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덜컹 홈통에 들었다가 다시 쏟아져 흐르는 물이 육중한 물레방아를 번쩍 쳐들었다가 쿵하고 확 속으로 내던질 제 머슴들의 콧소리는 허연 겨가루가 켜켜 앉은 방앗간 속에서 청승스럽게 들려나온다. 솰 솰 솰, 구슬이 되었다가 은가루가 되고 되줄기 같이 뻗치었다가 다시 쾅쾅 쏟아져 청룡이 되고 백룡이 되어 용솟음쳐 흐르는 물이 저쪽 산모퉁이를 10리나 두고 돌고, 다시 이쪽 들 복판을 5리나 꿰뚫은 뒤에 이방원(李芳源)이가 사는 동네 앞 기숡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 위에 물레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나도향의 단편소설 “물레방아” 첫 구절이다. ‘물레방아’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낭만과 전원(田園)의 대명사인양 자연 속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풍경이 연상된다. 그럼 우리나라에 물레방아는 언제,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요즘 나는 다시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빠져있다. 내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 고등학교 시절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일 것이다. 그 후 단편적으로 허생전, 호질 등을 읽었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1780년(정조5년) 청 건륭황제 만수절(칠순잔치)에 사신으로 가는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가며 탄생할 수 있었다. 당시 44살의 연암이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면서 연행기는 시작된다. 요동, 성경,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고, 다시 조선사신으로는 처음으로 열하행궁까지 갔다가 8월 20일 북경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보고, 느끼고, 필담으로 나눈 경험을 바탕으로 쓴 총 26권 10책의 기록이다. 나는 경남 함양의 기백산 자락, 용추폭포로 가는 안의면 안심마을에서 연암을 다시 만났다. 세계 최고의 여행 작가라고 스스럼없이 꼽을 수 있는 연암 박지원, 문장의 수사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에 대한 성심(誠心)이 더 큰 장점이다. 나 또한 새로운 곳을 여행하고 그 기록을 남기기 좋아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연암의 팬이 되었다.
산청에서 거창방면으로 3번 국도를 따라가다 안의면 소재지를 지나면 서쪽으로 ‘용추계곡’ 이정표가 서있다. 용추계곡 이정표를 따라가면 안심마을이 길가에 있다. 열하를 다녀온 연암은 10년이 지난 1792년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청나라에서 봤던 물레방아를 토대로 이곳에다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설치했다고 하나 그 정확한 위치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마을 도로 좌측에 물레방아 ‘확’이 놓여 있고, 우측에는 물레방아 체험관이다. 기록에 의하면 1836년에 안심마을 지우천 합수부에 정연상씨가 물레방앗간을 운영하였고, 정연덕씨로 이어지던 중 1936년 병자년 대홍수에 떠내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확은 모래, 자갈 등에 뒤덮여 오랜 세월 냇물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1987년 발견하여 현 위치에 전시하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 확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계곡을 거슬러 1km 가량 더 들어가면 함양군에서 조성한 물레방아공원이 있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당시의 물레방아는 “곡식을 찧거나 빻는 전마(轉磨)는 커다란 톱니바퀴를 이층으로 포개어 쇠로 된 축으로 꿰어서 방 안에 세우고 기계를 설치하여 돌린다. 톱니바퀴는 마치 자명종의 톱니와 같아 서로 들쭉날쭉하여 이가 딱 물린다. 방의 네 귀퉁이에도 이층으로 된 맷돌 판을 설치하는데, 맷돌 판의 가장자리도 들쭉날쭉하게 되어 큰 톱니바퀴의 이와 서로 맞물리게 된다. 큰 톱니바퀴가 한 번 돌면 맷돌 판 여덟 개가 다투어 돌면서 잠깐 사이에 가루가 눈처럼 쌓인다. 이 원리는 시계의 톱니와 닮았다. 연도의 민가에서는 모두 맷돌 하나와 나귀 한 마리를 가지고 있으며, 곡식을 찧는 데는 흔히 늘 연자방아를 사용하는데 당나귀가 끌어 절구질을 대신한다.
가루를 칠 때는 밀폐된 방에 바퀴 셋 달린 흔들이차를 설치하는데, 바퀴가 앞에는 둘, 뒤에는 하나가 되게 한다. 흔들이차 위에 기둥 넷을 세우고 아래위층에 몇 말 정도 들어갈 크기의 큰 체를 간들간들하게 두고, 위의 체는 가루를 붓고 밑의 체는 비워서 위체의 가루를 받아 더욱 곱고 보드랍게 되도록 하였다. 흔들이차 앞에는 막대기 하나를 똑바로 걸치는데, 한쪽 끝은 흔들이차를 붙잡고 다른 한쪽 끝은 방 밖으로 뚫고 나가게 하여, 집 밖에 기둥 하나를 세워 그 나무와 잇는다. 기둥 밑에는 땅을 파고 큰 목판을 설치하여 기둥의 뿌리를 받치게 하고, 목판의 바닥 정중앙에는 말뚝을 만들어 뜨게 하는데 마치 대장간의 풀무와 같다. 목판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그 발을 까딱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목판의 양쪽 끝이 서로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목판의 기둥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러면 기둥 끝에 가로지른 나무가 세차게 들이밀고 내밀고 하여서 방 안의 수레가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움직이게 된다.
방 안의 네 벽에는 십 층으로 시렁을 설치하고 그 위에 그릇을 두어서 날리는 가루를 받는다. 집 밖의 의자에 앉은 사람은 책을 보거나 글씨를 쓰기도 하고, 손님과 마주하여 담소를 주고받아도 안 될 것이 없다. 다만 등 귀에서 나는 삐거덕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지, 무엇이 그런 소리를 내게 하는지는 모른다. 발놀림은 아주 미약하지만, 거두는 효과는 매우 크다. 우리나라 부녀자들이 몇 말의 가루를 한 번 치면 금방 머리카락과 눈썹에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손과 팔뚝이 뻣뻣하고 말랑거리게 되니, 애쓰는 것과 편안함 그리고 얻어지는 효과가 중국의 이것과 비교해 보면 과연 어떠한가?“ 연암은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창한 북학파의 영수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다. 물레방아 외에도 베틀(織機), 풍구(風具), 용미(龍尾, 인력 양수기) 등의 농기구도 함께 만들었다는데, 나는 함양의 물레방아를 보며 그의 실험정신을 생각하는 시간여행이 되었다. 덕유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세 고을을 형성하였는데 동쪽에 원학동(猿鶴洞), 중앙에 심진동(尋眞洞), 서쪽에 화림동(花林洞)의 안음3동(安陰三洞)이다. 특히 이 심진동 상류에는 용추폭포가 있어 풍부한 수량과 계곡의 낙차를 이용한 물레방아 설치의 적지였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물레방아의 그 기능은 변했을지라도 “함양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에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도네...”의 민요처럼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이룬 우리의 정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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