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연암박지원의 술 낚시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8. 1. 01:08


연암박지원의 술 낚시

 

 

 

조선정조 89년경의 일이었다. 기나긴 봄날의 해가 서산에걸릴 무렵, 서울 남산골에 살고 있었던 현직 승지 이모가그 날밤 당직이어서 시간을 맞추어 대궐에 들어가기 위하여북 다른 재(현재 명동 천주교당)에 이르니 길가의 다 쓰러져가는 조그마한 초가집 문 앞에 팔척 장신인 텁수룩한 노인이망건도 쓰지 아니한 머리에 정자관(程子冠)만 삐뚜름하게얹고서 마치 이승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지나가는이승지의 남여(藍與) 앞을 가로막고 두 팔을 들어 길게읍을 하는 것이었다.

 

 

이승지는난데없이 길가에서 초면 인사가 그것도 몸차림이나마 제대로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인사를 받은 이상, 하는 수 없이남여에서 내려와 답례로 읍을 하였다.

 

 

그랬더니이 노인은 이승지에게 "영감 이 집이 내 집이오. 잠깐들어와 수어(數語)나 합시다" 하는 것이다.

 

 

이승지는첫째 그 달갑지 아니한 모양도 눈꼴이 틀리고, 둘째로 번()을들 시간도 거의 되었으므로 "지금은 공무로 입직하러가는 길이니, 이 다음에 필히 심방(尋訪)하겠소" 하며남여로 올라가려 하니 그 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기세도당당하게 승지의 길을 막으며 이승지에게 하는 말이 "아따! 근군(近君)하는 시종신(侍從臣)이라 자세가 대단하구려. 해가 아직 늦지 아니했는데, 담배 한대 피우고 갈 여가도없단 말이오" 한다.

 

 

이승지는이 노인의 책망 비슷한 말투에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그 집으로 따라 들어가, 저간을 살펴보니 먼지가 가득한한간 방이나 윗목에는 서책이 가득하였다. 주인은 다시승지에게 읍하고 아랫목에 놓인 초방석(草方席)으로 인도하니승지는 그의 말대로 그 방석에 앉았다. 그 다음 주인은아무 말 없이 앉았다가 안문으로 향하여 "손님이 오셨으니술상을 내오너라" 고 한다.

 

 

잠시후, 헌 누더기로 간신히 앞을 가린 여자하인이 걸죽한 막걸리한 뚝배기와 프르둥둥한 서산 상사발 하나와 김치 한 보시기를모 떨어진 소반에다 얹어 내다놓으며 손님을 기웃기웃 쳐다보고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그 상을 손님 앞에 놓고 뚝배기에서상사발에다 막걸리를 따르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이승지는당초부터 주인이 하는 짓이 이상하여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마음이 불안한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인데, 그 막걸리따르는 것을 보고 속마음으로 크게 놀래어 불안하였다.

 

'저막걸리를 먹으라고 하면 어찌한다' 하고 주인의 거동만주시하고 있었다. 술을 따라 놓고도 말이 없던 주인은 혼잣말로 "귀한 손님이 이러한 막걸리를 자실 수야 있나 내나마시지." 하고는 훌쩍 들어 마시고는 김치 국을 조금마신 뒤에 다시 한 사발을 더 부어 놓더니

 

"이것은내 차례니 손님의 말 기다릴 것 있나?" 하고는 또훌쩍 들어 마신다. 그리고 나서는 안문으로 향하여 "술상내어가거라" 한다.

 

 

승지가살펴보니 뚝배기 술이 원래 두 사발 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여자하인이와서 상을 치운 뒤에 주인은 승지에게 다시 읍하고 "영감대단히 미안하오. 오늘 영감이 내 술 낚시에 걸렸소. 바쁘실텐데 어서 가십시오." 한다.

 

 

이승지가답례를 하며 "도대체 노인은 누구이시며 술 낚시라는것은 무슨 말씀이오." 하고 물었다.

 

 

승지의물음에 대하여 주인은 껄껄 한바탕 웃고 나서 "술낚시꾼 성명은 알아 무엇하겠소. 내 집이 가난하고 내가술을 좋아하므로 가속이 간신히 반주 한잔씩은 준비하여주나 다시는 아니 주고 손님이 오셨다면 손님 술 대작할한 잔을 내보내 주는구려. 오늘도 저녁에 술 생각이 간절하였으나얻어먹을 방법이 없고 보니 통정할 수 있는 친구가 혹 지나가면들어 오라 하여 술을 낚아 낼까? 하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오늘은 아무도 못 만났기에 해는 저물어가고 해서 초조하여지는데, 마침 영감이 지나가시니 인급계생(人急計生)이라고 내가영감을 내 집으로 유인하여 집에만 들어오시게 하면 내계획은 달성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불고체면하고 인사를청한 것이나 인사를 아니 받으셨다면 모르겠거니와 받은이상에는 초면 친구를 괄시는 못하는 것이라 꼭 따라 오실것이 아니오. 나는 이 방에 손님이 있는 것만 보이면 술은마실 수 있거든요. 아까 계집하인이 기웃기웃한 것은 전에내가 없는 손님을 있다 하고 술을 낚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그 뒤로는 손님 술을 내왔다가도 손님이 없으면 도로 가져가는구려. 그래서 참말로 손님이 있나 없나 보아 없으면 도로 가져가려고기웃거린 것이오. 오늘의 이 신기 묘산이 적중하였으니누추한데 오래 앉아 계실 것이 없소. 어서 가시오." 하며 문 밖까지 전송을 하여주는 것이었다.

 

 

그집에서 나와 다시 남여를 타고 대궐로 향하는 이승지는방금 자기가 당한 일이 맹랑하기도 하였거니와 그보다도술꾼의 술 낚시질의 이용물 노릇을 한 것이 지극히 분하였다. 그 날밤 승정원에서 이승지와 함께 번을 들은 승지 남공철이이승지의 안색이 좋지 못함을 보고 "오늘밤에는 영감의기색이 좋지 못하니 댁에 무슨 연고가 생겼소?" 하자.

 

 

이승지는쓴웃음을 지으며 "집에는 별 일 없지만 오는 길에서괴상한 일을 당하였기 마음이 편치 못하오." 하면서오는 길에 당한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때에 승정원 내시가나와 상감마마께옵서 입직한 승지를 부른다고 한다.

 

 

승지가명에 의하여 어전으로 입시하니 정조가 하교하되 "오늘밤은하도 심심하기에 시종신들과 한담으로 소견할까? 하여 부른것이다." 하며 옥당들의 주담(奏談)이 끝난 뒤에 두승지를 바라보시며 "너희들도 말을 해보아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자이승지가 "오늘 번들어 오는 길에 당한 일을 말하려고했으나 비설(鄙屑)하여 못 아뢰나이다." 하니

 

정조는 "군신의 사이는 가인 부자와 같으니 친구에게 말하려던것을 임금에게 어찌 말 못 할 것이냐. 본대로 당한 대로말하라" 하신다.

 

 

이에이승지는 오늘 입궐하러 들어오다가 북 다른 재에서 당하였던일을 자세히 아뢰는 도중 "술을 따라 놓고도 권하지않더라……" 는 구절까지 이르렀을 때,

 

 

정조가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정도만 들어도 나는 그 사람이누구인가를 짐작하겠다" 고 하신다.

 

 

이승지가그 다음 일을 다 아뢴 뒤에 "신은 그 사람이 실성한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고부언하니,

 

 

정조는다시 웃으시며 "그 사람이 실례한 것이 아니라. 네가몰지식하다. 너는 문과도 하고 벼슬도 하였으나 사책에오르지 못하되 그 사람은 지금 방달한 미친 사람 비슷하지만사책을 빛낼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정녕코 박지원일 것이다" 하시니 이승지는 자기가 고루하여 문봉으로 일세를 능가하는연암선생 박지원을 못 알아 본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물러 나왔다.

 

 

그옆에 시립 하였던 남공철이 다시 부복하여 아뢰기를 "전하의지금 하교를 듣자오니 옛말의 지신막여군(知臣莫如君)이적실한 말씀이외다. 성명지치(聖明之治)에 아래에 그런사람이 봉초(蓬草)에 매몰되면 옥의 티같이 성루가 될까합니다. 이미 통촉하셨으니 유현(遺賢)의 탄이 없으시길바랍니다" 하였다.

 

 

정조가남승지에게 이르기를 "내가 유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지원의 문장이 섬부(贍富)는 하나 정도로 아니 나가고권도로 나가므로, 그 버릇을 징계하려고 모른 체하였으나, 그 정도로 기한(飢寒)에 빠진 것을 몰랐다." 하시고, 즉시 박연암을 불러 초임을 시키시고, 일년 이내에 안의(安義) 현감을 제수 하셨다.

 

 

박연암은소년시절에 경제문제에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시대가 허용을 아니하니 다시 문장변으로 들어가서 400년여를내려오던 고문사체를 개혁하려 하니 박제가, 이덕무, 김매순등이 다들 그의 문도라, 이고증(泥古症)에 걸린 당시 문사들이연암을 이단이라고까지 지목하고 정조에게 박지원은 세상을버려놓은 사람이라고 아뢰어 정조도 연암을 미워하였던것이다.

 

 

그러나박연암은 자기의 초지를 그대로 굳게 지키어 흔들리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인도 남편이 세상에 나서지 못하는 것이 본뜻을 지키기위하여 그러는 것이라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바느질품도팔고 갖은 고초를 당하여 가며 밤에 글 읽을 때 쓸 초와좋아하는 술은 조금씩 이어주되 술의 거성인 연암을 만족하게까지할 재력은 없으므로 매일 한 두 잔 정도의 술도 그 부인이진심 갈력으로 대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 생각이 나기만 하면 연암은 가끔 그러한 행동을 하였던것이며, 그 날은 공교롭게도 입직할 승지에게 걸리어 큰출세는 못하였어도 그토록 좋아하는 술의 해갈만은 면할수 있는 길이 정조에 의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오백년기담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