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7. 10. 31. 10:38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인산(因山)이 끝나고 왕께서 영원히 떠나셨으니, 멀리 운향(雲鄕)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고 길이 부르짖은들 어느 곳에 미치리오.
깊은 겨울 모진 추위에 대감의 기거(起居)는 두루 좋으신지요?
돌아가신 형님의 유집(遺集)은 교정된 본(本)으로 모두 몇 권이나 되는지요? 말세의 풍속이 명예만을 제일로 삼고 덕을 알아보는 자는 드물지요. 이는 아마도 형님께서 몸가짐을 나직이 하였으되 뜻은 고상하고, 겉모습은 여위었지만 속마음은 여유가 있었으며, 은거하면서도 친한 이를 기피하지 않아 남들이 은거하는 줄을 알지 못한 때문일 것이오. 유명해져도 선비의 본분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소. 또 처지가 이처럼 가까운데도 멀리 떠나려는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고, 도(道)가 형통하려는 때를 만났는데도 고생을 마다 않는 굳은 절개를 굽히게 하기 어려웠으니, 이 어찌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히지 않는’ 그런 인물이 아니겠소. 옛 현인 중에서 찾아봐도 실로 더불어 짝할 이 드문지라, 비록 그 명성과 지위가 충분하지 못하고 출사(出仕)와 은거가 똑같지는 않지만, 민풍(民風)을 세워 세상을 선도하고 학설을 세워 후세에 남기고자 한 점에 있어서는 미상불 동일하다 아니 할 수 없소이다. 그 공이 어찌 다만 사문(斯文 유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데에 그칠 뿐이리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과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두 선조를 보좌하고 우리 종중을 더욱 튼튼히 하리라 믿소.
지난번 영남의 고을에 있을 적에 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에 제사 지낼 때 축문(祝文)을 쓰는 일로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내려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 편지가 유집 가운데 수록되었는지 모르겠소. 그때 답서를 올리면서 부득불 낱낱이 들어 실정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에 아울러 등초(謄抄)하여 보내니, 부디 원서(原書)의 아래에다 붙이되 글자 한 자를 낮추어 기록함이 어떻겠소?
족종(族從 연암을 가리킴)은 노병이 날로 심한데도 다시 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기꺼이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무슨 심보인지요?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의 고질이 모두 고치기 어려운 형편인데, 바람마저 매우 달라 나무를 뽑고 기왓장을 날리곤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며, 고래나 악어의 울부짖음이 바로 베개맡에 들린다오. 돌이켜 고향 집이 생각나도 수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로막고 있지요. 대저 이곳은 한때의 구경꾼들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명승지로 찾을 만한 땅은 될 수 있지만, 노경에 노닐면서 몸을 보양할 곳은 전혀 못 되지요. 더구나 하인 하나도 데리고 있지 않고 중처럼 외로이 살고 있는 신세이리요!
이해도 저물어 가는데 그리움으로 울적한 마음을 소폭의 편지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이만 줄이오.

 

珠邱事竣。弓劒永閟。瞻望雲鄕。頓首長號。何所逮及。伏惟嚴沍。台軆起居萬勝。先兄主遺集較正之本。共有幾卷否。末俗循名知德者稀。葢以卑牧而高尙。癯容而肥遯。隱不違親。人不知其隱也。名不離士。世無得以名焉。地如此近。而遐心莫回。道之方亨。而苦節難屈。豈非獨立而不懼。確乎其不拔者乎。求之先民。實罕與儔。雖其名位未充。出處不侔。若爲樹風善世。立言垂後。未始不同也。豈惟斯文賴而不墜。有以翼玄黎二祖。而益壯吾宗也。曩在嶺邑時。以華陽先墓祭祝事。見賜長牘矣。未知收入於遺集中耶。其時仰答不得不枚擧暴實。玆以幷爲謄送。幸爲附之原書之下。低一字列錄如何。族從衰病日甚。而猶復間關嶺海。甘作老饕。是誠何心。邑瘼民肓。俱屬難醫。而風氣絶殊。拔木飄瓦。發作無時。鯨吼鼉鳴。只在枕頭。回想家鄕。千嶂揷天。大抵一時遊客。筇屐探勝之地則可也。殊非暮境盤桓嗇養之所。况其不帶一丁。孤棲如僧者乎。値此歲暮。懷思悄悄。非尺書可旣。姑此不備。




 

[주C-001]족제(族弟)에게 보냄 : 이 편지는 1800년 음력 9월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임명된 연암이 연말에 쓴 것으로 보인다.
[주D-001]인산(因山)이 …… 떠나셨으니 : 순조(純祖) 즉위년(1800) 11월에 거행된 정조(正祖)의 장례를 가리킨다. 원문은 ‘珠邱事竣 弓劍永悶’인데, ‘주구(珠邱)’는 순(舜) 임금의 무덤에 새가 날아와 구슬을 떨어뜨린 것이 쌓여서 언덕을 이루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능침(陵寢)을 뜻한다. 《拾遺記 虞舜》 그리고 ‘궁검(弓劍)’은 각각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지상에 떨어뜨렸다는 활과, 텅 빈 그의 무덤 속 관에 남아 있었다는 칼을 가리킨다. 《史記 卷28 封禪書》 《列仙傳》
[주D-002]운향(雲鄕) : 운향은 백운향(白雲鄕) 또는 제향(帝鄕)과 같은 말로 선계(仙界)를 가리킨다. 《장자》 천지(天地)에 성인(聖人)은 “천세(千歲)토록 살다가 인간 세상이 싫어지면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於帝鄕〕”고 하였다.
[주D-003]돌아가신 형님의 유집(遺集) : 박준원의 형인 박윤원(朴胤源 : 1734~1799)의 문집 《근재집(近齋集)》을 가리킨다. 《근재집》은 이후 1807년에 박준원의 아들인 박종경(朴宗慶)에 의해 전사자(全史字)로 간행되었다.
[주D-004]몸가짐을 나직이 하였으되 : 원문은 ‘卑牧’인데,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初六)의 상사(象辭)에 “지극히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고 하였다.
[주D-005]속마음은 여유가 있었으며 : 원문은 ‘肥遯’인데, 《주역(周易)》 돈괘(遯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물러가 숨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肥遯 无不利〕”고 하였다.
[주D-006]처지가 …… 없었고 : 아우 박준원의 딸이 후궁이 되어 왕세자(후일 순조〈純祖〉)를 낳음에 따라 귀근(貴近)의 처지가 되었는데도 굳이 은둔하려 했다는 뜻이다. 정조 22년(1798) 원자(元子)를 위한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그 요속(僚屬)으로 천거ㆍ선발되었으나, 박윤원은 정조의 거듭된 엄교(嚴敎)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 대고 취임하지 않았다. 원문은 ‘地如此近 而遐心莫回’인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그대의 목소리를 금옥처럼 여겨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품지 마소.〔毋金玉爾音 而有遐心〕”라고 하였다. 이 시는 산중으로 떠나려는 현자(賢者)를 만류하는 시라고 한다.
[주D-007]홀로 …… 않는 : 원문은 ‘獨立而不懼 確乎其不拔’인데,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상사(象辭)에 “군자는 이 괘를 써서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아니한다.〔君子以獨立不懼〕”고 하였고,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효사(爻辭)에 대한 문언전(文言傳)에 공자 가라사대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힐 수 없는 것이 잠룡이다.〔確乎其不可拔 潛龍也〕”라고 하였다.
[주D-008]영남의 …… 없었지요 : 안의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1796년 박윤원이, 안의현 부근의 합천(陜川) 화양동(華陽洞)에 있던 선조 박소(朴紹)의 묘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호장(戶長)이 축문(祝文)을 쓴다고 잘못 전해 듣고 그 비례(非禮)를 견책하면서 시정을 촉구한 편지를 보내왔으므로, 연암이 그에 대해 자세히 해명하는 답서를 보낸 바 있다. 그 답서는 《연암집》 권2에 ‘답족형윤원씨서(答族兄胤源氏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박윤원의 편지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근재집(近齋集)》 권18에도 연암에게 보낸 박윤원의 편지가 실려 있다.
[주D-009]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 연암이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직하다가, 1800년 음력 8월 승진하여 강원도 양양(襄陽)에 부사(府使)로 부임한 사실을 가리킨다. 양양은 동해에 임하여 바닷바람이 거세고 산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험준한 고을이었다.
[주D-010]고래나 악어의 울부짖음 : 원문은 ‘鯨吼鼉鳴’인데, 비바람을 몰고 오는 대해(大海)의 거센 파도 소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