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자가 만든 이슬람식 천문시계29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7. 31. 20:14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자가 만든 이슬람식 천문시계

유금과 아스트롤라베

알려지지 않은 실학자, 유금


실학자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8세기 실학자 중 유금(, 1741~1788)이라는 인물이 있다. 유금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 사람인 유득공의 숙부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서호수 등과 교우한 북학파 실학자 중의 한명이다. 평생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고 학문과 예술을 즐기며 북학파 벗들과 교유한 인물이다.

유련은 거문고를 좋아하여 자신의 이름을 유금으로 개명하였다. <출처: 문화재청-공공누리>

유금은 거문고를 좋아하여 자를 탄소()라 하고 원래 이름이 유련이었으나 이 이름 대신 거문고 금()자를 써서 유금으로 개명하였다. ‘탄소’는 ‘탄소금()’의 준말로 소금을 연주한다는 의미이다. 탄소라는 자와 유금이라는 개명에서 보듯이 거문고를 매우 사랑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유금은 음악뿐만 아니라, 인장을 잘 새기는 재주가 있었고 수학과 천문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서재를 기하학의 기하를 따서 ‘기하실()’이라고까지 불렀다.

연행과 『한객건연집』의 편찬


유금은 북경 연행을 모두 3번이나 갔다 왔다. 물론 서자출신인 자신의 신분 탓에 공식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연행을 다녀 온 뒤 유금으로 이름을 개명했고, 서양선교사들의 서적도 탐독했다.

유금이 연행길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 문인 이조원과 반정균의 서문을 얹어 간행한 한객건연집. <실학박물관 소장>

유금은 1776년에 사은부사였던 서호수를 따라 연경에 갔다. 이때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 벗들의 시를 각각 100수씩 총 400수를 뽑아 만든 『한객건연집』을 편찬하여 이조원과 반정균 등 청나라 문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유금은 귀국길에 이들의 서문과 비평을 받아 왔다.

『한객건연집』을 통해 유득공과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의 이름이 청나라 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조()·청() 문인들의 교유가 『한객건연집』을 통해 더욱 활발해졌고, 조선 후기 문화와 학술사에서 유금과 북학파 문인들의 위상이 높아졌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명의리론에 입각하여 임진왜란 당시 군대를 파병하여 조선을 구원해 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청나라와 여전히 교류했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명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마다 청나라 연행 사절단이 왕래하면서 청나라 문인들과 조선 문인들의 교유는 점차 하나의 풍조로 자리 잡았다.

담헌 홍대용이 북경에서 청나라 문인인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교유한 것은 박지원 등 북학파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홍대용과 박지원이 북경을 다녀 온 후 쓴 연행록은 점차 조선문인들에게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유금이 청나라 연행에서 『한객건연집』을 가지고 간 것은 홍대용과 박지원의 공이 크다.

천문학과 수학을 좋아하다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 이들은 C. 클라비우스가 교정한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의 전반 부분을 번역하였다. <출처: (CC BY-SA)Kircher, Athanasius@Wikimedia>

유금은 천문학과 수학을 좋아했다. 자신의 서재를 “기하실”이라 붙였는데 기하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소개한 서양의 수학인 『기하원본』에서 따온 것이다. 유금과 친분이 있었던 서유구는 남산 기슭에 있는 기하실에서 천문학과 수학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유금에게 다음과 같은 농을 던졌다.

“그대는 듣지도 못했나? 육예의 도는 도의 말단이고 수학은 육예 중에서도 말단일세. 자네가 공부하고 있는 게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네.”

유교경전을 읽고 해독하는 것이 선비들의 최고의 도였던 시대에 천문학이나 수학은 말단 학문이었다. 공부해 봐야 과거시험에도 나오지 않았고 선비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학문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배경 속에 서유구의 농은 분명 기분 나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금은 아랑곳없이 즐거워하는 낯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주변은 온통 천문과 역수에 관한 책들이었다. 서유구는 그의 진지한 학문 태도에 감복하여 다음과 같은 사과의 말을 전했다.

 

“자네는 명성을 얻고자 성품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네. 온 세상 사람들이 큰 것에만 매달릴 때 그대는 홀로 작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혼자 우뚝 서 있는 사람이라 할 만하네.”

유금, 이슬람 별시계 ‘아스트롤라베’를 만들다


천문학과 수학에 몰두한 유금이었지만, 그가 남긴 저술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인장 새기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책에 인장 찍기를 즐겨한 그였지만, 그의 책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담긴 천문기구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

유금의 아스트롤라베 <실학박물관 소장>

유금의 아스트롤라베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2002년이다. 2002년 일본 시가현 오오미하치만시의 토기야()가 일본 동아천문학회 이사장인 야부 야스오에게 검토를 의뢰하면서부터이다. 토기야의 조부가 1930년경에 대구에서 구입하여 패전한 후 일본으로 가져온 것이다.

유금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상단(부분) <실학박물관 소장>

처음 이 아스트롤라베가 일본에서 공개될 때는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앞면 위쪽 고리 부분에 ‘유씨금(’)이라는 인장이 고문헌 연구자인 박철상에 의해 해독되면서 이 귀중한 작품의 제작자가 유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울러 아스트롤라베에 청동 고리에 새겨진 “북극출지 38도(한양의 위도) 1787년에 약암 윤선생(이름 미상)을 위해 만들었다( )”라는 기록을 통해 제작연도도 알게 되었다. 이후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의 권위자인 미야지마 카즈히코 교수에 의해 18세기 동아시아인이 만든 것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아스트롤라베, 혼개통헌의로 동양에 소개되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장 나즈(Jean Naze)가 만든 아스트롤라베. <출처: (CC BY-SA)François de Dijon@Wikimedia>

아스트롤라베는 14세기 기계시계가 고안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 여행자들에게 가야 할 방향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가장 정교하고 정확한 천문시계였다. 해와 별이 뜨는 시간과 지는 시간을 계산할 수 있고, 미래나 과거의 어느 날짜에 천체들의 정렬 상태도 알아낼 수 있게 고안되었다.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라고 전하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이슬람 문화에서이다. 아스트롤라베가 이슬람에서 발전한 것은 어느 곳에 있든지 메카의 신전을 향하여 정확한 시간에 매일 5번의 기도를 해야 하는 이슬람 종교의례와 관련이 깊다. 유럽에서는 잊혀 있다가 11세기를 전후로 스페인 남부 지역을 통해 서유럽에 다시 전파되었다. 유럽이 아스트롤라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항해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명나라 말기에 클라비우스(Christoph Clavius, 1538~1612)의 아스트롤라베 해설서인 “아스트롤라븀(Astrolabium)”(1593)을 명말의 학자인 이지조(1569~1630)와 마테오 리치가 『혼개통헌도설()』(1607)로 제목을 붙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아스트롤라베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혼개통헌()’이라는 이름으로 청과 조선에 전래되었고, 일본은 16세기에 서유럽을 통해 직접 전래되었다.

유금이 만든 아스트롤라베


유금의 아스트롤라베 앞면 <실학박물관 소장>

아스트롤라베의 앞면은 일종의 천문계산기이다. 앞면에는 ‘레테(Rete)’라고 불리는 구멍 뚫린 판이 있는데, 이것을 돌려가며 원반 아래에 새겨진 눈금선을 통해 천체 관측값을 얻는다. 레테의 기본 뼈대에는 다양한 개수의 ‘지성침()’이 있는데 조선시대 유금이 만든 아스트롤라베에는 모두 11개의 지성침이 있다. 유럽에는 지성침이 40개나 되는 아스트롤라베도 있다. 이 지성침들은 특정의 밝은 별을 가리키도록 맞추어져 있다. 유금의 아스트롤라베에는 규대() 즉 규수대성(Mirach), 필수대성, 삼좌견성을 비롯한 11개의 특정별을 가리키도록 제작되어 있다.

유금의 아스트롤라베 모체와 레테 <실학박물관 소장>

모체판 앞면의 중심은 하늘의 북국을 나타내며, 이곳의 구멍에 핀을 박아 성좌판을 회전시킬 수 있도록 했다. 바깥쪽 둘레에는 지름 16.7cm인 원이 그려져 있다. 그 안쪽으로는 지름 16cm와 15.4.cm의 동심원 사이에 2도 간격으로 눈금이 있고, 그 안쪽은 24등분하여 아래쪽을 자초자정의 경계로, 위쪽은 오초오정의 경계로 삼아 12지에 초()와 정()을 붙인 시각 이름을 시계방향 순서로 새겨 놓았다.

유금의 아스트롤라베 내 24절기가 새겨진 부분. <실학박물관 소장>

모체판 뒷면에는 2도 간격의 눈금까지는 앞면과 같지만, 그 안쪽은 10도마다 눈금이 있고 그 안쪽은 30도씩 등분되어 황도12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24등분하여 24절기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해시계 역할을 하는 도표라 할 수 있다.

유금의 아스트롤라베 뒷면 <실학박물관 소장>

유금의 아스트롤라베는 한중일 통틀어 자국에서 제작된 것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전형적 형태의 아스트롤라베이다. 동아시아 특히 조선시대 서양근대 과학의 전래와 수용을 고찰하는 데 있어 귀중한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사용했을까?


아스트롤라베 관측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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