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역법과 달력
전근대 동아시아 시간질서 변화의 단면
달력이 왜 중요한가?
인간의 생활을 시간적인 측면에서 다루는 것이 역사와 달력이다. 이 가운데서도 하늘의 천체의 운동을 살펴보고 예측하는 역은 인간의 시간 생활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기본적인 법률이다. 그리고 이를 생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곧 달력(almanac)이다.
오늘날 달력이라고 하면 대개 1년 12개월의 날짜와 요일을 기록해 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전통시대 달력은 정치, 문화, 과학적으로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달력의 통일은 국가 통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했다. 달력의 통일은 곧 시간과 도량형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정치하는 사람들은 달력을 국가 통치 질서와 관련지어 매우 중요시했다. 한국을 비롯한 전통시대 동아시아는 중국달력을 기준으로 했다. 이는 시간이 곧 치적 권위의 상징이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적 시간체제의 영향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국제적 표준시간은 서양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러한 서양 주도의 시간 통일은 근대 이후 서양의 우위를 확인해 주는 또 하나의 지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간의 통일은 과학적 우위와 함께 정치적 우위라는 함수 위에 존재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측면은 전통시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시간체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중국적 시간체제를 형성하였으며, 한국은 중국의 시간체제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국가이다. 물론,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달력의 영향을 받았지만, 서양력이 들어오기 전까지 가장 과학적으로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시헌력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일본은 시헌력 이전의 역법인 수시력을 태양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사용하였는데, 17세기에 조선이 시헌력을 수용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전통달력과 시간관념
역의 최소단위는 하루이다. 이 하루의 기점을 정하는 방법과 1일을 분할하는 방법을 시법이라고 한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태양력(그레고리력)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896년부터이다. 그 이전인 조선시대에 사용된 역은 대통력과 시헌력으로서 이들 역은 흔히 음력이라 불리는 태음태양력이다.
한국에서 대통력이 사용된 것은 조선 건국 이전인 1370년(공민왕 19)부터이다. 대통력은 명나라의 역에 따라 개력한 역으로서 이 역은 조선을 관통하여 1653년(효종 4)에 시헌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283년간 사용되었다.
고려가 대통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원명 교체라는 정치적인 변수가 가장 큰 배경이었다. 대통력이 사용되기 전, 고려는 원나라 역인 수시력을 사용하였다. 대통력은 사실상 수시력과 거의 비슷한 역법이었으므로 대통력은 엄밀히 말해 개력이 아닌 왕조교체에 따른 역법의 개명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개력은 정치적인 이유가 개력의 가장 큰 이유였고, 때문에 날짜나 시각 변동 등 역법상의 갈등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력에 이어서 1653년부터 사용한 시헌력은 1896년(건양 원년) 1월 1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서양의 태양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조선에서 243년 동안 공식력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음력으로 통칭되고 있는 시헌력은 그동안 사용되어 왔던 종래 중국역법과는 다른 서양역법을 기반으로 하는 역법이었다. 시헌력은 기존의 대통력과는 절기 계산법에서도 달랐고 날짜도 달랐으므로 대통력으로 개력할 당시와는 달리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시간질서 속에 편입되어야 하는 조선의 입장과 과학적으로 우수한 역법이라는 명분에 힘입어 공식력으로 채택되었다.
공식력은 1896년에 다시 시헌력(음력)에서 태양력(양력)으로 바뀌었다. 조선은 개항을 기점으로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줄줄이 조약을 체결해야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과 날짜가 다른 음력을 계속해서 사용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일본의 입김이 작용한 갑오경장이 추진되면서 조선은 본격적으로 중국 중심의 시간질서에서 서양 중심의 시간 질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삭망을 기준으로 한 한 달의 시간 단위
현존하는 조선시대 달력 즉 역서는 중국력과 매우 흡사하다. 조선시대는 달력을 책력 혹은 역서라고 불렀다. 오늘날과 달리 달력이 책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역서는 대통력이건 시헌력이건 1년을 기준으로 한 태양년과 달의 위상 변화 즉 삭망을 기준으로 한 달을 정하는 것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 단위는 지구의 공전과 달의 자전을 기준으로 한 불변하는 자연의 주기이다. 숭정(崇禎) 10년 1637년 명나라에서 발간한 달력을 보면 달력의 표지가 당시 조선에서 발간한 달력과 동일하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달력은 중국 달력을 그대로 본받았다.
역서는 자연주기 외에 인간 생활에 필요한 대로 정해 놓은 인위적 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12개월의 구분과 60간지, 28수 등이다. 간지를 나날에 배당한 것을 일진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역서에는 날짜 아래에 간지를 배당하였으며, 간지로 1년의 날짜를 나타내었는데, 이는 중국 달력의 체제를 따른 결과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시간체계는 고대 중국에서 형성된 것으로 특히 60간지의 생성은 목성과 토성이 같은 황경상에 거듭해서 돌아오는 주기가 60년에 가깝다는 천문학적 주기와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60년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주기가 인위적 시간 구분인 간지(干支)로 결합되어 역서에 사용되었다.
시간 인식과 달력의 제작
옛날 농경사회에서 왕의 제일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에게 씨 뿌릴‘때’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에게는 ‘때’라는 것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고 고기를 잡을 때를 바로 아는 것이 살기 위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지금도 흔히 우리는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는 흘러가는 시간이 모두 같지 않으며 어떤 일이든 가장 적절한 때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인간 활동에는 항상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간과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달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가장 간단한 시간이나 날짜의 경과는 천체 운동만으로도 잘 알 수 있었다. 즉, 밤과 낮 그리고 달이 변하는 모습을 잘 관찰하면 시간의 흐름을 손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달의 변화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세계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시간의 척도로 받아들여져 왔다.
사실 태양과 달의 운행만으로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달력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달력이라 할 수 있는 천체력에는 별들의 운행까지 포함되어 있어 매우 복잡하다. 이것은 당시 달력의 기능이 실용적인 의미를 넘어 일식이나 월식의 예측은 물론이고 점성학적 해석까지 덧붙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사회의 천체력은 우리가 매일매일의 날짜를 알기 위해 사용하는 현대의 달력과는 거리가 멀다.
천체력이든 일반 달력이든 시간과 날짜의 기준을 정하는 데는 정치적 속성과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음력을 버리고 유럽식의 그레고리력인 양력을 사용했는데, 이는 음력이 정확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음력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서양력에 비해 훨씬 우리나라의 실정에 더 잘 맞고 정확한 달력이다. 밀려 들어오는 서양의 물결 앞에서 현실적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지 결코 서양력이 우수해서가 아니었다. 서양력을 쓰기 시작하고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명절이나 제삿날 등을 음력에 맞추고 있는 것을 보면 음력이 지닌 과학적인 힘을 엿볼 수 있다.
본래 역법이란 집권자가 만든 일종의 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법은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해야 하는 것이므로 권력자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또한 역법은 어떤 형태로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갖추어진 사회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역법은 정치적이고도 정서적인 측면이 모두 고려된 하나의 정책이었다.
역법에 따라 달력을 만들다
우리나라 역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중국의 역법이다. 중국의 ‘역법은 천체의 현상은 하늘의 뜻을 반영한다.’는 사상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이나 달, 행성 등에 관한 천체 현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시의 달력은 단순히 날짜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일종의 천문계산표였다. 따라서 역법은 실용적인 달력으로서는 물론이고,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정확해야만 했다.
천체 현상은 법칙을 가지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만히 변하는 것이므로, 역법 연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역법은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되었다. 결국 천체의 변화에 따른 정확한 역법을 만들고자 하는 갈망은 역의 개정과 서양 역법의 수용으로까지 이어지게 했다.
시헌력은 지금까지 음력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역이다. 시헌력은 역대 역법 중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하다. 시헌력이 사용되기 이전에도 중국 역법을 그대로 수용한 여러 가지 역법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주체적이고도 자주적으로 역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세종 때에 와서 칠정산내외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정치적이고도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중국력은 그대로 사용되었고, 중국이 시헌력을 사용하게 되자 우리나라도 시헌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헌력은 전통 역법과 다른 점이 많아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전통 역법에서는 24절기 간의 길이를 15.22일로 일정하게 나누었지만, 시헌력에서는 태양의 운동 속도에 맞추어 절 기간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조정했다. 더욱이 시헌력은 서양이나 청나라의 오랑캐 문화의 일부라는 인상을 주어 정서적으로도 거부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시헌력의 과학성이 입증되면서 차츰 대중적인 역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시헌력은 1896년 1월 1일에 현재의 그레고리력으로 바꿔 사용할 때까지 공식적인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연호의 사용
조선시대 역서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표제명에 중국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대통력의 표제명을 검토해 보면, 임진왜란 시기인 1598년을 경계로 그 이전까지는 중국 연호가 없었고, 그 다음해부터 ‘대명만력(大明萬曆)’이라 하여 중국 연호가 사용되었다. 1598년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해로 중국 연호의 사용은 임진왜란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역서는 1598년 이후부터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직전까지 중국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를 통해 볼 때 1597년 이전 시기에는 역서에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종 대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의 편찬으로 조선은 처음으로 자국의 역서를 편찬할 수 있는 과학적 능력을 갖추었으며, 이후 이러한 역량은 역서 편찬에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역서에 중국 연호를 사용한 것은 시간체제뿐만 아니라 관념상으로도 중국적 시간체제 속에 편입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한국과 중국의 전통 역서에는 시간에 대한 두 개념, 즉 순환적 개념과 직선적 개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즉,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상서로운 시기를 택하고 싶은 소망과 계절과 해와 세대가 직선적으로 지나고 있는 자연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간지로 날짜를 헤아리는 것은 시간에 대한 순환적 개념을 강요했고 순서가 정해져 있는 육십갑자는 다른 계산법을 능가했다. 순환적 개념과 대립하는 직선적 개념에 따라 군주의 치세가 시작된 해부터 햇수를 매겼는데, 따라서 서양과 달리 동양 3국은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연호에 치세의 햇수를 사용하였다. 연호에 사용되는 해의 의미는 계속적으로 순환하고 지속하는 시간이 아닌, 특정한 순간이나 때를 의미한다. 이처럼 시간이란 정치·사회적 필요에 따라 조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후기 역법과 달력 - 전근대 동아시아 시간질서 변화의 단면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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