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37

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심한 더위 속에 여러분들은 여전히 건강하게 지내는지?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은 근자에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마음에 걸리어 더욱 잊혀지지 않네. 중존(仲存 이재성(李在誠))과는 가끔 서로 만나 술이라도 마실 수 있겠지만, 백선(伯善)은 청교(靑橋)를 떠나고 성위(聖緯 이희경(李喜經))도 이동(泥洞 현재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없으니 이와 같이 긴긴날에 무얼로 소일하며 지내는지 모르겠네.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은 듣자니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다는데, 집에 돌아온 뒤 몇 번이나 서로 만났는가? 그가 이미 조강지처를 잃고 또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 같은 훌륭한 벗을 잃어, 이승에서 오래도록 외톨이로 쓸쓸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그의 얼굴과 말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네. 그 또한 천지간에 의지가지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말고.
아아, 슬프도다!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슬픔보다 심하다고 논한 적이 있었지. 아내를 잃은 자는 그래도 두 번 세 번 장가라도 들 수 있고, 서너 차례 첩을 들여도 안 될 것이 없네. 마치 의복이 터지고 찢어지면 꿰매고 때우는 것과 같고, 집기가 깨지고 이지러지면 새것으로 다시 바꾸는 것과 같네. 때에 따라서는 후처(後妻)가 전처(前妻)보다 나을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나는 비록 늙었지만 상대는 새파랗게 젊어서 신혼의 즐거움이 초혼과 재혼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도 있네. 하지만 지기를 잃은 쓰라림에 이르러서는 그렇지가 않지. 내가 다행히 눈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보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귀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듣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입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나의 맛을 함께하며, 내가 다행히 코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맡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마음을 지녔지만 장차 뉘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영각(靈覺)을 함께한단 말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났으니, 백아(伯牙)가 이 석 자의 오동나무 고목을 끌어안고 장차 뉘를 향하여 타며 장차 뉘로 하여금 듣게 한단 말인가? 그 형세로 말하자면 부득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번에 다섯 줄을 긁어 대어 그 소리가 쟁그르르 하고 났을 걸세. 그렇게 하여 줄을 자르고 끊고 부딪고 깨고 부수고 밟아서 모조리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단번에 불태워 버린 연후에야 마음이 후련하였을 것이네. 그리고 제 자신과 이렇게 문답했겠지.

“네 속이 시원하냐?”
“시원하고말고.”
“울고 싶으냐?”
“울고 싶고말고.”

그러자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하며, 눈물이 솟아나 옷깃 앞에 마치 화제(火齊)나 슬슬(瑟瑟)처럼 떨어졌을 것이네. 눈물을 드리운 채 눈을 들어 바라보노라면, 빈 산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네.
네가 백아를 보았느냐고 물을 테지. 암, 보았고말고!

 

劇暑中。僉履起居連勝否。聖欽近作何樣生活否。懸懸。尤不能忘也。仲存時得相逢飮酒。伯善失靑橋。聖緯無泥洞。則未知如此長日。何以消遣否。在先聞已罷官云。未知歸後。幾番相逢否。彼旣喪糟糠之妻。又喪良友之如懋官者。悠悠此世。踽踽凉凉。其面目言語。不見可想。亦可謂天地間窮民。嗚呼痛哉。吾甞論絶絃之悲。甚於叩盆。叩盆者。猶得再娶三娶。卜姓數四。無所不可。如衣裳之綻裂而補綴。如器什之破缺而更換。或後妻勝於前配。或吾雖皤而彼則艾。其宴爾之樂。無閒於新舊。至若絶絃之痛。我幸而有目焉。誰與同吾視也。我幸而有耳焉。誰與同吾聽也。我幸而有口焉。誰與同吾味也。我幸而有鼻焉。誰與同吾嗅也。我幸而有心焉。將誰與同吾智慧靈覺哉。鍾子期死矣。爲伯牙者抱此三尺枯梧。將向何人鼓之。將使何人聽之哉。其勢不得不拔佩刀。一撥五絃。其聲戛然。於是乎斷之絶之。觸之碎之。破之踏之。都納竈口。一火燒之。然後乃滿於志也。吾問於我曰爾快乎。曰我快矣。爾欲哭乎。曰吾哭矣。聲滿天地。若出金石。有水焉逬落襟前火齊。瑟瑟垂淚。擧目則空山無人。水流花開。爾見伯牙乎。吾見之矣。



 

[주C-001]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 것이다 : 연암은 정조 16년(1792) 음력 1월에 안의에 부임하여 정조 20년(1796) 2월까지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글 중에 이덕무(李德懋)가 사망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음을 보면, 1793년 여름 무렵에 씌어진 편지로 짐작된다.
[주D-001]청교(靑橋) : 한양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쌍리동(雙里洞)의 개울물이 북쪽으로 흘러 이 다리를 지나 태평교와 합친다고 하였다. 《漢京識略 卷2 橋梁》
[주D-002]영각(靈覺) : 불교 용어로,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다는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본성을 말한다.
[주D-003]종자기(鍾子期) : 중국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음악에 정통했다는 인물이다. 거문고 명수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하였더니, 종자기가 이를 듣고 백아의 뜻이 고산유수(高山流水)에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 세상에 자신의 음악을 이해할 사람〔知音〕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줄을 끊고 거문고를 부수어 버린 뒤 종신토록 거문고를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本味》 《列子 湯問》
[주D-004]울음소리가 …… 듯하며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위(衛) 나라에 있을 때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주D-005]화제(火齊)나 슬슬(瑟瑟) : 모두 구슬 모양으로 된 보석의 일종이다.
[주D-006]빈 산에는 …… 피어 있네 : 원문은 ‘空山無人 水流花開’로, 소식(蘇軾)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에 나오는 구절이다. 연암은 이 구절을 빌려, 고산유수(高山流水)의 뜻을 표현했던 자신의 음악을 알아줄 이가 이제는 없음을 서글퍼한 백아의 심경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