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南壽)에게 답함
사흘 낮을 이어 비가 내리니 가련하게도 필운동(弼雲洞)의 번성하던 살구꽃이 다 떨어져 붉은 진흙으로 변하고 말았네.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던들, 왜 서로 주선하여 하루 동안의 심심풀이를 서둘지 않았겠는가? 긴긴날 무료히 앉아 홀로 쌍륙(雙六)을 즐기자니, 바른손은 갑(甲)이 되고 왼손은 을(乙)이 되어, 오(五)를 부르고 백(百)을 부르는 사이에 그래도 피아(彼我)의 구분이 있어 승부에 마음을 쏟게 되고 번갈아 가며 적수가 되니, 나도 정말 모를 일이지,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하여도 역시 편애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이 두 손이 이미 저것과 이것으로 나뉘어졌다면 어엿한 일물(一物)이라 이를 수 있으며 나는 그들에 대해 또한 조물주라 이를 수 있는데, 오히려 사정(私情)을 이기지 못하고 편들거나 억누르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를 일이지,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들에게 사정(私情)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문득 보니 발〔簾〕 곁에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랬네. 내 나이 사십이 못 되었는데 벌써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그 기력과 태도가 하마 노인 같아, 제비 손님과 장난치며 웃으니, 이것이 노인의 소일하는 비결일세.
이때에 갑자기 그대의 서찰이 내 앞에 떨어져 나의 그리운 마음을 충분히 위안해 주기는 하였으나, 자줏빛 첩(帖)에 쓴 부드러운 필치는 너무도 문곡(文谷)과 흡사하여 우아한 점은 있지만 풍골(風骨 웅건한 기상)이 전혀 없네그려. 이는 용곡(龍谷) 윤 상서(尹尙書)가 비록 진신(搢紳)의 모범은 될지언정 결국은 대가(大家)의 필법은 아닌 것과 같으니, 이 점만은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네.
정존와기(靜存窩記)는 그 글을 찾으러 오겠다는 말을 지금 읽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으니, 평소 남에게 너무 쉽게 승낙하기 때문에 이런 독촉을 받게 되는 것이라 자못 후회가 되고 부끄럽군. 그러나 지금 이미 유념해 두었으니 삼가 차분하게 만들어 보겠으나, 다만 그 더디고 빠름은 미리 헤아릴 수 없네. 불선(不宣).
[주D-001]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공자(孔子)가 자로(子路)에게 말하기를, “너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니라.〔誨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하였는데, 원문의 음이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와 비슷하다 하여 제비를 묘사할 때 자주 쓰인다.
[주D-002]바둑이나 …… 낫겠지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아무 마음도 쓰지 않고 지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 않느냐? 이것이라도 하는 것이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3]문곡(文谷) :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의 호이다. 김수항은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전서(篆書)와 해서(楷書)ㆍ초서(草書)에 두루 능하였다고 한다.
[주D-004]윤 상서(尹尙書) : 판서를 지낸 윤급(尹汲 : 1697~1770)을 가리킨다. 그는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에 대해 용기 있게 반대하여 자주 파직ㆍ좌천되었으므로 직신(直臣)으로 명망이 매우 높았다. 필법이 정려(精麗)하여 당시 이름난 고관 대신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썼으며, 사람들이 그의 편지를 얻으면 글씨를 다투어 모방하여 그런 글씨를 ‘윤상서체(尹尙書體)’라 불렀다고 한다. 《槿域書畵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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