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출발 박규수
박규수 베이징을 다녀오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번진 공포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모든 일이 중단되었고 부자나 넉넉한 집안 사람들은 산골로 도망하였다. 관직을 그만두는 관리도 수두룩하였다. 처자식의 손에 보물을 쥐어 주고 서둘러 떠나보낸 대신들도 많았다.
[한국천주교회사]
다소 과장 섞인 이 글은 1860년 서울에 살았던 어느 외국인의 기록이다. 이 무렵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을 침략하여 여러 차례 승리하였고 중국의 수도까지 함락시켰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며, 세계의 최강국’이라 믿던 조선 사람들에게 당시의 상황은 충격이었다.
박규수(1807-1876) :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자신이 살던 시대를 서양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상황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외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함께 영국, 프랑스 배들이 우리 해안에도 잇달아 나타나고 있었으니, 조정으로서는 대단한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 사람을 보내 실상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이 때 책임을 맡은 이가 박규수였다.
여러 날이 걸려 중국에 도착한 박규수는 중국의 패배를 확인하였으며, 두려운 상대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 자주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도 정치 때문에 정치는 부패해 있었고, 민심은 조정을 떠난 상태였다. 수많은 고을에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개혁을 요구하였지만, 조정은 그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원군의 등장
민족의 위기가 깊어지고, 민심이 조정을 떠났다며 걱정하는 관리들이 늘어나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도 점차 많아졌다. 이 무렵 고종이 즉위하여 흥선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어 정권을 잡았다.
흥선대원군 :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왕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대원군은 민심이 조정을 떠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었던 조세 제도를 뜯어 고쳤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제를 폐지하였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물렸다. 또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이 민중을 수탈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은 왕권을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려운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을 다시 짓는데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으로 큰 고통을 겪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경복궁 : 경복궁은 조선 건국 당시 지어져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폐허로 남아 있었는데, 1863년부터 1868년 사이에 다시 지어졌다. 두 차례의 화재로 공사 기간이 길어지고,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는데, 이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따랐다.
대원군에게도 서양에 대한 위기감은 있었다. 하지만 늘 나라 안을 안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주교의 확산을 막음으로써 전통 풍속을 지키고, 서양인과 내통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물리치다
대원군의 개혁에 박규수는 지지를 보냈다. 개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강화도(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대원군도 새로운 문물에 관심이 많은 박규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박규수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주신의 뜻을 펴도록 도왔으며, 박규수의 생각처럼 신무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것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프랑스는 사과와 손해 보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 모두를 거부하였다. 대원군은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라 선언하고 모든 이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프랑스 군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군대는 여러 곳에서 침략자를 물리치고, 결국 프랑스는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1866.병인양요)
초지진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의 격전지이다. 1875년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가 앞바다를 침범하자 단호히 맞섰던 곳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에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여 왔다.
광성진 : 신미양요 당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이 이곳으로 몰려왔을 때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장렬히 순국하는 항쟁으로 미군의 퇴각을 이끌어 냈다.
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하여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 이것이 대원군의 답이었다.
전투가 다시 벌어졌다.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수많은 조선 병사들이 장렬하게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결국 물러갔다.(1871.신미양요)
척화비 :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 적혀 있는 이 비석은 미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전국에 세워졌다. 외세를 침략자로 이해하고 그래서 우리 자신을 지키고자 하였던 많은 국민들은 대원군의 정책에 동의하였다.
대원군과 박규수
서양 세력이 침략해 왔을 때 박규수의 생각도 대원군과 다르지 않았다. 외세의 부당한 요구에도 당당히 맞서야 하고, 침략해 온 적은 군대로써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뒤에는 두 사람의 생각에 많은 차이가 생겼다. 대원군은 여전히 ‘우리는 오랜 문화 민족이고, 저들은 오랑캐일 뿐’이며, 다시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과 교류하자는 주장도 완전히 틀어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박규수는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그들과 평화적으로 국교를 맺고 통상 교류를 시작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과학 기술이나 경제, 군사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어, 하루라도 빨리 이들의 문물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박규수는 대원군을 점정 어려워하게 되었고, 대원군도 박규수를 점차 멀리하였다.
이 난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1860년대, 우리 민족에게 이 때는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였지만, 근본적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어보자, 여러분들은 어느 의견에 동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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