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재집(瓛齋集)
《환재집(瓛齋集)》 해제(解題)
- 환재 박규수의 삶과 《환재집》의 내용에 대하여 -
이성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김채식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환재집》 번역의 의의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19세기 조선의 역사적 격변기를 살다간 인물이다. 또한 격변기의 중심에서 평안도 관찰사와 우의정 등을 역임하며 정치와 외교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 문학과 사상 등 여러 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19세기 조선의 정치ㆍ문학ㆍ사상을 살피기 위해서라면 결코 그의 존재를 외면할 수 없으며 이에 당연히 학계에서도 환재를 주목해왔다.
환재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주로 개화사상 연구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개화사상이 실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는 전제 아래 ‘우리나라 최초의 개화사상가’라 할 수 있는 환재가 실학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된 시기는 언제이며, 그러한 사상적 전환의 요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벌였다. 따라서 환재에 대한 관심은 사상적ㆍ정치적 활동에 집중되었다.
환재에 대한 연구는 주로 《환재집》의 내용 검토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환재집》에는 환재의 중요한 글이 많이 누락되어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환재집》은 환재가 세상을 떠난 뒤 아우 박선수(朴瑄壽)가 간행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환재의 문인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환재의 글을 수습하여 1913년에 간행하였다. 김윤식의 일기인 《속음청사(續陰晴史)》의 기록에 의하면, 1911년 10월에 필사본 《환재집》 11권 5책을 완성하였고, 1913년 7월에 보성사(普成社)에서 연활자(鉛活字)로 간행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간행과정에서 김윤식의 취사선택에 따라 중요한 글들이 많이 누락되었던 것이다. 1978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박규수전집》에는 환재가 경상도 암행 어사로서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인 《수계(繡啓)》와 양반사대부의 복식에 관해 논한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가 추가되었으나 학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후 김명호 교수의 노력으로 1996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환재총서(瓛齋叢書)》를 간행함으로써 환재가 남긴 중요한 글들이 대부분 수습되어 학계에 공개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환재에 대한 연구는 그 관심의 범위가 대폭 확장되었다.주-D001 환재의 정치적ㆍ사상적 활동은 물론, 천문 관측에 힘쓰고 지세의(地勢儀) 등을 제작한 과학자로서의 모습, 예학(禮學)과 청나라의 학술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서의 모습, 빼어난 글씨를 남긴 서화가로서의 모습,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자 문장가로서의 모습 등이 다각도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완역한 《환재집》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권역별거점연구소 협동번역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결과물이다. 본 연구원에서는 2014년에 조선 시대 성균관의 일상은 물론 조선 후기 사회의 부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증언한 윤기(尹愭, 1741~1826)의 《무명자집(無名子集)》을 완역하여 공개한 바 있으며, 그 다음으로 경화사족이면서 개명한 지식인으로서 손꼽히는 환재의 저작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번역대본은 김윤식이 간행한 《환재집》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자료로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으나 한국문집총간에 실린 문집만으로 한정해서 번역해야 하는 원칙이 있으므로 더 이상 다른 작품에까지 확장할 수도 없었고, 그럴 역량도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재집》에는 환재의 인간적 면모와 뛰어난 역량이 다채롭게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이를 완역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학술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환재집》의 번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김명호 교수의 연구를 비롯한 선행 연구 성과에 크게 힘입었다. 번역과 연구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지만 번역이 이루어져야 더 심도 있는 연구 성과가 도출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이번 《환재집》의 번역은 순서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학술번역’의 일환으로 주석을 통해 기존의 훌륭한 연구 성과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을 아울러 밝혀둔다.
실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접한 환재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나라 고염무(顧炎武)의 실증적 학술을 극찬하고 추종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명나라 신종황제의 모후 효정황태후를 흠모하여 초상을 복원하는 데 금전을 부조하는 과정을 보면 누구보다 투철한 대명의리(大明義理)로 무장한 모습도 보인다.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일본의 서계(書契)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습과 진주농민항쟁을 공평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한 모습은 현대의 우리가 조선조 양반에게서 바라던 개명지식인의 표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고, 또한 아우 박선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유서 깊은 가문의 후예로 관료로서의 삶에 충실하려 한 모습은 현대사회 소시민의 염원과 다를 바 없다.
이번 번역서가 나옴으로써 환재의 개명적이고 개화적인 모습은 물론 육신을 지니고 온기를 띤 인간적이고 솔직한 모습도 함께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2. 환재 박규수의 생애와 교유주-D002
김명호 교수는 환재의 생애를 출생부터 효명세자가 훙서(薨逝)한 1830년(순조30, 24세)까지의 수학기, 효명세자의 훙서 이후 1848년(헌종14, 42세) 과거에 응시해 출사하기 전까지의 은둔기 및 문과 급제 이후 벼슬을 시작하여 사망할 때까지의 사환기로 크게 구분하였다. 여기서도 이 구분을 따라 환재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하되, 편의상 사환기는 출사 이후 철종 때까지와 고종 때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1) 수학기:1807년(순조7)~1830년(순조30, 24세)
환재는 1807년(순조7) 9월 27일에 한양 가회방(嘉會坊)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1835)이고, 모친은 전주 유씨(全州柳氏)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규학(珪鶴), 자는 환경(桓卿), 호는 환재(桓齋)이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곳은 연암의 옛 집인 계산초당(桂山草堂)으로, 지금의 종로구 계동 중앙중학교 부근이다.
환재는 7세(1813, 순조13) 때 《논어》를 읽고 분판(粉板)에 “효성스런 백성이라야 신하가 될 수 있다.〔孝民可以爲臣〕”, “군자는 공경해야하고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소인은 업신여길 수 있어도 공경해선 안 된다.〔君子可敬而不可侮, 小人可侮而不可敬.〕”라는 글귀를 써서 부친에게 문중자(文中子)보다 낫다는 칭찬을 받았다. 13세(1819, 순조19) 때는 140구의 장편 한시 〈성동시(城東詩)〉, 14세 때는 〈석경루잡절(石瓊樓雜絶)〉 20수를 지었는데, 〈석경루잡절〉의 일부는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수록될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다. 또 14, 5세 무렵에 북해(北海) 조종영(趙鍾永, 1771~1829)이 환재가 지은 시를 보고 찾아와 경술(經術)과 사업을 토론하고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는 사실은 환재의 뛰어난 능력을 짐작하게 한다.
수학기 환재의 인품 및 사상과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부친 박종채를 비롯하여, 환재가 선배 중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었던 인물로 꼽은 조종영, 또 학문과 문학으로 명성이 있었던 외종조 유화(柳訸)와 척숙 이정리(李正履, 1783~1843)ㆍ이정관(李正觀, 1792~1854) 형제를 들 수 있다.
환재가 19세(1825, 순조25) 때, 효명세자로부터 지우를 입은 사실은 특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 효명세자가 경우궁(景祐宮 순조의 생모)을 배종하여 창덕궁 후원의 문을 걸어 나와 계산(桂山)의 언덕에 있었던 환재의 집을 방문했던 일은 야사에도 실린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후 1829년(순조29, 23세)에 효명세자가 《연암집》을 올릴 것을 명한 일, 환재가 자신의 저술인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義例)》를 바친 일, 효명세자의 명으로 〈봉소여향절구(鳳韶餘響絶句)〉를 지어 올린 일 등은 효명세자로부터 입은 지우를 잘 보여준다. 1830년(순조30, 24세)에 효명세자가 훙서하자 환재는 선왕에게 의로운 뜻을 바친다는 의미로 자(字)를 ‘桓卿’에서 ‘瓛卿’으로 바꾸고 과거를 포기한 채 1848년(헌종14, 42세)까지 18년 간 은둔생활로 접어들었다.
수학기에 환재와 깊이 교유한 인물로는 홍대용(洪大容)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와 김영작(金永爵, 1802~1868)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환재와 사상적ㆍ정치적 지향을 같이하는 평생 동지가 된다.
2) 은둔기:1830년(순조30, 24세)~1848년(헌종14, 42세)
환재의 생애 가운데 은둔기는 장기간의 내면적 모색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한층 심화시킨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절 환재는 예학(禮學) 공부에 몰두하여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를 저술하였다. 사대부가 집에서 입는 각종 평복을 중심으로 고례(古禮)와 부합하는 이상적인 의관 제도에 대해 논한 저작으로, 3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원래 환재가 그의 아우 박주수(朴珠壽, 1816~1835)의 제안으로 착수하게 되었으며, 그와 협동하여 작업한 끝에 1년 만인 1832년(순조32, 26세)에 탈고하였다.
《거가잡복고》를 탈고한 뒤 환재는 부모형제를 잇달아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1834년(순조34, 28세) 1월에 모친을 여의었고, 이듬해 11월 13일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이틀 뒤에는 아우 박주수마저 요절하고 말았다.
은둔기는 환재가 학문에 전념한 시기임과 동시에 당대 학자들과의 폭넓은 학문적 교유를 통해 학문이 더욱 성숙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때 교유한 인물로는 김상현(金尙鉉, 1811~1890), 신석우(申錫愚, 1805~1865)와 신석희(申錫禧, 1808~1873) 형제, 윤종의(尹宗儀, 1805~1886), 조면호(趙冕鎬, 1803~1887) 등을 들 수 있다. 《환재집》에는 윤종의에게 보낸 편지가 31통이나 수록되어 있으며, 신석희에게 보낸 편지도 1통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환재가 서유구(徐有榘, 1764~1845)를 종유한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당시 벼슬에서 은퇴하여 은거 중이던 서유구는 젊은 시절에 존경하며 따랐던 선배 연암의 손자인 환재가 자신을 찾아오자, 학문과 문학의 대선배로서 자상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영ㆍ정조 시대의 실학이 19세기에 계승ㆍ발전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환재집》에는 서유구에게 주는 〈은퇴한 풍석 서 상서께 드리다〔呈徐楓石致政尙書〕〉와 〈의고시를 풍석암께 드리다〔擬古呈楓石庵〕〉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환재가 만년에 거처하기 위해 마련한 경기도 두릉(斗陵)의 집은 서유구가 만년에 머물던 곳이기도 하였다(卷9 〈與尹士淵 7〉).
한편, 1840년(헌종6, 34세)을 전후한 시점에 환재가 활발하게 시를 창작한 사실도 눈에 띈다. 김윤식은 《환재집》을 편찬하면서 환재가 서른 살 이후 간혹 10년에 한두 수를 지었을 뿐이라고 하였으나(卷1 〈節錄瓛齋先生行狀草〉), 이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 20여 편이 《환재집》에 수록되어 있다.
3) 사환기 1:1848년(헌종14, 42세)~1863년(철종14, 57세)
환재는 1848년(헌종14, 42세) 5월에 실시된 증광별시에 대책(對策)으로 급제해 출사하였다. 은둔을 끝내고 출사한 이유에 대해서는, 헌종이 익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강화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그에 호응하여 환재의 벗인 신석우ㆍ김영작ㆍ남병철(南秉哲, 1817~1863) 등이 정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상황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과거에 급제한 뒤 1849년(헌종15, 43세) 5월에 평안도 용강 현령(龍岡縣令)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1850년(철종1) 6월에는 전라도 부안 현감(扶安縣監)으로 옮겼다. 이 시절 환재는 천문 관측과 지도 제작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는데, 용강에서는 오창선(吳昌善)과 안기수(安基洙)의 협조를 받아 〈동여도(東輿圖)〉를 제작하였고, 부안에서는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관찰한 사실을 편지를 통해 아우에게 전하였다(卷8 〈與溫卿 4〉). 또 이 무렵 지세의(地勢儀)를 손수 제작하기도 했다(卷4 〈地勢儀銘幷敍〉). 이런 사실은 환재의 사상적 발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851년(철종2, 45세) 3월 부안 현감에서 해임된 뒤 중앙 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다가 9월에 전라좌도 경시관(京試官)으로 파견되었으며, 1852년과 1853년에는 홍문관 수찬과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854년(철종5, 48세) 11월에는 경상좌도 암행 어사로 임명되어 전ㆍ현직 관리들의 부정과 환곡제도 등의 폐단을 조사하였는데, 그 보고서인 《수계(繡啓)》가 《환재총서》 5책에 수록되어 있다. 《수계》는 진주농민항쟁이 발발하기 수년 전 영남 지방의 민정(民情)과 시정(施政)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환재의 내정 개혁론이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환재집》에는 《수계》의 서문과 별단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卷7 〈慶尙左道暗行御史書啓〉).
암행 어사의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환재는 주로 승지(承旨)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1858년(철종9, 52세) 6월에 다시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부임했다. 곡산에서는 백성들의 질고를 이해하기 위해 《곡산도임수지(谷山到任須知)》라는 책을 만들었다(卷8 〈與溫卿 30〉).
1860년(철종11, 54세) 1월에 곡산 부사에서 교체된 뒤, 12월에 열하 문안사(熱河問安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1차 연행에 나선다. 당시 청나라가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하여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가 열하(熱河)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 정부에서 위문 사절단을 파견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환재는 1861년(철종12, 55세) 1월에 출발하여 3월에 북경에 도착했으나, 황제가 조선 사신에게 열하 예방(禮訪)을 면제한다는 칙유를 내림에 따라 5월까지 북경에 체류하다가 6월에 귀환하였다.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심병성(沈秉成, 1823~1895), 동문환(董文渙, 1833~1877), 황운혹(黃雲鵠, 1818~1897), 왕증(王拯, 1815~1876), 왕헌(王軒, 1823~1887), 풍지기(馮志沂, 1814~1867), 정공수(程恭壽, 1804~?) 등과 교유하였으며, 귀국한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이들과 교유를 이어가며 보낸 편지가 《환재집》 권10에 수록되어 있다.
연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인 1862년(철종13, 56세) 2월에 진주에서 농민항쟁이 발발하자, 3월에 환재는 이를 수습하기 위한 안핵사(按覈使)로 파견되어, 두 달여에 걸쳐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사 결과와 대책을 보고하고 건의하였다. 이 보고서 중 하나가 환정의 폐단을 개혁할 것을 청한 〈기구를 설치하여 환향을 정리하기를 요청하는 소〔請設局整釐還餉疏〕〉(卷6)이다. 복명한 뒤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자핵소(自劾疏)를 올려 사양하였고, 1863년(철종14) 5월 이조 참의에 임명될 때까지 일시 은둔생활로 접어들었다. 1863년 12월에 철종이 승하하였다.
4) 사환기 2:1864년(고종1, 58세)~1876년(고종13, 70세)
1864년에 고종이 즉위한 뒤, 1월에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전교에 의해 가선대부에 가자(加資)되고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고, 1865년까지 도승지ㆍ이조 참판ㆍ비변사 당상ㆍ대사헌ㆍ예조 판서ㆍ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866년(고종3, 60세) 2월에 환재는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1869년(고종6, 63세) 4월에 해임될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866년 5월에는 철산(鐵山)에 표착한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을 구조하여 중국으로 이송해 주었다. 7월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침투하여 횡포를 부리자 화공 전술로 격침시켰다. 9월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대동강 연안에 토성을 쌓도록 지시하고 평안도 포수들을 강화도로 급파하였으며, 12월에는 미국 군함 와츄세트호가 내도하여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또 1868년(고종5, 62세) 3월에는 미국 군함 셰난도어호가 내도하여 제너럴셔먼호의 생존 선원 석방문제에 대해 협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4월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이 충청도 덕산(德山)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여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환재는 잇따른 서양 선박의 출현과 그로 인한 소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5편의 자문(咨文)을 지어 서양 선박으로 인한 사태의 실상을 해명하였는데, 그 자문이 《환재집》 권7에 수록되어 있다. 1869년(고종6, 63세) 3월에 양자로 들인 박선수의 아들 제정(齊正)이 요절하였고, 4월에 평안도 관찰사에서 해임되었다. 해임 직후에 환재는 자신의 후임 한계원(韓啓源)에게 편지를 보내 군기고(軍器庫)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卷9 〈與新箕伯某公〉). 평안도 관찰사에서 해임된 뒤 형조 판서와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1871년(고종8, 65세) 2월에 청나라 총리아문에서 미국이 조선 원정에 나설 것임을 알리는 자문이 도착하자, 이에 회답하는 자문을 지었다(卷7 〈美國封函轉遞咨〉). 또 4월에 신미양요가 일어난 뒤 미국 함대가 철수하자 신미양요의 전말을 알리는 자문을 지었는데,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신미양요를 총결산하는 중요한 자문이다(卷7 〈美國兵船滋擾咨〉).
1872년(고종9, 66세) 4월에 흥선대원군에게 청원 편지를 올려 청나라 동치제(同治帝)의 혼인을 축하하는 진하 겸 사은사의 정사로 임명되어, 7월에 2차 연행을 떠났다. 9월에 북경에 도착하여 1차 연행 때 교분을 맺은 정공수와 재회하였으며, 동문찬(董文燦, 1839~1876)ㆍ만청려(萬靑藜, 1807~1883)ㆍ숭실(崇實, 1820~1876)ㆍ팽조현(彭祖賢, 1819~1885)ㆍ오대징(吳大澂, 1835~1902) 등과 새로 교유를 맺고 귀국 후에도 편지를 통해 교유를 이어갔다. 한편, 이 연행에 아우 박선수가 지은 《설문해자익징(說文解字翼徵)》을 가지고 가서 북경에서 출판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12월에 귀국하였다. 1873년(고종10, 67세)에는 형조 판서ㆍ내의원 제조ㆍ규장각 제학을 역임하고 12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874년(고종11, 68세)과 1875년에는 일본에서 명치유신 후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알리며 보낸 서계(書契)의 형식과 내용을 문제 삼아 접수를 거부한 흥선대원군과 좌의정 이최응(李最應)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조선은 운양호 사건 이후 일본의 서계를 접수하게 되었는데, 환재는 일본의 무력에 굴복해 서계를 접수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이전에 서계 접수를 거부했던 명확한 이유를 밝히기를 주장하며 이최응과 갈등을 빚었다. 환재는 1875년(고종12, 69세) 9월에 우의정의 해임을 요청해 윤허를 받았는데, 서계 접수 문제로 인한 갈등이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재집》 권11에 실린 대원군과 이최응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서계를 접수할 것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1876년(고종13, 70세) 1월에 요절한 양자 제정의 후사를 잇기 위해 일족 박제창(朴齊昌)의 아들 희양(羲陽)을 양손으로 들였다. 8월에 수원 유수(水原留守)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며칠 만에 발병하였다. 12월에 병으로 사직소를 올렸고, 이 사직소를 올린 사흘 뒤인 12월 27일에 재동(齋洞)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환재가 세상을 떠난 날 고종은 “이 대신은 도량과 식견이 고명하고 문장과 학문이 해박하여 과인이 의지하고 조야(朝野)가 기대하던 사람이다. 근래에 의정의 짐을 풀어주고 특별히 유수의 직책에 머물게 한 것은 바로 평소의 정력이 강직하여 잠시 휴식하면 다시 등용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찌 까닭모를 병으로 갑자기 영영 가버릴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내 슬픔과 한탄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고(故) 박 판부사의 초상과 시호와 관련한 의식은 규례대로 거행하고, 성복(成服)하는 날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실어 보내라.”라는 전교를 내렸다(《고종실록》). 환재의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3. 환재 박규수 연보 도표
왕력 | 서기 | 연령 | 기사 | |
순조 | 7 | 1807 | 1 | 9월 27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에서 태어나다. |
순조 | 13 | 1813 | 7 | 《논어》를 읽고 “군자는 공경해야 하고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소인은 업신여길 수 있어도 공경해선 안 된다.〔君子可敬而不可侮, 小人可侮而不可敬.〕” 문구를 지어 부친에게 문중자(文中子)보다 낫다는 칭찬을 받다. |
순조 | 19 | 1819 | 13 | 장편 한시 〈성동시(城東詩)〉를 짓다. |
순조 | 20 | 1820 | 14 | 〈석경루잡절(石瓊樓雜絶)〉 20수를 짓다. |
순조 | 23 | 1823 | 17 | 5월 6일, 순조가 희정당(熙政堂)에서 동몽(童蒙)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이때 박규학(朴珪鶴)이란 아명으로 교관 송흠명(宋欽明)의 인솔로 입시하여, 단오절에 내린 희우(喜雨)를 주제로 시를 지어 올리고 함께 포상을 받고 돌아오다. |
순조 | 25 | 1825 | 19 | 여름, 효명세자(孝明世子)가 계동(桂洞)에 있던 저자의 집에 찾아와 밤늦도록 담론하다. |
순조 | 27 | 1827 | 21 | 2월 18일, 일차유생(日次儒生)으로 입시하여 《주역》을 진강하여 《규장전운(奎章全韻)》을 하사받다. |
순조 | 29 | 1829 | 23 | 가을, 효명세자가 《연암집》을 올릴 것을 명하다. |
순조 | 30 | 1830 | 24 | 5월 6일, 효명세자가 서거하다. 이 일로 크게 충격을 받고 과거 응시를 포기하다. |
순조 | 32 | 1832 | 26 |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3권 2책을 탈고하다. |
순조 | 34 | 1834 | 28 | 1월, 모친상을 당하다. |
헌종 | 1 | 1835 | 29 | 11월 13일, 부친상을 당하다. |
- | - | - | - | 김상현(金尙鉉), 신석우(申錫愚), 신석희(申錫禧), 윤종의(尹宗儀), 조면호(趙冕鎬) 등과 교유하다. |
헌종 | 14 | 1848 | 42 | 5월, 증광시에서 대책(對策)으로 급제하다. |
헌종 | 15 | 1849 | 43 | 병조 좌랑이 되다. |
철종 | 1 | 1850 | 44 | 6월,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되다. |
철종 | 2 | 1851 | 45 |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이 되다. |
철종 | 3 | 1852 | 46 | 홍문관 수찬, 부교리가 되다. |
철종 | 5 | 1854 | 48 | 1월, 경상좌도 암행 어사가 되어 전ㆍ현직 관리들의 부정과 환곡제도 등의 폐단을 조사하고 11월에 보고서인 《수계(繡啓)》를 올리다. |
철종 | 9 | 1858 | 52 | 6월, 곡산 부사(谷山府使)가 되다. |
철종 | 11 | 1860 | 54 | 1월, 곡산 부사에서 교체되다. |
철종 | 12 | 1861 | 55 | 1월, 연경에 가다. |
철종 | 13 | 1862 | 56 |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안핵사(按覈使)가 되다. |
철종 | 14 | 1863 | 57 | 5월, 이조 참의가 되다. |
고종 | 1 | 1864 | 58 | 1월, 대왕대비의 명으로 가선대부에 가자되다. |
고종 | 2 | 1865 | 59 | 2월, 한성부 판윤이 되다. |
고종 | 3 | 1866 | 60 | 2월, 평안도 관찰사가 되다. |
고종 | 5 | 1868 | 62 | 3월, 미국 군함 셰난도어호가 내도하여 제너럴셔먼호의 생존 선원 석방문제에 대해 협상을 요구하다. |
고종 | 6 | 1869 | 63 | 3월, 양자 박제정(朴齊正)이 죽다. |
고종 | 8 | 1871 | 65 | 2월, 청나라 총리아문에서 미국이 조선 원정에 나설 것임을 알리는 자문이 도착하자, 이에 회답하는 자문을 짓다. |
고종 | 9 | 1872 | 66 | 7월, 청 동치제(同治帝)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 정사(進賀正使)가 되어 다시 연경에 가다. |
고종 | 10 | 1873 | 67 | 5월, 형조 판서가 되다. |
고종 | 11 | 1874 | 68 | 8월, 일본의 서계 접수를 반대한 흥선대원군을 설득하는 편지를 올리다. |
고종 | 12 | 1875 | 69 | 1월, 일본의 국사(國使)가 군함을 타고 부산에 와서 재차 서계의 접수를 요구하자, 서계 접수에 반대하는 흥선대원군을 설득하는 편지를 올리다. |
고종 | 13 | 1876 | 70 | 1월, 기로소에 들어가다. |
고종 | 14 | 1877 | - | 3월, 양주(楊州) 노원(蘆原)에 장사하다. |
고종 | 15 | 1878 | - | 11월,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리다. |
- | - | 1913 | - | 문인 김윤식(金允植)이 보성사(普成社)에서 문집을 간행하다. |
4. 《환재집》의 구성과 내용
《환재집》은 11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머리에는 김윤식이 1911년에 쓴 〈환재집 서문〔瓛齋集序〕〉이 있는데, 《운양집(雲養集)》 권10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어 〈절록한 환재 선생의 행장 초본〔節錄瓛齋先生行狀草〕〉이 있는데, 박선수가 지은 행장을 김윤식이 뽑아서 교정한 것이다. 이어 목록이 첨부되어 있고, 권3, 권5, 권7, 권9, 권11의 말미에는 정오표가 붙어 있다.
권1~권3은 총 57제 227수의 시가 실려 있다. 권1 첫 부분에 붙은 김윤식의 “선생께서는 어려서 시에 재능이 있었으나, 시가 무익하다고 여겨 즐겨 짓지 않았다. 문집에 수록된 222수의 시는 대부분 약관 전후로 지은 것이고, 30세 이후로는 10년 동안에 한두 수를 짓기도 했으나 56세 이후로는 다시 짓지 않았다”는 언급을 통해, 《환재집》에 수록된 시의 대부분이 젊은 시절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윤식이 222수라고 한 것은 착오로 보인다.
권1에는 27제 62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가장 앞에 수록된 〈성동시(城東詩)〉는 13세 때인 1819년(순조19)에 지은 5언 69운 140행 700자로 된 장편시이다. 동대문 밖 교외에서 임금의 정릉(貞陵) 행차를 구경한 뒤, 성 동쪽의 여러 명승지를 둘러본 소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시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한유(韓愈)의 〈성남연구(城南聯句)〉를 차운한 작품이지만,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일정한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석경루잡절(石瓊樓雜絶)〉은 1820년(순조20, 14세) 4월에 외종조인 유화(柳訸)를 따라 석경루를 비롯한 명승지를 유람하고 지은 시이다. 석경루는 도성의 북쪽 세검정 부근에 있었던 김정희(金正喜)의 별장으로, 19세기 서울의 시인들이 자주 시 모임을 갖던 명소이다. 환재도 두세 차례 친구들과 어울려 이곳을 찾았고, 그곳에서 유숙한 적도 있다. 이 시는 5언 절구 20수로 이루어져 있다. 창의문(彰義門)을 거쳐 석경루를 방문한 뒤 인근의 백석정(白石亭)과 장의사(莊義士) 터, 장원(莊園) 등을 두루 돌아보며 탈속적인 느낌을 읊은 시이다.
〈수선화를 얻고 기뻐서〔得水仙花喜賦〕〉 2수는 수선화를 처음 본 느낌을 읊었다. 서문에서 환재는 황정견(黃庭堅)의 〈수선화(水仙花)〉를 읽고 수선화를 보고 싶어 하던 차에 연경에서 수선화를 사온 어떤 객으로부터 몇 뿌리를 얻었다고 하였으며, 연이어 〈눈 오는 밤에 동파의 취성당 운에 차운하여 수선화를 읊다〔雪夜次東坡聚星堂韻賦水仙花〕〉, 〈다시 동파의 송풍정 운에 차운하여 수선화를 읊다〔又次東坡松風亭韻 賦水仙花〕〉 등을 지어 수선화를 본 감회를 노래하였다.
〈강양죽지사 13수를 지어 천수재 이공의 부임길에 드리다〔江陽竹枝詞十三首 拜別千秀齋李公之任〕〉는 1822년(순조22, 16세)에 합천 군수로 부임하는 이노준(李魯俊, 1769~1849)을 송별하며 지은 민요풍의 시이다. 시의 서문에는 옛날 가야의 땅이 신라 때 강양군(江陽郡)이 되었다가 조선에 들어와 합천군으로 되기까지의 연혁을 간략히 서술하였다. 시에서는 신라 시대 최치원(崔致遠)의 고사와 아울러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가야산 일대의 명승고적을 주로 노래하였다. 또 죽지사(竹枝詞)의 관행에 따라 각 작품 아래에 자세한 주석을 붙였다.
〈회포를 적어 두양 조공께 드리다〔述懷呈斗陽趙公〕〉는 1823년(순조23, 17세)에 조종영(趙鍾永)에게 지어 준 시이다. 조종영은 14~15세 무렵 문사(文詞)가 크게 진보한 환재를 직접 찾아와 경술(經術)과 사업(事業)에 대해 두루 논하고 나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
〈백설세모행(白雪歲暮行)〉은 1829년(순조29, 23세)에 당나라 왕창령(王昌齡)의 〈공후인(箜篌引)〉을 모방하여 지은 칠언 104구의 악부 가행체이다. 눈 내리는 세모에 친구들을 생각하며 지은 시라는 뜻인데, 홍길주의 《숙수념(熟遂念)》을 읽고 제목을 〈숙수념행(孰遂念行)〉으로 고쳤다고 한다. 세모에, 은둔해서 글이나 읽으며 한을 품은 채 의욕 없이 지내는 불우한 친구들을 떠올리고는, 그들을 대신해 선비로서의 원대한 이상을 노래하여 그들의 심정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권2는 〈봉소여향절구(鳳韶餘響絶句)〉가 수록되어 있다. 1829년(순조29, 23세)에 7언 절구 100수로 지은 궁사체(宮詞體)의 장편시로, 순조 말년에 국정을 대리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명으로 지었다. 봉소(鳳韶)는 순(舜) 임금 때에 궁중음악 소소(簫韶)를 연주하자 봉황이 날아와 춤추었다는 고사에 유래를 둔 것이고, 여향(餘響)은 여운이란 의미로, 고대 중국의 이상적인 궁중음악의 전통을 잇는다는 뜻이다.
시의 서문에서 환재는, 궁사가 궁중 내부의 생활을 노래하여 화려한 기교를 발휘한 것이므로 《시경》과 같이 교화와 치세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한 뒤, 왕정(王政)에 기여할 교훈적인 궁사를 짓겠다는 뜻을 밝혔다.
〈봉소여향절구〉의 체재는 역대 임금들에 관한 고사 하나마다 7언 절구 1수를 배당하였는데, 작품의 첫수에서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을 예찬한 시와 결미 부분에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행궁(行宮)으로 삼은 사실을 소재로 한 시는 하나의 고사에 2수의 시를 배당하였다. 작품의 수미에 모두 특별히 2수의 시를 배당하고 조선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상징하기 위해 동일한 주제와 이미지로써 상호 조응하게 한 것은, 개개의 고사를 독립적으로 노래한 것에서 오는 구성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로서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봉소여향절구〉의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해보면, 군신간의 화합을 예찬한 시가 가장 많으며, 이어 임금의 효행과 자성(自省), 인애(仁愛)와 근학과 검덕(儉德) 등을 예찬한 시, 백성에 대한 여러 시혜 조치, 존명사대를 예찬하는 방향에 주안점을 둔 시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하나의 고사를 노래할 때마다 반드시 문헌에 근거한 자세한 주를 붙였는데, 주에 인용된 서적은 《국조보감(國朝寶鑑)》, 《열성어제(列聖御製)》, 《갱장록(羹墻錄)》,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해동패림(海東稗林)》,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오산설림(五山說林)》 등 총 30여 종이다.
권3에는 29제 65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효명세자 만장〔孝明世子輓章〕〉 3수는 1830년(순조30, 24세)에 효명세자의 영전에 올린 만시이다. 제목 원주에 ‘남을 대신해 짓다’라고 했는데, 누구를 대신해 지었는지는 미상이다. 효명세자의 훙서는, 환재가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42세가 될 때까지 은둔 생활로 접어들었을 만큼 정신적 충격이 큰 사건이었다.
〈내가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위사가 조롱하기에 곧 일백 운을 지어 해명하다〔渭師嘲余不喜作詩 輒以一百韻解之〕〉는 1840년(헌종6, 34세)경에 지은 시로 보인다. 위사는 김상현(金尙鉉)의 자이다. 앞서 ‘30세 이후로는 10년 동안에 한두 수를 짓기도 했으나’라는 김윤식의 언급을 소개하였지만, 김윤식의 언급과 달리 환재는 1840년을 전후한 무렵에 이 작품을 위시하여 활발한 시작활동을 재개하였고 그 시들이 《환재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5언 200구의 장편으로 환재가 남긴 가장 긴 시이다. 시의 본질 및 기능, 역사에 대해 읊은 내용이 있어 환재의 시관(詩觀)을 엿볼 수 있다.
〈늦가을에 연재ㆍ소정ㆍ경대와 함께……가고 오는 중에 고체 근체 모두7수를짓다〔秋晩同淵齋邵亭經臺……往返得古近體凡七首〕〉는 1840년(헌종6, 34세)경에 지은 시로 보인다. 연재(淵齋)는 윤종의(尹宗儀), 소정(邵亭)은 김영작(金永爵), 경대(經臺)는 김상현(金尙鉉)의 호이다. 승가사(僧伽寺)는 구기동 북한산에 있는 절이다. 이 시는 환재가 당시 교유했던 인물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은퇴한 풍석 서 상서께 드리다〔呈徐楓石致政尙書〕〉는 1840년(헌종6, 34세)경에 지은 시로 보인다. 서 상서는 서유구(徐有榘)를 지칭한다. 1840년을 전후한 무렵에 환재가 서유구를 종유한 사실은 19세기 실학의 계승과 발전 양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시에서 환재는 서유구의 자연경실(自然經室)에서 연암(燕岩)에 관한 회고담을 듣던 광경을 노래하였는데, 서유구가 연암의 문학론의 핵심이 법고창신(法古創新)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뒤에 이어지는 〈의고시를 풍석암께 드리다〔擬古呈楓石庵〕〉도 편차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한편, 환재가 만년에 거처하기 위해 마련한 두릉(斗陵)의 집은 서유구가 만년에 머물던 곳이기도 하였다(卷9 〈與尹士淵 7〉 참조).
〈신유년 정월 6일에 학초서실에 모여서……우선 장구를 남겨서 여러 친구들과 작별하였다〔辛酉孟春之六日集鶴樵書室……聊以長句留別諸公〕〉는 1861년(철종12, 55세) 1월 6일에 지은 것으로, 열하 문안사로 1차 연행을 떠나기 며칠 전에 지은 작품이다. 학초서실(鶴樵書室)은 안응수(安膺壽, 1804~1871)의 서실이다. 서양의 침략에 직면한 중화 문명을 바라보는 환재의 인식과 열하 일대를 찾아가겠다는 기대와 다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신유년 3월 28일에 심중복 병성과……〔辛酉暮春二十有八日 與沈仲復秉成……〕〉라는 시는, 1861년(철종12, 55세) 3월 28일에 북경에서 교유한 인사들과 고염무의 사당을 참배하고 자인사(慈仁寺)에서 술을 마신 며칠 뒤에 쓴 시이다. 5언 160구의 장편시로, 북경을 찾은 감회를 묘사하고 서양의 침략에 직면한 중국의 정세를 염려하며, 함께 대적할 결의를 다진 내용이다. 한편, 환재는 귀국한 뒤 이때의 모임을 회고하며 화공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고사음복도(顧祠飮福圖)〉라는 이름을 붙이고, 〈고사음복도에 쓴 글〔題顧祠飮福圖〕〉을 지었다(卷11).
〈완정복호도에 쓰다〔題完貞伏虎圖〕〉는 1861년(철종12, 55세) 4월에 북경에서 지은 32구의 고시이다. 〈완정복호도〉는 황운혹이 그의 5대조 모친 담씨(談氏)의 은덕을 기리고자 그린 그림인데, 황운혹이 중국의 교유 인물들에게 시문을 얻고, 또 환재에게 부탁하여 조선의 벗들에게도 시문을 요청하였다. 그림의 내력을 소개한 황운혹의 〈완정복호도집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다〔完貞伏虎圖集略述〕〉에 의하면, 일찍 과부가 된 담씨는 친척의 개가 권유를 물리친 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깊은 산중에 숨어 살았는데, 범이 며칠씩이나 집 근처에서 울부짖으며 떠나지 않자 담씨가 범을 타일러 물러가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마침내 황씨(黃氏)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환재와 함께 연행한 정사(正史) 조휘림(趙徽林)과 서장관 신철구(申轍求)도 시를 남겼고, 또 김상현(金尙鉉)ㆍ이기호(李基鎬)ㆍ허전(許傳) 등 총 8명의 조선 인사들이 시를 지어 보냈으며, 중국과 조선 문인의 시문을 모아 황운혹은 《완정복호도집(完貞伏虎圖集)》을 편찬하였다. 《완정복호도집》의 편찬은 19세기 한중 문학교류사에서 특기할 만한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주-D003
〈손수 그린 증서도에 써서 심중복과 작별하며 주다〔題手畫贈書圖 贈別沈仲復〕〉 역시 1861년(철종12, 55세) 1차 연행 때 북경에서 심병성에게 지어준 시이다. 이 시의 뒤에 붙은 원주를 참고하면, 북경의 팔영루(八詠樓)에서 심병성을 만났을 때 심병성이 육구몽(陸龜蒙)의 《입택총서(笠澤叢書)》를 선물하며 증서도를 그려달라고 하자 환재가 증서도를 그리고 이에 붙인 시이다.
〈신유년 단오 다음 날에 중복ㆍ하거ㆍ연추가 찾아와 작별하였는데……절구 2수를 지어 그 뜻에 따르다〔辛酉端陽翌日仲復霞擧硏秋來別……爲二絶副其意〕〉 역시 1861년(철종12, 55세) 1차 연행 때 북경에서 벗들과 이별하면서 왕헌과 동문환에게 지어 준 것으로, 이별의 아쉬움과 다시 만날 기약을 드러냈다.
〈임술년 8월 보름에……윤사연 태수의 잔치에 참여하다〔壬戌仲秋之望……赴尹士淵太守之約〕〉는 1862년(철종13, 56세) 8월에 지은 시이다. 당시 김포 군수(金浦郡守) 윤종의의 초대를 받아 윤8월 13일에서 16일까지 신석우(申錫愚)ㆍ조면호(趙冕鎬)ㆍ장조(張照)와 함께 한강의 서강(西江)에서 출발하여 김포까지 다녀오는 뱃놀이를 했는데, 이때 지은 시이다. 김포 유람의 경위는 신석우의 《해장집(海藏集)》 권12의 〈금릉유기(金陵遊記)〉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한편, 〈윤사연에게 보내는 편지〔與尹士淵〕 5〉(卷9)는 이 유람을 마치고 돌아와 보낸 편지이다.
권4는 잡저(雜著) 15편과 서(序)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첫머리에 박선수가 《환재집》을 교정하며 붙인 논평이 있는데, 환재의 글 가운데 종류별로 모을 수 없거나 한두 편에 불과하여 권(卷)으로 묶을 수 없는 작품들은 《한창려집(韓昌黎集)》과 《방정학집(方正學集)》의 예에 따라 잡저로 엮어서 문(文)의 첫머리에 싣는다고 하였다.
잡저 첫 부분의 〈천자는 친영하지 않는다는 데 대한 변증〔天子不親迎辨〉과 〈심의광의(深衣廣義)〉는 환재가 아우 박선수와 함께 편찬한 《거가잡복고》에서 뽑은 것이다. 《거가잡복고》는 사대부가 평상시 집에서 입는 각종 의복을 중심으로 고례(古禮)와 부합하는 이상적인 의관 제도에 관해 논한 저술로, 《환재총서》 4책에 수록되어 있다.
〈천자는 친영하지 않는다는 데 대한 변증〉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천자가 친영하지 않는다.’라고 한 구절을 대상으로 그 실상을 변증한 글이다. 천자는 지존이어서 대적할 이가 없으므로 친영하지 않는다는 학설이 좌씨(左氏)로부터 유래하였음을 지적하고, 당시에 천자가 제후국에 가서 직접 후비를 맞아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동성제후(同姓諸侯)인 노(魯)나라를 혼주(婚主)로 삼아 혼례를 주관케 했을 뿐만 아니라, 제후국의 입장에서도 도리상 천자가 몸소 왕림하는 것을 기다릴 수 없으므로 후비를 모시고 천자국에 가서 관사(館舍)에 유숙하면 천자가 그곳에서 친영하여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타당함을 논증하였다.
〈심의광의〉는 김윤식이 《거가잡복고》에 부록으로 실려 있던 것을 독립시킨 글이다. 환재는 1841년(헌종7, 35세)에 《거가잡복고》를 완성하고 서문을 붙였으므로, 이 글은 그 전에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예기》 〈심의(深衣)〉편의 뜻을 부연 설명하고,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상수학적 논리에 기반하여 심의에 깃든 법상(法象)과 문장(文章)과 제도(制度)를 천지와 자연의 운행원리에 맞춰 상통하는 숫자나 원칙을 발견하려 하였다. 뒷부분에는 군자가 심의를 입은 모습이 지닌 효용에 대해 서술하였다. 다소 작위적인 설명도 없지 않으나 사대부의 심의가 지닌 의미를 중요하게 부각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김덕수가 기전을 논하면서 의심한 것에 답함〔答金德叟論箕田存疑〕〉은 서간문의 형식을 빌어 의견을 개진한 논설문으로 1840년(헌종6, 34세)을 전후한 시기에 창작되었다. 김덕수는 김영작(金永爵)으로, 덕수는 그의 자이다. 김영작이 제기한 의문은 자료가 없어 확증할 수 없으나, 이 글을 토대로 살펴보면 평양의 정전(井田) 터는 바로 기자(箕子)의 도읍지이지 정전제의 자취가 아니라는 주장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환재는 그 주장이 매우 독창적임을 인정하면서도 그와는 반대로 고대 중국에서는 토지를 구획하면서 전토와 성읍과 도로를 함께 건설했으므로 평양의 정전은 도읍지이면서 정전이므로 김영작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기자가 조선으로 왔을 때 조선의 임금이 하사한 약간의 토지를 유민들과 함께 경작하며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므로, 기자의 궁궐은 마땅히 전토 사이에 있었을 것이고, 그 유적이 평양에만 국한된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평양의 정전이 기자가 시행한 토지 제도의 유적이라고 주장한 조부 연암의 〈기자전기(箕子田記)〉(《燕岩集》 卷16 《課農小抄》)의 내용을 계승하여 심화한 것이다.
〈지세의명병서〔地勢儀銘幷敍〕〉는 1850년(철종1, 44세)을 전후한 시기, 즉 용강 현령과 부안 현감으로 재직하던 무렵에 지세의(地勢儀 지구의)를 제작하고 붙인 명(銘)과 서문이다. 이 글은 윤종의의 《벽위신편(闢衛新編)》과 남병철의 《의기집설(儀器輯說)》에도 수록되어 있다. 서문에서 환재는 여러 서적의 고증을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설은 본래 동양에서 먼저 알았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지도 및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의 설을 참고하여 지세의를 제작했음을 밝히고, 세세한 기능을 설명하였다. 지세의를 읊은 명(銘) 뒤에는 풍지기(馮志沂)와 윤정현(尹定鉉)의 논평이 첨부되어 있다.
〈고려사 신 서인전에 실린 홍무황제의 성유를 베껴 쓴 데 대한 발문〔恭錄高麗史辛庶人傳所載洪武聖諭跋〕〉은 1848년(헌종14, 42세)에 《고려사》 〈신우전(辛禑傳)〉에 실린 명 태조의 성유(聖諭)를 읽고서 그 감동을 쓴 것이다. 《고려사》에 실린 명 태조의 성유가 속화문자〔白話〕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 오히려 진실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하고, 조선을 개국한 이 태조가 명 태조의 성유를 훌륭히 계승하였음을 서술하였다.
〈효정황태후의 화상을 다시 보수한 내력을 기록하다〔孝定皇太后畫像重繕恭記〕〉는 1876년(고종13, 70세) 8월에 쓴 기문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의 생모인 효정황태후(孝定皇太后)의 초상화의 유래와 전승과정 및 자신이 백금 50냥을 중국 지인에게 보내 화상을 보수하게 한 내력을 서술하였다. 신종이 황제에 등극한 뒤 생모의 모습을 관음보살의 모습으로 그려 자수사(慈壽寺)에 봉안하였는데, 환재는 1861년(철종12, 55세) 1차 사행 때 북경의 자수사에 들러 이 초상을 친견하면서 보존에 소홀하여 손상된 것에 가슴아파했고, 1866년(고종3, 60세)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백금 50냥을 보내 동문환(董文渙) 등에게 부탁하여 잘 보존되게 조치를 취하였다. 환재는 만력(萬曆) 연간의 태평 시대가 실제로는 효정황태후가 신종을 잘 계도한 데서 말미암았음을 특기하여 평소 간직한 강렬한 존명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한편, 효정태후의 화상 보수와 관련해서는 〈윤사연에게 보내는 편지 8〉과 〈홍일능에게 보내는 편지〉(卷9)도 참고가 된다.
〈안노원이 손수 모사한 신주전도에 대한 발문〔安魯源手摹神州全圖跋〕〉은 1853년(철종4, 47세) 11월에 문인 안기수(安基洙, 1817~?)가 모사한 중국지도인 〈신주전도〉에 붙인 발문이다. 안기수는 평안도 용강 출신으로, 환재가 용강 현령으로 있을 때 문인이 되었다. 지도 제작에 뛰어나 환재를 도와 조선의 지도인 〈동여도(東輿圖)〉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안기수가 모사한 〈신주전도〉가 정밀하고 섬세하여 《일통지(一統志)》에 비하더라도 손색이 없음을 높이 평가하였고, 모사한 지도의 원본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논증하였다.
〈대구 민충사 중건기〔大邱愍忠祠重建記〕〉는 대구 민충사의 건립과 훼철, 중건과정을 1857년(철종8, 51세)에 정리한 글이다. 환재가 경상도 암행 어사로 임무를 수행할 때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황선(黃璿)이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큰 공적을 세우고도 포상을 받지 못한 사실을 알고, 민충사를 복구하고 사액할 것을 조정에 주달한 내용이 〈경상좌도 암행 어사 때 올린 서계〔慶尙左道暗行御史書啓〕〉에 붙은 〈포계별단(褒啓別單)〉(卷7)에 보인다. 이후 관찰사로 부임한 신석우(申錫愚)가 백성들의 청원에 따라 민충사를 건립하게 되자, 환재는 이 글을 지어 황선 및 절도사 원필규(元弼揆)와 군관 이무실(李茂實)의 공을 기렸다.
〈고정림 선생이 일지록에서 그림을 논한 구절에 대한 발문〔錄顧亭林先生日知錄論畫跋〕〉은 1855년(철종6, 49세)에 고염무의 《일지록》 권21 〈그림〔畫〕〉을 읽고서, 그림이 지닌 의미에 대해 탐구한 글이다. 그림은 〈직공도(職工圖)〉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서 보듯이 문화를 대변하고 문헌고증의 자료가 되며 시대의 풍경을 모사하는 기능이 있음을 특기하고, 오직 진경(眞境)과 실사(實事)를 그려 실용(實用)으로 귀결되어야 올바른 ‘화학(畫學)’이 됨을 주장하였다.
〈진방 집안에 소장된 황명고명첩 뒤에 쓰다〔書陳芳家藏皇明誥命帖後〕〉는 1864년(고종1, 58세)에 진방(陳芳)에게 써 준 글이다. 진방이 자신의 조상이 받았던 고명(誥命)을 등사하여 집안 대대로 전하기 위해 글을 청하자, 환재는 그 고명이 만들어진 과정과 진방 집안이 명나라 명족으로서 명말에 우리나라로 피난 온 내력을 적어 증명의 자료로 삼도록 써 주었다.
〈진주 관고에 소장된 대명률의 뒤에 쓰다〔題晉州官庫所藏大明律卷後〕〉는 1862년(철종13, 56세)에 안핵사로 있으면서 조선 초에 간행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열람하고 그 내력에 대해 고증한 글이다. 이 책이 활자본과 목판본 2종이 있음을 알고서 목판본에 있는 발문을 근거로 처음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음을 추정하였고, ‘입적자위법조(立嫡子違法條)의 예를 들어 이 책이 원문을 이두로 풀이하면서 《대명률》의 내용을 보완하기도 했음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유용한 서적을 선비들이 독서하고 강구하지 않아 경세제민에 이바지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양 초산과 양 응산 두 선생의 유묵 뒤에 삼가 쓰다〔敬題楊椒山楊應山二先生遺墨後〕〉는 1872년(고종9, 66세) 2차 연행 때, 북경에서 예은령(倪恩齡)으로부터 명나라의 명신이었던 양계성(楊繼盛)과 양련(楊漣)의 필적을 빌려 보고 감흥을 적은 글이다. 윤정현은 환재의 이 글을 읽고 〈박환경이 두 양공의 유묵에 쓴 발문 뒤에 붙이다〔書朴瓛卿二楊公遺墨跋後〕〉라는 글을 짓기도 하였다(《梣溪遺稿 卷5》).
〈맹낙치의 화국첩에 쓰다〔題孟樂癡畫菊帖〕〉는 1874년(고종11, 68세) 11월에 맹영광(孟永光)의 국화그림에 쓴 화평(畫評)인데, 맹영광이 김상헌(金尙憲)에게 붉은 국화를 그려 준 일화를 소개하면서 맹영광 또한 존명의식을 지닌 인물임을 암시하였다.
〈용괴려의 팽계전기 뒤에 쓰다〔題龍槐廬彭溪傳奇後〕〉는 용계동(龍繼棟)이 지은 〈팽계전기(彭溪傳奇)〉를 읽고 쓴 발문이다. 역관 이용숙(李容肅)이 1876년(고종9)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팽계전기〉를 환재에게 전해 주었는데, 환재는 이 전기가 호남성(湖南省) 신녕현(新寧縣) 팽계촌(彭溪村) 장사꾼의 딸 강열녀(姜烈女)의 사적을 사관의 직필로 훌륭히 묘사하여 윤리를 부추기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소정유묵첩에 쓰다〔題邵亭遺墨帖〕〉는 1868년(고종5, 62세)에 소정(邵亭) 김영작(金永爵)이 남긴 유묵첩에 쓴 글이다. 김영작이 연행했을 때 교유한 오교(午橋) 장병염(張丙炎)이 김영작을 위해 지은 제문(祭文)을 전재하고, 중국의 인사들에게까지 인정받은 충심과 정성을 찬탄하였다.
〈거가잡복고 서문〔居家雜服攷序〕〉은 1841년(헌종7, 35세) 11월에 《거가잡복고》를 완성하고 붙인 서문이다. 서문에 따르면, 환재는 아우 박주수의 제안으로 저술에 착수하여 그와 협동 작업을 거쳐 1년 만인 1832년에 탈고하였는데,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고 아우마저 요절하여 원고를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다가 1841년에 서문을 붙여 세상에 공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하 2책 3권으로, 제1권은 사대부 남성의 복식을 논한 〈외복(外服)〉편이고, 제2권은 사대부 여성의 복식을 논한 〈내복(內服)〉편이며, 제3권은 남녀 아동의 복식을 논한 〈유복(幼服)〉편이다. 이 저술은 당시 의관 제도의 실상과 그 개혁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조부 연암의 지론인 의관 제도 개혁론을 계승하여 사대부 사회의 기풍을 혁신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문정공문초 서문〔文貞公文鈔序〕〉은 1845년(헌종11, 39세) 2월에 7대조 문정공 분서(汾西) 박미(朴瀰, 1592~1645)의 시문을 뽑아 《문정공문초》 10권을 편찬하면서 붙인 서문이다. 이 책은 집안에 소장되어 온 필적을 모아 묶은 것으로, 이미 간행된 《분서집(汾西集)》보다 규모가 작은 별본이다.
〈하충렬공관계변무록 서문〔河忠烈公貫系辨誣錄序〕〉은 하위지(河緯地)의 관향에 대한 논쟁의 시말을 정리하여 1876년(고종13)에 6권 3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한 《하충렬공관계변무록》에 쓴 서문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의 관향이 단계(丹溪)라는 설과 진주(晉州)라는 설이 수백 년 동안 논란이 되었는데, 하시철(河始徹)이 환재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자 환재는 예조 판서 홍석주(洪奭周)에게 이를 알렸고, 홍석주가 단계의 하시철과 진주의 하석중(河錫中)을 대질시켜 하위지의 본관을 단계로 판정하였다.
〈정강의공의 실기를 중간하는 데 써 준 서문〔重刊鄭剛義公實記序〕〉은 1874년(고종11, 68세)에 정희규(鄭熙奎)가 조상 강의공 정세아(鄭世雅)의 실기를 중간하는 데 써 준 서문이다. 정희규가 중간한 실기는 《호수선생실기(湖叟先生實記)》로 9권 2책의 목판본이다. 환재가 경상좌도 암행 어사로 임무를 수행할 때, 임진왜란에 공적을 세운 정세아와 권응수(權應銖)의 후손들이 공적을 독차지하고자 다투는 사태를 목도하였고, 나중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이 사건을 화해시킨 전말을 자세히 수록하였다.
〈규재집 서문〔圭齋集序〕〉은 1863년(고종1, 58세) 7월에 남병철(南秉哲)의 문집 《규재집》에 써 준 서문이다. 환재는 남병철이 뛰어난 자질과 통달한 식견을 지녔으나 문장을 짓는 일을 중시하지 않아 남은 원고가 소략함을 안타까워하였다. 또 말미에는 남병철이 편집한 《해경세초해(海鏡細草解)》, 《의기집설(儀器輯說)》, 《추보속해(推步續解)》를 환재가 중국에서 교유한 하거 왕헌(王軒)에게 보낸다고 했는데, 〈중복 심병성에게 보내는 편지 6〉(卷10)에도 그 내용이 보인다.
〈둔오집 서문〔屯塢集序〕〉은 1872년(고종9, 66세)에 함경도의 저명한 주자학자였던 임종칠(林宗七, 1781~1859)의 문집인 《둔오집》에 써 준 서문이다. 환재는 이정리(李正履)를 통해 임종칠이 관북 지방에서 추앙받는 선비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문집을 읽고서 그가 관북 지방에서 몸을 수양하며 백성들을 도로써 가르친 행적이 관직에 나아간 사대부들보다 못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68세부터 죽을 때까지 하루의 일과는 물론 독서하며 깨달은 바를 모두 기록한 《일적(日籍)》 8편이 있음을 특기하였다.
〈서귀집 서문〔西歸集序〕〉은 1876년(고종13, 70세)에 이기발(李起浡, 1602~1662)의 문집인 《서귀집》에 써 준 서문이다. 환재는 이기발과 이흥발 형제가 병자호란 때에 척화를 주장하였고, 이후 은거하여 평생 명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적을 서술하고, 숭정(崇禎) 말년의 명청 교체기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배신(陪臣)과 의리를 지킨 유민(遺民)이 우리나라만큼 많은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을 특기하여 투철한 존명사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었다.
권5에는 제문 3편, 신도비명 1편, 묘갈명 2편, 묘지명 3편, 시장(諡狀) 2편이 수록되어 있다.
〈북해 조공에 대한 제문〔祭北海趙公文〕〉은 1830년(순조30, 24세) 2월에 북해(北海) 조종영(趙鍾永)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어린 나이 때부터 자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주고,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어 수시로 자신을 격려해 주었던 조종영과의 추억을 비통한 심정으로 서술하였다.
〈외구 이공에 대한 제문〔祭外舅李公文〕〉은 1849년(헌종15, 43세)에 장인 이준수(李俊秀, 1778~1848)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이 글은 제문의 상투적인 형식을 넘어, 선비의 본분을 지켜 청빈하고 곤궁한 삶을 살았고 통달한 식견으로 세상의 명리에 초연했던 장인의 모습을 탁월하게 그려낸 명문으로 평가받는다.
〈선조 호장공의 묘를 배알하며 올린 글〔謁先祖戶長公墓文〕〉은 1851년(철종2, 45세)에 나주에 있는 반남 박씨의 시조 박응주(朴應珠)의 묘소를 배알하고 올린 제문이다. 조상의 훌륭한 덕행을 추모하고, 후사를 잇도록 자식을 점지해 달라는 간곡한 심정을 표하였다.
〈충정공 박심문 신도비명〔忠貞朴公審問神道碑銘〕〉은 1871년(고종8, 65세) 3월에 박심문(朴審問, 1408~1456)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가 내리자 지은 신도비명이다.
〈성균 생원 하군 묘갈명〔成均生員河君墓碣銘〕〉은 하치룡(河致龍, 1803~1865)을 위해 지은 묘갈명이다. 하치룡의 본관은 단계(丹溪)이고, 자는 운경(雲卿)이다. 앞의 〈하충렬공관계변무록 서문〉에 보이는 하위지의 관향에 대한 논쟁도 함께 거론하였다.
〈홍 처사 묘갈명〔洪處士墓碣銘〕〉은 1849년(헌종15, 43세)에 처사 홍임제(洪任濟, 1727~1786)를 위해 지은 묘갈명이다. 홍임제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경윤(景尹)이다.
〈이조 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윤공 행임의 묘지명〔吏曹判書贈領議政尹公行恁墓誌銘〕〉은 1861년(철종12, 55세)에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 영의정에 추증되자 그의 아들 윤정현(尹定鉉)의 요청을 받고 지은 글이다. 3700여 자에 달하는 역작으로, 윤정현이 지은 행장을 바탕으로 하되 이를 대폭 개작하여 한 편의 독립적인 예술 산문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서 석사 묘지명(徐石史墓誌銘)〉은 1875년(고종12, 69세)에 기사(奇士) 서미(徐湄, 1785~1850)를 위해 지은 묘지명이다. 시인으로 명성이 있었고 충효와 절의를 숭상하였으며, 당대의 공경과 여항인에 이르기까지 교유가 넓었던 서미의 모습과 환재가 어려서 《이소(離騷)》를 읽으면서 겪었던 일화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술하였다.
〈처사 칙천 신공의 묘지명〔處士淔泉申公墓誌銘〕〉은 1859년(철종10, 53세)에 처사 신교선(申敎善, 1786~1858)을 위해 지은 묘지명으로, 신교선의 장남 신기영(申耆永)의 요청을 받고 지었다. 신교선이 젊어서부터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으나 부친 신귀조(申龜朝)가 조정의 탄핵을 만나 칩거하자 벼슬을 단념한 채 부친을 봉양한 사실과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두릉(斗陵)에 은거하여 생을 마친 모습을 서술하였다.
〈예조 판서 신공 시장〔禮曹判書申公謚狀〕〉은 1875년(고종12, 69세)에 절친한 벗 신석우(申錫愚)의 시호를 청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영의정으로 치사한 봉조하 조공의 시장〔領議政致仕奉朝賀趙公謚狀〕〉은 1874년(고종11, 68세)에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의 시호를 청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권6은 헌의(獻議) 5편과 소차(疏箚) 12편이다. 소차에는, ‘사직하며 올린 의례적인 소는 모두 싣지 않았다’는 박선수의 언급이 있다.
〈헌종대왕을 부묘할 때, 진종대왕을 조천하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에 대한 논의〔憲宗大王祔廟時眞宗大王祧遷當否議〕〉는 1851년(철종2, 45세) 6월에 지은 글로, 헌종대왕을 부묘할 때 진종대왕을 조천(祧遷)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진술한 글이다. 진종대왕은 영조의 맏아들로, 1724년(영조 즉위년)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 나이 10세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환재는 철종이 헌종을 이었으므로 종통의 막중함으로나 예묘를 존숭하는 예법 및 정조의 교지와 선정신들의 정론에 근거가 분명하므로 진종은 마땅히 조천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묘사의 대향에 서계와 이의를 옮겨서 거행하는 데 대한 논의〔廟社大享誓戒肄儀移行議〕〉는 1865년(고종2, 59세) 6월 12일에 올린 글이다. 당시 환재는 예조 판서로서 서계(誓戒)와 이의(肄儀)를 만약 묘사(廟社)의 대문 안에서 거행한다면 위차(位次)와 진설(陳設)이 매우 부대끼고, 또 제사를 거행하기 전에 소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그 장소를 의정부와 예조로 옮겨 거행하자고 요청한 글이다.
〈만동묘의 의절을 강정하는 데 대한 논의〔萬東廟儀節講定議〕〉는 1874년(고종11, 68세) 9월에 지어 올린 글이다. 서원 정비 정책에 따라 1865년에 철폐되었던 만동묘가 임헌회(任憲晦)ㆍ이항로(李恒老)ㆍ최익현(崔益鉉) 등의 상소로 1873년에 다시 건립되자, 환재는 어명에 따라 우의정으로서 제사를 지낼 날짜와 격식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였다. 전반부에는 만동묘가 건립된 의의와 이미 국가의 사전(祀典)으로 승격되었으면 그에 맞는 절문(節文)과 의물(儀物)이 있어야 함을 서술하였다. 이어 만동묘와 대보단에서 따로 제향을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대보단의 제향을 늦봄에 시행하고 만동묘의 제향을 늦가을에 시행하여 제사가 중첩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말미에는 대제학 때 지은 축문을 실어 놓았다.
〈청전을 혁파한 후에 폐단을 구제할 조치에 대한 논의〔淸錢革罷後 措畫救弊議〕〉는 1874년(고종11, 68세) 1월 13일에 청전(淸錢)의 수입을 금지한 조치와 관련하여 화폐 정책을 논한 글이다. 주석에는 ‘갑술년(1874) 정월 13일 어전에 올린 계사’라는 언급이 붙어 있다. 청전은 청나라에서 무역해 와 통용시킨 돈으로, 연전(燕錢)이라고도 한다. 전반부에서는 청전 유입에 따른 각종 병폐를 서술하였고, 후반부에서는 청전이 혁파될 것이란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익을 도모하는 모리배를 처벌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말미에는 청전 혁파에 따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강화도의 군량미를 비축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沁都兵餉措畫議〕〉는 1874년(고종11, 68세) 이후에 지은 글로 강화도의 군량확보 방안을 강구하라는 임금의 자문에 응대하여 올린 글이다. 서양 오랑캐의 방비를 위해 강화도에 군사를 두는 것이 급선무이고, 원활한 납부를 위해 결역(結役)과 같은 번다한 명목을 혁파하여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이 좋은 방안임을 건의하였다.
〈기구를 설치하여 환향을 정리하기를 요청하는 소〔請設局整釐還餉疏〕〉는 1862년(철종13, 56세) 5월에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을 설치하여 환향(還餉)을 정리할 것을 촉구한 상소이다. 진주농민항쟁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파견되어 임무를 마치고 지어 올린 글로, 진주농민항쟁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1차 자료의 하나로 간주된다. 환정을 시급히 개혁하지 않으면 장차 내우외환에 직면하여 나라가 망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환정의 폐단이 극에 달한 지금이야말로 개혁의 호기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전담할 기구의 설치를 건의했다. 또 환곡 문제 해결을 위해 광범한 여론을 수렴하고 개혁을 위한 세부 지침인 ‘절목(節目)’을 법제화하여, 한 도에서부터 전국으로 점진적으로 확대 시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우부승지의 소명을 어긴 후에 올린 자핵소〔右副承旨違召後自劾疏〕〉는 1862년(철종13, 56세) 윤8월에 우부승지에 임명되자 자신의 허물을 자책하며 올린 사직 상소이다. 환재가 진주농민항쟁을 조사하여 올린 장계가 5월 22일 조정에 도착했는데, 진주 민란의 주도층으로 경상도 양반 사족층을 지목한 것이 영남 사림 및 조정 관료들의 반발을 자아냈고 또 옥사를 맡아 3개월 동안 지나치게 온건한 쪽으로 처벌한 점을 들어 환재에게 간삭(刊削)의 율을 시행해야 한다고 비변사에서 상주하였다. 철종은 비변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환재에게 삭직 처분을 내렸다가 윤8월 초에 다시 우부승지로 임명하였다. 환재는 안핵사 활동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자핵소를 올려 자신의 장계로 인해 야기된 물의를 해명하고 사직을 청하였다.
〈예문 제학을 사직하는 소〔辭藝文提學疏〕〉는 1864년(고종1, 58세) 4월 22일에 예문관 제학을 사직하며 올린 소이다. 환재는 고종이 즉위하는 해에 품계가 경(卿)에 오르고 벼슬이 여러 차례 내린 것이 분수에 편안하지 못함을 서술하고, 문장에 재주가 없어 예문관의 적임자가 아님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만동묘를 철폐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는 소〔請還寢萬東廟停撤疏〕〉는 1865년(고종2, 59세) 4월경에 올린 상소이다. 환재는 제향을 정지하고 만동묘를 철폐하라는 신정왕후의 명을 듣고, 만동묘를 설치하게 된 연유와 건립과정 및 중국에서 제향해 온 사례를 자세히 서술하여 훼철이 불가한 이유를 밝혔다.
〈특별히 정헌대부에 가자한 것을 거두어 달라는 소〔辭特加正憲疏〕〉는 1866년(고종3, 60세) 8월 17일에 정헌대부를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이다. 1866년 평양에서 발생한 제너럴셔먼호의 사태를 자세히 진술하고, 이 사태로 포상을 받아 정헌대부에 오른 것이 사리에 부당함을 들어 사직을 요청하였다.
〈대제학을 사직하며 올린 소〔辭大提學疏〕〉는 1871년(고종8, 65세) 11월에 예문관 대제학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이다. 문장의 도(道)에 ‘경세지문(經世之文)’과 ‘수세지문(需世之文)’이 있음을 거론하고, 자신은 이 두 가지에 모두 적임자가 아님을 들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각 제학의 사직을 요청하는 차자〔乞解內閣提學箚〕〉는 1873년(고종10, 67세) 12월 13일에 규장각 제학을 사직하며 올린 차자이다.
〈빈대 때에 어전에 올린 계사〔賓對上殿啓〕 1〉은 1873년(고종10, 67세) 12월 24일에 빈대(賓對)에서 고종에게 올린 계사(啓辭)이다. 빈대는 차대(次對)라고도 하여 매월 여섯 차례 정부의 당상(堂上)ㆍ대간(臺諫)ㆍ옥당(玉堂) 등이 빈청에 입시하여 중요한 정무를 상주하는 일을 말한다. 빈청은 조선 시대 궁궐 내에 설치한 고관들의 회의실이다. 제목의 ‘上殿啓’는 전폐(殿陛)에 올린 계사라는 뜻이다. 고종이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 거둥하여 빈대를 행할 때, 환재는 우의정으로 참여하였다. 환재는 다스림의 요체는 조종조의 정치를 본받는 것이 중요함을 전제한 후, 정치의 현안을 진달케 하여 함께 토론함으로써 치도(治道)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경연을 적극 활용해야 함을 진달하였다.
〈빈대 때에 어전에 올린 계사 2〉는 1874년(고종11, 68세) 1월 13일에 빈대에서 고종에게 올린 계사이다. 환재는 빈대에 우의정으로 참여하였다. 태조와 선왕들이 백성을 보호하려 노력한 일념을 본받아, 창업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선왕들의 절검을 이어 받아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실효가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함을 진달하였다.
〈빈대 때에 어전에 올린 계사 3〉은 1874년(고종11) 5월에서 6월 사이에 빈대에서 고종에게 올린 계사이다. 요순 시대를 본받고자 한다면 예의의 교화와 탁월한 행실을 본보기로 보여 백성들에게 달려갈 곳을 보여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아울러 자신처럼 녹봉만 축내는 자를 가장 먼저 내치는 것이 염치를 권장하는 도리가 될 것이라는 말로 사직을 청하였다.
〈빈대 때에 어전에 올린 계사 4〉는 1874년(고종11) 6월 9일에 빈대에서 고종에게 올린 계사이다. 환재는 빈대에 우의정으로 참여하였다. 혜패(慧孛)가 나타나고 비가 연달은 재해를 계기로 임금이 더욱 수성(修省)에 힘써야 한다고 상주하였다. 계사의 끝부분에는 김윤식의 부기가 있는데, 빈대에 참여할 때 차자를 읽는 외에 더 자세히 진술하지 말기를 청한 사알(司謁)에 대해 환재가 처벌을 청하였다는 내용이다.
〈우의정의 면직을 청하며 올린 소〔乞解右議政疏〕〉 1, 2는 1874년(고종11, 68세) 9월 7일과 12일에 우의정의 사직을 청하며 올린 소이다.
〈소유의 처벌을 참작해 달라고 청한 두 번째 연명 차자〔請疏儒裁處聯名第二箚子〕〉는 1875년(고종12, 69세) 5월경에 대원군의 운현궁 복귀를 촉구하는 상소를 주도한 유생들에 대해 감형을 요청하며 올린 연명 차자이다. 1873년(고종10)에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벼슬에서 물러난 대원군이 양주(楊州)의 직곡산장(直谷山莊)에 머물게 되자, 1875년 2월에 이순영(李純榮)과 서석보(徐奭輔) 등이 상소하여 대원군의 복귀를 촉구하며 무례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가 조야에 큰 반향을 일으켜 이들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5월 17일에 의금부에서 이들을 목숨만은 살려주어 이순영을 전라도 나주목 지도(智島), 서석보를 영광군 임자도(荏子島)에 유배 보내기를 청하여 윤허를 얻었다.
〈상의하여 형벌을 결정하라는 비지가 환수된 후에 올린 연명 차자〔相議定律批旨還收後聯名箚子〕〉는 앞의 차자를 올린 얼마 후에 다시 올린 연명 차자이다. 처음에 경연에서 소유(疏儒)의 처벌을 논하면서 고종이 지엄한 하교를 내렸는데, 대신들은 이 하교가 유생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며 다시는 번거롭게 떠들지 못하도록 한 의도라고 이해하였다. 그런데 이어 대신들이 함께 논의하여 형률을 정하라는 비지가 내리자 대신들이 더욱 당황스러워 하였다. 이에 형률을 논의하는 중에 임금의 의중을 자세히 따지지도 않고 묵묵히 물러나 소임을 다하지 못한 환재 자신을 포함한 대신들을 한꺼번에 내쳐서 경각심을 일깨우기를 청하는 내용이다.
〈수원 유수의 면직을 요청하는 소〔乞解水原留守疏〕〉는 1876년(고종13, 70세) 12월 25일에 수원 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의 사직을 청하며 올린 사직소이다. 원인 모를 질병이 백여 일이나 지속되고, 더욱이 큰 흉년을 만나 백성을 구휼하는 급무를 처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제목에 붙은 원주에, 이 소를 올린 사흘 뒤에 환재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환재는 12월 27일에 서울 북부(北部) 재동(齋洞)에서 세상을 떠났다.
권7에는 윤음(綸音) 1편, 발문(跋文) 5편, 자문(咨文) 7편, 서계(書啓) 1편 및 포계별단(褒啓別單)이 수록되어 있다.
〈재해를 입은 영남과 호남의 백성을 위유하는 윤음〔慰諭嶺湖被災人綸音〕〉은 1865년(고종2, 59세) 8월에 지은 것이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이삼현(李參鉉)이 태풍과 홍수로 인한 피해 상황을 보고하자, 수렴청정 중이던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이 보고를 받고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백성을 위유할 윤음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여, 예문관 제학으로 있던 환재가 지어 올린 것이다.
〈법선도의 발문〔法善圖跋〕〉은 1864년(고종1, 58세) 11월에 지었다. 《법선도(法善圖)》는 법도와 경계로 삼을 만한 역대 제왕들의 훌륭한 행적을 뽑아 이를 그림으로 그려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을 지어 올릴 사람으로 총 16명이 낙점되었는데, 환재가 포함되었다. 송나라 인종(仁宗)이 한밤중에 구운 양고기를 먹고 싶은 생각이 났다가 후대에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길 것을 걱정하여 먹지 않았다는 고사를 인용한 뒤, 막 왕위에 오른 고종에게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펼칠 것을 당부하였다. 《법선도》에 대해서는 《임하필기(林下筆記)》 권27에 실린 〈법선도에 대한 설〔法善圖說〕〉이 참고가 된다.
〈인심도심도의 발문〔人心道心圖跋〕〉 역시 1864년(고종1, 58세) 11월에 지었다. 11월 26일에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에서 권강(勸講)할 때에 고종이 강관(講官)에게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뜻을 물은 뒤, 〈인심도심도〉를 첩(帖)으로 만들고 《법선도》의 서문을 쓴 신하들에게 모두 〈인심도심도〉의 서문을 써서 올릴 것을 명하였다. 환재는 인심과 도심을 정의한 뒤, 요(堯)ㆍ순(舜)ㆍ우(禹)가 서로 전한 ‘위미정일(危微精一)’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려 한 고종의 통치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찬양하였다.
〈선원보략의 발문 1〔璿源譜略跋文〕〉은 환재가 우의정으로 있던 1874년(고종11, 68세) 5월에 원자인 순종(純宗)의 탄생 백일을 맞이하여 개수한 《선원보략》에 붙인 발문이다. 《선원보략》은 조선 왕실의 보첩인 《선원록(璿源錄)》을 간략하게 기록한 책으로, 정식 명칭은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이다. 1679년(숙종5)에 종친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 1640~1699)에 의해 개인적으로 작성되었고 이후 《선원록》을 대신하는 왕실 족보로 19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개수되고 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정되고 증보된 내용을 각각의 발문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환재는 《선원보략》을 새로 만들게 된 경위를 간략히 기록한 뒤, 원자의 교육에 정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선원보략의 발문 2〉는 1875년(고종12, 69세) 5월에 원자의 세자 책봉례(世子冊封禮)를 거행한 뒤 《선원보략》을 개수하고 붙인 발문이다. 환재는 당시 우의정에서 물러나 있던 상황이었다. 서두에서는 어린 세자가 늠름한 모습으로 책봉례를 치른 것을 경하하고, 세자의 교육에 정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선원보략의 발문 3〉은 1876년(고종13, 70세) 1월에 효명세자에게 익종(翼宗)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신정왕후에게 융목(隆穆)이라는 존호를 올린 뒤 《선원보략》을 개수하고 붙인 발문이다. 익종이 대리청정 기간에 보여준 훌륭한 정치는 후세 왕들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이어 신정왕후가 익종의 비(妃)로서 훌륭히 내조한 사실을 칭찬하고 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태산과 반석에 올려놓았다고 찬양하였다.
자문(咨文)은 총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주석에 의하면, 환재의 자문은 총 15편인데 서양 선박 사건과 관련된 자문 7편만 수록했다고 하였다. 서양 선박과 관련된 환재의 자문은 1866년(고종3, 60세)부터 1871년(고종8) 사이에 지은 것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및 병인양요, 와츄세트호 및 셰난도어호의 내항과 회항, 오페르트 사건, 신미양요 등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으며, 당시 환재의 정치적 활동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글이다.
첫 번째 자문 〈미국인의 조회에 대한 황해도 관찰사의 모의 답서〔擬黃海道觀察使答美國人照會〕〉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1866년(고종3, 60세) 12월에 지은 것이다. 1866년 7월에 발생한 제너럴셔먼호 사건 뒤 미국은 와츄세트호를 조선으로 파견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생존 선원을 인수해 오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와츄세트호의 함장 슈펠트가 황해도 장연(長淵) 앞바다에 와서 조선 정부에 조회(照會 공문서)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가 성과 없이 철수하였다. 와츄세트호의 회항 소식을 접한 환재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조선의 입장을 해명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황해도 관찰사 박승휘(朴承輝)의 입장이 되어 이 모의 답서를 작성하였다. 환재는 표류한 외국 선원을 안전하게 송환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임을 밝혔는데, 이는 슈펠트가 보낸 조회에서 자국의 서프라이즈호 선원 송환에 대해 감사를 표한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또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발생 원인이 제너럴셔먼호 측의 잘못된 행동에 있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환재의 이 글은 원래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가 아니었으나, 뒤에 제너럴셔먼호 사건 진상에 관한 조선 정부의 견해를 대변하는 문서로 채택되어 미국 측에 전달되었다.
〈미국 사신이 의혹을 품지 않도록 타일러주기를 청하는 자문〔請開諭美國使臣勿致疑怪咨〕〉은 1868년(고종5, 62세) 3월에 지은 것이다. 1868년 3월 13일에 조선 정부는 중국 예부(禮部)에서 보낸 자문을 접수했는데, 영국과 미국 측에서 제너럴셔먼호 생존 선원의 구출을 요청하며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낸 조회 내용을 전하고 나서, 서양인의 조선 억류설에 관해 해명하는 답서를 보내도록 조선에 권하는 내용이었다. 조선 정부는 곧 회자(回咨)를 작성하여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환재의 이 글이 바로 그 회자이다. 서두에서 1866년(고종3) 12월에 와츄세트호가 황해도 장연현에 정박했다가 돌아간 것에 대해 해명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생존한 미국 선원이 조선에 억류되어 있다는 설은 전혀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또 제너럴셔먼호의 선원 생존설을 퍼트린 김자평(金子平)을 체포해 처벌하겠다는 뜻을 전하며, 와츄세트호의 수로 안내인으로 왔다가 김자평에게서 제너럴셔먼호의 선원이 생존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중국 측에 유포한 우문태(宇文泰)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하여 선원 생존설이 거짓임을 밝혀줄 것을 중국 측에 요청하였다.
〈미국 병선이 돌아갔으니 먼 곳 사람의 의심을 풀어주도록 요청한 자문〔美國兵船回去請使遠人釋疑咨〕〉은 1868년(고종5, 62세) 4월에 지은 것이다. 미국 병선은 1868년 3월 18일에 조선에 모습을 드러내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접경 해역을 오르내리면서 평양에 억류된 것으로 알려진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다가 4월 26일에 회항한 미국 군함 셰난도어호를 말한다. 이 자문은 셰난도어호가 회항한 직후 작성된 것으로, 셰난도어호의 내항과 회항에 관한 자세한 사실을 중국 측에 전하고 있다. 또 제너럴셔먼호 선원 생존설을 퍼뜨린 김자평을 효수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서양 선박의 정황에 대해 진술하는 자문〔陳洋舶情形咨〕〉 1, 2 두 편은 1868년(고종5, 62세) 윤4월 2일 이후 어느 시점에 지은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이른바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전말을 중국 예부(禮部)에 전하고, 이 사건이 현지 지리에 밝은 천주교도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였다. 또 조선인 천주교도 7명이 서양인과 내통하여 중국에 잠입해 있고 지금까지 서양 선박으로 인한 소요는 모두 이들이 빚어낸 것임을 주장하면서,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압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봉함을 전달해 준 것에 대해 답하는 자문〔美國封函轉遞咨〕〉은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인 1871년(고종8, 65세) 4월에 지은 것이다. 1871년 1월 17일에 북경 주재 미국 공사 로우는 조선 국왕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고, 중국의 총리아문에 나아가 이 편지를 조선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중국이 자문과 함께 미국의 봉함(封函)을 조선 측에 전달해 주었는데, 환재의 이 자문은 여기에 대한 회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로우의 편지 내용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겠다는 것과 차후 자국 선원이 표류했을 때의 안전한 호송에 대해 협상하자는 것이었다. 환재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이미 해명했음을 밝히고 이어 사대질서를 내세워 로우의 협상 제의를 거부했는데, 《예기》의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조선 국왕은 중국 황제의 신하이기 때문에 사대의 의리상 어떤 외국과도 직접 교섭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마지막 자문인 〈미국 병선이 일으킨 소요를 알리는 자문〔美國兵船滋擾咨〕〉은 1871년(고종8, 65세) 5월 신미양요 직후에 지은 것으로, 신미양요를 총결산한 대단히 중요한 자문이다. 환재는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신미양요의 전말을 상세히 밝혔다. 미국 측의 행동이 난폭했음을 성토하는 한편, 손돌목에서 선제공격을 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이 정당했음을 주장했다.
서계(書啓)는 〈경상좌도 암행 어사 때 올린 서계〔慶尙左道暗行御史書啓〕〉와 〈포계별단(褒啓別單)〉으로 이루어져 있다. 환재는 1854년(철종5, 48세) 1월 4일에 경상좌도 암행 어사로 임명되었고 11월에 암행 어사 활동의 결과를 보고한 《수계(繡啓)》 2책을 작성하였는데, 《환재총서(瓛齋叢書)》 5책에 전체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수계》 제1책은 경상도 관찰사 김학성(金學性)을 비롯한 전현직 지방관들의 잘잘못을 조사해 보고한 내용이다. 제2책은 환정(還政)을 중심으로 전결(田結)ㆍ조운(漕運)ㆍ우전(郵傳)ㆍ염정(鹽井) 등의 폐단에 대한 개선책과 충신ㆍ효자ㆍ열녀에 대한 포상을 건의하고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천거한 별단(別單)이다. 진주농민항쟁이 발발하기 수년 전 영남 지방의 민정과 시정(施政)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환재의 내정 개혁론이 드러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환재집》에 수록된 〈경상좌도 암행 어사 때 올린 서계〉는 《수계》의 서문이다. 또 《수계》 제2책의 별단의 일부가 〈포계별단〉으로 《환재집》에 첨부되어 있다. 김윤식은, 환재가 《수계》 별단에서 제시한 내용은 당시의 병폐를 구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나 영남 지역에 대한 정책이 지난날과 크게 달라져 더이상 시의적절치 않으므로 충신ㆍ효자ㆍ열녀의 포상을 건의하고 인재를 발굴한 조목만 추려서 기록한다고 하였다.
〈경상좌도 암행 어사 때 올린 서계〉에서 환재는 1854년에 경상좌도 암행 어사로 임명될 때 받은 성지(聖旨)의 내용을 옮겨 적고, 암행 어사로서 수행한 임무를 모두 《수계》에 기록해 아뢴다는 것을 밝혔다. 〈포계별단〉은 이인좌의 난에 경상도 관찰사로서 공을 세운 황선(黃璿),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도 포상이 미흡한 윤흥신(尹興信)과 조영규(趙英圭), 의병을 일으킨 김호의(金好義),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군으로 침략해 왔다가 귀화한 김충선(金忠善)의 후손 등에게 적절한 포상을 내리기를 청하고, 효자 4명, 효녀 1명, 열부(烈婦) 7명의 행적을 기록해 포상을 청하였으며, 안동(安東)의 유학(幼學) 유형진(柳衡鎭), 대구(大邱)의 유학 최효술(崔孝述), 대구의 전(前) 첨사(僉使) 손해진(孫海振) 등 인재 3명을 천거하는 내용이다.
권8은 서독(書牘)으로, 아우 박선수에게 보낸 편지인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與溫卿〕〉 38통이 수록되어 있다.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 1~5〉는 1850년(철종1, 44세) 6월에 부안 현감(扶安縣監)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1851년 3월에 해임될 때까지 보낸 편지이다. 〈편지 1〉은 1850년 8월에 보낸 것으로, 인조(仁祖) 때 부안으로 유배되었던 8대조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을 회고하면서 박동량이 유배 당시 머물렀음직한 곳을 추정하였다. 별지(別紙)에서는 박동량의 아들이자 환재의 7대조인 박미(朴瀰)가 지은 시의 내용을 통해 박동량이 유배 당시 머물렀던 곳을 구체적으로 추정하였고,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벗 남병철(南秉哲)과의 만남을 전하였다. 〈편지 2〉는 1850년 11월 2일 보낸 편지로, 이동(泥洞)으로 이사하려는 생각이 있으면서도 망설이는 박선수에게 개의치 말고 하루바삐 이사할 것을 권하였다. 〈편지 4〉는 1850년 12월 27일에 보낸 편지이다. 대한(大寒)날 밤에 부안현 관아에서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관측하는 데 성공한 사실을 전하며, 한라산 정상에서만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다는 속설이 과장된 것이라고 하였다. 환재의 천문지리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편지이다.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 6~9〉는 1854년(철종5, 48세) 2월에서 6월까지 경상좌도 암행 어사의 직무를 수행할 때 보낸 것이다. 〈편지 6〉은 1854년 2월 25일에 쓴 편지로, 조선 말기의 화가 정안복(鄭顔復)과 환재의 교유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편지 7〉은 1854년 5월 15일에 쓴 편지로, 밀양에서 자신의 절친한 벗인 서승보(徐承輔, 1814~1877)의 부친인 전 부사(府史) 서유여(徐有畬)의 부정을 조사하여 파직시켰는데, 이 일 때문에 서승보가 절교를 선언한 일로 몹시 괴로운 심경임을 피력하였다.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 10~12〉는 1861년(철종12, 55세) 2월에 열하 문안사로 떠나며 국경을 넘기 전에 보낸 것이다. 〈편지 10〉은 1861년 2월 2일에 쓴 편지로 숙천(肅川)에서 보낸 것이다. 안주(安州)에 도착하면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조종영(趙鍾永)의 유적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고, 도중에 본 조선 백성들의 가난한 살림에 가슴 아픈 마음을 전하였다. 〈편지 12〉는 1861년(철종12) 2월 14일에 의주에서 보낸 편지로, 통군정(統軍亭)에 올라서 느낀 감회를 전하고, 조부 연암이 연행할 때 마두(馬頭)로 따라갔던 장복(張福)의 후손을 만나 함께 데려가게 된 기쁨도 전하였다.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 13~22〉는 1862년(철종13, 56세) 3월에서 6월까지 진주농민항쟁을 수습할 안핵사로 활동하면서 보낸 것이다. 〈편지 14〉는 1862년(철종13) 3월 15일에 쓴 편지로, 벗 신석우(申錫愚)가 경포교(京捕校)를 진주로 보내 민란을 진압할 계획을 세운 것에 대해, 자신은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방식으로 다스리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진주농민항쟁을 대하는 환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편지 15〉는 1862년(철종13) 3월 말경에 보낸 편지이다. 진주농민항쟁을 안핵하는 일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해명하였고, 농민 항쟁이 널리 확대되는 이유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거론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편지 17〉은 1862년(철종13) 4월 17일에 쓴 편지로, 별지에서 진주농민항쟁의 주동자를 양반 토호라고 주장하였다. 〈편지 21〉은 1862년(철종13) 5월 15일에 쓴 편지로, 별지에서 단성(丹城) 농민항쟁의 주동자로 알려진 양반 김령(金欞)의 죄상을 상세히 기술하며 비난하였다.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 23~29〉는 1866년(고종3, 60세) 2월에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후 1867년(고종4) 5월까지 보낸 편지이다. 환재는 1869년(고종6, 63세) 4월 평안도 관찰사에서 해임되었다. 〈편지 25〉는 1866년 8월 말에 보낸 것으로, 당시 경상도 암행 어사에 임명된 아우 박선수에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을 주문하였다.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 30~33〉은 평안도 관찰사에서 해임된 이후 서울에 머물며 보낸 것으로, 1871년(고종8, 65세) 2월부터 10월까지의 편지이다. 박선수는 이해 1월 13일에 이천 부사(伊川府使)에 임명되어, 1872년 11월 29일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편지 30〉은 1871년 2월 12일에 쓴 것으로, 별지에서 자신이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있을 때 지은 《곡산도임수지(谷山到任須知)》의 예를 모범으로 삼아 이천 백성의 질고를 파악하기 위한 책을 지어 볼 것을 권하였다. 〈편지 31〉은 1871년 4월 20일에 쓴 것으로, 별지에서 관상감(觀象監)에 있는 해시계인 간평구(簡平晷)와 혼개구(渾葢晷)를 탁본하여 보낸다고 하면서 자세히 살펴볼 것을 당부하였다. 〈편지 32〉는 1871년 5월 18일에 쓴 것으로, 총 4편의 별지가 붙어 있다. 첫 번째 별지에서는 신미양요(辛未洋擾) 후에 미군이 자진 철수한 이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전하였다. 두 번째 별지에는 조선을 ‘예의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 세상에 예의 없는 나라는 없다고 하였고, 양반 행세하는 자들에 대해 예의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판하였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별지에서는 당시 조정에서 보폐전(補弊錢)과 역근전(役根田)을 수납하려는 계획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편지 33〉은 1871년 10월 16일에 쓴 편지로, 별지에서 태탕만년(駘蕩萬年)이라는 기와로 벼루를 만들어 시험해 본 일을 전하였으며, 녹용(鹿茸)과 녹각(鹿角)과 녹혈(鹿血)의 효능을 설명하였다.
〈온경에게 보내는 편지 34~38〉은 1872년(고종9, 66세) 7월 청나라 동치제(同治帝)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 겸 사은사의 정사로 임명되어 두 번째로 연행을 떠날 때부터 12월 귀국하며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의 편지이다. 〈편지 34〉는 1872년(고종9) 7월 23일에 쓴 것으로, 박선수가 지은 《설문해자익징》을 가지고 가서 중국의 벗들에게 직접 보이고 그들의 글을 받아오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편지 36〉은 1872년(고종9) 9월 24일 쓴 편지로, 북경에서 보낸 것이다. 동문환(董文渙)의 아우인 동문찬(董文燦)에게 《설문해자익징》을 보여준 사실을 전하였다. 〈편지 38〉은 1872년(고종9) 12월 6일 쓴 편지로, 북경에서 돌아와 압록강을 건넌 뒤 보낸 것이다. 별지에서 증국번(曾國藩)의 추천을 받아 정계에 진출한 팽옥린(彭玉麟)을 만나 대화를 나눈 사실을 전하였다. 또 서양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숭후(崇厚)를 만나게 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뒤 당시 국제 정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로 러시아를 거론하였다.
권9에는 서독 총 69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벗에게 보낸 편지이다. 윤사연(尹士淵 윤종의)에게 보낸 편지가 31통으로 가장 많고, 신유안(申幼安 신응조(申應朝))에게 보낸 편지가 30통, 남자명(南子明 남병철)에게 보낸 편지가 2통, 윤침계(尹梣溪 윤정현), 신사수(申士綏 신석희), 홍일능(洪一能 홍양후(洪良厚)), 신치영(申穉英 신기영(申耆永))에게 보낸 편지가 각 1통이다. 또 자신의 후임으로 평안도 관찰사에 부임한 한계원(韓啓源)에게 보낸 편지 1통과 석성(石星)의 화상(畫像)에 대해 논한 〈여러 벗에게 주어 석 상서의 화상에 대해 논하다〔與知舊諸公論石尙書畵像〕〉라는 편지가 1통이다.
〈윤사연에게 보내는 편지〔與尹士淵〕〉는 시기가 명확하지 않는 것도 다수 있지만, 용강 현령에 임명된 1849년(헌종15, 43세)부터 1876년(고종13, 70세) 1월까지 보낸 편지이다.
〈편지 1〉은 1849년(철종 즉위년, 43세) 연말에 용강 현령으로 있을 때 보낸 편지이다. 용강현의 위도(緯度)를 측정한 사실을 전하면서, 용강에 겨울에도 간혹 더운 날씨가 생기는 이유가 적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 용강현 읍지의 편찬 계획을 전하였다.
〈편지 5〉는 1862년(철종13, 56세) 윤8월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환재는 당시 김포 군수(金浦郡守) 윤종의의 초대를 받아 윤8월 13일에서 16일까지 신석우(申錫愚)ㆍ조면호(趙冕鎬)ㆍ장조(張照)와 함께 한강의 서강(西江)을 출발하여 김포까지 다녀오는 뱃놀이를 했는데, 이 유람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낸 것인 듯하다. 유람에서 돌아오는 길에 굴포(掘浦)에서 본 ‘천등교(天登橋)’라는 비석 뒷면에 ‘숭정(崇禎) 8년’이라고 적힌 기록으로 미루어 김안로(金安老)가 다리를 만들었다는 속설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고 하였으며, 금석(金石)을 통한 고증을 폐기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하였다.
〈편지 6〉은 보낸 시기가 분명하지 않다. 조부 연암이 임서(臨書)한 조맹부(趙孟頫)의 〈난정서(蘭亭序)〉를 빌려주면서 조부의 수택(手澤)이 가장 많은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덕무(李德懋)의 《사소절(士小節)》을 빌려주며,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단 주석이 있는 본(本)이므로 급히 등사할 것을 권하였다.
〈편지 8〉은 1867년(고종4) 연말에 쓴 편지이다. 명나라 석성(石星)의 후손 석태로(石泰魯)가 석성의 화상을 들고 평양으로 찾아와 무열사(武烈祠)에 걸린 석성의 화상과 비교하려 한 일을 전하고 석태로가 가져온 화상이 진본임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한편, 북경의 자수사에 있는 명나라 효정태후의 화상을 개수하는 일을 동문환(董文渙)이 맡아서 처리한 사실도 전하였다.
〈편지 10〉은 1869년(고종6, 63세) 5월 말경에 쓴 편지이다. 환재는 이해 3월에 양자 제정(齊正)의 상을 당하고, 4월에 평안도 관찰사에서 해임된 뒤 서울로 돌아왔다. 환재는 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자 아우 박선수의 아들 제정을 양자로 들였는데, 3월 22일에 갑자기 요절하였다. 자식이 죽음을 당한 슬픔을 전하였다.
〈편지 12〉는 1869년(고종6) 가을 이후에 쓴 편지로 보인다. 환재는 이 무렵 서울에서 강관(講官)으로 진강하고 있었으며, 윤종의는 강릉 부사로 재직 중이었다. 종손(宗孫)과 양손(養孫)을 세우기 위해 목천(木川)에 갔다가 홍양후(洪良厚)를 만나고 홍대용(洪大容)의 묘소에 참배한 사실을 전하였다.
〈편지 13〉은 1870년(고종7, 64세) 연말에 쓴 편지로, 윤종의는 당시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있었다. 환재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편지를 읽어보고 기상이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았다고 하면서, 찾아가 만나볼 것을 권유하였다.
〈편지 16〉은 1872년(고종8) 8월 초에 쓴 편지로, 2차 연행을 떠나 압록강을 막 건넜을 때 보낸 것이다. 위원(魏源)의 《증자장구(曾子章句)》라는 책을 구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편지 18〉은 보낸 시기가 미상이다. 증국번(曾國藩)의 문집을 구입하고 싶은 생각을 전하며 그의 업적에 대해 조선 사람들이 모르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이 편지 이후의 편지는 대부분 보낸 시기가 미상인데, 1874년 이후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편지 20〉에서는 추사(秋史)의 글씨만 모방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윤종의의 아들로 하여금 중세 서체의 전형인 송설체(松雪體)를 우선 학습하게 하도록 권유하였다.
〈편지 23〉에서는 윤종의가 명말(明末)의 종실(宗室) 팔대산인(八大山人) 주답(朱耷)의 물고기 그림을 보내오자, 그 그림이 부산(傅山)의 그림과 함께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것은 명절(名節) 때문이라는 뜻을 전하였다. 《환재집》 권4 〈맹낙치의 화국첩에 쓰다〔題孟樂癡畵菊帖〕〉라는 글에도 부산과 주답의 그림에 대해 이와 같은 뜻을 밝힌 내용이 보인다.
〈편지 24〉는 《해장집》을 교정할 때의 감회가 피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74년(고종11, 68세)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편지 25〉에서는, 청나라의 섭명침(葉名琛)이 간행한 《해산선관총서(海山僊館叢書)》에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의 저자가 황종희(黃宗羲)의 아우 황종염(黃宗炎)으로 기록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편지 30〉에서 환재는 자신의 그림인 〈연암산거도(燕巖山居圖)〉에 윤종의가 붙인 발문을 《동호소권(東湖小卷)》에서 본 사실과 그 감회를 전하였다.
〈편지 31〉은 환재가 양손(養孫)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76년(고종13, 70세) 1월에 쓴 편지로 보인다. 환재는 양자 제정(齊正)이 요절하자, 70세 때인 1876년 1월에 일족 박제창(朴齊昌)의 아들 희양(羲陽)을 양손으로 들였다.
한편, 〈윤사연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는 윤종의가 환재에 대해 논평한 글과 만시(輓詩)가 첨부되어 있는데, 김윤식이 붙인 것이다. 윤종의는 환재의 문장에 대해 일을 논하는〔論思〕 데 특장이 있다고 하였으며, 관화(官話)와 이언(里諺)도 모두 가다듬어 아름다운 말로 승화시켰다고 평하였다. 또 논사하는 글은 당나라의 육지(陸贄)와 같고, 지적과 진술의 정밀함은 주희(朱熹)의 문장과 같다고 평했다. 만시에서는, 역대의 관료 중 외로운 충정과 훌륭한 명망에서 사암(思菴) 박순(朴淳)에 필적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윤종의의 이 글은 환재의 문장과 관료로서의 능력을 적절히 평가한 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침계에게 올리는 편지〔上尹梣溪〕〉는 1852년(철종3, 46세) 연말에 보낸 것이다. 당시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던 윤정현이 황초령(黃草嶺)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탁본하여 보내오자 이에 답한 편지이다. ‘진흥’이 시호인지, 재위(在位) 시의 명칭인지에 대한 논란에 대해, 환재는 여러 근거를 들며 시호일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 구례(求禮)의 화엄사(華嚴寺)에 있던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왜구에 의해 파손된 뒤 전혀 수습되지 않고 있는 실정을 개탄하였다. 이 편지는 앞의 〈윤사연에게 보내는 편지 5〉와 함께 금석 고증에 관심을 기울인 환재의 학문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신치영에게 보내는 편지〔與申穉英〕〉는 1875년(고종12, 69세) 4월 15일에 보낸 것이다. 편지와 함께 막걸리와 생선을 선물 받고, 과거 북경에서 교분을 맺은 심병성(沈秉成)에게 《육노망집(陸魯望集)》을 선물 받고 시를 써 준 일을 회상하였으며, 또 두릉(斗陵)에 집을 한 채 얻었으니 그곳에서 만년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홍일능에게 보내는 편지〔與洪一能〕〉는 1872년(고종9, 66세) 4월 12일에 쓴 것으로, 2차 연행에서 막 돌아왔을 때였다. 북경을 통해 들어온 서양 그림에 등장한 부인의 치마가 조선 부인의 치마와 흡사해 놀랐다고 하면서, 서양과 조선이 원나라 지배를 받았을 때의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또 이런 누습을 개혁하기 위해 젊은 시절에 《거가잡복고》를 저술한 적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한편 북경 자수사에 걸린 명나라 효정태후의 화상을 개수(改修)한 자세한 내막도 전하였다.
〈신사수에게 보낸 편지〔與申士綏〕〉는 보낸 시기가 미상이다. ‘정봉선(鄭逢仙)’이라는 인장이 찍힌 백묘(白描) 인물화를 신석희에게 보내면서, 아우 박선수와 그 그림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전하였다. 또 그림 속의 인물들이 착용한 복장을 자세히 관찰한 뒤 하나의 그림에 여러 시대의 복식 제도가 뒤섞여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개탄하였다. 박선수의 서화 감식안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남자명에게 보내는 편지〔與南子明〕 1〉은 1861년(철종12, 55세) 6월 1일에 보낸 것으로, 열하 문안사의 임무를 마치고 막 압록강을 건너왔을 때였다. 심양(瀋陽)을 지나올 때 여관의 주인이 어떤 별을 보고 ‘소적성(掃賊星)’이라 하며 비적(匪賊)들이 소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중국이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에게 몹시 시달리고 있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편지 3〉은 1861년(철종12) 사행에서 귀국한 이후 남병철이 사망한 1863년 7월 이전에 쓴 편지로 추정된다. 환재가 심병성에게 기증받은 몇 권의 책을 남병철에게 보여주며 평가를 부탁하자 남병철이 편지를 통해 알려온 듯하다. 이에 환재가 그 평가에 대해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로 만들어도 될 만큼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또 명말청초의 이옹(李顒)의 책에 대해서는 학술적인 면모보다 명나라 조정에 절의를 지킨 것을 더 높이 평가할 인물이라고 하였고, 묘기(苗夔)의 책에 대해서는 실용에 도움이 적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지 않은 남병철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새로 부임한 평안도 관찰사 모공에게 주다〔與新箕伯某公〕〉는 1869년(고종6, 63세) 4월에 평안도 관찰사에서 해임된 뒤 후임으로 임명된 한계원(韓啓源, 1814~1882)에게 준 편지이다. 군기고(軍器庫)는 부정과 비리가 발생할 소지가 크고 국가 방어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철저하게 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여러 벗에게 주어 석 상서의 화상에 대해 논하다〔與知舊諸公論石尙書畵像〕〉는 1867년(고종4, 61세) 연말에 쓴 것으로 보인다. 환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석성(石星)의 후손인 석태로(石泰魯)가 석씨 가문의 가승(家乘)을 새로 편찬한 뒤 석성의 화상을 세상에 내놓자 사람들이 의심하였으므로, 석성의 화상을 들고 평양으로 가서 무열사(武烈祠)에 보관된 석성의 화상과 비교하려 한 일이 있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윤사연에게 보내는 편지 8〉에도 보인다. 환재는 석씨 가문의 가승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화상은 진본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벗들에게 편지를 보내 의견을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말미에서 김윤식은 이 화상이 진본임을 논한 환재의 논변이 매우 많지만 첫 편만 기록해 둔다는 주석을 붙였다.
〈신유안에게 보내는 편지〔與申幼安〕〉는 1868년(고종5, 62세)부터 1876년(고종13, 70세)에 걸쳐 보낸 것인데,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편지 2~7〉은 1871년(고종8, 65세)에 보낸 것이다. 〈편지 4〉는 1871년 5월에 쓴 편지로, 옥수(玉樹) 조면호(趙冕鎬)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숙배하지 않은 내용이 보인다.
〈편지 9~24〉는 모두 1874년(고종11, 68세)에 보낸 것이다. 신응조는 1873년(고종10) 12월부터 1874년 9월까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했고, 환재는 같은 기간에 우의정을 지냈다.
〈편지 25~30〉은 1876년(고종13, 70세)에 보낸 것이다. 〈편지 26〉에서는 환재가 기로소에 든 사실과 양손(養孫)을 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지 30〉은 환재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여 전인 1876년(고종13) 11월 3일에 쓴 것이다. 이해 8월에 수원 유수(水原留守)로 부임한 뒤 갑자기 발병한 상황을 전하였다.
권10 역시 서독으로, 청나라 인물에게 보낸 편지 총 41편이 수록되어 있다. 1861년(철종12, 55세)과 1872년(고종9, 66세)의 연행 때 북경에서 교유를 맺은 이들에게 보낸 것이다. 수신자는 풍지기 1편, 심병성 7편, 왕증 1편, 설춘려(嶭春黎) 1편, 정공수 1편, 왕헌 7편, 황운혹 6편, 동문환 7편, 동문찬 1편, 장병염(張丙炎) 1편, 오대징(吳大澂) 1편, 팽조현(彭祖賢) 1편, 만청려(萬靑藜) 4편, 숭실(崇實) 2편이다. 편지를 보낸 시기는 1차 연행 직후인 1861년 10월부터 시작해 1876년(고종13, 70세) 10월에까지 걸쳐 있다.
〈중복 심병성에게 보내는 편지〔與沈仲復秉成〕 1~7〉은 1861년(철종12, 55세) 10월 21일부터 1872년(고종9, 66세) 10월까지의 기간에 보낸 것이다. 〈편지 1〉은 1861년(철종12) 10월 21일에 쓴 편지이다. 진정한 우정은 화이(華夷)의 차별을 초월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연암의 우정론을 계승한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북경에 머무를 때 고염무의 학술에 대해 토론한 일을 회고하며 고염무의 학문과 투철한 선비정신을 칭찬하였다.
〈편지 2〉는 1862년(철종13, 56세) 봄에 쓴 편지인데, 내용으로 보아 환재가 진주 안핵사로 간 3월 1일 이전에 보낸 것이다. 심병성이 산서성(山西省)의 향시관(鄕試官)으로서 많은 인재를 선발한 것을 축하하고, 향시 수석자의 답안을 베껴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환재가 연행 당시 직접 베껴 갔던 것으로 보이는 연암의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가 문산사(文山祠)에 게시된 사실에 감사를 표하였다.
〈편지 4〉는 1862년(철종13) 겨울에 쓴 편지이다. 심병성이 《제감도설(帝鑑圖說)》을 주해(注解)한 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임금을 보좌할 서적으로 초횡(焦竑)의 《양정도해(養正圖解)》를 추천하였다. 또 북경 자수사에 걸린 명나라 신종의 모후인 효정태후의 화상을 보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으며, 동인들의 시선(詩選)인 《영루합잠집(咏樓盍簪集)》의 간행 여부를 물었다. 한편 〈중봉유허비(重峯遺墟碑)〉와 〈진철선사비(眞澈禪師碑)〉의 탁본을 보내주면서 임진왜란 때 순절한 조헌(趙憲)의 행적을 높이 사고 〈진철선사비〉의 건립 연대를 고증했는데, 환재의 금석문자에 대한 관심과 애호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부 연암이 열하에서 교유한 혹정(鵠汀) 왕민호(王民皡)의 행적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편지 5〉는 1863년(철종14, 57세) 10월 27일에 쓴 것이다. 1861년 연행 때 중국의 벗들과 고염무 사당에 참배하고 음복한 일을 그림으로 제작한 〈고사음복도(顧師飮福圖)〉를 부쳐 보낸다고 했는데, 〈고사음복도에 쓴 글〔題顧師飮福圖〕〉(卷11)이 참고가 된다. 또 환재는 편지를 통해 학술적 토론을 펼치기를 제안하였다. 별지에서 고염무의 《하학지남(下學指南)》, 황여성(黃汝成)의 《일지록집석(日知錄集釋)》, 왕무횡(王懋竑)의 《백전잡저(白田雜著)》, 《전경당총서(傳經堂叢書)》에 실린 능명개(凌鳴喈)의 《논어해의(論語解義)》 등에 대해 질문하였다. 특히 《논어해의》에서 능명개가 고염무와 모기령(毛奇齡)을 동시에 칭찬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주자의 설을 비판한 모기령은 고염무와 함께 거론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편지 6〉은 1864년(고종1, 58세) 10월에 쓴 편지로 보인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남병철의 천문수학에 관련된 저술인 《해경세초해》, 《의기집설》, 《추보속해》를 동봉하면서, 왕헌(王軒)에게 전달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하거 왕헌에게 보내는 편지〔與王霞擧軒〕 1~7〉은 1861년(철종12, 55세) 10월 21일부터 1872년(고종9, 66세) 10월까지 보낸 것이다. 〈편지 1〉은 1861년 10월 21일에 쓴 편지이다. 왕헌이 저술하려 하는 《공범통해(貢範通解)》를 집필했는지 묻는 한편, 남병철을 천문수학에 정통한 학자로 소개하고 남병철이 장돈인(張敦仁, 1754~1834)의 수학서인 《개방보기(開方補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전하며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편지 3〉은 1866년(고종3, 60세) 10월에 쓴 것으로, 환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박선수가 《설문해자익징》을 저술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였으며, 1866년 7월에 발생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이 미국 측에 있음을 밝혔다.
〈편지 4〉는 1868년(고종5, 62세) 윤4월에 쓴 것으로, 셰난도어호 사건을 진주(陳奏)하기 위한 사행 편을 통해 보낸 것이다. 환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왕헌이 북경의 자수사에 봉안된 명나라 신종의 생모 효정태후의 영정 보수 사업을 끝내고 〈구련상중장기(九蓮像重裝記)〉를 지어 보내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또 왕헌이 삼례(三禮) 공부를 마쳤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삼례에 대한 논의 몇 항목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이는 중국 인사들과의 교유가 학술적 토론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편지 5〉는 1868년(고종5) 11월에 쓴 것이다. 동문환이 감숙성으로 떠나며 조선 문인의 시를 모아 편찬하려는 뜻을 전해주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초록한 조선 문인의 시를 동문환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환재가 초록한 시 가운데는 자신의 7대조인 박미(朴瀰)와 조부 연암의 시가 포함되어 있다. 동문환은 뒤에 실제로 조선 문인의 시를 모아 《한객시록(韓客詩錄)》을 편찬했는데, 미완성으로 현재 전하지 않는다.
〈편지 6〉은 1870년(고종7, 64세) 윤10월에 쓴 것이다. 양자로 들인 제정(齊正)의 죽음을 전하였다. 또 박선수의 《설문해자익징》이 완성되는 대로 서문을 부탁하겠다고 하면서, 고증학적 측면에서 가치 있는 저술임을 언급하였다.
〈상운 황운혹에게 보내는 편지〔與黃緗芸雲鵠〕 1~6〉은 1861년(철종12, 55세) 10월 21일부터 1872년(고종9, 66세) 10월까지의 기간에 보낸 것이다. 〈편지 1〉은 1861년(철종12) 10월 21일에 쓴 것이다. 황운혹이 조선의 벗들에게 부탁한 〈완정복호도(完貞伏虎圖)〉에 붙일 시문이 아직 다 수합되지 않았음을 전하였다. 〈완정복호도〉에 대해서는 권3 〈완정복호도에 쓰다〉가 참조가 된다.
〈편지 4〉는 1867년(고종4, 61세) 10월에 쓴 것으로, 환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이시원(李是遠)을 위해 만시(輓詩)를 지어 보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이시원은 병인양요가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자결한 인물이다. 또 북경의 자수사에 봉안된 명나라 신종의 생모 효정태후의 영정 보수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다.
〈연추 동문환에게 보내는 편지〔與董硏秋文煥〕 1~7〉은 1861년(철종12, 55세) 10월 21일부터 1872년(고종9, 66세) 10월까지의 기간에 보낸 것이다. 〈편지 1〉은 1861년(철종12) 10월 21일에 쓴 것이다. 환재는 연행 당시 송균암(松筠菴)에서 펼친 연회를 그림으로 그려 동문환에게 준 〈회인도(懷人圖)〉를 떠올리며 그리운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연암과 인연이 있는 곽태봉(郭泰峯)과 곽집환(郭執桓) 부자에 대해 아는지 묻고 곽집환의 《회성원집(繪聲園集)》을 읽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또 문승상사(文丞相祠)와 법원사(法源寺)에서 본 〈운휘장군비(雲麾將軍碑)〉 잔존 글자의 내력을 묻고 〈운휘장군비〉의 모각(摹刻)을 탁본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편지 5〉는 1868년(고종5, 62세) 윤4월에 쓴 편지로, 셰난도어호 사건을 진주(陳奏)하기 위한 사행 편을 통해 보낸 것이다. 환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북경의 자수사에 봉안된 명나라 신종의 생모 효정태후의 영정 보수 사업을 끝내고 자수사의 석각(石刻) 탁본과 〈구련화상을 다시 장정하고 지은 노래〔重裝九蓮畵像歌〕〉를 지어 보내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한편, 동문환이 편찬하고 있는 《한객시록》에 수록될 시의 선별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 《목은집(牧隱集)》과 《하서집(河西集)》의 시를 선별하고 있으니 조금 기다려 달라는 부탁도 전하였다. 말미에는 셰난도어호 사건이 있었음을 언급하였다.
〈편지 6〉은 1868년(고종5, 62세) 11월에 쓴 것으로, 환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한객시록》에 수록할 이색(李穡)과 김인후(金麟厚) 시의 선록(選錄)이 끝나 한 책으로 만들었다는 사실과 박미의 시를 초록하고 연암의 시를 부록하여 함께 보낸다고 하였다. 환재는 이 책의 이름을 《동한제가시초(東韓諸家詩鈔)》와 《분서시초(汾西詩鈔)》로 명명하였다.
〈편지 7〉은 2차 연행 때인 1872년(고종9, 66세) 9월에서 10월 사이에 북경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동문환의 아우인 동문찬과 처음 대면한 뒤 고염무의 사당을 함께 참배하고 보수를 마친 자수사의 효정태후의 화상을 살펴보면서 동문환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노라고 하였다. 환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중국의 지인들에게 백금 오십 냥을 보내 효정태후의 영정 보수 사업을 완수한 바 있다. 또 2차 연행 당시 〈효정황태후의 화상을 다시 보수한 내력을 기록하다〔孝定皇太后畵像重繕恭記〕〉라는 기문을 지어서 가지고 갔다(卷4).
〈운감 동문찬에게 보내는 편지〔與董雲龕文燦〕〉는 1873년(고종10, 67세) 겨울에 쓴 편지로, 2차 연행을 마치고 귀국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2차 연행 때 동문환의 아우인 동문찬과 교유를 맺었다. 아우 박선수가 편찬 중인 《설문해자익징》이 마무리 되면 북경에서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하였다. 환재는 2차 연행 때 《설문해자익징》을 가지고 갔고 동문찬에게 책을 보여준 뒤 평론을 붙여 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환재가 《설문해자익징》을 중국에서 출간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책의 내용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과 아울러 조선에서는 그 가치를 알아볼 사람이 없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당시 중국의 물가가 너무 올라 간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귀국한 뒤에도 중국에서 간행할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교 장병염에게 보내는 편지〔與張午橋丙炎〕〉는 1870년(고종7, 64세) 윤10월에 쓴 것이다. 환재는 장병염을 직접 만난 적이 없으나, 김영작(金永爵)이 1858년(철종9) 동지사의 부사로 연행하여 장병염을 만났고, 환재는 김영작을 통해 장병염의 존재를 알았다. 또 장병염이 편찬하여 김영작에게 보내 준 《강의(講義)》를 읽은 적이 있었다(卷4 〈題邵亭遺墨帖〉). 마침 동지 부사 조영하(趙寧夏)가 돌아오는 편에 장병염이 보낸 대련(對聯)을 선물 받았기에, 감사의 편지를 보내 장병염과 교유를 맺으려 한 것이다.
〈청경 오대징에게 보내는 편지〔與吳淸卿大澂〕〉는 1873년(고종10, 67세) 10월에 쓴 편지로, 2차 연행 때 오대징과 교유를 맺었다. 내용으로 보아 연행 당시 오대징으로부터 《증문정문초(曾文正文鈔)》를 선물 받은 듯한데, 환재는 증국번의 학술과 문장에 감탄하여 그의 전집(全集)을 구해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또 박선수의 《설문해자익징》을 중국에서 출간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말미에는 연행 당시 교유를 맺은 장지동(張之洞)ㆍ왕의영(王懿榮)ㆍ사유번(謝維藩)ㆍ고조희(顧肇熙)ㆍ이자명(李慈銘)ㆍ오보서(吴寶恕)의 안부를 물었다. 주목할 점은 오대징 및 환재가 안부를 물은 인물들이 조선의 개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이 1858년(철종9) 또는 1863년(철종14) 북경에서 장지동ㆍ오대징ㆍ왕의영 등 양무파(洋務派) 개혁사상가를 만나 그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을 형성하였으며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첫 개화 사상가로 오경석을 꼽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경석이 장지동 등을 만난 것은 환재를 수행해 북경에 갔던 1872년이므로, 기존의 연구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주-D004
〈용수 만청려에게 보내는 편지〔與萬庸叟靑藜〕 1~4〉는 1873년(고종10, 67세) 10월에서 1875년 1월 사이에 보낸 것으로, 2차 연행 때 팽조현과 교유를 맺었다. 〈편지 1〉은 1873년(고종10) 10월에 보낸 것인데, 내용에서 주목할 점은,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에게 보낸 편지를 얻어 보고 지촌(咫村)에서 즐거운 모임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 환재의 언급이다. 이는 만청려가 이하응에게 따로 편지를 보냈음을 의미하는데, 이하응이 연행단 편에 청나라 예부 상서(禮部尙書) 만청려에게 편지를 전해 비공식적으로 중국과 외교 교섭을 추진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편지 2〉는 1874년(고종11, 68세) 6월 29일에 쓴 편지로, 중국에서 보낸 비밀 자문(咨文)에 회답하기 위해 파견된 재자관(齎咨官) 편에 부친 것이다. 중국에서 보낸 비밀 자문은 1874년 6월에 이른바 ‘모란사 사건(牡丹社事件)’으로 위기에 몰린 청나라가, 일본이 조선으로 출병하려 하며 프랑스와 미국이 이에 가세하려 한다는 첩보를 알려주며 미국과 프랑스와 통상을 맺으라고 권고한 내용이었다. 이 자문을 받은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은 일본이 침략해 와도 물리칠 수 있으며 또 중국의 통상 권유는 잘못된 처사라고 불만을 표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이런 내용으로 중국에 회답 자문을 보내게 하였다. 환재는 이 편지를 통해 이유원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만청려에게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한편 환재는 당시 서양의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잡지인 《중서문견록(中西聞見錄)》을 본 사실과 그 잡지에서 옛 선현들의 도학(道學) 정신을 진부한 것으로 치부한 것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는 생각을 전하고 있다. 환재가 견지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편지 3〉은 1874년(고종11, 68세) 10월에 보낸 것이다. 당시 환재는 우의정에서 물러났을 때였다. 박선수의 《설문해자익징》을 중국에서 간행하고 싶다는 뜻과 그 책의 내용과 성과를 언급하였다. 또 조선에는 문자학에 대한 안목을 지닌 이가 없으며, 관심을 가진 이가 있다고 해도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박산 숭실에게 보내는 편지〔與崇樸山實〕 1~2〉는 1873년(고종10, 67세) 10월과 1876년(고종13, 70세) 10월에 보낸 것이다. 내용은 이전의 만남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환재는 2차 연행 때, 1870년(고종7) 겨울 천진 흠차대신(天津欽差大臣)으로 프랑스에 다녀온 숭후(崇厚)를 만나 세계정세에 대해 듣고 싶어 하다가, 반묘원(半畝園)에서 만난 숭후의 아우 숭실을 통해 세계정세에 대해 전해 들었다. 숭실을 만나게 되는 과정은 《환재집》 권8에 수록된 〈온경에게 주는 편지 38〉의 별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편지 2〉는 내용으로 보아 1876년(고종13) 동지사 편에 보낸 편지인데, 숭실은 1876년 9월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사실을 모른 채 보낸 것으로 보인다. 《환재집》에 수록된 중국 인사에게 보낸 편지 중 시기가 가장 늦은 편지이다.
권11은 서독과 잡문(雜文)이다. 서독은 흥선대원군에게 답하는 편지 5통과 좌의정 이최응(李最應)에게 보내는 편지 9통인데, 1874년(고종11, 68세) 8월부터 1875년 11월까지 쓴 것이며, 모두 일본의 서계 접수를 거부한 흥선대원군과 이최응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명치유신을 단행한 일본이 1868년(고종5) 12월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알리는 내용의 서계를 보내왔는데, 이 서계를 접수한 동래부(東萊府)의 왜학훈도 안동준(安東晙)은 서계의 형식과 자구 등이 종전의 격식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조선 조정에서는 1년 간의 협의 끝에 1869년 12월에, 서계를 수정해 올리도록 책유(責諭)하고 접수를 거부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일본은 대마도주의 대조선 외교의 직임을 회수하고 외무성을 통한 직접 외교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1872년(고종9) 1월 일본이 삼산무(森山茂) 등을 파견해 외무대승(外務大丞) 명의의 서계를 보냈는데 안동준이 다시 접수를 거부하자, 5월 20일 일본 관원들이 왜관(倭館)을 난출(攔出)하여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에게 직접 교섭할 것을 요청했다. 정현덕은 이들을 문책하여 왜관으로 돌려보냈고, 일본에서는 삼산무 등 외무성 관원들을 왜관에서 모두 철수시켰으며, 이 일로 인해 양국 간의 교린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런데 1874년 6월에 청나라 예부에서 비밀 자문을 보내 일본이 조선으로 출병하려 하며, 프랑스와 미국이 이에 가세하려 한다는 첩보를 알려왔다.
〈대원군께 답해 올리는 편지〔答上大院君〕 1〉은 이 무렵인 1874년(고종11, 68세) 8월에 보낸 것이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이미 정계에서 물러난 상황이었고, 환재는 우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이 보내온 서계의 자구와 내용을 문제 삼아 접수를 거부하였다. 환재는 조선이 문제로 삼은 일본 서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일본에서 보낸 서계를 접수할 것과 왜학훈도 안동준을 처벌하여 일본의 서계 접수를 거절한 것이 안동준의 농간임을 확인시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을 요청하였다.
1874년(고종11) 8월에 동래 부사 박제관(朴齊寬)과 훈도 현석운(玄昔運)이 일본 외무성 삼산무와 교섭을 가졌고, 일본 외무경(外務卿)이 조선의 예조 판서에게, 외무대승(外務大丞)이 예조 참판에게 서계를 작성해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875년 2월에 일본의 서계가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환재에게 편지를 보내 미리 서계를 접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편지 2〉는 이에 답하는 편지로 1875년(고종12, 69세) 1월에 쓴 것이다. 환재는 일본과 서양이 한편이기 때문에 서계로 인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되며, 서계를 수정해 왔는데도 접수하지 않는 것은 변란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반박하였다.
1874년 8월에 이루어진 교섭에 의거해 1875년 1월 19일에 삼산무가 외무성의 서계를 지니고 만주환호(滿珠丸號)를 타고 와 왜관에 도착했다. 삼산무는 훈도(訓導)와 면대한 자리에서 동래 부사를 만나 직접 서계를 전달하겠노라고 하면서 왜관을 나가 동래부로 가겠다고 하였다. 새로 임명된 동래 부사 황정연(黃正淵)은 장계를 올려 삼산무가 화륜선을 타고 왔고, 서계를 담당 역관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며 왜관 난출을 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2월 5일 어전회의를 거쳐, 삼산무의 동래부 입부(入府)는 인정하지 않고 동래 부사로 하여금 왜관에 가서 연향을 베풀고 서계를 검토하여 격식을 어긴 곳이 있으면 사리에 의거해 물리치며, 고쳐서 가져오면 즉시 받아들여서 우호를 회복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동래부에서 연향을 베풀겠다는 뜻을 전하자 삼산무는 양복(洋服)을 입고 참석하겠다고 했으며,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보고 받고 3월 4일에 옛 법식대로 시행하라는 지시와 함께 동래부에 정배(定配)한 전 훈도 안동준을 효수하도록 명하였다. 연향 때의 양복 착용 문제로 대립이 계속되자 일본은 이해 4월과 5월에 이른바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펼치며 군함 운양호(雲揚號)와 제2정묘호(第二丁卯號)를 차례로 부산에 입항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를 보고받은 고종은 5월 10일 시임 및 원임 대신과 당상관을 불러 서계의 접수 여부를 물었는데, 환재와 이최응 등 4인이 접수를, 김병국(金炳國) 등 7인이 거절을 주장하였고, 나머지 24명은 대답을 보류하였다. 이날 조정에서 서계의 접수 거부를 최종 결정짓게 되었는데, 서계가 대마도를 통하지 않고 외무성에서 보내온 것, 교린의 문자에 겸공(謙恭)함이 없고 스스로 존대한 점, 연향을 베푸는 것은 먼 나라 사람을 대접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인데 의식 절차를 이전의 규칙과 다르게 바꾸려 한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편지 3〉과 〈편지 4〉와 〈편지 5〉는 조선 정부가 서계 거부를 최종 결정지은 직후인 1875년(고종12, 69세) 5월 11일 이후에 보낸 것으로, 서계 접수 거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재고할 것을 흥선대원군에게 요청하였다.
〈좌의정에게 답해 올리는 편지〔答上左相〕 1~7〉은 1875년(고종12) 2월부터 7월 사이에 보낸 것으로 대원군에게 보낸 편지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서계를 접수할 것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편지 8, 9〉는 운양호 사건 이후인 1875년 9월과 11월경에 보낸 것이다. 운양호 사건 이후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가 일본 서계를 접수하는 쪽으로 결정을 바꾸자, 환재는 갑자기 서계를 접수하여 위협에 굴복한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서계 접수를 거부한 원인이 일본 측에 있음을 밝혀 조선 조정의 체면을 세운 뒤에 서계를 접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잡문(雜文)은 총 8편이다.
〈인가에 소장된 송나라 고종의 서축에 대해 변증한 글〔辨人家所藏宋高宗書軸〕〉은 환재의 서화 감식안을 살펴볼 수 있는 글로, 1832년(순조32, 26세) 이전 작품으로 추정된다. 송나라 고종의 서축(書軸)에 찍힌 낙관을 근거로 인물들의 행적을 추적하여 위조된 작품임을 증명하였다. 또 중국 소주(蘇州) 지역에서 위조된 작품이 많이 유통되지만 그 수준이 졸렬하여 판별하기 어렵지 않다는 언급을 통해 환재의 수준 높은 서화 감식안을 확인할 수 있다.
〈도선암시고의 발문〔逃禪菴詩稿跋〕〉은 영조 때 활동한 여항 시인 전홍서(全弘叙)의 시집에 써 준 발문으로, 여항 문학에 대한 환재의 관심과 이해 수준을 보여준다. 윤정현이 지은 〈도선암시고의 서문〔逃禪菴詩藁序〕〉이 1850년대 말에서 186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환재의 이 글 역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유가의 정통적 문학론에 입각하여 신분 제한에 따른 불평불만을 절도 있게 표현한 점에서 전홍서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환재의 이런 태도는 여항한시를 《시경》의 전통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여항한시에 잠재해 있는 체제비판적 성향을 순화하고자 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안주 백상루의 중수기〔安州百祥樓重修記〕〉는 1871년(고종8) 5월 이후에 영유 현령(永柔縣令) 이경로(李敬老)를 대신하여 지은 글로 보인다. 평안도 안주의 백상루는 조종영(趙鍾永)이 지은 누각이다. 환재는 안주의 지리적 중요성을 언급한 뒤, 단순히 음풍농월하는 장소로 만들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고사음복도에 쓴 글〔題顧祠飮福圖〕〉은 환재가 1차 연행 때 북경에서 교유를 맺은 인물들과 고염무의 사당을 참배한 뒤 자인사(慈仁寺)에 모여 음복한 광경을, 귀국 후 화공을 시켜 그리게 한 것이다. 〈중복 심병성에게 보내는 편지 5〉에서 〈고사음복도〉를 그려 보내니 수정해 되돌려 보내 줄 것을 부탁한 점으로 미루어, 이 글 역시 1863년(철종14, 57세)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서두에서 그림에 그려진 인물들을 간략히 소개한 뒤, 도주(道州) 사람 하소기(何紹基)가 고염무 사당의 건립을 처음 주도한 사실을 밝혔다. 또 평소 사모하던 고염무의 사당을 참배한 감회와 그곳에서 벗들과 벌인 학문적 토론에 대해서도 추억하였다.
〈능호의 그림 족자에 쓴 글〔題凌壺畵幀〕〉은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의 그림에 붙여 이인상의 인품과 작품의 품격을 논한 글이다. 1863년에서 1873년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이인상의 지조와 절개가 작품에 드러나 ‘신운(神韻)’을 느낄 수 있다고 평하였는데, 그림과 글씨의 기교를 넘어 화가의 ‘사의(寫意)’ 정신이 지닌 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이인상의 글씨는 안진경(顔眞卿)의 필체를 배웠고 전서(篆書)가 가장 고아하며 화법은 모두 전서의 필세를 지녔다는 평가를 통해, 환재의 서화 감식안을 확인할 수 있다.
〈유요선이 소장한 추사의 유묵에 쓴 글〔題兪堯仙所藏秋史遺墨〕〉은 유요선이 추사의 유묵을 잃어버렸다가 18년 만에 되찾아 북청(北靑)으로 돌아갈 때 지어준 글이다. 1873년(고종10, 67세)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요선은 김정희가 북청에 유배되었을 때 제자로 삼은 인물로 보인다. 조면호(趙冕鎬) 역시 북청으로 돌아가는 유요선을 전송하면서 〈유요선과 헤어지며 주다〔贈別兪堯仙幷小識〕〉라는 시를 지었는데, 계유년(1873)에 지은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玉垂集》 卷17). 환재는 이 글에서 추사 서법의 변화 과정을 정리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동기창(董其昌), 중년에는 옹방강(翁方綱)ㆍ소식(蘇軾)ㆍ미불(米芾)ㆍ이옹(李邕)을 거쳐 구양순(歐陽詢)의 진수를 얻었으며, 제주도 유배에서 해배된 이후에는 어떠한 서법에도 구애받지 않고 이른바 ‘추사체’를 완성했다고 논하였다. 또 추사체를 ‘근엄함의 극치’라고 평가하였다. 아울러 김정희의 글씨는 조맹부(趙孟頫)로부터 그 힘을 얻은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길지 않은 글이지만 김정희의 서법의 변화 과정을 간명하게 제시하고 그에 대해 품평한 이 글은 추사체에 대한 가장 뛰어난 비평문의 하나로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환재의 서화 감식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상고도에 붙인 안설 열 조목〔尙古圖按說十則〕〉은 환재의 첫 저작인 《상고도회문의례》에 수록된 환재의 안설 중 10개를 뽑아 옮겨 놓은 것이며, 안설 뒤에 이정관(李正觀), 홍길주(洪吉周), 가산(稼山 미상) 등의 평어가 붙어 있다. 《상고도회문의례》는 《환재총서》에 수록됨으로써 학계에 공개되었다. 총 16권 16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826년(순조26, 20세) 여름부터 1827년 초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역대 중국의 뛰어난 인물들에 관한 기록을 널리 발췌하고, 이 글에 의거하여 벗들과 함께 놀이 삼아 의고문(擬古文)을 짓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한 저술이다. 원래는 명나라 왕세정(王世貞)의 《상영람승삼재만변지도(觴咏攬勝三才萬變之圖)》를 보고 이를 모방하여 지은 것인데, 《상영람승삼재만변지도》가 패관잡기에서 글제를 따온 데에 불만을 느껴 이 저술에 착수했다고 한다.
첫 번째 안설 〈제갈자가 초당에서 한가로이 거처하다〔諸葛子草堂閑居〕〉는 《삼국지》 권35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 중, 서서(徐庶)에게 제갈량을 추천받은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기 위해 삼고초려한 내용을 발췌하여 축약해 수록한 다음 붙인 것이다. 환재는 선비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출처(出處)’를 들었으며, 선비가 의(義)를 바탕에 두고 ‘출처’를 행한다면 자신의 임금을 요순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마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 안설 〈이정공이 연영전에서 물러나오다〔李貞公延英退朝〕〉는 《신당서》 권152 〈이강열전(李絳列傳)〉의 내용을 발췌 수록한 뒤 붙인 것이다. 환재는 직언하는 신하와 이를 진심으로 수용하는 군주 의 이상적 모습을 당 헌종(唐憲宗)과 이강의 경우에서 찾았다. 또 직언으로 이름난 한나라의 급암(汲黯)과 당나라의 위징(魏徵)이 결국 한 무제(漢武帝)와 당 태종(唐太宗)에게 버림받은 것은, 임금이 직언을 용납한다는 명성만 좋아할 뿐 진정으로 직언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세 번째 안설 〈범희문이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선발 제도를 깨끗이 할 것을 청하다〔范希文請興學校淸選擧〕〉는 《송사(宋史)》 권11 〈인종본기(仁宗本紀)〉 중 범중엄(范仲淹)이 재상이 되어 학교의 건립과 인재선발 제도의 개혁을 건의한 부분을 발췌하여 요약한 뒤 붙인 것이다. 요약한 내용은 54글자에 불과하지만, 안설은 2천 자가 넘는 장문으로 도도한 ‘사론(士論)’이 펼쳐져 있는데, 조부 연암의 선비론인 〈원사(原士)〉에 드러난 주장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 안설 〈당나라 초기에 부병제를 설치하다〔唐國初置府兵〕〉는 《신당서》 권50 〈병지(兵志)〉 중 당나라 군사 제도가 부병(府兵)에서 확기(彍騎)로, 확기에서 방진(方鎭)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을 발췌하여 수록한 뒤 붙인 것이다. 환재는 중국 고대의 군사 제도가 주나라의 정전제(井田制)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방법을 이상적인 군사 제도라고 하였다. 또 당나라 초기에 설치한 부병제가 병농일치의 정신을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다섯 번째 안설 〈송나라 태조가 봉장고를 설치하다〔宋太祖置封樁庫〕〉는 《송사기사본말(宋史記事本末)》 권1 〈태조대주(太祖代周)〉의 내용 중 송 태조가 북주(北周)를 평정한 뒤 봉장고(封樁庫)를 만들어 한 해 동안 필요한 비용 이외의 재물을 쌓아두고, 3백 만의 재물이 모이면 석진(石晉)이 거란에게 뇌물로 바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를 되찾아 오는 비용으로 쓰거나 거란을 공격할 비용으로 쓰겠다고 한 부분을 발췌하여 수록한 뒤 붙인 것이다. 봉장고는 송나라 때 만든 궁궐 창고의 하나이다. 환재는 이 안설에서 봉장고를 혁파했어야 마땅한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
여섯 번째 안설 〈당나라 태화 연간의 유주의 이해〔唐太和中維州利害〕〉는 《자치통감》 권247 〈당기(唐紀) 63〉의 내용 중 토번(吐蕃)의 유주 부장(維州副將) 실달모(悉怛謀)가 유주의 군대를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해 오자 서천 절도사(西川節度使) 이덕유(李德裕)가 실달모를 받아들이고 유주를 차지하는 이로움을 조정에 상주하였는데, 이덕유와 대립하던 우승유(牛僧孺)가 오랑캐와 약속한 화친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실달모의 투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을 발췌해 수록한 뒤 붙인 것이다. 환재는, 당나라 문종(文宗)의 유주의 조치에 대한 사마광(司馬光)과 호인(胡寅)의 상반된 견해를 소개한 뒤, 실달모의 투항을 받아들였어야 한다는 호인의 견해에 찬성하면서 스스로 당나라 조정의 신하로 가정하여 실달모의 투항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상소를 지어 붙여 놓았다.
일곱 번째 안설 〈악악왕이 금자패를 받들다〔岳鄂王奉金字牌〕〉는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권14의 소흥10년(紹興十年) 조 중, 악비(岳飛)가 언성(郾城)에서 금나라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주선진(朱仙鎭)까지 추격한 뒤 곧바로 황하를 건너 진격하려 했을 때 진회(秦檜)가 화의를 주장하며 황제를 설득하여 12번이나 금자패를 내려 악비를 소환한 사건을 발췌하여 수록한 뒤에 붙인 것이다. 안설을 통해 환재는, 왕세정(王世貞)과 이반룡(李攀龍)이 보통의 논자들과 달리 악비가 진격하지 않고 조정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 반박하였다. 환재는 ‘국경을 나갔을 때 전권(專權)을 행사하는 법도’를 전제로 내세우고 당시의 여러 상황을 분석한 뒤, 악비가 금나라를 공격해 원수를 갚고 돌아와 황제에게 보고했더라면 진회에게 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덟 번째 안설 〈사안이 부견이 침입했다는 말을 듣다〔謝安聞苻堅入寇〕〉는 《진서(晉書)》 권79 〈사안열전(謝安列傳)〉 중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을 때 장군 사현(謝玄)이 사안을 찾아가 계책을 물었는데, 사안이 조카 사현과 별장을 걸고 태연히 내기 바둑을 둔 일을 발췌하여 수록한 뒤 붙인 것이다. 환재는 사안이 적은 병력으로 전진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일을 천행으로 돌리고 전진의 침략 소식을 듣고 태연히 바둑 둔 일을 두려운 마음을 감춘 것이라고 폄하하는 논자들의 태도에 대해 반박하였다. 그리고 맹자의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말에 의거해, 전진이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모두 어긴 사실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사안의 승리를 천행으로만 돌릴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아홉 번째 안설 〈소노천이 문을 닫고 독서하다〔蘇老泉閉戶讀書〕〉는 구양수(歐陽脩)의 《문충집(文忠集)》 권34에 수록된 〈고패주문안현주부 소군묘지명 병서(故霸州文安縣主簿蘇君墓誌銘并序)〉에 보이는 소순(蘇洵)의 고사를 읽고 붙인 것이다. 소순이 어린 시절 독서를 좋아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발분하여 독서하며 문사(文辭)를 공부하였지만 과거에 실패하였고, 다시 독서하며 문사를 짓지 않다가 5, 6년 뒤에 붓을 들고 글을 짓자 순식간에 수천 마디가 쏟아졌다는 내용이다. 소순의 이 일화에 대해 환재는 자신이 지은 〈예장설(豫章說)〉의 내용을 소개하며 속성(速成)을 바라는 태도를 경계하였다. 〈예장설〉은 귀한 목재로 쓰이는 예장 나무를 두고 고대 중국의 이름난 장인(匠人)인 공수반(公輸般)이 제자와 나눈 가상적인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길주는 환재의 이 안설이 우언(寓言)의 형식을 빌려 훌륭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칭찬하며, 우언 형식의 산문을 남긴 명나라의 유기(劉基)와 송렴(宋濂)도 환재에게 한 걸음 양보해야 할 것이라는 평어를 붙였다.
열 번째 안설 〈사마온공이 재상에 배수되다〔司馬溫公拜相〕〉는 《자치통감절요속편(資治通鑑節要續編)》 권7 신종(神宗) 8년의 내용 중 사마광(司馬光)이 낙양(洛陽)으로 물러나 산 지 15년 만에 신종이 세상을 떠나자 모든 백성이 사마광의 정계 복귀를 염원하므로 태후(太后)가 사마광을 재상에 임명하였다는 부분을 발췌하여 수록한 뒤 붙인 것이다. 환재는 사마광이 재상에 임명된 일을 통해 한 편의 재상론(宰相論)을 펼치고 있다. 하늘이 백성을 위해 군주(君主)를 만들어 준 뜻을 서술하며 첫머리를 시작하였고, 다음으로 군주가 천명을 받들어 현자를 구해 재상으로 임명한 뜻을 서술하였다. 이어 창업한 군주의 재상, 수성(守成)한 군주의 재상, 후세의 임금을 도운 재상의 역할을 나누어 서술한 뒤, 탐욕에 물들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재상이 세상을 어떻게 망치는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 안설은 《서경》의 내용처럼 천자가 신하에게 훈시하는 형식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서경》의 독특한 문체를 모방해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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