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규비(靈圭碑)
신종황제(神宗皇帝) 20년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25년에 왜놈이 침략해 와 우리 삼경(三京 경주ㆍ한양ㆍ평양)을 무너뜨리자, 중 영규(靈圭)가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수길(秀吉)의 군사를 청주(淸州)에서 크게 깨뜨리고, 군사를 금산(錦山)으로 옮겨 힘껏 싸우다 죽었다.
이때를 당하여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은 의(義)를 내걸고 민병(民兵)을 일으켜 초토사(招討使)가 되었으며, 최경회(崔慶會)는 송골매 골(鶻) 자로 군기(軍旗)를 표(標)하고, 임계영(任啓英)은 범 호(虎) 자로 군기를 표하고, 김덕령(金德齡)은 초승(超乘)으로 휘장(徽章)을 만들고, 곽재우(郭再祐)는 홍의(紅衣)로 군을 구별 지었는데, 이들은 모두 대부(大夫)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세신(世臣)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영규는 승려로서, 토지나 병갑(兵甲)을 지닌 것도 아니고 부신(符信)을 발급하거나 호령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건만,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궐기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의를 내세워 궐기한 자들이 10여 진(陣)이었다. 그들은 혹 제 고장을 스스로 호위하기도 하고, 혹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지휘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고, 혹 연수(連帥 관찰사)의 죄를 성토하여 각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기도 했는데, 오직 문열공 조헌의 군중만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스스로 조정과 연락을 취했으니 그 의(義)가 특히 정대하였다. 여기에서 식자들은 영규의 의(義)가 동맹자를 얻었음을 알았다.
절도사(節度使) 박홍(朴泓)은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이각(李珏)과 조대곤(曺大坤)은 군량 10여 만 가마를 불태우고 정기(旌旗)를 땅에 묻어 버리고 적을 만나자 먼저 도망했으며, 부사(府使) 서예원(徐禮元)과 군수 이유검(李惟儉)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관찰사 이광(李洸)과 윤선각(尹先覺)은 10여 만의 군사를 지니고도 왕을 호위하지 못했고, 왕이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거둥하였으나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영규는 승려로서, 한 치의 무기나 한 말의 군량도 지닌 처지가 아니었건만,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힘껏 싸웠다. 문열공의 군사가 청주성(淸州城)의 동문(東門)을 포위하자 영규는 성의 서문에서 전투를 벌여 먼저 성에 올라가니,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여기에서 식자들은 영규의 용맹함이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가 대신을 보내어 조선 문제를 맡기니, 군사를 통솔한 대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 진린(陳璘)ㆍ마귀(麻貴)ㆍ유정(劉綎)은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었고, 군무(軍務)를 맡아 다스린 어사(御史) 만세덕(萬世德)ㆍ양호(楊鎬)와 상서(尙書) 형개(邢玠)는 모두 병법에 깊은 자들이었다. 유격장군(遊擊將軍) 낙상지(駱尙志)는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릴 정도로 힘이 세었고, 양원(楊元)과 사대수(査大受)는 기이한 재주와 굳센 용맹으로 적진에 뛰어들 때는 맨 앞에서 나서고 성을 칠 때는 남보다 먼저 올라갔다. 군사들은 모두 절강(浙江)ㆍ사천(泗川)ㆍ운남(雲南)ㆍ등주(登州)ㆍ귀주(貴州)ㆍ내주(來州)의 날랜 기병(騎兵)과 활 잘 쏘는 사수들이며, 거기에는 대장군의 집종 천 명과 유계(幽薊)의 검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왜놈을 공격하다가 자주 군사가 퇴각했으며, 포위망을 공격하다 패한 적도 자주 있었으며, 항상 많은 군사로 적은 수효의 왜병을 공격했으되, 무기가 파손되고 군사는 지쳐서 7년 사이에 성을 쳐서 빼앗은 것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영규는 승려로서, 머리 깎고 검은 옷 입고 술과 고기를 끊고 살생을 경계하는 무리를 이끌고 하루아침에 견고한 성 아래로 육박하여, 왜병들로 하여금 제 한 목숨 구하기에도 바빠 죽은 시체를 불태우고 도망가게 만들었으니,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이런 공적은 일찍이 있은 적이 없었다. 급기야 군사를 금산으로 이동하여 절도사 및 여러 의병들과 왜병을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군사들이 모두 기일을 놓치게 됨으로써 문열공이 전사하였다. 영규가 장중(帳中)에 들어갔으나 문열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공의 휘하 700사람과 더불어 같은 날에 전사하였다.
오호라! 이때를 당하여 정발(鄭撥)은 적의 습격을 받아 죽었고, 송상현(宋象賢)은 성이 무너지고 힘이 다해 적을 꾸짖고 죽었으며, 신립(申砬)과 김여물(金汝岉)은 군대가 패하여 죽었으며, 신길원(申吉元), 정담(鄭湛), 변응정(邊應井)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었으며, 황진(黃進), 원호(元豪)는 힘껏 싸우다 죽었으니, 모두 공(公)에 죽고 절(節)에 죽은 신하들이다. 저 영규는 승려로서, 공에 죽고 절에 죽어야 하는 신하가 아닌데도 마침내 그 무리들과 함께 특별히 죽었으니, 그 의열(義烈)과 충용(忠勇)은 족히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저 영규는 승려인데도 선비와 군자들이 그 절의를 지극히 사모하여 비석을 깎아 그 공을 새긴다고 한다. 영규의 법호(法號)는 ‘청허대사(淸虛大師)’라 한다.
[주D-002]군무(軍務)를 …… 양호(楊鎬)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찰원(都察院) 우첨도어사(右僉都御使) 양호는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임명되었으며, 만세덕은 양호가 파직된 뒤 그의 후임으로 왔다.
[주D-003]상서(尙書) 형개(邢玠)는 : 원문 중 ‘尙書邢玠’ 다음에 몇 자가 누락된 듯하다. 정유재란 때 병부 상서 형개는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총독계요보정군무(總督薊遼保定軍務)를 겸임하였다.
[주D-004]유계(幽薊) : 거란(契丹)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 연운(燕雲) 16주(州)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의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주D-005]원호(元豪) : 1533~1592. 퇴직 무신으로서 임진왜란 때 강원도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여강(驪江)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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