니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림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단지 벼슬을 깎거나 파직하여 그만두게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죄상을 유사에게 처리하게 하십시오.

전 전 현감(前前縣監) 김정묵(李鼎?)입니다. 안으로 기방(妓房)에서 미혹되었고, 밖으로 임무를 맡기는 사람은 간특한 아전들입니다. 송사는 뇌물에 따라서 결정되고, 직책은 돈을 보고 임명합니다. 영겸이전(營廉餌錢)으로 막고, 마을의 헐뜯는 소문에 차꼬를 채워서 앞뒤에서 직책과 송사를 돈으로 사고 죄를 날조하여 강제로 거둔 명단을 수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증거가 있는 것만도 계산해 보면 합하여 5.110냥이 됩니다. 이러한 탐욕스런 관리를 만났으니, 백성들은 힘이 마르고 고갈되었습니다. 이미 바뀌었다고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비안 현감(比安縣監) 김병연(金秉淵)입니다. 부임한 지 몇 개월도 안 되어서 처음 정치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습니다.

전 현감(前縣監) 조영화(趙永和)입니다. 올 봄에 굶주린 사람을 구휼해 줄 때 정성을 다했고, 좋은 사람들을 먹이고 키우는 것을 잘했습니다. 재결(災結) 462결령에서 표준으로 나누어주는 것 외로 경산(慶山) 174결령을 추가했고, 가전(價錢 : ) 1.830령의 출처를 조사해 보면 모두 세금이 나온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돈으로 서로 주어서 구휼하는 물자로 썼으니, 정말로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자인 현감(慈仁縣監) 오경연(吳慶延)입니다. 조금의 재간은 있지만, 운영하는 것은 모두 이익을 추구하는 계획뿐입니다. 신해년 환곡미 1.500석을 처음으로 감영의 관문을 운영하기 위해서 돈을 만들고 받아야 할 돈을 두루 받지 않고, 받은 돈은 범하여 사용했습니다. 받은 돈 4.650냥 중에 1.000냥은 관에서 별도로 준비한 것이라 하고는 민간에 나누고, 이윤을 키워서 쌀로 바꾸었습니다. 매년 거둔 300석은 환곡에서 빈 부분을 채우려는 것이지만 절목(節目 : 조항)을 만들어두고는 매번 거둔 것이 10년이나 되었으니, 다시 백성을 괴롭히는 빌미를 더합니다 2.150냥을 감영 아전의 집 밖에 보내놓고는 마치 공공의 재물을 보내고 받는 듯이 하면서 몰래 사사로운 용도로 썼습니다. 그 나머지는 1.500냥입니다. 본미 1.500석은 근본을 세우려는 의도인데, 이방에게 내주고는 겨우 그 700석을 채웠고, 800석은 3년간 같이 고갈되었으니 모두 1.064령이 아직도 기록에는 비어 있습니다. 임자년(1852)에 세금을 걷을 때는 없어진 부분을 보충한다고 핑계 대고는 궁방(宮房 : 대군이나 옹주의 궁전)을 계획적으로 얻어서 세금 100결을 면제했는데 매 결당 15냥이었습니다. 노봉전(奴捧錢 : 노비에게 거두는 돈 또는 세금)1.500냥인데 그 가운데 530냥령은 사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음해에는 매 결당 14냥을 면제했고 걷은 돈이 1.400냥이었는데 그 가운데 440냥이 사사로운 용도로 귀결되었습니다. 계축년(1853) 표재(俵災 : 재해로 세금을 면제해 주는 것, 또는 그 밭) 48결령 중에서 돈으로 바꾼 81냥이 사사로이 쓰였습니다. 읍아전인 황도엽이 죄를 날조하여 강제로 걷은 돈이 800냥인 것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각박하게 하여 일을 해치고 어지럽히고 뇌물을 받은 것은 논하지 않겠습니다만 장물을 취하고 죄를 범한 것이 큰 사람들은 적발하여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죄상을 유사에게 처리하게 하십시오.

 

영양 현감(英陽縣監) 홍희승(洪羲升)입니다. 재결(災結)을 공평하게 나누었고, 알찬 효과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주휼을 급하게 하는 후덕함이 있으니 성실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드러운 정치여서 꼿꼿하고 과감한 정치는 없다고 하지만, 큰 근본에는 잃은 것이 없으니 혹독한 평가로 번거롭게 하지 않습니다.

 

예안 현감(禮安縣監) 권택하(權宅夏)입니다. 부임한 지 반년이 되지 않아서 공적을 살펴보아도 달리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전 현감(前縣監) 황선(0)입니다. 이미 죽어서 의논할 수 없습니다.

 

봉화 현감(奉化縣監) 이병룡(李炳龍)입니다. 부임했을 때는 제가 그 지방을 지나고 난 뒤였습니다.

전 현감(前縣監) 임백능(任百能)입니다. 무릇 마땅히 해야 할 직분과 백성들에 관계된 급한 일을 정성스럽고, 마음 졸이면서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조처할 때에 또 매우 자세히 하고 종합적이면서 꼼꼼하여 그 충성스러움과 근면함, 정성스러움과 순수함은 참으로 보기 드문 점입니다. 제가 암행하면서 (‘)’자 한 개도 감히 가볍게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 고을의 현감만은 어쩔 수 없이 칭찬의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황산 찰방(黃山察訪) 안재린(安在麟)입니다. 속해 있는 역원이 굶주리자 박봉을 덜어내어 급한 사람을 주휼해 주고, 파발마의 번잡한 경비는 관가의 돈을 빌려주고는 기한을 연기해 주었습니다. 각 역 사람들이 그 은혜를 칭송하며 다음에 공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전 찰방(前察訪) 선우업(鮮于?)입니다. 사사로운 운영만을 계속 힘써서 법의 이치를 돌아보지 않았고, 오로지 혹독한 형벌로 위엄을 세웠습니다. 어떤 때는 천인을 면제해 줄 때 의례적으로 받는 것이라 하고 어떤 때는 기록을 부풀려서 강제로 거두고 몰래 거둔 것이 모두 1.090냥이 됩니다. 아전과 노비들이 일을 맡을 때 뇌물을 받아서 뽑았는데, 그 돈이 모두 980냥이니, 탐욕스러움이 넘치고 자기 직분에 빠진 죄가 있으니 이미 파직되었다고 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현 찰방(省峴察訪) 이철남(李喆南)입니다. 이루어놓은 공적이 없고, 뒷날에 잘하기를 기대합니다.

전 찰방(前察訪) 허탁(許鐸)입니다. 계축년(1853)과 갑인년(1854)에 마가전(馬價錢)이 모두 5.160냥인데, 겨우 5, 6필의 허약한 말로 책임을 면하고 대신 세워놓았고, (나머지는) 모두 개인 용도로 돌아갔으며, 자잘한 일에 뇌물을 받은 것이 모두 1.120냥입니다. 우관(郵官 : 각역의 마정을 관장한 찰방의 이칭)이 비록 낮은 관리이지만 역시 아전이나 노비들보다는 위에 있는 직책입니다만, 음탕하고 더러운 행태는 붓을 적실 수도 없습니다. 그 탐욕스럽고 법을 어긴 죄는 함께 관리를 시켜서 처리하십시오.

 

 

창락 찰방(昌樂察訪) 윤치종(尹致琮)입니다. 일을 처리할 때는 원성이 없게 하려 했고, 마음가짐은 힘써서 구제해 주려 했습니다.

전 찰방(前察訪) 김경락(金慶洛)입니다. 이미 교체된 관리이며 살면서 머물고 있으니 또한 무엇을 추궁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 부임하는 아전을 잡고서 보내주지 않았다고 하니 오히려 우스울 뿐입니다.

 

장수 찰방(長水察訪) 정학유(鄭學裕)입니다. (부임한 지) 반년이 되지 않았으며, 비록 적지만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이 있어서 장차 올 공적을 살필 수 있습니다.

전 찰방(前察訪) 안계랑(安季良)입니다. 이미 임기가 되었지만 절약하고 검소한 공적이 있습니다. 망아지를 다루는 데에 힘썼지만, 달리 시끄러운 폐단은 없었습니다.

 

안기 찰방(安奇察訪) 김진정(金晋禎)입니다. 이미 조심스럽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종합적으로 살펴보니 또 기뻤습니다. 속역(屬驛 : 관할하는 역)의 폐단을 유념해 두었으며, 역시 굶주린 백성을 구하려는 방법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송라 찰방(松羅察訪) 이방영(0)입니다. 쇄잔한 역에서 어려운 때를 만났고, 진휼 정치를 점점 내실 있게 한 은혜가 있습니다.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현서(李玄瑞)입니다. 기강와 법률을 엄격히 밝힌다는 것을 들었는데, 스스로 적진을 살피는 데에 소홀함이 없습니다.

전 첨사(前僉使) 김춘서(金春敍)입니다. 죽어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다대 첨사(多大僉使) 이창오(李昌五)입니다. 방포(防布 : 방군에 소속된 군인이 번을 들지 않을 때 대신 내는 베)가 간간이 끊어져서 여러 읍이 기한을 넘기는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진휼 곡식을 정밀하고 알차게 하여서 모두들 일념으로 은혜를 고루 베풀었다고 칭송합니다.

 

서생 첨사(西生僉使) 박환구(朴煥球)입니다. 다행히 큰 과실이 없었고, 2년간 과실 없이 지냈습니다.

 

개운 만호(開雲萬戶) 한광연(韓光演)입니다. 진휼로 구해주는 것을 성실하고 부지런히 했으며 진내의 군졸들이 이에 힘입어서 편안했습니다.

 

포윤 만호(包伊萬戶) 이만서(李晩緖)입니다. 굶주린 군졸을 진휼로 구해주어서 자못 성실하고 부지런하다는 칭찬이 있습니다.

 

서평 만호(西平萬戶) 양종해(梁鍾海)입니다. 진휼로 대신 내는 것을 구해주었고, 성실된 마음으로 처리했습니다.

 

두모 만호(豆毛萬戶) 정순민(丁順民)입니다. 일에 민첩히 대처했고, 본인이 범한 것을 없으니 허물을 추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울산 감목(蔚山監牧) 이중신(李重信)입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칭찬이나 헐뜯는 말이 없습니다.

전 감목관(前監牧官) 이명구(李命九)입니다. 민심을 불안하게 하고 욕들을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가산 별장(架山別將) 서상규(徐相珪)입니다. 산성을 조심히 지켰으며 평소에도 부지런하고 내실이 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전 별장(前別將) 김학해(李學海)입니다. 지금은 벌써 교체되었으니 거슬러서 평할 필요 없습니다.

 

단양 군수(丹陽郡守) 심원택(沈元澤)입니다. 민고에서 폐단을 (손실된 자산을) 보태는 것으로 이자를 만든 것이 2.400냥이고, 군포에서 이자로 만든 돈이 1.050냥입니다. 공관과 손님 접대하는 집을 찬란하게 다시 지었는데 그 경비가 거의 1.000금이었지만, 백성들은 칭송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청풍 부사(淸風府使) 신억(申檍)입니다. 부임하자마자 의례대로 받는 돈으로 나누고 흩어서 각 고을의 군포의 폐단을 보충하는 데 썼습니다.

 

충주 영장(忠州營將) 이승준(李承駿)입니다. 훔치고 도적질한 장물을 관가 창고에 잘 보관했다가 주인이 나타나면 내어주었습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정만교(鄭晩敎)입니다. 백성들이 이제 눈을 비비면서 바라보니 앞으로 공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전 목사(前牧使) 조연명(趙然明)입니다. 임자년(1852)과 계축년(1853)에 결가로 이익을 챙긴 것을 바로 개인 용도로 사용했는데 모두 6.043냥입니다. 이른바 따로 아래로 나눈 것도 그 사용처를 살펴보면 그 행태를 숨길 수 없습니다. 돈을 합하면 2.287냥이며 장물을 더럽게 한 것도 이미 백성들의 결수와 관계 있습니다.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죄상을 유사를 시켜서 처리하게 하십시오.

 

연원 찰방(連源察訪) 김정원(金政源)입니다. 직분을 조심하고 독실히 받들었고, 순박하고 성실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음죽 현감(陰竹縣監) 원강(元降)입니다. 별다르게 나타난 공적은 없지만 허황하고 과장된 말이 많습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심의복(沈宜復)입니다. 묵힌 것을 조사하니, 백성들이 하소연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천 부사(利川府使) 김동선(金東選)입니다. 환곡을 걷을 때 몸소 받았으며, 힘써 정밀하고 공평하게 했습니다. 공납하려 출발할 때에 기간을 지체됨이 없었습니다.

 

경안 찰방(慶安察訪) 김대묵(金大?)입니다. 스스로 득실이 있으니 가혹한 평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이규방(李圭?)입니다. 위의와 명망이 있어 복종하며 군민이 서로 편안합니다.

 

중군(中軍) 신명홍(申命洪)입니다. 막하의 일에 칭찬이 있고, 임무를 비운 것은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전 중군(前中軍) 유정유(柳貞裕)입니다. 거슬러 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판관(判官) 유장주(兪張柱)입니다. 쌀을 나누고 들이는 것을 공평하게 하였고, 이치 듣는 것을 자세하게 하였습니다.

 

삼전도 별장(三田渡別將) 문원구(文原龜)입니다. 부지런히 일해서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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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욕버릇을 떼준 어사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경상좌도의 어사로 되여 령남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대구에 있는 경상감영을 떠난 박어사는 수행인원들을 몇패로 나뉘여 부근 고을을 돌고나서 아무날 언양읍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갈라졌다. 아침밥을 설때리고 몇리길을 다그친 그는 허기증이 나서 허리춤을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 수종들에게 맡긴 돈을 깜박 잊고 받지 않아 몸에 엽전한잎도 없었던것이였다. 그들을 다시 찾아갈수 없게된 박어사는 로자부터 장만하지 않을수 없었다. 높이가 천메터도 넘고 험난한 운문산을 넘고나니 사지가 나른해지고 식은 땀이 솟아났다. 가까스로 산을 내려오니 마침 나무그늘밑에서 두 로파가 수수전병을 팔고있었다.

 

<<전병 한장에 얼마씩 받고 파오? >>

 

박어사의 물음에 그들은 두장에 한푼씩 받는다고 대답했다.

 

<< 실로 미안한 청이오나 전병 두개를 외상으로 팔수 없겠습니까? 급히 오느라 돈을 지니지 못했는데 읍에 내려갔다와서 갚아드리겠소이다.>>

 

박어사가 조금 젊어보이는 40대의 녀인을 보고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금새 낯이 수수떡같이 벌개지더니 <<>>하고 코웃음을 치며 화를 벌컥 내였다.

 

<<제길할것, 오늘 재수가 사무라와서 원, 병신도 아닌 멀정한 녀석이 누구앞이라구 성가시게 구는거야? 썩 꺼져!>> 녀인은 독기어린 눈으로 대방을 쏘아보면서 박어사의 가슴을 왈칵 밀었다. 아침에 내린 비에 땅이 채 마르지 않아 매대앞이 질벅한데다가 불의의 봉변을 당한 박어사는 하마트면 미끄러져 넘어질번하였다. 그러나 계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망할 녀석>> <<빌어먹을 놈>> 하면서 입에서 구렝이가 나오는지 뱀이 나오는지 모르고 온갖 악담을 마구 퍼부어댔다.

 

박어사는 욱하고 치솟는 분을 삭이느라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공연히 벌집을 건드려서 랑패를 보게되는것이 싫어서였다.

 

<<손님이 오죽 배가 고프면 한푼어치 떡을 외상으로 달라했겠는기오. 내 돈을 받지 않겠으니 여기 와서 이걸 자시게.>> 곁에서 떡을 팔던 50대의 로파가 박어사에게 전병 두장을 주고나서 물 한공기를 떠주었다.

 

이것을 본 악녀는 눈에 불을 켜면서 펄쩍 뛰였다.

 

<<니년은 돈이 썩어서 건사하지 못하는가부지? 니년은 밤깔년이구나. 저 거지를 언제 알았다고 선심을 쓰는거여? x, 밤까묵어라, 쯧쯧>>

 

<<손님, 물을 마셔가며 천천히 드시구려. 말같지 않은 소리는 못들은걸로 치게. >> 로파는 계집의 악담을 마이동풍하고 손님을 살뜰히 대해주었다.

 

박어사가 전병 두개를 먹고나니 금새 살것 같았다. 그는 로파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나서 길을 떠났다. 이윽고 청도읍에 당도한 박규수는 군수를 찾아 어사패를 보이고나서 로자를 빌릴 뜻을 말하고나서 산아래에서 욕을 본일도 이야기하였다. 그는 사령 둘을 불러 산아래에 가서 전병파는 두 로파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한식경이 지나자 사령이 두 로파를 앞세우고 관청에 들어왔다. 이윽고 박어사는 동헌대청에 좌정했다. 어인 영문인지 모르고 관청에 끌려온 두 녀인은 사시나무같이 후들후들 떨기만하였다.

 

<<두 로파는 고개를 들고 내가 누구인가 똑똑히 보아라!>>

 

고개를 들고 앞을 올려다보던 악녀는 기절초풍을 할번했다. (동헌에 높이 앉아서 호령하는 사람이 낮에 나한테 욕벼락을 맞던 그 거지가 아닌가? 아이고 이젠 갈데없이 죽었구나 ) 그녀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이윽고 박어사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왜 두 로파를 관청에 대령시켰는지 알겠는가?>>

 

두 로파는 무릎을 꿇은채 감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박어사는 산아래서 자기에게 전병을 주던 로파를 보고 말하였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댁은 비록 생계가 어렵지만 남의 딱한 사정을 헤아릴줄 아는 어진분입니다. 착한일을 하는분에게는 복이 뒤따릅니다. 오늘 본관은 특별포상을 하나니 그것으로 살림에 보태쓰시오 .>> 말을 마친 그는 관청에서 빌린 로자에서 돈 스무냥을 꺼내서 로파의 손에 쥐여주었다. 뜻밖에 거액의 상을 받은 로파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박어사에게 연신 절을 올리였다.

 

뒤이어 박어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여봐라, 욕잘하는 계집은 듣거라. 네년은 배속에 무엇이 들었길래 입만 열면 상욕이 쏟아져나오느냐? 륙방관속이 다 듣도록 어디 한번 되풀이해보아라.>>

 

<<나으리, 쇤네는 죽을죄를 졌나이다.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옵소서.>>

 

악녀는 땅바닥에 엎디여 이마가 벗어지도록 머리를 쪼으면서 애걸복걸했다.

 

<<너도 부끄러운줄을 아느냐? >>

 

<<쇤네는 주둥이를 잘못 놀려 죽을 죄를 졌사온데 다시는 안그러겠나이다.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옵소서.>>

 

<<용서라니 무슨 용서를 빈다는게냐? 네년의 입에서 상욕이 어떻게 쏟아져나오는지 구경 좀 시키자는데 무슨 사설이 그리 많으냐?>>

 

박규수는 좀체로 용서해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으리님, 저 계집이 지은 죄는 커 죄를 다스리되 상욕으로 관청을 더럽히라는 령만은 거두어주소서.>>

 

상을 받은 로파가 간청하자 박어사는 못이기는척하고 말했다.

 

<<내 오늘 이 로파의 안면을 봐서 용서를 한다만은 네년은 상욕을 일삼는게 고질로 되였으니 이대로 관청을 나갔다간 누구 손에 입이 뭉개질지 모를테니 미리 방비해둬야겠구나. 여봐라. 당장 저 몹쓸계집한테 따귀 스무대를 되게 쳐서 정신을 차리게 한뒤에 돌려보내거라.>>

 

어사의 령에 따라 사령 둘이 번갈아가며 악녀의 볼기를 쳤다. 입술이 터지고 볼이 부어서 고무공같이 된 로파는 정신없이 관청을 나오자 걸음아 날살려라 하고 꼬리빳빳 도망쳤다. 망신을 톡톡이 당하고 악녀란 별명까지 얻은 그녀는 그때부터 감히 상욕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