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심한 더위 속에 여러분들은 여전히 건강하게 지내는지?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은 근자에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마음에 걸리어 더욱 잊혀지지 않네. 중존(仲存 이재성(李在誠))과는 가끔 서로 만나 술이라도 마실 수 있겠지만, 백선(伯善)은 청교(靑橋)를 떠나고 성위(聖緯 이희경(李喜經))도 이동(泥洞 현재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없으니 이와 같이 긴긴날에 무얼로 소일하며 지내는지 모르겠네.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은 듣자니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다는데, 집에 돌아온 뒤 몇 번이나 서로 만났는가? 그가 이미 조강지처를 잃고 또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 같은 훌륭한 벗을 잃어, 이승에서 오래도록 외톨이로 쓸쓸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그의 얼굴과 말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네. 그 또한 천지간에 의지가지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말고.
아아, 슬프도다!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슬픔보다 심하다고 논한 적이 있었지. 아내를 잃은 자는 그래도 두 번 세 번 장가라도 들 수 있고, 서너 차례 첩을 들여도 안 될 것이 없네. 마치 의복이 터지고 찢어지면 꿰매고 때우는 것과 같고, 집기가 깨지고 이지러지면 새것으로 다시 바꾸는 것과 같네. 때에 따라서는 후처(後妻)가 전처(前妻)보다 나을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나는 비록 늙었지만 상대는 새파랗게 젊어서 신혼의 즐거움이 초혼과 재혼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도 있네. 하지만 지기를 잃은 쓰라림에 이르러서는 그렇지가 않지. 내가 다행히 눈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보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귀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듣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입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나의 맛을 함께하며, 내가 다행히 코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맡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마음을 지녔지만 장차 뉘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영각(靈覺)을 함께한단 말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났으니, 백아(伯牙)가 이 석 자의 오동나무 고목을 끌어안고 장차 뉘를 향하여 타며 장차 뉘로 하여금 듣게 한단 말인가? 그 형세로 말하자면 부득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번에 다섯 줄을 긁어 대어 그 소리가 쟁그르르 하고 났을 걸세. 그렇게 하여 줄을 자르고 끊고 부딪고 깨고 부수고 밟아서 모조리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단번에 불태워 버린 연후에야 마음이 후련하였을 것이네. 그리고 제 자신과 이렇게 문답했겠지.
그러자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하며, 눈물이 솟아나 옷깃 앞에 마치 화제(火齊)나 슬슬(瑟瑟)처럼 떨어졌을 것이네. 눈물을 드리운 채 눈을 들어 바라보노라면, 빈 산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네.
네가 백아를 보았느냐고 물을 테지. 암, 보았고말고!
[주D-001]청교(靑橋) : 한양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쌍리동(雙里洞)의 개울물이 북쪽으로 흘러 이 다리를 지나 태평교와 합친다고 하였다. 《漢京識略 卷2 橋梁》
[주D-002]영각(靈覺) : 불교 용어로,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다는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본성을 말한다.
[주D-003]종자기(鍾子期) : 중국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음악에 정통했다는 인물이다. 거문고 명수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하였더니, 종자기가 이를 듣고 백아의 뜻이 고산유수(高山流水)에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 세상에 자신의 음악을 이해할 사람〔知音〕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줄을 끊고 거문고를 부수어 버린 뒤 종신토록 거문고를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本味》 《列子 湯問》
[주D-004]울음소리가 …… 듯하며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위(衛) 나라에 있을 때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주D-005]화제(火齊)나 슬슬(瑟瑟) : 모두 구슬 모양으로 된 보석의 일종이다.
[주D-006]빈 산에는 …… 피어 있네 : 원문은 ‘空山無人 水流花開’로, 소식(蘇軾)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에 나오는 구절이다. 연암은 이 구절을 빌려, 고산유수(高山流水)의 뜻을 표현했던 자신의 음악을 알아줄 이가 이제는 없음을 서글퍼한 백아의 심경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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