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과 근대사상
유배지의 제자들
다산학단
프롤로그
다산 정약용 스스로 500여 권이라고 밝힌 그의 저작 활동은 주로 강진 유배기에 이루어졌다. 한 인간이 평생 베껴 쓰기에도 불가능한 분량이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방대하면서도 조리정연하고 예리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성과는 제자로 스승의 곁에서 직접 목격한 증언이 말해주듯이‘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이겨낸 결과였다.
이렇게 방대한 저술 결과는 유배지에서 만난 제자들의 조력이 있어 가능했다. 유배지에서 키운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연구와 저술을 도왔다. 분업적으로 저술을 도와 함께한 것이어서 집체 저술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다산이 강진에서 키운 제자들은 친척이거나 양반 자제도 있지만, 읍중 아전집의 자제들과 승려들도 있었다. 조선에서 사제 관계의 전통으로 보아 매우 특이하다. 이들은 절망과 고난의 시기에 다산 정약용과 사제의 연을 맺고 함께 역경을 딛고 희망을 써 나갔다. 다산초당은 절망을 디디고 다산의 희망주의가 피어낸 새로운 세계였다.
유배지의 제자들은 대개 처지와 개성에 따라 학문 진로를 정하였다. 어떤 제자는 과거 공부, 어떤 제자는 경학 공부에, 또 어떤 제자는 문학이나 기술을 중점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다산학단의 중요한 학문자세와 중심 과제는 수기치인에 있었다. 다만 저술에 힘쓰기를 강조하는 스승의 모범을 따라 각자 개성적 전공으로 나갔다. 천문·농학·지리·역사·기술·외교·문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 성과를 내어놓고 스승의 실학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다산학단은 정약용이 강진을 떠나면서 강학을 중단했다. 강진을 떠나면서 다산은 ‘다신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서로 유대를 가지도록 하였다.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열리는 모임으로 상호 간에 친목·연대하고 스승을 향한 존모의 마음을 새겼다. 그리고 각기 발전을 이루고 업적을 남겼다.
다산학단은 다산을 계승하여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수립했거니와 강진·해남·진도 같은 먼 바닷가의 고을에 ‘문명의 고을’이란 명예를 안겨 주었다.
다산, 강진과 만나다 – 절망을 딛고 온 다산
다산 정약용은 수십 년의 관직생활 동안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바르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서학(천주교 신앙)문제를 빌미로 삼아 부패한 세력의 모함으로 되돌아왔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셋째 형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 형제는 평생 다시 보지 못하였다. 정약용은 40세로부터 57세에 이르는 18년 동안 남쪽 바닷가의 외진 곳에서 보냈다.
유배지 강진은 다산에게 새로운 인식과 학문을 요구하였다. 당시 민인民人들은 무책임한 지방관과 포악한 아전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임신만 해도 군포를 부과하고 백골이 된 조상을 세금에서 빼 주지 않았으며, 여자를 남자로 바꾸고, 강아지 이름을 군안에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고통을 참다못해 어떤 집에서는 남자가 자신의 양근을 자르는 처참한 일까지 발생했다(「애절양」). 세상은 원망과 탄식으로 가득했다. 강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온 나라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다산은 자신의 학문세계를 ‘성인의 참뜻’에 두고, 세상을 바꾸는 실천의 사상적 토대를 위해 유교 경학연구(경전의 재해석)에 몰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현실의 문제해결책을 찾아 나라를 새롭게 바꾸고자 하였다. 강진은 다산에게 새로운 현실인식과 학문의 길을 요구했고, 다산은 강진의 제자들과 함께 이를 탐구해 나갔다.
아픔을 딛고 유배 온 다산
1801년(순조 1) 11월, 다산 정약용과 손암 정약전 형제는 죽음의 고문을 견디고 유배지로 쫓겨났다. 과천, 금강, 나주까지 함께 온 형제는 율정에서 각각의 유배지 강진과 흑산도를 향해 이별했다. 꼭 잡은 두 손에 할 말을 잃고 눈물만 흘리며 헤어진 이별은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이었다.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 읍내의 누구도 다산을 맞아주는 사람은 없어 주막집에 머물렀다. 1년여 기간 동안 다산은 공황상태였다. 음식도 제도로 먹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자포자기할 수 없었다.
‘사의(四宜)’를 다짐하며 다산은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베푼 것이다. 아전집[吏家] 자제들인 황상·황경 형제를 비롯해 황지초·이청·손순·김재찬 등은 가장 힘들었던 강진 생활 초기에 만난 제자들이다.
아전집의 아이들을 가르치다다산은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에서 기숙한 5년을 포함하여 8년간 읍내에서 지냈다. 이 기간 동안 다산은 읍중 제자를 만나고 가르쳤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회적 진출이 제한된 아전집 자제들이다. 다산은 읍중의 이 들에게 독서를 강조하였다. 세상 살아가는 법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다고 했다. 배움에는 귀천이 없고, 남녀노소, 지위고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 누구나 가장 아름다운 일이 독서라고 하였다. 다만, 아전집 자제들 중에는 스승이 마재로 돌아오면서 학문을 계속하지는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후일 상당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인물은 이청과 황상·황경 형제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 다산은 제자들의 성격과 특징을 살펴 실용학과 문학으로 구분하여 강학했다.
전등계 학연들과 만나다다산은 「다신계절목」의 끝 부분에 전등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강진 만덕사에서 혜장과 『주역』에 대해 토론하며 유불의 경계를 넘어 교제하였다. 혜장이 죽자 다산은 묘지문을 지어 애도하기도 하였다. 그 혜장의 제자들인 수룡·철경 등은 다산과 사제관계처럼 유대를 맺었다. 초의 또한 다산을 스승과 같이 섬겼다.
전등계는 바로 혜장의 제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수룡 색성과 철경 응언과 기어 자굉, 침교 법훈, 일규 요운과 초의 선사 의순(1786~1866) 등이 그들이다. 이처럼 전등계는 여러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풍에 쓰러지고, 복숭아뼈에 구멍이 뚫리다다산은 유배 초기 모진 고초를 겪었다. ‘중풍[풍비]’으로 인해 “혀가 뻣뻣하고 말이 헛나간다”고 괴로움을 호소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18년 유배 생활에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강진이 다산을 깨우치다
강진은 다산에게 조선 후기의 사회 현실을 절박하게 인식하고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개혁해야 한다는 사고를 갖게 했다. 행정·형률·경제 등 제도와 폐단을 생활의 관점에서 강진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백성의 고통과 부조리들을 통해 개혁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다산은 ‘일표이서’로 대표되는 경세학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그것이다. 『경세유표』에는 거대한 국가개혁론이 제시되었고, 『목민심서』에는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기준과 사무를 제시하며 “자신을 다스려라”, “공무에 봉사하라”, “백성을 사랑하라”는 세 가지의 자세가 밝혀져 있다. 또 『흠흠신서』에는 백성들의 생명을 소중히 하고 보호해야 하는 관료의 역할을 강조되어 제시되기도 하였다.
강진이야말로 다산을 사람다움과 생활현실의 인문학(경학), 현실과 이상을 함께하는 개혁적 사회과학(경세학)의 실천적 사상가로 만들었다.
강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고통을 나누다
다산은 강진 고을 사람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남편을 ‘반상(盤床)’이라 하고, 돈으로 지급하는 모내기철 품삯을 ‘돈모(전앙, 錢秧)’라고 하고, 밥을 먹여 주는 품삯을 ‘밥모(반앙, 飯秧)’라고 한다. 높새바람을 ‘고조풍(高鳥風)’, 마파람을 마아풍(馬兒風), 보릿고개를 맥령(麥嶺), 책씻이를 ‘세책례(洗書禮)’ 등으로 뜻을 살려 시어(詩語)로 바꾸었다. 시부모가 갓 시집온 며느리를 ‘아가(兒哥)’라고 하고, 낙지를 ‘낙제(絡蹄)’라고 하는 것은 음을 살려 한자어로 바꾸었다.
다산과 그 제자들은 강진 사람들의 생활감정이 묻어나는 언어들을 시문학에 적극 활용하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기호와 성정에 맞는 ‘조선시’를 짓게 되었다. 중국의 역사를 끌어오기보다는 우리의 역사, 풍속, 방언 등을 시어로 사용한 것이다.
다산은 1820년 고향에 돌아와 강진·흑산도를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속담과 격언을 모아서 『이담속찬』을 완성하였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모은 속담[동언]을 정리하였고, 이강회는 스승 정약용의 백언시를 보완하여 『방언보』를 지었다.
1803년, 관리들의 부패와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고통 받는 농민의 형상을 보며 깊이 슬퍼했다. 황구첨정과 백골징포에 시달리다 못한 농부가 “자식 낳은 죄로구나!”라며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일이 강진에서 벌어졌다. 다산은 이러한 참상을 보고 굶주린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무능하고 부패한 관리와 나라의 낡은 제도의 개혁을 절감하게 되었다.
함께 베우고 익히다 – 다산의 희망주의가 제자들을 키우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는 500여 권의 방대한 양이다. 모든 사서육경을 비롯하여 역사·지리·예악·언어·의학·교육·국방·행정 등 학문의 전 분야를 다루고 있다. 경학·경세학과 기예 등 오늘의 인문·사회·자연과학기술로서 실학의 집대성을 이룬다. 그 분량과 내용이 한 개인의 능력으로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한 것이어서 경이롭다.
이 저술들은 대부분 1801년(40세)부터 1818년(57세)까지의 강진 유배기 동안에 이루어졌다. 18년이라는 시간과 ‘강진’이라는 공간이 『여유당전서』의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바탕은 책이 많기로 유명한 해남 외갓집의 장서였다.
당시 강진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윤씨 가문과 윤선도의 사위였던 광주이씨 이보만의 후손 등 유수한 양반 가문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인근의 만덕사와 대둔사는 아암 선사 혜장(1772~1811)과 초의 선사 의순(1786~1866) 등 조선 불교계의 선론을 주도한 중심인물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다산이 강진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다산 자신에게 있어서나 강진의 인재들에 있어서나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제자들을 키우기 시작한 곳은 강진읍 내 주막집[사의재]에서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익힌 곳은 귤동마을 다산 중턱의 초당(다산초당)이었다. 절망의 시련을 디딘 다산의 위대한 희망주의가 여기에서 꽃피기 시작하였다.
초당의 안과 밖
다산은 1808년, 귤동마을 뒤 다산 중턱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원래 귤림처사 윤단(1744~1821)의 별장이던 곳에, 친지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경을 하고, 건물을 더 지었다. 서로서로 노력하고 힘쓰게 하려는 의미로 연못도 만들었다. 그리고 장서 1천여 권을 비치하였다. 약간의 토지도 일구고 장만하였다.
다산 초당은 꽃과 나무가 보기 좋게 우거지고, 작은 폭포와 연못 앞에는 다조가 있어 차를 끓이고 마시는 데 이용하였다. 연못에는 강진 앞바다의 돌로 만든 석가산이 자리하였다. 그리고 연못 좌우에 동암과 서암 두 채의 초가집이 자리하고, 바위 벽에 세긴 ‘정석’이란 표지도 세웠다. 그리고 복숭아나무, 연못의 잉어, 초당 뒤 백련사로 넘어가는 붉은 동백꽃길은 특히 초당의 아름다운 경치를 대표한다.
유배지의 제자들은 그 안에서 양반과 아전이란 신분을 넘어 함께 지내며 인간적 유대를 맺고, 스승과 제자가 배우고 토론하며 저술을 진행하였다. 뒷날 스승이 고향으로 돌아간 초당은 다신계를 바탕으로 학문과 우의를 다지는 곳이었다. 다산초당은 연구와 교육이 함께 이루어진 곳이다.
함께 배우고 익히다
다산초당은 다산과 제자들의 학문연구 및 교육활동의 장이었다. 교육은 질의와 토론이 특징이었다.「다산문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주역』을 예로 든다면, 역학을 강의하고 강의 내용을 이해한 제자들과 다산이 질의·토론을 벌이고, 이 결과를「다산문답」 이란 이름의 책자로 묶어 엮어 내었다.
또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메모하고 기록하여 저마다의 총서를 엮어내기도 하였다. 정성 들여 써서 모은 것인데, 이를 초서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학습 메모이다. 이강회의 『유암총서』, 윤종진의 『순암총서』, 황상의 『치원총서』와 황경의 『양포총서』, 윤종삼의 『성헌총서』 등이 남아 전해진다.
다산의 제자들은 좋은 책을 베껴 가며 하는 공부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저마다의 총서로 남은 것이다.
베끼고 옮겨 적으며 스승의 저술을 돕다
제자들은 책이 귀하고 한 처지에서 고전과 선배·동료의 좋은 글을 베끼고 옮겨 적으며 공부를 하였다.
나이 어린 황상은 어른도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는 학질에 걸려서도 바른 자세로 붓을 잡고 초서 작업을 계속하였다. 강인한 의지와 학문을 향한 열의로, 파리머리처럼 작은 글자를 하루에 네댓 쪽씩 베껴 써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풍비[중풍]에 걸려 “혀가 뻣뻣하고 말이 헛나가”는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초기에 만나 사뭇 곁에서 지킨 황상은 “선생님께서 20여 년 동안 날마다 연구하고 저술에 골몰하셔서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與褱州三老」)라고 증언하고 있다.
다산은 신병의 장애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연구저술의 작업을 밀고나갔다. 이청 등 많은 제자들이 그 과정에 각자의 전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조력하여 다산과 함께 우환을 견뎌 내고 희망의 밭을 일구었다.
3. 30여 제자들, 다산학단 이루다
다산이 18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면서 길러낸 제자들은 양반 자제뿐 아니라 강진의 아전과 승려까지 포함되어 있다. 경학에서 경세학으로 체계화된 방대한 저작 과정은 바로 이 시기의 제자들의 도움이 큰 몫을 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힘입어 각자 개성에 맞게 다양한 분야의 적지 않은 성과를 생산했다.
이들의 학문적 내용과 범위가 모든 영역에 걸쳐 있고, 분과학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로써 유배지의 제자들은 다산의 학술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다산학단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학술적 성과를 바탕으로 다산학단은 차츰 서울의 다양한 학인들과 교유를 진행하면서 다산학을 계승하고 넓혀갔다.
다산학단이 비록 다산을 능가하는 학문 성과를 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19세기 학문경향의 신조류였다. 시문학에서는 높은 사실주의 성취를 이루기도 하였다.
개성에 맞게 학문의 방향을 찾아서
다산학단은 문예와 학술 등으로 구분하여 각기 전공을 선택하였다. 개성에 맞게 방향을 선택했다. 자신의 역량과 취미를 살펴 장점이 있는 분야에 집중적으로 힘을 쏟았다. 문예를 잘하는 사람, 수학이나 과학에 재주가 있는 사람, 비슷한 취향과 특장에 따라 짝을 지어 토론하고 생각을 공유하면서 학문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청과 이강회는 이학理學 분야에, 황상과 초의는 문예에 전공을 두었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이후 김정희, 홍현주 같은 서울의 유명한 문인·학자들의 인정을 받고 중앙의 학인들과 학문적 교유를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유배지의 제자들은 다산의 손과 마음이 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
따끔한 훈계로, 한없는 격려로 길러 낸 제자들이다. 다산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을 기억하고 함께했던 시공간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앞길을 헤쳐 나갔다.
서울의 학인들과 만나다
19세기는 세도정치의 등장과 함께 서울 경기지역의 정치적, 경제적 독점이 심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학술문예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방의 학자와 문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중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성된 ‘다산학단’이 서울의 학술문예계와 교류하는 과정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정약용이 강진을 떠나 매재 고향으로 돌아가자 강진 제자 이청과 황상 등 다산학단은 서울의 명사들과 일정한 교유를 하게 되었다. 홍현주 형제나 김정희 형제 등 서울의 명문 인사들은 그들을 다산의 고제자로 높이 평가하였다. 정약용과 그의 저작들이 이룬 학문적 성취를 통하여 강진과 서울의 학술문예계는 새로운 소통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한편, 다산학단의 불교계 인물들도 김정희 등 서울의 저명한 유학자들과도 깊은 교유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유불 간의 교류가 가능했던 것인데, 이는 정약용의 학문적 성취와 함께 정학연의 서울지역 학계와의 교류 활동에 의해 연결되었다.
4. 다산학단의 의미
‘다산학단’으로 알려진 인물 중에서 초의와 윤정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낯선 학자·문학가이다. 그런데 다산학단의 학자들은 정약용을 매개로 서울과 지방의 학계를 연결시켜 주었다.
19세기 세도정권이 등장하면서 서울 경기지역 중심으로 정치적, 경제적 분야뿐만 아니라 학술문예 분야에서도 독점이 심화되어 지방의 학자와 문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중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진에서 결성된‘ 다산학단’이 서울의 학술문예계와 교류하는 과정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다산학단’을 통하여 유교계와 불교계의 소통을 규명하게 되었다. 19세기 서울 경기 지역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불교에 우호적인 사상적 움직임들이 싹트고 있었다. 시어에 그간 금기시되었던 불교적인 용어들이 자유롭게 등장하고, 불교의 권선적 측면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유들이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서학이 성리학에 가장 위협적인 사상체계로 등장하면서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이 싹텄던 것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다산학단은 서울의 유학계와 당시 조선 불교의 중심지였던 해남·강진지역이 정약용의 학문적 성취와 정학연의 서울지역 학계와의 교류를 통해 연결되는 과정은 19세기 유불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산학단은 19세기 지성사 연구에 중요한 활로를 마련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 조선 지성사의 중심에 정약용과 김정희를 설정해 볼 수 있다. 이들의 상호 학문적 교류는 그 양적인 면을 떠나 당시 최고 지성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들과 이들 제자들이 서로 교유했던 서간문, 시 등을 분석하면서 그들 사이의 학문관계를 구체적으로 규명하고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그간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19세기 전반 지성사를 기술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산학단의 조명을 통해 지방학계의 학문적·문예적 동향을 살펴보는 것은 그간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19세기 전반 지성사 연구를 보완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배지의 제자들 - 다산학단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김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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