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의 개방성, 개화로 이어지다31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7. 31. 20:17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실학의 개방성, 개화로 이어지다

실학과 개화사상

실학사상 속에 근대 지향적인 요인이 들어있음은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지만, 최근 들어 조선 후기 사회 혹은 실학에서 근대성을 찾는 것 자체가 현재의 로망을 과거에 투영한 것일 뿐이라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18세기 실학이 단절되지 않고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까지 연속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일부 역사가의 로망에 불과한 것일까. 실학과 개화사상 간의 연결 고리를 찾아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용후생이 있은 다음에 정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 <출처: (CC BY-SA)by bdnegin (Brian Negin)@Wikimedia>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실학의 사상적 계승 여부일 것이다. 유학과 실학 간의 사상적 차이를 언급할 때 흔히 지적되는 것이 정덕1)이용후생의 선후관계이다. 원래 유학에서는 “정덕이용후생유화”라 하여 먼저 정덕을 내세우고 이용후생을 그 다음의 문제로 보고 있었다. 주자학경도된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이용후생보다는 정덕이나 수신의 문제에 매달려 구체적인 현실 문제는 도외시한 경향이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은 현실을 도외시하고 정덕만을 앞세우는 유교 이념을 비판한 사상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정덕을 이용후생 이후의 문제라 보았고, 이용 이후에 후생이 이뤄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용후생의 이념을 바탕에 둔 이른바 북학론은 유학의 전통적인 이념질서를 뒤집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정덕 대신 이용과 후생을 전면에 내세운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북벌론에 대치한 북학론을 내세워 근대 서양문명과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인물들이다. 북학파 실학자들이 중국 연행을 통해 보고 배워온 것은 다름 아닌 ‘이용후생의 학문’이었다.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다음에야 올바른 다스림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이용이 되지 않으면서 후생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 생활이 이미 제각기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겠는가.” - 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 중에서

이용후생론의 계승


청나라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모습 <출처: 실학박물관 제공>

연암 박지원에 이어 초정 박제가 또한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도덕이 바로잡힌 사회, 즉 정덕의 사회는 공허한 목표일뿐이라고 보았다. 도덕적 이념만으로는 빈곤을 해결할 수 없고, 빈곤이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명분이나 이념도 허구인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이용후생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의식주를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을 누리는 이른바 민생을 의미한다. 박제가는 『북학의』의 서문에 “이용과 후생, 둘 중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정덕을 해친다.”는 말을 남겼다. 인간 도덕의 문제는 이용과 후생 중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처럼 먼저 배가 불러야 남을 돌볼 수 있는 덕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박제가는 이용후생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키고, 바닷길로 외국 여러 나라와 통상하며, 전국의 유통망을 확충하고 운송도구의 도입과 개선을 주장하였다. 기술발전론, 해로통상론, 상공업발전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박제가의 주장은 19세기 후반 개항 이전에 나온 것으로는 가장 선진적이고 혁신적인 정책안이었다. 그의 주장에는 미래를 앞서 내다본 선견지명이 있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 <출처: 실학박물관 제공>

박제가의 『북학의』는 동시대는 물론, 개화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정약용은 자신의 국가개혁안이 담긴 『경세유표』에서 이용감이란 부서를 설치하여 각종 기계와 도구의 제작을 주관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는 박제가의 제안을 정부기구로 구체화한 것이다. 정약용은 “이용감을 개설하여 북학의 방법을 논의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하니 이는 가볍게 여길 수 없다.”라고 하여 박제가의 북학론과 이용후생론을 부국강병의 방안으로 설정하였다.

정약용의 제자인 이강회(1789~?) 역시 박제가의 영향을 깊이 받아 북학과 이용후생을 주장하며 “박초정의 『북학의』는 헐뜯을 수 없다.”라며 동조하였다. 그밖에도 19세기에 북학파를 계승한 서유구이규경 등에도 깊은 영향을 끼쳐 박제가의 『북학의』는 동시대와 그 이후 사상계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이용후생과 실사구시 정신이 개화사상으로 이어지다


개화파 김옥균의 초상.

북학파의 중심 논리였던 이용후생은 개화사상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가령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실상은 천하인을 위하여 그 쓰임〔〕을 이롭게〔〕 하고 그로 인하여 그 생()을 후하게 하며, 또 인하여 그 덕()을 정()하게 함이니....”라 하여 정덕보다 이용이 먼저임을 설파하였다.

이용후생에 이어 실사구시도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주자학은 허()하고 실학은 실천학문이라는 실학자들의 실사구시론은 그대로 개화 사상가들에게 계승되었다. 개화파 김옥균은 평소 “나의 소견으로는 실사구시만한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고 『한성순보』 창간사설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쓸데없는 시비는 그만두고 오직 실사구시에 충실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박영효도 『독립협회일보』 창간호에서 “이용후생은 부국강병의 실사구시이다”라고 하였다.

19세기 실학을 계승한 인물들


19세기 실학자들과 19세기 후반의 개화 사상가들은 직간접적으로 서로 인간적인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었다. 후기 실학자의 제자 내지는 후계자들을 추적해 보면 대체로 초기 개화 사상가들과 연결된다.

서울 재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내에 표지석으로 남아 있는 박규수 선생 집터. <출처: (CC BY-SA)SG Hur@Wikimedia>

19세기 실학자 박규수는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해 주는 가교자로 지목되어 왔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친손자이며, 그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조부인 박지원은 박규수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805년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므로 그가 조부를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박지원이 박규수의 학문 전반에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 박규수가 태어나고 오랜 기간 살았던 재동 자택은 박지원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살았던 곳이다.

연활자본 열하일기 <출처: 실학박물관 제공>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반드시 손자인 박규수를 통해서만 개화사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그의 여러 저서들 특히 『열하일기』, 『과농소초』 등이 필사되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읽히고 있었다. 『열하일기』는 이미 박지원이 생존했던 시기부터 이른바 베스트셀러였고, 한글로 번역되어 부녀자들 사이에 읽히고 있었던 책이었다.

19세기는 북학의 저변이 확대된 시기였다. 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들의 경제사상은 19세기 개국통상론으로 이어졌다. 최한기는 중국과 서양서적을 섭렵하여 개국통상론을 주장할 만큼 서양의 발달한 과학문명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인식을 가졌고 개화사상 형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개국통상은 아니지만,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1788∼?)은 천지, 인사, 만물 등과 관련된 사안들을 조선과 중국의 고금사물에 관한 서적을 통해 고증하여 백과전서식으로 정리한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저술하였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출처: 실학박물관 제공>

일부 지식인이 중심이 된 실학사상은 20세기에 들어와 바야흐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1901년에 김택영편의 『연암집』을 시작으로 『흠흠신서』와 『목민심서』가 각각 장지연(1864~1921)에 의해 광문사에서 연활자로 간행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해동역사』, 『연려실기술』 등이 1911년 조선광문회에서 간행되면서, 개화파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이 실학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자국중심론을 깨고 세계로 눈을 돌리다


최한기가 제작한 지구전후도. <출처: 실학박물관 제공>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지구 구형설을 바탕에 둔 세계지도 등이 전래되면서 18세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중국 중심의 화이론적 세계관이 깨지고 주체적으로 외국과 공존하는 세계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성호 이익은 “중국은 큰 땅 중에서 한 조각에 지나지 않다”고 설파했고 홍대용과 박지원은 지구설과 자전설을 이야기하며 세계의 중심이 따로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정약용도 “나를 기준으로 보면 중국은 그 가운데라 할 수 없으며 우리나라도 동국이라 할 수 없다” 고 했다.

18세기를 지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동아시아는 서양 세력의 진출로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깨져가고 있었다. 서세동점은 이미 17세기 초반부터 시작되었지만, 중화사상에 젖어 있었던 청과 조선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19세기 중엽에 와서였다.

19세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 누구보다도 국제 질서의 변화에 깊은 우려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을 깊이 연구하여 세계지리서인 『지구전요』를 편찬한 것이나 중국과 서양각국이 맺은 외교 조약을 필사하여 소개한 것은 서양의 사정을 정확하게 조선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도 멀지 않은 장래에 중국처럼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을 날이 분명히 다고오고 있음을 예측한 것이다.

박규수 영정 <출처: 실학박물관 제공>

박지원의 손자이기도 한 박규수는 관료로서는 최고자리라 할 수 있는 우의정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서울 북촌에서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개화파들과 함께 자신이 손수 만든 ‘지구의’를 보며 중국중심주의가 해체되어 가는 국제현실을 이야기했다.

“오늘날 중국이 어디에 있는가?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니 어떤 나라도 가운데로 오면 중국이 되는데 오늘날 어디에 중국이 있는가?”

박규수의 자극에 고무되어 화이적 세계관의 허구를 깨달은 김옥균, 유길준 등 개화파들은 개화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김옥균은 1876년의 개항을 부득이한 것으로 찬성하고 실리를 찾아 일본에 들어온 서양문명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민권사상과 실학


구한말 정치가였던 박영효의 초상

근대 민권사상에 견주면 어설프다고 평가할지는 모르지만, 18세기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신분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박지원은 『양반전』과 『호질』에서 양반의 허구성을 폭로하였고,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존재하는 것이지 목민관을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세금이나 군역에서 면제되어 놀고먹는 양반들을 비판한 정약용은 지방 관리는 작은 도적이고 큰 벼슬아치는 큰 도적이라 규정하기도 했다. 물론, 실학자들이 왕정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 시대보다 확연히 민권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실학의 민권 의식은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박영효는 “연암집에 양반을 공격하는 글을 읽으면서 평등사상을 얻었다.”고 고백했고, 다산학을 계승한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은 “제왕에만 있고 인민에게는 없는 유교 정신은 새롭게 바뀌어야 된다고.”고 주장하였다.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의 정신, 개방적 세계관과 민권의식을 품은 실학사상은 단절되지 않고 19세기를 거쳐 개화사상으로까지 이어졌다. 실학사상이 근대 지향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생각은 혹자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실학과 개화사상 간의 연결 고리마저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주석

1정덕(正德)
정의롭고 덕이 있음을 의미함.

[네이버 지식백과] 실학의 개방성, 개화로 이어지다 - 실학과 개화사상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정성희)


발행일

발행일 : 2016. 0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