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철종] 이어지는 민란, 동학의 등장

嘉石,何石 朴浚珉(贊九) 2019. 11. 1. 17:36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 시기, 안동 김씨세도 정치는 갈수록 심해지고 백성들은 삼정의 문란과 수령들의 수탈으로 크게 고통받았다.
결국 임계점에 다다른 조선 농민들은 폭발하고 말았다. 전국 각지에서 민란民亂이 잇따라 벌어진 것이다.

박규수 초상. (출처: 생방송 한국사)

말 그대로 백성들이 일으킨 난을 뜻하는 민란은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진주 민란은 경상 우병사 백낙신이 자신의 사사로운 재산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고 세금을 내지 않으면 인부들을 고용해 강제로 뜯어가는 식으로 일을 처리한 것에 분노한 농민들이 일으킨 것으로, 민란에 성공해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백낙신을 무릎 꿇리고 수탈을 주도했던 아전들을 불태워 죽이는 등 분노를 표출했다.
이때 안핵사지방에 일이 발생했을 때 조정에서 내려보내는 관리로 파견된 박규수[1807~1877]가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 민란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는데, 그는 박지원의 손자로 이후 조선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국의 압력에 의한 개화를 하게 되지만 김옥균, 박영효 등의 인물이 그의 주장을 이어받게 된다.
다시 돌아가서, 진주 민란은 백낙신이 절도에 유배되는 것으로 수습되었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민란의 불길은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삼남(전라,충청,경상) 지역에서 민란이 들끓었는데,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토호들을 죽였으며 수령들을 붙잡아 능욕하는 식으로 많이 진행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스스로 자치 행정을 펼쳐 고을을 다스리기도 했다.
이렇게 1862년 삼남 지역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난 민란을 통틀어서 임술 민란이라고 부른다.
임술 민란은 백성들이 조정에게 자신들은 그저 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켰으나, 신분제나 조선 왕조 자체를 뒤엎는다는 사상을 가지지는 못했기에 확실히 아쉬운 항쟁이다.

최제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임술 민란 이후 철종은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고 민생을 개선시키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수립했다. 그러나 문제는 삼정이정청의 책임자들이 김좌근,김흥근,정원용 등의 기득권층이었다는 것인데, 개혁 대상에게 개혁을 맡긴 꼴이 된지라 삼정이정청은 실질적인 개혁은 1도 이루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개혁이 실패하자 백성들은 다른 곳에 기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시기 새로 생겨난 종교 내지 학문인 동학東學이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1824~1864]는 장사꾼으로 지내다가 영적 체험을 겪은 뒤 서학(천주교)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동학을 창시했는데,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만 만사지'로 축약되는 이 동학은 곧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조정은 동학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1864년(철종 14년) 관리를 보내어 그 교주인 최제우를 체포한 뒤 참수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동학은 계속 퍼져나가 동학 농민 운동을 촉발시키게 된다.
그리고 최제우를 체포한 지 한 달 남짓 지난 1864년 12월, 철종이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강화도에서 살던 먼 왕족 출신으로 왕위에 올라 나름의 카리스마와 총명함을 보여주었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가 더욱 심해지고 삼정이 문란해지는 것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던 임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