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할아버지 연암박지원 및 환재공 501

연암 박지원 19 - 우상전 2

여항시인들의 시선집인 「풍요속선(風謠續選)」에는 이상조를 두고 ‘파리한 모습에 손가락이 길었다’라고 묘사했고, 제자였던 우선 이상적은 ‘총기가 세상에 뛰어나, 한 번 보면 잊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스승 이용휴는 제자의 유고집 서문에서 이렇게 평했다. “생각이 현묘한 지경까지 미쳤으며, 먹을 금처럼 아꼈고, 문구 다듬기를 마치 도가에서 단약(丹藥)을 만들 듯했다. 붓이 한 번 종이에 닿으면 전할 만한 글이 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기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먹을 금처럼 아꼈다는 말은 시를 쓰면서 그 표현에 꼭 필요한 글자만 썼다는 뜻이고, 단약을 만들 듯했다는 말은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해 여러 번 갈고 닦았다는 뜻이다. 그는 타고난 천재일 뿐만 아니라 노력하는 천재..

연암 박지원 20 - 옥갑야화

『열하일기』가 당대에 세간의 큰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진부한 관념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근간으로, 사물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박지원은 그것을 고리타분하지 않은 문체로 풀어냈다. 박지원은 그가 늘 비판했던 사대부들의 판에 박힌 글과는 달리 구어체 중국어나 소설 문체도 사용하고 토속적인 속담을 섞기도 하였으며, 아랫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까지도 거리낌없이 인용하였다. 거기에 해학과 풍자까지 곁들였다. 문체 때문에 정조에게 질책을 받고 일부 사대부들의 비난도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이 가볍거나 천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이 글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글 읽는 선비들에게는 내용이나 문체 모두 이전에 접해보지 못한 ..

연암 박지원 21 - 허생전

정조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묵사동(墨寺洞)을 설명하면서 “옛날 허생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집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자못 사적이 있어 박연암이 그를 위해 전을 지었다"는 글이 있다. 이 글에 나오는 ‘허생(許生)’과 의 주인공이 같은 인물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실재했던 ‘허생’이라는 인물에 착안하여 박지원이 창작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한경지략(漢京識略)』은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부지(府誌)1인데, 지은 이는 수헌거사(樹軒居士)로 되어 있다. 후세는 이 수헌거사를 4검서의 하나였던 유득공(柳得恭)의 아들 유본예(柳本藝)로 추정하고 있다. 허생이 살던 곳은 허생전 원문에는 ‘묵적동(墨積洞)’으로 나오는..

연암 박지원 23 - 벼슬살이

박지원은 50살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정조가 이조판서 유언호에게 “지금 재주가 있는데도 등용되지 못한 채 불우하게 지내는 자가 누가 있는가?”고 묻자 유언호는 “신(臣)이 벼슬하기 전에 사귄 박지원이라는 자가 있사옵니다.”라고 답을 했다. 이에 정조도 “나도 오래전에 그 자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 경(卿)이 책임지고 천거하도록 하라.” 해서 1786년 7월에 선공감감역에 임명되었다. 선공감(繕工監)은 공조(工曹) 소속으로 토목과 영선(營繕)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서이고 감역(監役)은 종9품(從九品)의 관직이다. 박지원이 늦은 나이에 이런 미관말직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평생의 벗인 유언호도 그런 박지원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정조에게 그를 천거했던 것이다. ..

연암 박지원 24 - 안의현감

박지원이 안의현 현감으로 부임한 것은 1792년 정월이었다. 아들 박종채는 안의현이 호남과 영남 사이에 위치한 산골마을로 풍속이 교활하고 사납다고 했다. 박지원이 부임하자 백성들이 박지원을 시험하려고 이치에도 닿지 않는 시시콜콜한 일들을 갖고 소송을 내는 바람에 그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박지원은 그 중 거짓말에 해당하는 송사 10여 건을 엄중히 가려내어 물리쳤는데, 그러자 백성들이 “원님이 총명하여 속일 수 없다”며 서로 경각심을 갖으면서 소송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대단히 교활하고 간사하여, 매번 수령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익명으로 투서하여 서로의 비리를 들추어내곤 하였다. 박지원은 어느 날 자리 밑에 웬 편지가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박지원은 이를 못 ..

연암 박지원 25 - 구휼의 예(禮)

조선말기의 서당 박지원이 안의현에 부임한 해에 흉년이 들었다. 박지원은 흉년의 피해를 감영에 보고할 때 과장하거나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자 아전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매번 감영에 재해를 보고하면 피해액을 삭감하는 것이 관례였사옵니다. 이제 만일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하여 감영이 그 절반을 삭감한다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줄 수 없게 되거늘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박지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장사치나 거간꾼들이 값을 부풀려 속여 파는 술책이다.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또 삭감될 것을 염려하여 부풀려 보고했다가 만일 보고한 대로 다 승인해준다면 그 남는 것을 장차 어떡하려느냐?” 그리하여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했는데, 감영에서는 보고한 숫자대로 승인을 해주었다. 박지원..

연암 박지원 26 - 의옥(疑獄) 심리

박지원이 안의현에 부임하였을 때의 경상 감사는 정대용(鄭大容, 1749 ~ 1805)이었다. 정대용은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규장각직각을 거쳐, 1787년에는 영남좌도어사, 이듬해는 함경도에 흉년이 들자 북관위유어사(北關慰諭御史)로 파견되었으며, 1791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평소 박지원의 명성에 감복해하던 인물로, 박지원이 부임 인사차 감영에 들리자, 직접 객사(客舍)에 찾아와 박지원과 밤새 담소를 나누었다. 정대용은 박지원보다 나이가 12살 어렸지만 관찰사인 그의 품계는 종2품이었고 현감인 박지원의 품계는 종6품이었다. 당시 도내(道內)에는 죄상이 복잡하여 쉽게 판정하기 어려워서 해가 지나도록 종결이 안 된 범죄 사건들이 여럿 있었는데 정대용은 박지원에게 이 사건들을 모두 판..

연암 박지원 27 - 이용후생(利用厚生)

박지원은 수령으로 있으면서 소송을 심리하거나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 언성을 높이거나 성을 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판결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인륜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유독 엄중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형제가 재산문제로 다투거나, 남의 아내를 간음한 일 등에 대해서는 보통보다 더 엄격히 다스렸다. 또한 죄를 지은 자가 뉘우칠 때까지 반복하여 타이르고 깨우쳐주었다. 박지원은 아랫사람에게 매를 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득이 곤장을 쳐야 할 경우에는 곤장질이 끝난 후 반드시 사람을 보내 그 맞은 곳을 주물러 열을 풀어주게 하면서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고을 원 노릇은 좋은 일이지만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일만큼은 몹시 괴롭고 싫다.” 박지원 휘하..

연암 박지원 28 - 하풍죽로

박종채는 아버지가 평소 소실을 둔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생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에 노래하는 기생이나 가야금을 타는 기생이 늘 옆에서 벼루와 먹 시중을 들거나 차를 만들어 올리고 수건과 빗을 받들거나 산보할 때 수행하면서 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함께 지냈지만 한 번도 마음을 준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지원의 처남인 지계공은 “매양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등잔불이 가물가물하면 담소는 한창 무르익고 앞자리의 기생들은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었지. 이즈음 사람들은 바야흐로 신이 나고 흥이 고조되었는데, 공(公)은 때때로 근엄한 낯빛에 엄숙한 목소리로 기생들을 그만 물러가게 하곤 했어. 그러면 사람들은 흥이 싹 식고 말았지. 그러나 공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알 수 없었는..