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재너럴셔먼호 사건의 이해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5. 4. 11:13


재너럴셔먼호 사건의 이해

 

샤만호 선주는 중국 천진에 있던 미국인 무역상 프레스톤이고 선장은 단마르크인 페이지였습니다. 이 배에는 선원장으로 미국인 윌슨이, 선원들로는 중국과 말레이시아인 24명이었고 통역으로는 우리말을 잘 아는 영국인선교사 토머스가 승선했습니다. 1866815일 샤만호는 장마로 불어난 대동강을 거슬러 만경대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배에는 서양에서 만든 유리그릇과 천리경 등 잡화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샤만호는 서양에서 만든 물건들을 동양에 팔아 무역을 하는 배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 조정은 프랑스 해군의 간섭에 긴장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시기에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샤만호가 올라오면서 평양의 관리들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평안도 감찰사 박규수는 사람을 보내 샤만호의 목적을 물었습니다. 통역관이었던 선교사인 토머스는 선원들의 국적을 솔직히 밝히고 샤만호가 조선과 무역하려고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쌀과 금, 인삼, 가죽 등을 서양물건들과 바꾸려 한다며 배에 실린 화물을 소개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의 기록들을 살피면 샤만호는 승조원들이 만경대에 상륙하여 지형을 정찰하는 등 이상 행동도 있었습니다. 당시 쇄국정책에 매달려온 고종은 서양과의 교류가 불순한 영향을 미친다며 교역을 금지시키고 샤만호에 돌아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의 지휘아래 군인들과 인민들이 장작에 불을 지른 작은 배들을 띄워 보내 샤만호에 부딪혀 불이 옮겨 붙도록 하는 방법으로 배를 완전히 수장시켰습니다. 선원들도 모두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

184097일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난 토마스는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18636월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송되었다. 그해 12월 상하이에 도착한 후 4개월 만에 아내가 사망하는 슬픔과 선배 선교사들과의 갈등으로, 186412월 선교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 지푸의 세관에 취직하여 독립 선교사가 되었다. 그곳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 총무 윌리엄슨은 황해를 건너온 천주교인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난 후 186594일 토마스를 한국에 권서로 파송했다. 토마스는 김자평의 안내로 황해도 옹진군 창린도에 도착하여 몇 달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18661월 베이징에 돌아와 조선 동지사를 만나 한국 사정을 탐지했으며, 런던선교회로부터 재임명을 받았다.

조선 선교 기회를 엿보던 토마스는 18667NBSS 권서로 재임명받고, 평양행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인으로 동행했다. 조선 정부는 유화 정책에 따라 연안에 접근하는 이양선에게 물과 식량은 제공했으나 통상과 내륙 항해는 금지했다. 중무장한 이양선 대항법을 연구해 온 평양감사 박규수는 해방론(海防論) 입장에서 여러 차례 경고를 보내어 충돌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상선은 무역을 요구하며 평양행을 감행했다. 토마스는 강변의 여러 마을에서 한문 성경을 반포했다. 선박은 평양의 양각도까지 접근했고, 평양과 서울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중군(3, 감영의 군사령관) 이현익이 승선하여 협상하던 중 인질로 잡혔으나 장교 박춘권이 구출했다. 협상을 주도하던 박규수는 상선의 도발적 발포로 민간인이 죽자, 조정에 보고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박규수는 92(음력 724) 무기 열세를 제갈량의 적벽대전처럼 화공법으로 극복하고 셔먼호를 전소시켰다. 토마스 등 선원 24명은 군민이 섬멸했다. 전리품인 포와 포탄, 바늘, 성경, 아편, 자기 등은 감영 창고에 보관했으나, 닻은 대동문에 걸어 도성 수호를 기념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한 조선사(총독부 조선사편수실, 1938)는 전투와 토마스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제너럴셔먼호가 양각도까지 올라와 총을 쏘며 상선의 양식을 약탈하고 주민 7명을 살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에 박규수가 출두하여 종일 감독하는 가운데 중군 백낙연과 서윤 신태정이 지휘하여 화공 포격을 했다. 24일 군민이 함께 화공을 하고 포수와 사수를 동원하여 공격했다. 정오에 셔먼호에서 포와 총을 쏘아 주민 1명이 사망했다. 이를 본 모든 백성과 수비 군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는데, 여러 척의 배에 가득 실은 풀에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어 셔먼호가 불에 타게 되었다. 이에 토마스와 조능봉이 뱃전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살려 달라 구하니 바로 잡아서 결박했다. 군민들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타살하니, 나머지 선원은 화살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서 죽었다.” 토마스는 결박된 채 군인과 주민에 의해 일요일에 타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